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당신을 맞춰 언젠가 7
보쿠아카
당신을 맞춰 언젠가 7
사망소재 주의
아카아시는 눈가가 축축한 것을 느꼈다. 눈을 뜨자 어른거리는 시야가 보였다. 다시 깨어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물기로 가득한 시야는 예상하지 못한 터라 아카아시는 당황했다. 자리에서 번쩍 몸을 일으키자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륵 떨어졌다. 이불보 위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낯설어 아카아시는 쉴 새 없이 닦아내다가 그만 포기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나는 얼마나 더 너를 잃어야 하는 걸까…’]
보쿠토의 말이 떠올랐다. 아카아시를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질문이 누군가를 향했다고 해도 아무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일 것이다. 지금은 일곱 번째 죽음, 여덟 번째 삶이었다. 그가 고양이처럼 아홉 번을 산다고 하면 이번을 포함해 한 번의 죽음과 두 번의 삶이 남았다. 이렇게나 많이 죽었는데, 그렇게나 많이 상처를 줬는데, 수도 없이 마음에 대못을 박는 이별을 경험했는데,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카아시는 지친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로 직전에 눈 떴던 장소와 동일한 곳이었다. 창문 밖은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 조금 흐리긴 했지만 간혹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추기도 했다. 그렇지만 날씨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카아시의 시선이 책상 위를 향했다. 탁상달력이 있었고 그 옆에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달력을 집어 들면서도 아카아시는 노트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이름으로 된 파일. 미안해. 시간은 반복된다. 알 수 없는 이 집 주인. 아카아시는 우선 년도부터 확인했다.
2031년.
……?
아카아시는 낯이 익은 숫자라고 생각했다. 2031년. 그가 37세이고, 보쿠토가 38세인 해… 잠깐, 2031년?
아카아시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달력을 넘겼다. 2031년 달력이 맞았다. 그러고 보니 풍경화가 그려져 있는 이 달력의 디자인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다. 2031년. 또 2031년에 왔다는 소린가?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은 눈을 뜰 때마다 크게 달라진 점이 없어 뭐가 달라졌는지 찾기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노트북을 펼쳐들었다. 부팅된 노트북 배경화면에는 그가 꾸준히 봐오던 아이콘들만이 있었다. 바로 직전 발견했던 아카아시의 이름으로 된 파일도 보이지 않았다. 우측 하단을 살피니 날짜는 확실히 2031년 5월 22일이 맞았다.
같은 년도에서 다시 눈을 뜬 건 처음이다. 혼란스러워하며 아카아시는 노트북을 덮었다. 같은 년도. 아카아시는 종이를 찾아 서랍을 열었다. 가지런하게 정리된 서랍에는 내용물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적을만한 노트가 보여 꺼내들었다. 펜도 하나 꺼내든 아카아시는 늘 그랬듯 날짜를 정리해보기 위해 노트를 펼쳤다. 하지만 보이는 문장에 아카아시는 움직임을 멈췄다.
[이번에는 성공해야 해.]
시간이 쩍쩍 갈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발견한 숫자는 6. 나까지 벌써 7번… 아니 어쩌면 그 이상…]
아카아시는 이 글씨체를 알고 있었다.
[시간은 반복된다.]
머리를 무거운 것에 한 대 세차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카아시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천천히 펜을 들어 노트의 빈 공간에 따라 적었다.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
[내가 발견한 숫자는 6. 나까지 벌써 7번… 아니 어쩌면 그 이상…]
[시간은 반복된다.]
숨을 멈춘 아카아시는 위에 적힌 문장들과 아래에 적힌 문장들을 비교했다. 단정하고 바르게 쓰인 글씨체는 찍어내기라도 한 듯 똑같았다.
나…? 난가? 내가 살아있는 건가? 어떻게? 아니 이 집이 내 집인가? 도대체 무슨,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아카아시는 바로 직전의 2033년에서 발견했던 파일을 떠올렸다. 그의 이름이 적힌 파일. 미안해. 시간은 반복된다. 아카아시의 눈이 다시 노트로 향했다. 시간은 반복된다.
