단편

[카게히나] 천사가 그랬어

별골짜기 2016. 5. 4. 22:02

카게히나 (+오이이와오이)

천사가 그랬어

 

 

 

 

, 카게야마!”

 

멀뚱히 서있던 카게야마가 히나타의 커다란 외침에 휙 뒤를 돌았다. 저 멀리서 편한 운동복 차림을 한 히나타가 손을 흔들며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입을 조금 벌렸다가 이내 꾹 다물곤 삐죽이는 입으로 고개를 도로 돌렸다. 히나타가 멀리뛰기를 하듯이 폴짝 크게 한걸음 뛰어 그의 앞에 도착했을 때여서야 카게야마는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가까워지는 히나타를 보는 게 어쩐지 뒷덜미가 근지러워 고개를 돌려버렸는데 가까이 다가와 있는 히나타를 봐도 그 간지러움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괜히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아 그는 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늦었잖아.”

허어?”

 

히나타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시간을 확인한 그가 재빨리 그 화면을 카게야마의 코앞에 바짝 들이대며 소리쳤다.

 

지금 엄연히 약속시간 5분 전이다!!”

나보다 늦었으면 늦은 거지.”

, 내가 억울해서 진짜! 다음엔 두고 봐라! 내가 30분 일찍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내가 질까보냐! 1시간 전에 나와 있을 테다!”

헤엥, 그러셔? 그럼 나는 2시간 전!!”

 

흡사 체육관에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 가리기 위한 대결처럼 번지는 양상에, 카게야마는 히나타와 아웅다웅하면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다음? 다음엔? 다음에도 또 이렇게 따로 볼 일이 있다는 건가? 누가 먼저 도착할지 시합하는 건 무시무시한 횟수의 전적이 쌓여 있을 정도이니 별다른 게 없었지만,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왈가왈부하고 있자니 체육관에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의 문제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기분이 느껴졌다.

다음에도 이렇게 볼 일이 있을까? 체육관에 먼저 도착하는지 대결하는 것과는 무슨 차이지? 혼자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와 마주한 카게야마의 표정이 눌 그렇듯 험악해졌다. 그 변화를 생생하게 목도한 히나타는 히익 놀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네가 아무리 위협해도 지지 않겠다고 소리치는 히나타의 쌩뚱맞은 대답을 들으며 카게야마는 시선을 거두었다. 묘하게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원체 그는 머리를 써야 하는 문제라면 딱 질색이었다. 배구와 관련이 있기라도 한다면 뇌세포를 총동원해 풀어보았겠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으니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카게야마의 표정이 수그러들었지만 히나타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옆에서 발 맞춰 걸었다. 오늘 날씨가 엄청 좋다느니, 간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잤다느니, 엄청 기대된다는 말을 조잘조잘 떠들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에게 시끄럽다는 타박을 주었지만 나름 그 말에 일일이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날씨는 딱히 특별할 것 없이 늘 보이던 날씨고, 멍청하게 잠을 설치니까 나보다 늦게 온 거 아니냐고, 봉사활동을 기대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라고. 물론 직접 소리 내어 대답을 하는 건 좀 민망해서 속으로만 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들이 지금 운동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는 사실이었다. 괜히 간지러운 신경줄보다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어린아이 돌보기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어린 아이들이라니. 처음 보충 담당 선생님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같이 옆에 서 있던 히나타도 선생님, 카게야마가 저 험악한 인상으로 정말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까요?’라고 진지하게 물어 하마터면 교무실에서 다툴 뻔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긍정적인 선생님은 히나타 네가 상쇄하면 된다며 근거 없는 믿음을 보였다. 보육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오는 대신 합숙과 겹치는 날짜의 보충수업을 면제해주는 조건으로 이미 합숙을 다녀온 직후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합숙을 가서 마음껏 배구를 하고 수많은 상대와 연습시합을 치르고 올 수 있었기 때문에 손해 보는 건 절대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같은 휴일도 연습에 매진했겠지만 이따 봉사활동이 끝난 오후나 저녁에 히나타와 근처 공원에서 몇 번 공을 튀기면 된다는 긍정적인 생각도 했다. 무엇보다 카게야마는 나름 어린 아이들을 (보는 건) 좋아했다.

저 멀리 두 사람이 봉사활동을 해야 할 보육원이 보였다. 선생님이 미리 말을 해놨기 때문에 들어가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 히나타가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늘 메고 다니는 노란색 가방에서 문득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희한한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가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히나타가 눈을 반짝 빛냈다. 그 소리 나는 비닐이 목적이었던 듯 망설임 없이 꺼내는 손끝에는 커다란 사탕 봉지가 딸려 나왔다. 히나타의 가방에서 나던 정체모를 소리가 사탕봉지가 내는 소리라는 건 이해할 수 있었지만 사탕봉지가 왜 가방에서 튀어나오는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침을 안 먹었나? 아침 대신 먹는 건가? 아니면 간식? 카게야마는 하나 달라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히나타는 내밀어진 손을 보고 반사적으로 카게야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카게야마는 화들짝 놀라 숨을 멈췄고, 히나타도 카게야마의 반응에 놀라 눈을 크게 부릅뜨고 물었다.

 

, , 왜 그렇게 놀라?!”

, 너야말로 지금 뭐하는 거야 멍청아!”

뭐하냐니! 네가 소, 손 내밀었잖아!”

손 내미는데 왜 잡아?!”

잡으라는 뜻 아니었냐고?!”

사탕 꺼내길래 나도 달라는 뜻이었다!”

뭐어? 이건 보육원 친구들 주려고 사온 거거든? 카게야마 너 설마 어린애야?”

허어? 그게 왜 그렇게 돼? 그러는 너야말로 맨날 여자애들한테 받은 사탕 물고 다니면서……

 

타닥, 순간 그들 근처에 인기척이 났다.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잘 알고 있는 얼굴이나 여기서 볼 줄은 몰랐던 얼굴 둘이 있었다. 과하게 잘생긴 얼굴로 가늘게 뜬 눈을 하고 있는 오이카와와, 당황하기도 하고 떨떠름해 하는 표정을 짓는 이와이즈미였다. 아오바죠사이와는 좀 거리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건 확실히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 근처에 있는 거라곤 이 보육원밖에 없어서이기도 했고.

