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보쿠아카] 당신을 맞춰 언젠가 完

별골짜기 2016. 5. 21. 18:46

보쿠아카

당신을 맞춰 언젠가

사망소재 주의

 

 

 

 

아카아시는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가 쓰던 침대가 맞았다. 그가 시험기간마다 밤을 새워가며 공부했던 책상이 보였다. 책꽂이에 가득한 1학년 때의 교과서와 2학년 때의 교과서가 보였다. 방구석에 배구공이 수건과 함께 놓여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방과 너무나도 흡사한 광경이었다. 순간 혼란이 닥쳐와 아카아시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보았다. 침대가 놓인 벽쪽에 걸려 있는 벽걸이 달력. 날짜를 따로 표시해놓는 편이 아니라 날짜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년도가 보였다.

2012. 그리고 펼쳐진 5월 달력.

정말 2012, 그가 18세인 시기로 되돌아온 것이다.

아카아시의 심장이 쿵쾅쿵쾅거렸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몹시 어려웠지만 아카아시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꺼내 책상에 대고 적었다.

여덟 번째 죽음과 아홉 번째 삶.

한 번 지냈던 시간대에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바로 직전에 체험했으므로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가 18세인 시절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정말 그가 고양이의 영향을 받아 아홉 번 산다는 가정이 맞다면, 시작과 마무리를 같은 시간에서 하게 되는 셈이었다. 이 얼마나 거짓말 같은 안배란 말인가. 아카아시는 믿기 어려운 것과 동시에 약간의 희망을 가졌다. 18. 그가 사고가 난 5. 지금까지의 패턴상 522일일 가능성이 컸다. 그는 오늘의 날짜가 며칠인지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빠르게 1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순간 부모님을 만나면 어떡하나, 만약 규칙이 어긋나 22일이 아닌 그가 죽은 이후라면 어떻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1층에는 아무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하지만 바로 직전까지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티가 났다. 소파 옆 테이블에 놓인 신문과, 주방에서 맡아지는 음식 냄새가 그러했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테이블로 다가가 신문을 집어 들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고요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낼 때 그의 눈동자가 날짜를 찾아냈다.

522.

그가 죽은 날. 반사적으로 거실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4. 심장이 잠시 멎는 듯했다가 빠르게 달박음쳤다. 아카아시가 죽은 시간은 오후 5시 즈음의 하굣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돌아왔다. 다시 돌아왔다. 2012522. 그것도 사고가 나기 직전의 시간으로. 아카아시는 머릿속을 스쳐가는 수많은 감회와 생각들 사이로 겨우겨우 한 가지를 끄집어냈다. 그의 개입으로 바뀌는 미래. 달라진 38세 두 번의 보쿠토. 어쩌면사고가 일어나는 것도 바꿀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카아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막을 수 있다.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막아야 한다.

아카아시는 곧장 현관으로 나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사고의 원인을 피하게 하거나, 제거해버리거나. 사고의 원인은 도로 한복판에 엎드리고 있는 작은 고양이였다. 하굣길에 늘 지나다니던 인도 쪽이었으므로 그 방향을 피하게 할 순 없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선택지를 살펴본다면, 고양이가 도로 위에 엎드리기 직전에 낚아채서 하굣길의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눈에 띄지 않게 하거나, 이미 엎드려 있다면 그가 보쿠토보다 먼저 구하러 뛰어들어야 했다. 만약 화물차가 달려드는 것을 피할 수 없을지라도.

심장은 더욱 빠르게 두근거렸지만 머릿속은 차가워졌다. 침착해야했다.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다. 어영부영 놓칠 수는 없었다. 아카아시는 현관 신발장 옆에 있는 전신거울을 보았다. 늘 똑같은 교복 차림을 한 모습이 보였다. 여기, 또 한 명의 아카아시가 살아 있다.

아카아시는 일단 발길을 돌려 다시 2층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고양이를 미리 찾지 못한다면, 도로 위에 웅크린 고양이를 구하기 위해 그들보다 먼저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똑같은 모습을 한 아카아시가 나타날 수는 없었다. 교복차림으로 맨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면 분명 동네에서 의심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사고가 난 이후를 생각해도 그랬다.