지잉, 머리가 울리며 아팠다. 아카아시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이 이리저리 섞여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긴 분명히 그가 죽은 지 한참 된 2031년인데 그와 글씨체를 아주 똑같이 쓰는 누군가가 이 집에 살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아카아시의 이름을 알고 있는 듯하고, 그에게 벌어지고 있는 기묘한 상황까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아카아시의 상황을 아는 건 보쿠토밖에 없었다. 보쿠토마저도 모든 정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상한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보쿠토가 이 집의 주인일 리도 없었고, 아카아시의 글씨체를 연습할 리도 없지 않은가.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그 사실을 숨길 위인이 되지 못했다.
그럼 남는 건 아카아시 당사자라는 소린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죽은 지 오래인데 어떻게 이 집을 사고 노트북을 하고 노트에 글씨를 쓴다는 말인가. 또 이 집은 아카아시가 2028년에 깨어났을 때, 그러니까 아카아시 나이 기준 34세일 때도 봤던 집이다. 그가 잘 살아있다면 보쿠토의 상황이 그 꼴일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비현실적인 일이지만 끝까지 비현실적이다. 아카아시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신경이 쓰이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까지 벌써 7번. 아니 어쩌면 그 이상…]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 집 주인은 아카아시보다는 분명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시간이 반복된다는 말을 남겼을 것이다. 혹시 저건 내가 되살아난 횟수를 말하는 걸까. 아카아시는 손가락을 헤아렸다. 이번으로 정확히 8번째 삶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이상’이라는 단소가 붙었다는 건, 그가 9번 이상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일까?
생각만으로도 끔찍해졌다. 아카아시는 차마 침대에 편히 앉아있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집주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지만 책상 서랍을 열어도, 책꽂이를 보아도, 노트북을 살펴도 그에 대한 정보를 얻기는 매우 어려웠다. 집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릴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지금까지의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깨어났을 때 우연이라도 집주인과 만난 경우는 없었다. 집주인이 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면 하필 5월 22일에 동그라미를 쳐놓은 것도, 한 번도 집에서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을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카아시는 결국 이 방에서 더 이상의 무언가를 얻는 것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한걸음을 내딛자마자 살짝 해를 가렸던 구름이 사라지고 햇빛이 흐드러지게 쏟아져 인상을 찡그렸다. 아카아시는 일단 침착하게 생각하려 애썼다. 어쨌든 그 누군가는 이 집의 주인이었다.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보면 마주칠 수도 있는 거였고, 운 좋게 옆집이나 근처에 사는 사람을 만나 집주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동네를 살피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득 40세의 보쿠토가 5월 22일마다 동네를 배회하며 그를 기다렸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제일 최근에 널 만났을 때… 그 길거리를 중심으로 알아봤어. 혹시 설치되어 있었을 녹화 카메라가 있으면 네가 어떤 경로로 거기까지 왔는지 알 테니까.’]
보쿠토가 말한 ‘제일 최근’은 언제일까. 시기로만 따지면 40세와 가장 인접한 나이인 38세일 가능성이 컸다. 그가 세 번째로 깨어나 만났던 38세 때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잠깐. 아니다. 38세가 아니다. 아니다…?
[‘벌써 네 번이야.’]
[‘19살 21살 27살 35살에 널 잃었어.’]
40세의 보쿠토는 그렇게 말했었다…. 아카아시가 보쿠토에 대해 이상하게 느꼈던 위화감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아카아시.”
“…!”
아카아시는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보쿠토가 서 있었다. 그는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당황했다. 의외의 상황에 손바닥에는 땀이 찼다. 38세. 첫 38세의 보쿠토를 만난 건 체육관이었다. 낡고 허름한 체육관. 그를 보고 고요한 분노를 뿜으며 다짜고짜 멱살을 잡으려 들었던 상처받은 눈동자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38세의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익숙한 팀 저지를 걸치고 있었다. 조그만 체육관에서 연습하는 변방의 팀이 아닌, 그가 입단하고 은퇴까지 마쳤을 팀의 저지.
그러고 보니 40세의 보쿠토도 그 저지를 입고 있었다. 35세의 보쿠토도 그랬다. 아카아시를 사로잡았던 위화감이 야금야금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네.”