카게야마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굳이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가 이 보육원까지 왔다는 건 아무래도 몰래 염탐을 온 게 분명했다. 아마 그들이 보충수업 대신 봉사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 가만, 어떻게 알았지? 염탐이 아닌가? 그럼 보육원에 올 이유가 뭐가 있지? 배구와 관련이 없는데?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히며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를 보았다. 눈매가 가늘어진 오이카와가 물었다.

 

토비오쨩이랑 치비쨩 지금 사랑싸움 하는 거야?”

사랑싸움?!”

 

카게야마와 히나타가 충격 받은 얼굴로 오이카와에게서 시선을 돌려 서로를 마주보다가, 곧 아직도 부여잡고 있는 자신들의 손을 보고 이게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를 깨달은 듯 붉어진 얼굴로 후다닥 떼어냈다. 이와이즈미가 처음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본 것도 같은 이유였던 듯 큼큼 헛기침을 했다. 재빨리 간격을 넓혀 물러선 두 사람을 재밌다는 듯 바라본 오이카와가 말했다.

 

휴일에 자진해서 봉사활동 하러 오는 타입이 절대 아닌 토비오쨩이나, 오히려 누굴 살필 기력도 없어 보이는 치비쨩이 여기까진 무슨 일일까?”

살필 기력이 없다니요!”

치비쨩 그렇게 작아서 애들 안아줄 수는 있으려나 모르겠네~”

대왕님보다 훨씬 잘할 수 있거든요?!”

 

히나타가 발끈하는 사이 카게야마가 물었다.

 

그럼 오이카와상 이와이즈미상은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우리는~ 여기 입양하러 왔, ! 이와쨩, 아팟!”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망할카와. 우린 여기 자주 봉사 와서 온 거야. 너희도 봉사 때문에 온 거 아닌가?”

, 맞아요! 합숙 때문에 보충을 못 들었거든요.”

! 토비오쨩 치비쨩 낙제?”

그건!”

 

사실이니 부정할 수 없었다. 눈에 띄게 비웃는 오이카와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이를 갈았다. 오이카와는 그들의 분한 표정을 읽어내고 더 놀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나 이와이즈미는 혀를 찬 뒤 그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먼저 성큼성큼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이와이즈미는 조용히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살살 다뤄달라고 뻔뻔한 소리를 하는 오이카와의 말에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꿀밤을 한대 먹였다.

 

다음에는 낙제 피하는 거다.”

그래!”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등장에 서로 다투던 중이었다는 사실도 잊은 카게야마와 히나타가 결연하게 다짐하고 그들 뒤를 따라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토비오쨩이랑 치비쨩이 하필 오늘 올 게 뭐람.”

놀랍긴 해.”

 

오이카와가 투덜거리고 이와이즈미가 대꾸했다. 이와이즈미는 처음 카게야마와 히나타를 발견하고 본 당황스러운 광경을 상기했다. 둘 다 분명 성난 표정으로 싸우고 있는데 마주잡고 있는 손은 뭐냔 말이다. 순간 사귀나?’라는 생각이 든 것은 비단 이와이즈미의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입 한쪽 끝을 삐죽삐죽 올리며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오이카와는 이걸 꼬투리 잡아 어떻게 놀리면 효과적일지 머릿속으로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안녕하세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그들을 반기는 원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곳을 잊을 즈음 하면 자주 찾아와 꽤 친근한 사이인 원장에게 오이카와가 그새 더 예뻐지셨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원장도 그 말이 마냥 싫지는 않은지 그를 타박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곧 그들의 뒤를 따라온 카게야마와 히나타를 발견한 원장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카라스노 선생의 연락을 받았다는 원장에게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1학년이라고 했나?”

.”

이쪽은 오늘 같이 도와줄 3학년들이야. 이름은……

압니다.”

, 정말이야?”

 

원장이 아는 사이였냐는 듯 놀란 눈으로 네 사람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히나타는 대왕님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려던 것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이름을 정확하게 읊어냈다.

 

오이카와상은 카게야마군의 라이벌이기도 합니다!!”

 

히나타의 말에 오이카와가 버럭 소리쳤다.

 

누가 오이카와상 라이벌이라는 거야?!”

 

오이카와는 팔짱을 끼고 히나타를 내려다보았다. 그 험악하고 불만스러운 얼굴을 본 히나타는 겁에 질려 재빨리 카게야마의 뒤로 숨었다. 카게야마는 평소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분위기를 잡고 있었지만, 그게 아마 오이카와를 더 열 받게 하리라는 사실을 이와이즈미는 알고 있었다. 하여간 저 카라스노 9번 꼬맹이는 오이카와 속을 긁는데 카게야마만큼 묘하게 일가견이 있었다.

 

잘 됐어. 어색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그럴 걱정은 없네.”

 

원장이 웃으며 하는 말에 오이카와는 흥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이 맘에 안 드는 티를 팍팍 내며 뾰루퉁하기 그지없었으나 이와이즈미가 그의 발을 콱 밟아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어준 덕분에 표정을 어색하게나마 바꿀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오랜만에 연습도 없이 쉬는 날에, 그것도 이와이즈미와 보낼 수 있는 금 같은 시간에 난데없이 끼어든 불청객들을 불만스럽게 보았다. 금방이라도 어린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으리라 여기는 듯 약간 긴장한 표정을 본 그는 아직 이곳에 대해 잘 모르는 두 사람에게 혀를 끌끌 찼다. 미안하지만 여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구.

 

- 그럼, 일단 간단한 것부터 도와줘요.”

 

원장이 인자하게 웃었다.

 

 

 

 

전혀 간단하지 않잖아.

히나타는 생각했다. 그들이 안내된 곳은 보육원 뒤에 있는 밭이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이름 모를 작물 혹은 잡초가 자라는 곳이었다. 원장은 자리에 주저앉아 어느 것이 기르는 거고 어느 것이 잡초인지를 직접 뽑아 보여주었다. 히나타는 사실 한 번 보고 그것을 곧바로 구분해낼 자신은 없었지만 카게야마가 입을 꾹 다물고 있길래 그 역시 입을 가만히 다물고 있었다. 카게야마도 단번에 외웠는데 그가 외우지 못한다면 충분히 자존심이 상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반응을 보여 더 그랬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편안함과 안락함이 걸려 바로 코앞에 닥친 중대한 문제에 네 명 사이에는 긴박한 전운이 흘렀다.