빠르게 2층으로 올라와 옷장을 열어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색의 옷으로 갈아입는 손이 더뎠다.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다. 머리와 얼굴도 가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카아시는 모자가 없었다. 나가자마자 아무 모자든 어떻게든 사야겠다고 다짐한 아카아시는 바지를 갈아입었다. 그가 2012522일을 떠난 지는 체감상 무척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의외로 그의 손은 옷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다시 깨어났다고 해도 여긴 아카아시의 방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 그의 방. 그가 깨어난 방과 그의 집을 나서면서도 머릿속이 교통정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시끄럽기만 했다. 뭔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구슬들을 한 번에 꿰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실 끝이 잡힐 듯하면서도 잘 잡히지 않아 어려웠다.

생각으로 머릿속이 뒤범벅된 상황에서도 아카아시는 가까운 스포츠용품 가게에 들어가 모자를 샀다. 최대한 어두운 검은색으로 골랐다. 바로 쓰고 나갈 거라 계산을 마치고, 모자를 썼다. 잘 가려졌나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보았다. 푹 눌러써 얼굴이 반쯤 보이지 않았다. 잘 가려지는 것 같은데…… 잠깐.

순간, 아카아시는 잠시 숨이 콱 막혔다. 그의 손가락이 미약하게 떨렸다. 보일 듯 말 듯 가려진 얼굴. 까만색 모자. 어두운 색의 옷.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어디지? 어디였지? 뭔가와 이어진 듯한 끄트머리를 잡기 위해 아카아시는 안간힘을 썼다. 얼굴 대부분을 덮은 까만색 모자. 모자모자.

아카아시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카아시는 그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분명.

 

[‘, ’]

 

보쿠토가 그를 보며 제대로 된 단어조차 뱉어내지 못하던 순간. 둥그렇게 그들을 둘러싸고 시끄럽게 술렁이던 사람들. 입으로 손을 막은 여자, 수염 난 남자, 우는 아이를 달래는 여자, 교복을 입은 커플,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남자, 그래, 그 중에는 분명 모자를 쓴 남자도 있었다. 그 남자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 아카아시는 기억을 파헤치려 애썼다. 하지만 그때 상황이 주변을 일일이 신경 쓸 처지가 되지 못했고, 그의 신경은 온통 보쿠토에게만 쏠려 있었으며, 시야마저 혼탁해졌던 덕분에 더는 자세히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번 비약적으로 뻗어나간 생각은 굽힐 줄을 모르고 자꾸자꾸 길을 만들어 치솟았다. 지나친 것일 수도 있지만정말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만약정말 만약그 모자 쓴 사람이 아카아시였다면.

그러니까원래 2012년을 살아가던 아카아시가 아니라, 몇 번이고 죽어 9번째로 2012년에 도달한 아카아시가 바로 그 모자 쓴 남자였다면.

그게 가능한가? 그가 깨어난 집들에 대한 생각을 하던 순간에도 떠오르던 의문이 자꾸자꾸 던져졌지만 어느새 그 가정을 토대로 하고 있는 머릿속은 자꾸만 생각의 범위를 넓혀갔다.

정말 그게 여덟 번의 죽음을 거친 또 다른 아카아시가 맞다면 그때 왜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던 걸까? 나라면 대신 뛰어들어 고양이를 구하거나 대신 죽음을 선택했을 텐데, 대체 왜? 순간 아카아시는 번개처럼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기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안해.]

 

그의 이름으로 된 파일에 적힌 사과가, ‘실패를 두고 한 말이었다면?

 

[이번에는 성공해야 해.]

 

익숙한 글씨체로 손수 적힌 글자가, 다시 2012년으로 돌아갈 그를 향한 당부였다면?

 

[내가 발견한 숫자는 6. 나까지 벌써 7아니 어쩌면 그 이상]

 

7번이라는 숫자가, 원래의 아카아시 대신 죽는 데 실패한 횟수를 나타낸 거라면?

 

[시간은 반복된다.]

 

그가 대신 죽는 데 실패하게 되면 이 고리를 끊지 못해 반복될 시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을까?

피가 휙휙 돌았다. 맥을 짚고 있지 않았는데도 목울대에서 세차게 뛰는 심장박동소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 가설이라면 모든 설명이 가능했다. 검은 모자를 쓴 그가 교복 입은 아카아시 대신 죽지 못하는 동시에 이 악순환을 끊어버리는 데 실패한다면, 교복을 입은 아카아시는 여덟 번의 죽음과 아홉 번의 삶을 또다시 경험하며 최종적으로 2012년에 도착해서, 그 시기에 살아가고 있던 또 다른 아카아시 대신 죽기를 시도할 것이다. 그것이 또 실패해버린다면 구하지 못한 그 다음의 아카아시가, 또 실패한다면 구하지 못한 그 아카아시가…….