[‘하, 또야? 교복도 이제 지겹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는 없어?’]
그때의 잔뜩 비꼬는 목소리가 아닌 담담하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아카아시는 머리가 핑글핑글 돌 것 같았다. 이상하고 모를 것들 투성이였다. 머리가 아파 그는 조금 휘청거렸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라고 짧게 힘주어 부르며 그를 부축했다. 그의 눈빛에는 아카아시를 향한 원망이나 미움이 싹 지워져 있었다. 마치… 40세의 보쿠토를 미리 보는 기분이었다. 분명, 분명 38세일 텐데.
“보쿠토상.”
“응.”
“지금이… 몇 년도인가요.”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처음으로 그걸 물을 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2031년.”
“보쿠토상은… 38세가 맞나요?”
“응.”
아카아시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중얼거렸다.
“잠깐… 얘기가 듣고 싶은데요.”
“근처 공원 갈까.”
공원. 아카아시는 떠오르는 좋지 못한 기억에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마음이 습관처럼 불안했지만 당장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보쿠토가 그때처럼 열성팬 극성팬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가는 길에 조심만 하면 될 것이다. 아카아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묵만이 가득찬 골목길을 빠져나가며 그는 연신 경계의 눈초리를 보였다. 그런 아카아시를 옆에서 따라붙으며 보쿠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공원에 도착했다.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고 그 사이에 이름 모를 꽃들이 간격마다 메우며 심어져 있는 예쁜 공원이었다. 가로등과 그 아래 놓인 벤치는 별로 많지 않은 나무 아래에만 있는 탓인지 간격이 꽤 멀어 이야기를 나누기 좋아 보였다. 생나무로 만든 것 같은 벤치에 앉은 아카아시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고 있었다. 이 근처를 잘 아는지 가끔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손가락을 들어 방향을 일러주기만 하고 다만 오는 내내 한참을 침묵하던 보쿠토가 그제야 물었다. “이제 말해도 돼?” 아카아시는 입을 한 번 벌렸다가 다물었다.
“전 말하지 말라고 한 적 없는데요.”
“아카아시가 자꾸 주위를 신경 쓰길래, 방해될 것 같았어.”
“…보쿠토상과 제대로 몇 마디도 하지 못하고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보쿠토가 피식 웃었다. 몹시 맥이 없는 웃음이었다. 늘 호탕하게 웃던 모습과 달리 그는 몹시 나약해져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봤던 38세의 모습보다 훨씬 더. 그때는 아카아시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정말 죄송하고 마음이 좋지 못했지만 차라리 그 모습이 더 나을 지도 몰랐다. 지금은 아프다 못해 저릿저릿할 정도로 괴로웠으니까. 하지만 의문을 풀기 위해서 아카아시는 더 아파야 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어땠을 것 같아?”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아카아시가 느끼고 있는 것보다 더한 심적 고통을 감내해 와야 했을 보쿠토의 질문에는 악의가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아카아시 역시 말을 정정했다.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요.”
“구체적으로?”
보쿠토가 스윽 아카아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처음이네. 나한테 그렇게 물어본 거.”
“…대부분 미리 알아봤으니까요.”
“늘 그렇게 혼자 알고 있던 거야?”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얼 말하는지 몰라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어쩐지 마음이 침이라도 찔린 양 따끔거렸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깨달아버렸는지도 모른다. 보쿠토가 그를 책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직접 말해주는 것보다 정확한 게 있어?”
“그러네요.”
“마음 같아선 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지만… 나도 그래.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모르니까…”
조금 억울하네. 보쿠토가 중얼거렸다.
“아카아시가 줄곧 말해주지 않아서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게 있는데.”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시선이 마주쳤다. 거기서 아카아시는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보쿠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의 마음을 거울로 비춘 듯한 또렷한 잔상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말해주지 않겠지.”
‘그렇지만 아카아시는 아마 나한테 말해주지 않겠지.’