 

모자가 두개밖에 안 남아서미안해. 교대로 쓰든가 해줘. 그래도 밭이 작아서 얼마 안 걸릴 테니까

 

원장의 말대로 밭은 작았다. 넷이서 작정하고 잡초를 뽑는다면 한 시간 내로 마무리 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한 시간을 모자가 만든 그늘 아래에서 보낼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느냐가 달린 문제였다. 넷의 눈이 동시에 번뜩였다. 원장은 그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한 듯 모자 두개를 오이카와에게 건네준 뒤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오이카와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손에 든 모자를 꽉 쥐었다.

 

이런, 원장님이 오이카와상한테 두 개 다 주고 갔네~?”

! 설마 대왕님이 쓰려고요?”

난 쓰면 안 된다는 것처럼 들린다?”

아니, 그건 아닌데요

 

금세 위축된 히나타가 눈을 굴렸다. 다행히 카게야마도 히나타의 편이었던 듯 단호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저도 모자 쓰고 싶은데요.”

남는 하나는 이와쨩 건데?”

가위바위보 어떻습니까!”

 

위축은 됐지만 물러서지는 않으며 히나타가 소리쳤다. 히나타의 말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스노에서도 가장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가위바위보를 많이 썼으니 당연한 흐름이었지만, 오이카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곧바로 거절했다.

 

싫어.”

어째서!?”

난 맘에 안 드는 애들이랑 가위바위보 안 해.”

그런!”

 

카게야마가 있어서인지 더욱 철벽을 치는 오이카와를 본 이와이즈미가 보다 못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그냥 해.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더 뜨거워지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고.”

.”

 

오이카와는 입을 삐죽였다. 이와이즈미까지 나선 이상 안 하겠다고 더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이카와가 한발짝 물러나고 결국 그들은 모자를 사이에 둔 운명의 가위바위보를 하기로 했다. 동그랗게 모여선 넷 사이로 더운 바람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갔다. 어느 팀이 선공을 할 것인지 정하는 동전뒤집기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긴장이 감돌았다.

 

가위- 바위- !!!!”

 

넷의 우렁찬 목소리가 한데 섞어 크게 밭을 울렸다. 동시에 각양각색으로 뻗어 나온 손을 확인한 네 쌍의 눈동자가 각자 희비를 담았다. ‘쪽은 이와이즈미와 카게야마, ‘쪽은 오이카와와 히나타였다. 정확히 보와 바위로 갈라진 운명이었다. 오이카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렸고, 히나타도 마찬가지로 절망했다.

이와이즈미는 쯧 혀를 처며 석상처럼 굳은 오이카와의 손에서 모자를 빼냈다. 그 중 하나를 카게야마에게 던지자 마치 리시브를 하는 것처럼 매우 훌륭하게 받아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입매가 삐죽삐죽 올라가려는 게 꽤 기쁜 모양이었다. 단순 모자를 얻었다는 기쁨이 큰 것이겠지만, 글쎄.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보았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요상하게 웃는 모습을 보더니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큰 목소리로 정확하게 밭을 이등분했다.

 

여길 중심으로 왼쪽은 나랑 이와쨩이 맡을 테니, 오른쪽은 너희가 맡아. 햇빛 더 뜨거워지기 전에 끝내야 하니까, 되도록이면 빨리 끝내자구.”

…….”

설마, 더 젊은 토비오쨩과 치비쨩이 나이 많은 이와쨩보다 느릴 건 아니겠지?”

나는 왜 끌어들여?”

 

이와이즈미가 발끈했지만 순간 카게야마와 히나타의 눈빛이 돌변했다. 마치 경기에 나가기 직전 가지는 웜업이라도 된 듯 갑자기 몸을 풀기 시작했다. 뜀뛰기는 물론 어깨와 다리를 쭉쭉 펴는 두 사람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짓는데 대화는 더 가관이었다.

 

질 거냐?”

허어? 자신 없냐?”

걱정되는 건 카게야마군이죠~”

뭐야? 내가 너보다 더 많이 뽑을 거다!”

내가 더 많이 뽑을 거거든!”

이기는 건 나야!”

 

어김없이 다투기 시작한 두 사람을 보며 진짜 짜증난다는 감상을 하는 오이카와의 머리에, 순간 무언가 얹히는 느낌이 들었다. 오이카와의 눈이 커졌다. 그의 머리에 올라간 것은 모자였다. 이와이즈미의 손에 들려있던 모자. 오이카와는 손을 들어 모자챙을 만졌다. 얼떨떨하게 쳐다보는데 이와이즈미는 휙 고개를 돌려 영 이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가위바위보 진 거, 좀 억울해 할 것 같아서.”

 

엄청 잠깐이었는데 그걸 봤나. 오이카와는 피식 웃었다.

 

네가 걱정되는 건 아니고. 네놈 얼굴 타면 여자애들이 또 왜 그렇게 됐냐고 꺅꺅거릴 게 뻔하니까, 겸사겸사

이와쨩, 참 솔직하지 못해.”

 

뭐야?!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기껏 생각해서 준 건데 타박이나 듣게 생겼냐고 쏘아붙이려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정말 기분 좋은 듯이 환하게 웃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번에 당황한 이와이즈미가 입만 벙긋일 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얹어준 모자를 다시 그의 머리 위로 돌려주며 말했다.

 

오이카와상은 얼굴 타도 잘생겼지만, 이와쨩은 거기서 더 까매지면 여자들 다 도망간다구?”

 

이와이즈미는 울컥했다. 저 몹쓸카와가! 그는 머리에 얹힌 모자를 다시 오이카와에게 씌우다 못해 푹 눌러쓰게 하며 도발하듯 말했다.

 

그래서, 너도 도망갈 거냐?”

 

잠시 눈을 크게 떴던 오이카와가 결국 머리에 쓴 모자를 푹 눌러쓰곤 눈매를 접어 웃었다.