그게 맞다면, 그것이 맞다면……

. 그의 방. 그가 깨어난 방. 아카아시는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던 생각들이 그제야 천천히 모여들어 조립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카아시가 깨어난 방은 2012년 그의 방을 포함해 총 세 개였다. 하나는 작고 좁은 방, 하나는 깔끔하고 넓은 방. 그 방에서 발견된 아카아시의 이름으로 된 파일과 아카아시의 글씨체와 똑 닮은 문장들. 단순히 무작위로 빈 집을 골라 깨어난 것일 수도 있었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가 그곳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는이유가 있었다면? 그 세 종류의 방이 지니는 공통점이 따로 있다면?

가능한 건가? 정말?

아카아시의 방을 포함해 전혀 알지 못하는 두 종류의 방이 가질 공통적인 교집합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었다. 아카아시가 줄곧 지내던 방. 아카아시의 이름이 적힌 파일 이름. [미안해.] 아카아시의 글씨체가 적혀 있는 노트. [이번에는 성공해야 해.]

……그가 깨어난 방들이, 셋 모두 아카아시의 방이라면?

18세의 아카아시를 살리는 데에 실패한 아카아시의 집이라면?

그게 가능한가?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너무나 끔찍했다. 원래의 아카아시를 구하지 못하고 실패한 아카아시는없는 사람이 되어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아카아시들이 깨어날 장소를 제공하고다음번에는 성공해주기만을 바라는 거다. 그가 보쿠토를 만나면 반드시 사고가 나니까, 그를 대신해 죽으면 아홉 번 이상 다시 깨어날 거라는 기약이 없으니까, 차라리 다음번 아카아시에게 모든 것을 걸고, 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거다. 이 가정만큼 딱 들어맞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아카아시네 부모님사고 직후에 이사 가셨어.’]

[‘좀 멀리 떨어진 곳이라 기차 타야 돼. 차로도 좀 멀거든.’]

 

아마실패한 아카아시는 부모님을 찾아갔을 테지. 그들의 도움 없이는 이곳을 벗어날 수도 제대로 살아가며 버틸 수도 없었으니까. 최소 39세가 될 때까지보쿠토를 보고 싶어도 찾지 않으며 막연한 희망에만 매달려 그렇게.

도대체얼마나 반복되어 왔던 것일까.

아득해지는 기분에 아카아시는 목이 조여들었다.

 

[내가 발견한 숫자는 6. 나까지 벌써 7아니 어쩌면 그 이상]

 

그가 8번째였다. 하지만 힌트를 얻지 못하고 단서를 남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실패한 아카아시들은 더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여기서 끊어야 한다. 이 처절하게 고통스러운 고리를 어떻게 해서라도 끊어야 한다. 앞으로 최소 21년을 후회와 자책으로 버티며 살아갈 아카아시들과 보쿠토들을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바꿔야 한다.

처음 그 생각을 했을 때보다도 더욱 절실하게, 절박하게 생각하며 아카아시는 상점 시계를 보았다. .... 사고까지는 약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는 곧바로 유리문을 밀고 나와 달렸다. 고양이를 찾는 그의 눈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헤이헤이 아카아시~ 매점 가자!!”

 

복도쪽 창문에서 머리를 기웃기웃 들이밀며 보쿠토가 크게 소리쳤다. 목소리가 워낙 크기 때문인지 잠에 취해 고꾸라져 있던 몇몇 학생들의 고개가 들려졌다. 학교에서도 꽤 유명인사인 보쿠토가 손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그들은 다시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 3학년 선배가 거의 쉬는시간마다 2학년 교실을 찾아와 시끄럽게 만드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상대가 보쿠토라면 말이 다르다. 3학년 선배, 그것도 운동부 선배를 한번 쳐다만 본 뒤 다시 책상에 엎드리는 후배도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아카아시라면 가능했다. 아카아시는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보쿠토는 교실에 붙은 시간표를 확인했다. 왜 저렇게 맥을 못 추리나 했더니 바로 앞 시간이 졸음을 유발하는 문학이라 한참을 졸던 듯했다. 아카아시는 이번 쉬는시간은 좀 쉬고 싶어 나름 부탁한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보쿠토는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아카아시가 책상에 엎드린 순간 어어?!’하는 표정이 된 보쿠토가 곧장 아카아시의 교실 안으로 침입했다. 워낙 익숙한 일상이라 이젠 다른 학생들의 시선도 특별하게 따라붙지 않았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앞자리가 빈 틈을 타 냉큼 그 자리에 앉아 아카아시의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아카아시. 아카아-.”