40세의 보쿠토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보쿠토 대신 너무 많이 선택한 까닭일까. 죽음을 택할 때마다 마주쳤던 눈동자 틈으로 모르게 진심을 전해버린 걸까. 그저 같은 배구부였던 선배를 위한 후배의 행동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과한 감이 있었지만… 보쿠토는 아마 끝까지 모를 거라고 자만했던 걸까. 아카아시가 35세의 보쿠토를 대신해 죽는 순간 그도 알아차렸기에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아카아시의 흔적을 좇았을지도 모른다.
“좀 억울해도… 나는 말해줄 거야. 어디부터 말할까…”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서 시선을 떼고 흔들리는 꽃줄기를 바라보았다. 아카아시 역시 그 시선을 따라 가만히 앞만 쳐다보았다. 귓가로 여상스런 말이 흘러들어왔다.
“19살, 아카아시가 처음 죽고 나는 배구를 그만 둘까 생각했어. 실제로 그러려고도 했는데 코노하랑 애들이 말렸어. 네가 싫어할 거라고. 죽은 너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서 일단은 그냥 했어. 그러다가 가을에 추천을 받아서 팀에 입단하게 됐고. 별로 재미는 없었어. 네가 없었으니까. 배구를 계속 하면서도 그만둘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21살 때 네가 나타났어. 당연히 엄청 기쁘고, 기쁘고, 또 기뻤어. 그 말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카아시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설명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돌아왔고, 계속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더 좋았어. 다시 배구가 즐거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너는 금방 나를 대신해 또 죽었고. 네가 없어서 정말 억지로 하던 배구를 계속 해달라고 하면서.”
“…….”
“그 다다음해에 배구 국가대표로 뽑혔는데 별로 기쁘진 않았어. 오히려 그만두고 싶었어. 네가 자꾸 헛것처럼 보이고 나타났거든. 그렇지만 버텼지. 네가 배구를 하는 날 바랐을 거라는 게 확실해졌으니까. 네가 나한테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사실이 기뻤으니까. 그렇게 27살이 되어 널 만났어.”
“…27살이요?”
“응.”
“25살이 아니라요?”
“무슨 말이야?”
보쿠토는 정말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카아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것도 아닌 척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열성팬 같은 건 없으셨습니까?”
“글쎄~ 내가 좀 인기가 많긴 했지?”
“달려들었다거나…”
“그런 적은 없는데?”
그가 처음으로 깨어나 처음으로 만난 25세의 보쿠토. 당시 열성팬 극성팬에 시달리던 그는 없었다. 여기서 추론해볼 수 있는 가정은 두 가지다. 그와 보쿠토가 만난 25세 때의 과거가 사라졌다. 보쿠토는 정말 그와 있을 때만 사고가 난다. 그 사이 보쿠토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아카아시 네가 체육관에서 그렇게 되고 나는 배구를 하기가 더 끔찍해졌어. 체육관에 들어가면 자꾸 네 생각이 나서 코트를 밟는 것도 힘들어졌지만 아시안게임, 올림픽 꾸역꾸역 나갔어. 네가 담배도 피우지 말라고 해서 버티기 힘들었는데도 견딘 건 순전히 오기였어. 네가 계속 의식적으로 날 밀어내려던 것처럼 보였던 게 기억에 남아서, 마지막까지 내가 듣기 싫었던 말만 남기고 죽어버린 아카아시가 미워서 오기로라도 계속 했어. 당연히 은퇴도 늦어졌지. 30살에 은퇴하자마자 곧장 코치 과정 밟고 내가 뛰던 팀 코치로 들어갔어.”
“…….”
“그게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는 주제에 너한테 미안하고 또 여전해서, 다시 만나면… 널 억지로라도 가둬두고 싶었어. 그래서 35살 되는 해에 만난 너를 억지로 집에 데려다놨지만… 네가 다시 죽어버린 이후에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30세에 은퇴. 뛰던 팀의 코치로 들어갔다… 그건 아카아시가 아는 38세의 보쿠토가 아니었다. 그가 두 번째로 깨어나 만난 38세의 보쿠토도, 그와 함께 했던 기억도 사라졌다. 아카아시는 지금까지 차례로 25세 38세 21세 27세 35세의 보쿠토를 만나왔지만, 지금의 보쿠토는 21세 27세 35세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아카아시는 그를 둘러싼 거대한 위화감의 정체를 확실히 깨달았다. 그가 38세의 보쿠토를 만나고 21세의 보쿠토를 만나 배구를 계속 해달라고 말해버린 순간, 그 이후 시간이 쌓이는 동안, 그의 개입으로 미래가 바뀌어 한마디로 ‘리셋’이 된 셈이었다.