 

그럴 리가.”

 

오이카와는 가볍게 어깨를 돌려 스트레칭한 뒤 카게야마와 히나타쪽을 보며 말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볼……

 

- 라고 말을 완성하기도 전, 이미 잡초를 뽑는 데 혈안이 된 카게야마와 히나타의 모습을 확인한 오이카와는 시작한다는 말도 없이 시작하는 건 반칙이라구!!!”라고 소리치며 곧바로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훈훈한 분위기는 잠시, 마찬가지로 이를 빠득 간 이와이즈미도 최상의 집중력을 끌어내 와다다 잡초를 뽑았다.

 

?”

 

얼마나 됐을까. 잡초를 정신없이 뽑다 보니 (사실 잘 뽑고 있는 건지, 애꿎은 작물을 뽑은 건지 구분이 안 갔지만) 벌써 밭 절반을 해치운 것 같았다. 더위고 뭐고 집중해서 잡초를 뽑는데 열중하던 히나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 쪽을 보았다. 두 사람의 손놀림은 매우 신속하고 정확할 뿐만 아니라 군더더기도 없었다. 많이 와서 보육원 일을 도왔다더니 잡초도 많이 뽑아본 듯한 솜씨였다. 그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잠시 넋을 놓고 있는데, 그를 향해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뽑고 뭐하냐?”

 

히나타가 재빨리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카게야마는 그가 뭘 보고 있었는지를 눈치 챈 것 같았다. 그제서야 처음으로 상대의 잡초 뽑기를 보는 카게야마의 눈이 자못 심각해졌다. 저쪽이 저렇게나 잘 뽑는데, 너는 왜 딴짓 하고 있었냐는 불호령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부러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잡초를 뜯어내는데, 순간 머리 위에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 의아하게 고개를 들자 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무언가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 무언가의 정체가 모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히나타의 눈이 커졌다.

 

저게 그렇게 부러웠냐?”

뭐가?”

 

히나타의 질문에 카게야마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상 히나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다거나 화가 난 게 아니라 단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떠올리고 있는 분위기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챘다. 곧 머릿속으로 생각을 마친 카게야마는 느리게 말했다.

 

이와이즈미상이오이카와상한테모자 줬잖아.”

, 그랬나?!”

그거 본 거 아니었어!?”

 

히나타가 다시 확인차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를 보았다. 아까는 잡초 뽑는 손 확인하느라 몰랐지만 모자가 어느새 오이카와의 머리 위에 얹어져 있었다. 이와이즈미상은 대왕님한테 언제 모자 준 거지?! 곧 히나타가 우물쭈물 솔직하게 대답했다.

 

잡초 뽑는 솜씨가 대단해서 본 거였는데.”

 

카게야마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뭐야?!

 

젠장

?! 보면 안 돼!??”

그게 아니라!”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손에 든 모자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다시 잡초를 하나 뽑으며 말했다.

 

네가 오이카와상 부러워하는 것 같아서 준 건 아니고! 절반! 지금까지 딱 절반 뽑았으니까! 그래서 교대하려고 주는 거다!!”

? 알았어

정말로 여기까지가 딱 절반이라서 그런 거다, 알겠냐!!”

알았어!!”

왜 신경질을 내!?”

먼저 신경질 낸 건 카게야마 너잖아! 바보냐!!”

하아?? 지금 바보라고 했냐, 멍청이가!?”

 

둘 중 누구의 머리 위에도 얹히지 않은 모자가 히나타의 손에 꼭 부여 잡혀 있었다. 두 사람이 아웅다웅 다투는 사이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신들린 손놀림으로 빠르게 잡초를 해치워나가 기어코 그들을 추월하고야 말았다.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결국 중간에 한참을 싸워버린 탓에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에게 져버리고 말았다. 잡초 뽑기를 그들보다 일찍 마친 오이카와는 산뜻한 표정이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여유만만한 표정에 어쩐지 기분이 나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패한 결정적인 이유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잠시 히나타의 머리 위에 있는 모자에 닿았다. 괜히 큼큼 헛기침을 한 그는 수고했다며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들려주는 원장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얼마 걸리지 않았을 뿐더러, 다행히 땀은 별로 나지 않아 화장실에서 간단히 열을 식힌 후였다. 원장은 그들을 아이들에게 데려가 소개해주었다. 이제야 보육원 봉사활동 다운 일을 할 때가 온 것이다. 카게야마는 귀여운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그들 넷을 하나하나 살피는 호기심 어린 눈을 마주하고 조금 설렜다. 원래 어리고 귀여운 동물들을 좋아하는 그다. 어린 아이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대체로 네 살에서 일곱 살 사이의 아이들은 별로 낯을 가리지 않았다. 점심때까지 재밌게 놀라는 원장의 말에 뿔뿔이 흩어진 아이들은 각자 장난감을 집어 들거나 밖으로 나가 뛰어놀기를 선택했다. 특히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얼굴이 익었는지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섞여 놀아주기 시작했다. 히나타 역시 마찬가지로 동생 나츠와 놀아주었던 경험이 풍부해 스스럼없이 아이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물론 히나타의 친화력이라면 그러한 경험이 없더라도 쉽게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카게야마는 조금 쭈뼛쭈뼛했다. 애초에 그는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을 해본 경험부터가 부족했고 손위 아래 형제도 없었기 때문에 몹시 어정쩡한 태도를 하고 있었다. 눈을 들어 살핀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와 히나타가 각각 책을 읽어주거나 놀이를 하고 있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모습이 보여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근처에 있는 기차 장난감을 하나 들고 한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모형 찻잔을 가지고 노는 아이 앞에 슬며시 주저앉은 카게야마가 말했다.

 

. 안녕.”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빤히 쳐다보는 갈색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탐색하는 듯했다. 왜 쳐다보는 거지? 무심코 습관처럼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여자아이의 눈이 금방 울망울망해지더니 곧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우아아앙!!”

 

동시다발적으로 시선이 쏠렸다. 놀고 있던 아이들도,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던 세 사람도 카게야마쪽을 보았다. 카게야마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양손을 들어올렸다.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결백의 의미였지만 오이카와의 표정은 냉담하기 그지없었고 이와이즈미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히나타 역시 얼빠진 표정으로 보다가……

 

푸하핫!”