 

창가자리라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사람이 솔솔 불어왔다. 아카아시는 그가 이렇게 직접 찾아왔음에도 머리를 팔에 묻고 영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딱히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바람결에 구불구불한 까만색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걸 보면 덩달아 흔들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섭섭하거나 서운해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쿠토는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조금 더 말아 쥐며 내렸다. 같은 맥락으로 차마 아카아시의 어깨를 잡아 흔들 수 없었다. 그래서 조금 시끄럽게 떠들어보기로 했다.

 

아카아시. 나 배고파.”

전 피곤합니다.”

 

완전히 잠든 건 아니었는지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보쿠토는 히죽 웃었다. 잠에 취해 살짝 갈라진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았다. . 빨리 합숙 가고 싶은데. 아카아시의 잠에 덜 깬 모습이나 아카아시의 잠에 덜 깬 목소리를 원 없이 볼 수 있는 때가 바로 그때였다. 물론 조금 더 그 시기를 땡겨보자면 시도는 해볼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쿠토의 자신감과 용기와 관련된 일이었다. 물론 아카아시! 나한테 잠 덜 깬 모습 좀 보여줘!’라고 부탁할 종류는 아니었다. 보쿠토가 바라는 건 그보다 좀 더 근원적이고 좀 더 포괄적인 부분에 있었다.

 

다른 애들도 다 자는데? 그럼 나 혼자 가야 하는데?”

혼자 가시면 되잖아요

너무 외롭다고오~!”

 

아카아시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반면 보쿠토의 얼굴은 환해졌다. 그의 한숨소리는 신호 같은 거였다. 그의 뜻이 이루어지고 바람이 받아들여지는 청신호. 아니나 다를까, 아카아시는 엎드려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지만 팔에 받치고 있느라 댄 이마에 빨갛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게 지나치게 귀여워 보쿠토는 가슴이 들쭉날쭉 뛰는 것 같았다.

 

오후에는 같이 안 가드릴 겁니다.”

 

말은 단호하게 해도 오후에도 보쿠토가 찾아오면 못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도 없이 써먹은 말이자 지켜지지 않는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아카아시는 그의 말을 순순히 따라주었다. 함께 교실 뒷문을 나서고 계단을 내려가 매점을 향하는 길목으로 바람이 불었다. 매 순간순간의 충동을 동반하는 바람이었다. 말하고 싶다. 보쿠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매점을 가는 게 기쁜 건지, 아카아시를 보러 가는 게 기쁜 건지 구분할 수 없게 된 순간부터 늘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오늘은 할 수 있을까.’로 시작한 생각은 늘 아카아시가 불편해 하면 어떡하지.’로 끝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카아시가 그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의 충동은 날이 갈수록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마음을 너무 꽉꽉 채워서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라 힘을 빼는 순간 입 밖으로 숨처럼 튀어나갈 것 같은 말이었다.

 

. 먹어.”

 

오늘은 소시지빵이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빵 하나를 내밀었지만 그는 입맛이 없는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하지만 그냥 포기하면 보쿠토 코타로가 아니다. 보쿠토는 빵 봉지를 뜯어 반절을 잘라 아카아시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었다.

 

별로 배 안 고픕니다.”

그래도 먹어! 아직 점심때까지 2교시나 남았잖아. 오늘 아침 연습 빡셌다고?”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서 받아든 빵을 한입 물어 우물거렸다. 보쿠토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아카아시의 등을 탕탕 쳤다. 강한 손힘에 꽤 아픈지 아카아시가 등을 문질렀지만 보쿠토는 기분이 좋았다. . 말하고 싶다.

 

어이, 보쿠토. 어디 갔다와?”

매점.”

또 아카아시 괴롭히러 갔겠지~”

 

아카아시를 반에 데려다주고 3학년 교실 복도에서 만난 코노하와 와시오가 키득거렸다. 보쿠토는 괴롭히러라는 말에 발끈했다.