28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한 보쿠토도, 변방의 작은 팀에서 코치를 맡은 보쿠토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 시간들 위로 30세의 나이로 은퇴한 보쿠토와 잘나가는 팀의 코치가 된 보쿠토가 덧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아마 아카아시가 40세의 보쿠토를 만나고 현재 38세의 보쿠토를 만난 이상, 앞으로의 40세 보쿠토는 또 달라져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시간대를 옮길 때마다 즉각 영향을 받는 미래. 원한 적 없는 결론이 원한 적 없는 대가와 함께 그의 곁을 떠돌고 있었다.
“네가 죽고 네가 도대체 어디서 깨어나는지를 몰라서 따로 알아봤어. 넌 항상 5월 22일에 깨어나니까 이 근처를 계속해서 돌아다녔어. 3년 만에 이렇게 만나게 돼서 다행일까.”
“…….”
“아니… 다행도 아니지.”
보쿠토가 조금 울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어떻게 다행이야. 너는 자꾸자꾸 죽고 또 같은 일이 생기면 또 날 밀쳐내고 대신 죽는 걸 선택할 텐데.”
“지금이라도…”
모르는 척 자리를 떠나라는 말을 아카아시는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보쿠토의 눈빛은 몹시, 몹시도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울고 있지는 않았지만 물소리가 흐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졸졸졸. 어쩌면 피가 흐르는 소리였다.
“제가 죄송하다고 하면,”
“안 들을 거야.”
“그렇겠죠.”
죄송할 일을 자꾸 만들어버렸으니 이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보쿠토가 말했다.
“억지로 붙잡아두려고 해도 소용없고. 이 시간이 또 언제 끝날지 모르지. 나는… 얼마나 더 너를 잃어야 할까.”
아카아시는 그가 이미 만나고 온 40세의 보쿠토와 지금의 보쿠토가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보쿠토 모두 같은 나이에 아카아시를 만나 같은 방식으로 아카아시를 잃었기 때문일 테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말했다.
“저, 편의점 좀 가고 싶은데요.”
“편의점은 왜?”
“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가자.”
보쿠토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카아시는 그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제일 가까운 편의점이 어딥니까?”
“별로 안 멀어.”
그들은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깨어난 집의 골목 쪽이었다. 같은 상황 비가 오던 날 우산을 받쳐 든 보쿠토는 너무나도 단호하게 근처에 편의점이 없다고 했었는데. 알고 보니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피해 우산이라도 하나 살 요량이었고, 그걸 알기 때문에 일부러 억센 부정을 했던 것 같지만. 지금의 보쿠토는 순순히 아카아시를 편의점에 데려다 주었다.
편의점 앞에서 아카아시는 잠시 우물쭈물했다. 보쿠토가 물었다. 왜? 아카아시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지갑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나름대로 용기 낸 말이었지만, 보쿠토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웃었다. 고등학생 때 그를 매점으로 억지로 데려가 별로 고프지도 않은 빵을 매번 쥐어주었던 그때로 잠시나마 돌아간 것 같았다. 보쿠토는 기꺼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 다음 부탁은 어떻게 하지. 망설이는 사이에 보쿠토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받고 있으세요.”
“응.”
보쿠토가 다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받았다. 아카아시는 그대로 편의점에 들어갔다. 알바생처럼 보이는 어린 학생이 핸드폰을 뿅뿅 하다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로 개의치 않으며 아카아시는 편의점 구석구석을 살폈다. 마실 것도 사려는 목적은 아니었지만 혹시 몰라 보쿠토 것과 그의 것을 골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문구류가 진열되어 있는 곳에서 아카아시는 펜을 하나 집어 들었다.