 

웃음소리를 내 카게야마의 서슬 퍼런 눈빛을 받았다. 그 독기 어린 눈빛을 받자마자 히나타는 입을 합 다물었지만 이미 늦어 고요히 타오르는 분노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사실 히나타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왜곡된 진심(?)에 대한 억울함에 가까웠지만 표면적인 화살이 그에게 날아온 탓에 히나타는 방정맞은 자신의 입을 탓하며 에휴 혀를 찼다.

사실 뭐 카게야마가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할 건 이미 예상하고 있던 점이 아니던가. 자세한 상황을 처음부터 보지 못해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 험악한 얼굴로 아이를 위협해 울음을 터뜨리게 만들었을 터였다. (정확했다.) 카게야마에게 동생이 있지도 않으니 아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거고. 카게야마가 곤란한 상황에서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 마음에 들었으나 일단은 카게야마에게 빚 진 것도 있으니 도와주기로 했다. 모자를 쓰지도 않았지만 괜히 묵직한 감각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으며 히나타가 카게야마쪽으로 다가갔다.

카게야마의 손에는 꽉 쥐어진 기차 장난감이 있었다. 히나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래도 뭔가 해주려고는 한 것 같지만 그것부터가 조금 미스다. 히나타는 여자아이의 손에 들린 모형 찻잔을 보았다. 취향이 이렇게나 확고한데 기차놀이가 웬 말이냐. 쯧 혀를 찬 히나타가 여전히 눈물을 방울방울 매달고 있는 여자아이 앞에 쭈그려 앉아 물었다.

 

미안해. 놀랐지?”

흐으엉

이 오빠가 놀라게 했어? 혼내줄까? 때찌 때찌!”

 

히나타가 별안간 카게야마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다. 카게야마는 엉겁결에 그것을 맞으며 히나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아픈 척 해. 빨리. 아픈 척!’

카게야마는 연기에 영 재능이 없었지만 일단은 전문가인 히나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아픈 척 아야라는 어눌한 소리를 내자 아이의 울음이 뚝 멎어들었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있긴 했지만 입가에는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히나타가 재빨리 휴지를 가져와 아이의 콧물을 닦아주고 틈만 나면 카게야마를 때리는 것으로 응징을 가했다. 그가 맞는 것을 아이가 좋아하는 것 같아 그냥 두면서 장단을 맞추긴 하는데…… 히나타가 사감을 담아 쓸데없이 때리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겨우 누그러진 성난 눈빛이 다시 히나타를 향해서야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여자아이를 달랬다.

 

오빠가 이 오빠 혼내줬으니까 괜찮아. !!? 근데 그거 뭐야? 찻잔이네! 주전자는 어디 있어?”

저기

오옷! 오빠가 주전자에 물 담아다줄까? 차 따를래?”

 

히나타가 그러자! 라고 소리치며 재빨리 카게야마에게 눈짓했다. 잠깐 히나타에게 넋을 빼고 있던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때찌공격을 맞아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가 가리킨 장난감 바구니에서 모형 주전자를 찾아 화장실로 물을 뜨러 가는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밝게 웃으며 여자아이를 달래는 히나타의 모습이 꽉꽉 들어찼다. 멍하니 수도꼭지를 틀어 주전자에 물을 담으면서도 그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를 않았다.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도 능숙하게 아이들을 다룰 줄은 몰랐다. 울음을 금방 그치게 하고, 안심하게 하는 모습이 갑자기 새삼스러워졌다. 생각해보면 그를 안심시키는 말은 이미 예전부터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한테는 공이 잘 오니까 상관없어!’

 

한편으로는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약간 불안해진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거슬러 살펴봐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히나타가 아이들을 잘 돌봐주는 게 속이 편치 않다. 카게야마가 놀란 만큼 히나타가 이 정도까지 아이들을 잘 돌봐주는 모습을 보면 다른 누구라도 새삼스럽게 느낄 게 뻔하다. 특히 여자애들은 그런 히나타를 다시 보고 호감을 가질 지도 모른다. 왜냐면 히나타가 진심으로 아이들을 아끼는 게 눈에 보이니까.

……그런데 그게 불안할 게 있나? 카게야마는 주전자에서 넘쳐흐른 차가운 물에 손이 왕창 젖어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카게야마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우와, 잘 따르네!!”

 

물을 담은 주전자를 가져다준 이후로, 히나타는 자리를 몇 번 옮겨 카게야마를 끌고 다니며 아이들에게 인사시켰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시종일관 종알종알거리면서도 아이들의 말에 일일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히나타의 도움으로 아이들이 카게야마를 그렇게 많이 무서워하지는 않았지만 히나타에게 향하는 친밀감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히나타는 찾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져 히나타는 한군데에 오래 앉아있을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다가 말랑말랑한 작은 공을 던지는 한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남자아이가 높이 공을 띄우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엉뚱하게도 카게야마 발치로 떼굴떼굴 굴러왔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공을 들었다. 남자아이가 조금 경계하며 카게야마를 보자 그는 히나타가 당부한대로 인상을 쓰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공을 집중하게 한 뒤 공중에 살짝 띄웠다가 다시 받았다.

고등학생이지만 그도 엄연히 배구를 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미래를 촉망받는 세터였다. 토스를 올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만큼 공을 던지고 받는 것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 사실이 어린 남자아이의 눈에도 보인 것인지 그 눈이 반짝 빛났다. 나도, 나도. 손을 쭉 뻗어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에게 별 말을 하지 않으며 카게야마는 공을 건넨 뒤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 공이 이렇게 떴어!”

 

.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를 제대로 잡아준 덕분인지 공중으로 솟은 공이 다시 남자아이의 손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 또 보여줘!”

 

남자아이의 부탁이 어려운 것도 아니라 카게야마는 순순히 공을 몇 번 띄웠다가 받았다. 살짝 던져 남자아이에게 공을 패스한 카게야마가 남자아이의 자세를 조금 더 잡아 주었다.

 

형 왜 이렇게 공 잘해?”

 

공을 잘하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공 다루는 실력이 좋다는 뜻으로 대충 이해했다.