 

괴롭히다니!? 빵 사다주고 왔는데??”

그러고 남은 거냐?”

, 저기 아카아시다.”

 

와시오가 눈을 빛내고 코노하가 창문 밖을 가리켰다. 보쿠토의 시선이 저절로 복도 창문 밖을 향했다. 하지만 학교 뒤쪽 공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곧 쉬는시간이 끝나기도 하거니와 애초에 방금 교실에 들어간 아카아시가 저 밖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뒤늦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쿠토가 고개를 다시 돌리는 사이, 코노하와 와시오가 보쿠토 손에 든 빵을 가지고 와다다 달려가 버렸다.

 

으악!! 코노하! 와시오!!”

잘 먹을게 주장~”

역시 후쿠로다니의 에이스!”

 

나란히 때에 맞지 않는 칭찬을 던지고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보쿠토는 씩씩댔다. 이따 연습 때 보자. 괴롭혀줄 테다! 그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다시 터덜터덜 교실로 돌아갔다. 그래도 영 보람이 없지만은 않았다. 아카아시와 쉬는 시간에 또 만났고, 그 목소리도 듣고, 이따 점심시간에 또 만날 테니까.

그때 메일이 도착했다. 배구부 고문 선생님에게 온 메일이었다. 따로 연락이 오는 경우가 드문 사람이라 보쿠토는 의아해하며 내용을 읽었는데, 별로 달가운 쪽이 아니었다.

 

[오늘 방과 후에 체육관 점검이 있다고 하니 연습은 하지 못할 것 같다.]

 

으아아. 오로지 방과후 연습만을 위해 수업시간을 버티는 것과 다름없는 보쿠토는 괴롭게 책상 위에 머리를 박았다.

 

 

 

 

오늘 방과 후에 연습이 없다고요.”

그렇다니까! 정말 슬프지 않아?”

. 그렇습니다만

 

아카아시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입을 열었다.

 

부원들에게는 연락 돌리셨습니까?”

 

매점으로 힘차게 걸어가던 보쿠토가 그대로 굳어 멈췄다. 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확인한 아카아시는 그럴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체육관 점검 있는 줄 모르고 모였다가 허탕 치면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으억, 까먹었어!”

지금이라도 보내세요.”

 

점심시간이니 확실히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쿠토는 잘 걷던 길에 멈춰 선 뒤 주머니를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았지만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끄응, 오만상을 찌푸리며 잠시 모든 행동을 멈추고 핸드폰의 행방을 머릿속으로 좇던 보쿠토는 곧 가방에 넣은 채로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핸드폰 안 가져왔어! 올라가서 또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아카아시는 혀를 차며 보쿠토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잠금이 걸려있지 않은 평범한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받아든 보쿠토는 불덩이라도 쥔 듯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아카아시도 그렇지만 이카아시의 물건도 애지중지하게 되는 건 똑같았다. 보쿠토는 메일을 열어 부원들의 주소를 전부 찾아 입력한 뒤 메시지를 적었다.

 

[오늘 체육관 점검으로 부활동 없대! 대신 내일 일찍 나올 ]

 

일찍이라면 얼마나 일찍을 말하는 겁니까?”

 

틱틱 메시지를 입력하던 보쿠토는 바짝 붙어 들리는 아카아시의 목소리에 눈을 왕방울만하게 떴다. 보쿠토가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린 탓에 그가 메일 보내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아카아시와 거리가 무척 가깝게 되었다. 보쿠토는 조금 당황했다. 슬며시 내리깔아진 아카아시의 속눈썹을 보니 괜히 가슴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그가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르는 채 아카아시는 잠시 멈칫하더니 자연스럽게 몸을 똑바로 세웠다. 하지만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가까워졌던 그 순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좋아.”

?”

, , 아니

 

아카아시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보쿠토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변명했다.

 

여섯시? , 여섯시! 여섯시가 좋다고!”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그런가? 그럼 그냥 나오던 대로. 그래야 건강하지. . 좋아. 그렇지.”

 

보쿠토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확실히 인지하지 못한 채 손가락을 꾹꾹 눌렀다. ‘좋아라니. ‘좋아라니! 아카아시가 들었을까? 아니야, 들었어도 여섯시가 좋다는 말로 들었을 거야. 으윽, 큰일날 뻔했어! 가까워진 아카아시가 너무 좋아서 그대로 좋다고 말해버릴 뻔했잖아!