계산대 앞에서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지갑이 아닌 그의 지갑을 꺼냈다. 지폐 한 장을 꺼내 계산을 한 아카아시는 편의점 유리창 쪽 선반 위에 캔음료 두개를 세워둔 뒤 보쿠토의 지갑을 열었다. 색이 바랜 메모지가 안쪽에 붙어 있었다. 이게 얼마나 익숙하고 또 오래됐으면 내가 이걸 보게 될 거라는 사실조차 잊었을까. 색이 바랬음에도 불구하고 무뎌지지 않았을 아픔이 안타까워 아카아시는 그가 적어놓은 글자를 쭉 손가락으로 훑었다.
[요리 잘하시네요.]
아카아시는 그가 방금 구입한 펜을 들었다. 잠시 허리를 숙여 선반에 기댄 아카아시는 고개만 들어 유리창 너머의 보쿠토를 보았다. 등을 돌리고 전화를 받고 있는 보쿠토의 머리카락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이로 인한 건지 그로 인한 건지 이제는 알 수 없는 변화였다. 마찬가지로 지금 그가 할 행동이 옳은 건지 그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해서는 안 될 가능성이 더 컸다. 보쿠토의 안에서 이는 수많은 감정을 눈앞에 두고서도 차마 꺼낼 수 없었던 말이었다. 소리로는 절대 내어줄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아카아시는 망설임이 묻은 글씨로 꾹꾹 한글자 한글자 눌러 썼다. 보쿠토는 이미 이 마음을 알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절대 그에게 말하지 않을 것도 알았다. 아카아시도 알고 있었다. 보쿠토는 여전히 앞으로도 기다릴 거란 사실도. 이 말을 본 보쿠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른다. 오히려 상처를 받게 될지, 오히려 홀가분하게 그를 떠나보낼 수 있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좋아합니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펜을 꽉 쥔 손으로 점을 찍었다. 되도록이면, 상처를 덜 받는 쪽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료수가 먹고 싶었던 거야? 목말랐어? 진작 말하지!”
아카아시가 내민 음료수를 보고 보쿠토가 호들갑을 떨었다. 보쿠토는 한손으로 지갑을 주머니에 넣으며 한손으로 음료수를 받았다. 보쿠토가 좋아하던 음료수라 일부러 이걸 골랐는데 여전히 좋아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 볼펜은 뭐야?”
“가지세요.”
“엥?”
보쿠토가 의아하게 볼펜을 받자 아카아시는 짤막하게 말했다.
“생일 선물이요.”
“엑… 내 생일 그새 잊은 거야? 나 생일 9월인데!!”
“압니다.”
“나는 아카아시 생일이 12월인 것도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안다니까요. 보쿠토상 생일 9월 20일이잖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주는 거야?”
“미리 주는 거라고 하죠. 못 준 거 주는 거라던가.”
그러나 보쿠토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받고 싶은 건 이게 아닌데.”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받고 싶어 하는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혹시, 저한테 받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말해도 아카아시가 주지 않을 것 같은데.’
‘…비싼 겁니까?’
‘응. 날 좋아한다는 말.’
‘…….’
‘어때? 비싸지?’
‘…그러네요.’]
아카아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비싼 겁니다. 받아 두세요.”
“너무해…”
그러면서도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준 펜을 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었다. 괜히 코끝이 시큰거리는 것 같아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 갑니까?”
“글쎄. 가고 싶은 곳 있어?”
“아까 전화 온 건 뭐였는데요?”
아카아시의 질문에 보쿠토가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별거 아냐.”
“별거 있어 보이는데요.”
“역시 아카아시는 못 속인다니까…”
보쿠토는 머리를 슬쩍 긁적이며 말했다.
“급하게 봐줄 게 있다고 오라네.”
“그럼 가야죠.”
“아카아시랑 있을 거야.”
“그럼 저도 같이 가죠.”
보쿠토의 눈이 커졌다. 꿈뻑거리는 눈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환해졌다.
“그런 방법이…!! 차타고 가자. 근처에 차 세워뒀어.”
차 말입니까…. 아카아시의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보쿠토는 눈치 채지 못하고 방향을 틀었다. 아카아시 역시 짐짓 아무렇지 않게 그를 따라갔다.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곧바로 길가에 세워져있는 차를 보고 아카아시는 기겁했다. 차를 아무데나 세워두면 어떡하냐고, 이러고 있는 사이 블법 주정차로 딱지 떼이면 어떡하냐고 잔소리를 하는 아카아시에게 보쿠토는 축 처진 어깨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주체가 좀 바뀐 것 같긴 했지만 익숙한 광경이라 결국 아카아시는 칭찬을 곁들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래도 차가 좋네요.”