 

배구를 하니까.”

형 배구선수야? 배구선수 하면 형처럼 그렇게 잘 할 수 있어?”

 

천진난만한 물음에 그렇다고 무심코 대답하려던 카게야마의 시선이 문득 히나타를 향했다. 비행기를 태워준다며 아이들을 연신 들었다가 내리면서도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또 심장이 쿵덕거리고 긴장되고 불안해졌다. 어쩐지 심술이 나는 것 같아 카게야마는 대답을 바꿨다. 당사자가 들었다면 즉각 분노하고도 남았을 말이었다.

 

아니. 같이 배구 하긴 하는데 저 형은 배구 허접이야.”

허접?”

쓸데없이 말만 번지르르해서 사람 현혹시키기나 하고.”

현혹?”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하고. 그런 주제에 경기 중엔 토스를 갖다 바치라질 않나.”

 

남자아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의 나열에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형은 히나타형 싫어해?”

그건 아니,”

 

곧바로 대답한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싫지 않다. 그건 당연하다. 키타이치 시절과 아오바죠사이를 포함해 카게야마는 이제껏 누군가를 진심으로 싫어해본 적은 없었다. 하물며 같은 팀메이트이자 파트너인 히나타를 싫어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남자아이가 오해라도 할 것 같아 그는 주섬주섬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히나타는 운동 센스가 아주 뛰어나고 높이 날 수 있어. 그 멍청이만은 내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속도로 공을 줘도 때릴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맞춘다는 걸 처음 배운 것도 다 히나타라서 가능했던 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싫어하지는않아.”

그럼 좋아하는 거네!”

 

남자아이는 카게야마의 이번 말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표정을 바탕으로 결론내리며 소리쳤다. 카게야마는 아이의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 아니, 나는

아니야? 싫어해?”

아니, 그건 아니고

같은 팀이라며?”

 

카게야마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맞아. . 다이치, 스가와라, 아사히, 니시노야, 타나카처럼 히나타도 마찬가지로 팀원일 뿐이었다. 누군가가 앞선 사람들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카게야마는 부끄러워 하긴 하겠지만 어차피 금방 인정할 터였다. 그들은 카게야마에게 있어 처음으로 생긴 진정한 팀이었으니까. ‘좋아한다는 건 당연한 말인데, 왜 히나타에게는, 그 표현 하나를 제대로 못 써서, 왜 솔직해지지를 못해서…….

 

우왁! 공이다! 카게야마! 토스 토스!”

 

그때 히나타가 카게야마에게 달려들었다. 심장이 튀어나온 돌을 밟은 바퀴처럼 덜그럭거렸다. 카게야마는 당황한 나머지 들고 있는 공을 떨어트렸다. 퉁퉁 튄 공이 히나타 쪽으로 굴러갔다. 공을 집어 들며 눈을 빛내는 히나타가 카게야마를 한껏 기대에 찬 표정으로 보았지만 그는 물렁한 공으로 어떻게 스파이크 치려고?”라며 쏘아붙인 뒤 그 시선을 모르는 척 피해버렸다.

 

허어?”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 카게야마가 토스 시범을 보일 때부터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던 오이카와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헛숨을 뱉어냈다.

 

진지하게!! 진짜같이!”

내 딸 페르세포네가 어디에 있는지 빨리 말해줘요, 제우스!”

 

풀죽은 히나타가 쪼잔하다며 카게야마의 화를 돋운 뒤 다시 다른 여자아이를 찾아 간 이후, 카게야마는 남자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남자아이의 주문대로 최대한 생생하고 실감나게 대사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나름 그는 연기라는 것을 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어디선가 그를 비웃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착각으로 치부한 그가 더욱 열과 성을 다해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한창 카게야마도 흥미진진한 이 책의 내용이 과연 어떻게 끝맺을 수 있을까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한자 한자 열심히 읽어내려 가는데, 거의 결말 즈음에 이르러 남자아이가 문득 이상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형.”

?”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사랑해서 납치했다고 하잖아.”

 

카게야마가 들고 있는 책은 예쁜 삽화를 덧붙여 그리스 로마 신화를 짤막하게 묶은 책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하데스의 페르세포네 납치 이야기를 읽던 중이었다. 여기서 대체 질문할 게 뭐가 있는 거지? 카게야마는 하데스라는 신의 이름도, 페르세포네라는 여자도 처음 들어본지라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어떡하나, 히나타를 불러야 하나. 그런데 튀어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납치는 나쁜 거 아니야?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정말 좋아하는 거면 결혼해주세요, 하고 부탁해야지 납치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렇지? 듣고 보니 아이의 말이 맞아 카게야마는 당황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하데스는페르세포네가 자길 싫어할까봐, 그런 게 아닐까.”

자길 싫어하면 납치해?”

아니!! 납치는 절대 안 돼, 그런데

 

젠장, 알고 보니 너무 어려운 책을 읽어주고 있었잖아! 카게야마는 속으로 괴로워하며 계속 횡설수설 말했다.

 

다른 사람이랑 결혼해버리면짜증나서? 자기가 좋아하는데다른 사람이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화가 나서?”

어려워.”

그게 아니면, 그러니까페르세포네한테 좋아한다고 말해도잘 안 될 것 같아서? 페르세포네가자길 안 좋아할 것 같아서?”

 

남자아이는 인상을 썼다.

 

그걸 물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솔직하지 못한 거 아니야?”

그런가.”

 

그리고 순간 카게야마는 눈을 깜빡였다. 잠깐. 잠깐만. 여름합숙 내내 그를 애먹게 만들었던 멈추는 토스가 처음으로 성공했을 때와 같은 감각이 등줄기를 스쳤다. 카게야마는 그 감각을 더듬더듬 붙잡고 생각의 흐름을 탔다.

분명 싫어하지 않고 좋아하는 게 맞는데 고작 팀메이트에게 그가 무엇이 무서워서 솔직한 표현이 어려웠는지. 왜 히나타의 등장에 혹시 대화를 들었을까 놀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는지. 히나타가 아이들을 능숙하게 돌보는 모습을 보고 어째서 마음이 불안했는지.