 

아카아시.”

.”

 

어쩐지 보쿠토를 잘 쳐다보지 않는 것 같은 아카아시에게 그는 한순간 고민했다. 말할까. 말까. 아카아시가 거절해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쭉 좋아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카아시가 그를 불편하게 여기는 건 싫었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졸업식 때까지만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는데 역시 마음을 숨기는 건 너무 어렵다.

조금 묘한 침묵이 잔뜩 흐르고 나서야 보쿠토가 말했다.

 

아카아시 핸드폰은 내가 갖고 있을래!!”

그걸 왜 보쿠토상이 가지고 있습니까?”

부원들한테 답장 오면 아카아시가 귀찮잖아! 주장인 내가 보내줘야지!!”

귀찮은 일 하라고 있는 게 부주장인 줄 알았는데요.”

귀찮은 일이라니! 후쿠로다니 배구부에 귀찮은 일이 어딨어?”

보쿠토상만 아니면 그렇겠네요.”

아카아시 냉정해!”

매점이나 가죠.”

 

보쿠토는 아카아시와 매점에서 피자빵을 사면서도, 점심시간이 끝나서도 아카아시의 핸드폰을 계속 가지고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보쿠토가 호언장담했던 것처럼 부활동이 없는 것에 대해 여러 차례 답신이 왔으므로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아카아시는 조금 신경이 쓰이는 듯했지만 주장으로서 할일을 한다는데 말릴 수도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약 5분 전. 보쿠토는 교실로 돌아와 앉아 아카아시의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2012522일이라는 날짜와 시간이 적혀진 화면이 떠 있었다. 보쿠토는 괜히 주변 눈치를 보며 몰래 핸드폰 안을 살폈다. 메일함에 들어가 보니 그가 부활동 문제로 부원들과 몇 번 주고받은 메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텅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간혹 여자이름이 보여 신경을 곤두세우고 내용을 확인하면 숙제에 관한 내용이라 한시름 놓기도 했다. 보쿠토와 주고받은 메일도 잘 보관되어 있었다. ‘아카아시 뭐해?’ ‘아카아시 나 심심해.’ ‘아카아시 내일 숙제 있어?’등등 그가 생각해도 별 영양가 없는 대화였지만, 삭제하지 않고 남겨주었다는 사실에 조금 감동을 받았다.

메일 확인을 마친 보쿠토는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주소록으로 들어갔다. 아카아시에게는 그냥 같는 배구부 선배일 뿐인 사람이 핸드폰 이곳저곳을 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화를 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하고 싶은 걸 꼭 해야만 하는 성미인 것을 어쩌랴. 보쿠토는 맨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3학년 보쿠토 코타로]

완전히 딱딱하잖아. 다른 부원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보쿠토는 자기만 정 없어 보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퍽 우울해졌다. 그래서 무슨 용기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이름을 수정하기로 했다.

[존경하는 보쿠토상]

마음에 들긴 했지만 2% 부족해 보였다.

[사랑하는 보]

쿠토상, 이라고 전부 쓰기도 전에 전의를 그는 상실했다. 아주아주 마음에 드는 말이긴 했지만 후환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적당히 마음속으로 타협했다.

[좋아하는 선배]

보기만 해도 헤벌쭉 웃게 되는 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희망을 섞어 보았).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팀의 주장이자 에이스로 당연히 좋아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가 적은 좋아한다는 말은 그의 바람이 섞여 있었다. 아카아시도 그와 같은 마음이 되길 바라는 그런 자그마한 소망이.

, 정 그러면 집 가기 직전에 다시 바꿔놓지 뭐. 보쿠토는 속편한 생각을 하며 핸드폰 화면을 껐다. 수업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자마자 책상에 머리를 박은 보쿠토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수업이 끝났다. 보쿠토는 쉬는시간까지 내리 자느라 오후에 매점을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통해했다. 근처에 앉아있던 친구들 중 한 명이 보쿠토 너 자는 사이에 네가 맨날 찾아가는 배구부 2학년짜리가 교실 한 번 보고 가던데~’라고 말해 보쿠토는 분통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왜 안 깨웠냐고 길길이 날뛰는 보쿠토에게 걔가 깨우지 말라 그랬다, 어차피 넌 세상모르게 자고 있지 않았느냐는 말로 일축당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그를 간만에 교실까지 찾아왔는데 태평하게 자고 있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와다다 교실을 빠져나갔다.