“엇, 그렇지? 바꾼 지 얼마 안 됐어!”
“얼마나 됐는데요?”
“한달? 두달?”
음… 아카아시는 조수석에 올라타려다가 말했다.
“택시 타고 갈까요?”
의아해하는 보쿠토의 차를 한번 쭉 훑어본 아카아시는 확실히 이전의 38세 보쿠토가 타던 차보다 훨씬 좋은 차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확신은 없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아카아시는 길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택시 하나를 붙잡고 보쿠토에게 손짓했다. 보쿠토는 엉겁결에 그를 따라 택시에 올라탔다. 익숙한 체육관 이름을 택시기사에게 대고 차가 출발해서야 보쿠토가 물었다.
“걱정돼서 그래?”
“아니라곤 말 못하겠네요.”
보쿠토가 조금 눈을 내리깔고 뭐라 말하려는 것을 아카아시가 막으며 다른 화제로 돌렸다.
“요즘 팀 성적은 어떻습니까?”
보쿠토가 순순히 그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며칠 전에 라이벌 팀이랑 경기 했었는데 우리가 스트레이트로 이겼어. 우리팀에 괜찮은 세터가 있는데- 물론 아카아시만큼은 아니지만, 팀에 잘 맞춰주는 편이라……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중간 추임새처럼 들어가는 그에 대한 칭찬이 택시기사에게까지 들려 다소 민망했지만 그만두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야기를 하는 보쿠토의 표정이 조금은 즐거워보였기 때문이다. 배구를 하는 게 재미없다고 했으니 아카아시와 대화한다는 것이 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코치로서의 보쿠토도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볼 수 있다면 말이다.
“……!”
택시기사가 창문 밖을 보며 슬렁슬렁 운전하고 있을 때 아카아시는 전면유리 너머를 보았다. 교차로가 보였다. 택시는 그다지 느리지도 않고 과속하지도 않고 있었지만 아카아시는 식은땀이 났다. 얼굴이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조금 창백해지는 것 같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보쿠토의 말에 성의 있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을까, 긴장으로 버벅이지는 않을까, 아카아시는 가볍게 깜빡이는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한 번도 어긋난 적 없는 좋지 않은 예감이 교차로와 함께 가까워지고 있었다. 심장이 사납게 요동치고 아카아시는 아무것도 모르는 보쿠토를 보았다. 그의 주머니에는, 그의 지갑 안에는, 아카아시의 생일선물이 들어 있었다.
역시, 말로 하지 않는 편을 택한 건 다행이었다.
부우웅-
아카아시는 차가 교차로에 진입하자마자 보쿠토를 보았다. 보쿠토가 훈련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다 말고 아카아시를 마주했다. 의아해하는 그의 시선이 아카아시의 등 뒤를 향하고 커졌다. 아카아시는 볼 수 없었지만 그의 표정만 보고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는 택시 운전사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보쿠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쿠토상이 지도하는 모습도 궁금하고 보쿠토상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있고 보쿠토상과 생일도 보내고 싶은데 아쉽게도 이루어지는 게 없네요.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필사적으로 감쌌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다시 눈을 떴다.
누군가 잡아끈 것 같기도 하고 억지로 머릿속을 휘저어 깨운 것 같기도 했다. 지끈거리는 머리의 고통이 지금까지 중 가장 심했다. 핑글핑글 도는 시야로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들썩이는 가슴이 한번 더욱 크게 울렁였다. 눈을 크게 뜬 아카아시는 서둘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불안정한 시선이 방 곳곳을 더듬거리듯 짚었다. 이불을 쥔 손을 떼어내 꽉 쥐자 손바닥으로 손톱이 파고들어 내는 고통이 느껴졌다.
현실이다. 꿈이 아니다. 환상이 아니다.
이곳은 18세 아카아시의 방이었다.
다음편이 끝입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