다른 사람과 결혼해버리는 모습,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웃는 모습, 아이들을 보고 진심으로 아끼며 웃는 모습, 다른 누군가가 그 모습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모습, 호감을 가지며 접근하는 모습, 손에 쥐기도 전에 날아가 버릴까 불안에 떠는 모습까지……

이 모든 상상은 한 줄기 궤를 같이 하고 있었다. 그가 붙잡은 생각의 끝에는 히나타를 납치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안 되지!”

 

카게야마는 정신을 차리고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 . 당연하지.

 

페르세포네는 행복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하데스네 집에서 도망칠지도 몰라

 

카게야마의 눈이 커졌다. 아이의 말끝이 약간 흐려져 있었다. 어쩐지 슬퍼 보이는 눈이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어보려는데 곧 아이는 고개를 들고 씩씩하게 말했다.

 

나는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꼭 내 부인이랑 행복하게 결혼할 거야. 아무도 안 도망가게!”

 

아무도 안 도망가게. 아무리 눈치가 없는 카게야마여도 이 대목에서는 그 말이 시사하는 바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보육원에 사는 아이. 하데스네 집. 도망친 페르세포네.

 

. 그래.”

형도 그럴 거지?”

. 그래야지.”

 

카게야마는 조금 망설이다가 아이의 머리 위에 살짝 손을 얹었다. 아직 결말까지 다 읽지는 않았지만, 책이 재미없는지 곧 다른 놀이를 하자고 방방 뛰는 아이에게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오이카와상한테 설명해줄래?”

저도 잘 모릅니다.”

전 알 것 같기도 한데그게뭐랄까지금 설명했다고 해도 좀 늦었다고나 할까

 

히나타는 카게야마 뒤에 숨어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어설픈 웃음으로 퉁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신경질적으로 보자기를 펄럭였다. 정확히는 목에 망토 대용으로 달고 있는 커다란 천이었다. 방 한가운데 홀로 선 오이카와의 앞에는 카게야마와 히나타뿐만이 아니라 이와이즈미와 보육원 아이들이 대치하듯 서 있었다. 그러니까,

 

오이카와상이 왜 마왕 역할인 건데!?”

글쎄요

토비오쨩과 치비쨩이 거기 있는 건 그렇다 치고, 이와쨩은 왜 내 적이야???”

마왕 오이카와는 어쩐지 짜증나서.”

오이카와상 편은 하나도 없는 거야? ? 아니지? 우리 귀여운 친구들, 오이카와상 도와줄 거지?”

난 마왕 편 아니야!”

나도!”

나는 용사 할 거야!”

 

……결국 오이카와 편은 하나도 없었다.

 

이건 불공평하다구~!”

걱정 마 오이카와.”

 

이와이즈미가 씩 웃었다. 코트 위에서 보던 믿음직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조금 설렌 오이카와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이와이즈미를 보았다. 이와이즈미는 든든한 세이죠의 에이스로서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용사에게 지면 나도 깔끔하게 자결하지.”

, 이와쨩!”

 

자결이라니, 죽으면 안 돼 으앙!! 오이카와의 마음을 모르는 히나타가 보육원 아이들에게 신나게 소리쳤다.

 

마왕을 물리치자!”

꺄아~”

못된 마왕!”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아이들을 버텨내며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었다. 우리 못생긴 이와쨩은 내가 지킨다!! 오이카와가 여러 명의 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도 꿋꿋하게 서있는 모습을 본 카게야마는 태평하게 감탄하는 한편, 머릿속의 연습 메뉴를 더 빡세게 바꿔야겠다는 반성을 했다. 나도 저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지. 오이카와가 들으면 열 받아서 바닥에 쓰러질 생각이었다.

 

 

 

 

좀 대충 봐주지 뭘 그렇게까지 버텼어?”

 

이와이즈미가 어깨를 주무르는 오이카와에게 볼멘소리로 타박했다. 결국 오이카와는 무거운 아이들을 버티면서 끝까지 바닥에 쓰러지지 않는 것으로 승리를 거머쥐었고, 어린 용사들은 실의에 가득 차 현실과 환상은 다르다는 교훈을 얻었다. 적당히 놀아주는 척 그냥 져버리지, 무슨 자존심이 걸린 건지 끝까지 버틴 오이카와의 의지는 칭찬해줄 법도 했지만 꽤 오래 버틴 탓에 분명 놀란 근육도 있을 테다. 이리 와봐. 어깨에 멘 가방끈을 끌어당겨 오이카와의 팔을 살피는 이와이즈미에게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청량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아니, 이상한 건 내 귀려나. 보육원 봉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을 진 길거리를 걸으며 이와이즈미는 생각했다. 이 이상한 증상도 벌써 몇 년째 이어지고 있으니 중증은 중증이다. 괜히 심술이 붙은 이와이즈미는 뭉친 것 같은 부분을 꾹 눌렀다.

 

아얏! 아파 이와쨩~!”

아프라고 한 거야. 뭐가 좋아서 실실 웃어? 하지 말라는 말 엔간히 안 들어, .”

 

시라토리자와가 아닌 아오바죠사이에 온 것처럼, 경기 전날 상대를 철저히 분석하느라 날밤을 새는 것처럼, 좋아하지 말라는 고집에도 이미 늦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오이카와의 고집은 아무리 이와이즈미라도 꺾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와쨩이 자결할 거라는 말을 들은 이상 내가 어떻게 지겠어?”

진짜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상관인데?”

 

툴툴거린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팔에서 손을 뗐다.

 

상상이라도 싫어지는 걸 어떡해?”

 

이와이즈미의 눈가가 묘하게 찡그려졌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오이카와가 그 변화를 눈에 담아내며 빙그레 웃자 다시 표정이 험악해졌지만 말이다.

 

시끄러워! 빨리빨리 걷기나 해. 오늘은 너희 집에서 자고 갈 거야.”

, 정말? 그럼 빨리 가야지~!”

 

오이카와가 걸음걸이를 빨리 했다. 훨씬 빨라진 그 걸음에 발맞추며 이와이즈미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와쨩~금방이라도 그를 껴안을 것 같은 오이카와를 손으로 밀어버리며, 빨리 오기나 하라고 이와이즈미는 버럭 소리쳤다.