아카아시가 어딨지?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교실 복도에서 창문으로 머리를 기웃기웃 움직였다. 아카아시의 자리에 가방이 걸려 있기는 한데 정작 사람이 없었다. 먼저 간 건 아닌데? 의아해하는 사이 그의 등 뒤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하십니까?”

아카아시! 어디 갔었어??”

화장실요.”

빨리 나와! 집 가자!!”

, .”

 

아카아시는 교실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미리 싸놓았던 가방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연습을 하건 하지 않건 늘 익숙하게 이용하는 하굣길을 따라 걸으며 보쿠토가 물었다.

 

아카아시, 오후에 나 찾아왔었다며?”

선생님 심부름 갔다가 잠깐 들렀습니다.”

왜 안 깨웠어??”

곤히 자고 계시길래요. 침도 흘리시던데.”

 

쓰읍보쿠토는 괜히 입 주위를 매만졌다.

 

, 그래도 다음번에는 깨워도 돼!”

그때 봐서요.”

무조건 깨워!!”

?”

 

보쿠토는 입을 크게 벌렸다가 합 다물었다. ‘아카아시는 날 깨워도 화 하나도 안 나고 오히려 깨워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고백 같았다. 진짜 답답하네. 이런저런거 생각하고 계산해서 말하는 건 영 적성에 안 맞았다. 그냥 확 말해버려? 보쿠토는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눈을 똑바로 치켜뜬 그는 말을 내뱉기 전 잠시 어딘가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카아시, 저기 봐.”

뭡니까?”

저기도로에고양이가 우리 쳐다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도로 한복판에 고양이라니요

 

저 멀리 차가 지나다니는 도로 위에는 고양이가 있었다. 워낙 몸집이 작아 작은 점처럼 보일 장도였지만 단추구멍같이 보이는 초록색 눈동자가 또렷해 분명 살아있는 아기 고양이었다. 보쿠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차는 다니지 않았지만 아예 도로 위에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아슬아슬했다.

 

것 봐, 진짜지? 아직 어려 보이는데, 위험해보여.”

잠깐만요, 보쿠토상.”

빨리 데리고 나오자.”

보쿠토상!”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만류하려 했지만 보쿠토는 성큼성큼 걸었다. 그런데도 거리가 빨리 좁혀지지 않아 뛰려고 한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

 

검은 모자를 쓴 어떤 남자가 보쿠토보다도 더 빠르게 몸을 날렸다. 시야에 들이닥치는 광경에 보쿠토가 저도 모르게 뻣뻣하게 굳어 인도 위에 멈춰 섰다. 그를 따라 달린 아카아시도 보쿠토 옆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

빠아앙-!

 

모자를 쓴 어떤 남자가 도로 위의 고양이를 구하고 안아드는 순간, 저 멀리서 달려드는 화물차가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안 돼라고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이 끝내 상대를 찾아가지 못했다. 차와 부딪쳐 튕겨나간 몸이 바닥에 쓰러지자마자 경악하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그의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보쿠토가 쓰러진 사람을 향해 한걸음 다가가려는 것을 아카아시가 옷깃을 붙잡아 막았다. 아카아시는 역시 충격에 빠져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군가가 신고한 구급차가 달려와 멈추고 남자를 침대 위에 눕혀 흰 천으로 덮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여러 단어를 중얼거렸다. ‘고양이’ ‘화물차’ ‘마지막으로 열한 번째라고’ ‘운전기사’ ‘아직 어린’ ‘모자. 경찰이 오고 자리를 수습하고 사람들이 모두 흩어질 때까지도 보쿠토와 아카아시는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보쿠토상.”

…….”

왜 우세요?”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말을 들어서야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깨달았다. 그러게, 나 왜 울지. 보쿠토는 고개를 돌려 아카아시를 보았다.

 

아카아시는 왜 울어?”

저도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석처럼 사고현장을 향했다. 아카아시는 연신 눈물을 닦아냈지만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넘쳐 곤혹스러운 듯했다. 겨우겨우 발걸음을 떼고 익숙한 길을 돌아 아카아시의 집 앞에 도착했는데도 두 사람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보쿠토상도 좀 그치세요.”

아카아시부터 그쳐봐.”