 

아참, 이와쨩, 나 아까 토비오쨩이 우타쨩이랑 하는 얘기 들었는데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남자아이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약간의 과장과 각색을 섞어 히나타를 향한 카게야마의 지극한 순애보로 장르를 멜로로 바꿔버렸다. 놀라워하면서도 긴가민가하는 이와이즈미에게 오이카와가 말했다. 다음 공식전에서 만나면 꼭 이 얘기로 놀려주자구. 그의 얼굴에 싹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걸로 2 0 패배인가.”

 

무시무시하게 가라앉아 있는 카게야마와 히나타의 등 뒤로 까만 기운이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잡초 뽑기와 마왕용사 매치에서 져버린 타격이 너무 컸다. 배구 경기는 아니었지만 그 밖의 것에서도 어쩐지 지고 싶지 않은 상대가 오이카와였다. 축 처진 어깨로 나란히 걸어가던 히나타는 무언가 생각난 듯 갑자기 걸음을 뚝 멈췄다. 카게야마가 의아하게 돌아보자 히나타가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히나타의 가방에서는 한 번 들어본 바 있는 비닐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으악, 사탕 주는 거 깜빡했다!!!”

 

히나타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좌절했다. 보육원 처음 들어갈 때 카게야마와 다투기도 했고, 그 앞에서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를 만나 깜짝 놀라기도 했고, 보육원에 들어가자마자 한 게 밭에서 잡초 뽑기였으니 정신이 없을 만도 했지만, 히나타는 애써 준비한 것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지 못해 애통해했다. 히나타는 퍽 슬퍼하며 사탕봉지를 뜯었다.

 

하나 먹을래?”

 

히나타가 하나를 입에서 도륵도륵 굴리며 카게야마에게 사탕을 하나 내밀었다. 카게야마는 굳이 그것을 사양 않고 받아 깐 뒤 입에 넣었다. 떼룩떼룩 입안에서 구르는 사탕이 꽤 달았다. 오늘 하루 오전부터 힘을 쓰는 바람에 몸은 고단하고 생각보다 오래 보육원에 있었기 때문에 내심 기대했던 카게야마와의 추가 연습은 무리일 듯싶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천사같이 마음씨가 예쁜 아이들 덕분일 것이다. 아픈 가정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심란하고 마음이 쓰릴 정도로.

 

그래도 오늘 꽤 괜찮지 않았어?”

.”

 

히나타는 순순히 나오는 대답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히나타의 생각과 다를 거라고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어쩐지 평소보다 훨씬 순해져 있는 게 더 놀라웠다. 카게야마 목소리가 너무 착한데?! 히나타가 당황스럽게 쳐다보는 걸 알 텐데도 카게야마는 어쩐지 고집스럽게 앞만 보며 걷는 듯했다.

 

오오, 진짜야? 카게야마 네가 순순히 인정하니까 놀라운 걸? 뭐가 그렇게 좋았는데?”

 

카게야마가 스윽 히나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오래 보지 못하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여러 가지를 깨달아서.”

? 뭘 깨달았는아하?”

 

그러고 보니 카게야마 오늘 처음으로 애들이랑 제대로 놀아봤겠구나! 카게야마는 동생도 없이 외동으로 자란 걸로 알고 있으니 좋을 법도 했다. 히나타는 흐뭇하게 웃으며 카게야마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그래. 앞으로 오늘 배운 대로 하면 돼.”

 

오늘 해본 대로만 하면 어떤 성격의 아이들을 만나도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어린 히나타의 말에 카게야마가 묘한 얼굴을 했다. 그게 꼭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 줄 아냐고 묻는 것 같아 히나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이게 아닌가? 어리둥절한 히나타에게 카게야마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히나타는 사탕봉지를 뒤적거렸다.

 

또 줘? 무슨 맛?”

아니, 손 달라고.”

?”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오는 말에 히나타가 엉겁결에 손을 내밀었다. 카게야마 손 위로 안착한 손이 꽉 잡혔다. , 으아아악?! 커다란 손이 단단하게 잡아오는 감각이 무척 낯설어 히나타는 입을 벌리고 어버버했다.

 

, 무슨, , 뭐야?”

 

아까 점심 때 뭐 잘못 먹었나!? 히나타가 말을 더듬으며 물어도 카게야마는 태연하기만 해 더욱 당혹스러웠다. 보육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잘못 잡았을 때 히나타보다 더 놀랐던 모습과는 천차만별이었다.

 

싫어?”

, 으음, , 그건 아니고그렇다기보다는으음

 

싫은 것보다는그러니까뭐라고 해야 할까당황스럽다고나 할까뭔가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기분이 갑자기 울렁울렁 요상해지는 게 엄청 이상하기도 하면서배구로 따지면 경기 중에 카게야마가 올린 토스가 나한테 온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때랑 비슷하다고나 할까히나타는 수많은 유사감정을 떠올리면서도 이 상황에 딱 맞는 적절한 묘사를 고르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럼 됐어.”

 

히나타는 말문을 잃고 카게야마를 보았다. 카게야마는 좋은걸 억지로 참고 있는 듯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로 말했다.

 

나는 너 납치 안 해.”

 

, 납치!?

도통 따라갈 수 없는 흐름에 히나타가 눈을 휘둥그레 뜨든 말든 카게야마는 그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쿵 쾅 쿵 쾅 뛰는 심장이 혹시 맞잡은 손을 통해 히나타에게 전해질까 걱정이 되었지만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아이가 그랬었지. 도망가지 않게. 행복하게. 아이 덕분에 카게야마는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그런 카게야마에게 노을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히나타가 말했다. 앞으로 오늘 배운 대로만 하면 돼. 그것 또한 카게야마에게는 귀중한 깨달음이 되었다.

솔직하게.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는 카게야마의 입꼬리가 히나타 모르게 삐죽삐죽 올라갔다.

 

 

 

 

 

 

오이카와 감독 이와이즈미 코치vs카게야마 감독 히나타 코치로 애들 배구 가르쳐서 즉흥 시합 하는 것도 쓰고 싶었는데 하염없이 길어져서 스킵... 한번에 두커플 넣는건 진짜 어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