 

사고가 너무 충격이었나. 병원에 가서 상담을 해봐야 하나. 보쿠토는 눈에서 흐르는 눈물에 시야가 뿌옇게 변했어도 그렇게만 생각했지만 아카아시가 우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아카아시의 눈 밑을 엄지로 쓸었다.

 

그만 울라니까.”

 

아카아시의 눈이 조금 떨렸다가 가라앉았다.

 

그게 안 되니까 이러죠. 보쿠토상이나 그치세요.”

내가 우는 것보다 아카아시가 우는 게 더 싫은걸.”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보쿠토는 재빨리 시선을 비스듬하게 틀었다. 눈물이 고여 있어 아카아시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핸드폰이나 주세요.”

, 맞다.”

 

보쿠토는 고개를 내렸다.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가방에서 아카아시의 핸드폰을 꺼내 내민 보쿠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집으로 들어가는 아카아시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만 울어.”

보쿠토상도요.”

이따 확인전화 할 거야.”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카아시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해서야 보쿠토는 다시 길을 걸었다. 여전히 꾸역꾸억 새어나오는 눈물이 낯설었지만 억지로 그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처럼 소매를 들어 눈을 부벼 닦으며 보쿠토는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곧장 아카아시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핸드폰을 쥐고 있던 게 분명한 아카아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상하다. 방금 들어갔는데. 그새 씻나. 보쿠토가 한 번 더 눈물을 닦아내며 귀에서 수화부분을 뗄 때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아카아시, 전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이름을수정해놓으셨던데요.’

 

. 보쿠토는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 어느새 멀어진 아카아시의 집을 보았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 겁 없이 저장한 이름이 떠올라 보쿠토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괜히 새삼스럽게 느껴지고 찔렸다.

 

그게 말이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언제부터 아신 겁니까?’

? ?”

대답해주세요.’

무슨

제가 좋아하는 거 어떻게 언제부터 아셨는지 말입니다.’

……!”

 

보쿠토의 눈이 커졌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심장이 이렇게까지 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 얼마 안 됐어.”

 

방금 알았어.

 

어떻게 아셨는데요.’

네가말해줘서.”

제가 말했단 말입니까? 언제요?’

 

바로 지금.

한참 침묵이 흘렀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는 믿기 어려운 상황이 연이어 일어나는 가운데에서도 그 소리를 들었다. 아카아시의 한숨소리는 신호였다. 그의 뜻이 이루어지고 바람이 받아들여지는 청신호. 이번에도 어긋나지 않는 말이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전 분명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좋아합니다.]

보쿠토상 좋아합니다.’

 

그 목소리가 그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차는 순간을 기점으로 눈물이 더욱 펑펑 쏟아졌다.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동반하는데 기쁘면서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피어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평생 못 들을 줄 알았는데. 평생 말해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확신 없는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보쿠토는 그가 해줄 대답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나도

나도 아카아시 좋아해.”

 

기쁨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아카아시가 집에서 다시 나와 보쿠토 앞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순간에도 둘은 계속 울고 있었다.

우리 언제까지 울어야 되는 걸까요.

글쎄. 오늘이 가면 그치지 않을까?

지금 분명 기쁜데 왜 자꾸 슬프죠?

아카아시가 모르는데 내가 알 리가 없지.

보쿠토상은 안 슬픕니까?

슬퍼! 근데 기뻐! 아카아시가 날 좋아하니까!

그럼 그만 우세요.

아카아시도 그만 울어. 확 안아버린다.

보쿠토가 한참이 지나도 눈물이 그치지 않는 아카아시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붉은 노을이 진 지는 오래였다. 두 사람 사이로 같은 속도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디 하나 어긋나지 않은 온전한 한 갈래의 시간이.

꿈은 아니었으면 하는데요. 아카아시가 중얼거리는 말에 보쿠토는 꿈이 아니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에도,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는 시간 사이에서도, 보쿠토는 아카아시라는 한줄기 끈을 놓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설령 아카아시가 그러지 말아달라고 해도 멈출 수 없지 않을까. 아카아시가 더는 그에게 좋아한다 말해주지 않는다 해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개의치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아카아시가 아주아주 먼 곳으로 떠나버려도 언젠가 돌아오길 바라며 기다리지 않을까. 그는 그것밖에 할 줄 모르니까.

[좋아합니다.]

그것만으로도 보쿠토는 그럴 이유가 있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더욱 꽉 안았다. 아카아시의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딱 오늘까지만 흘릴 눈물이 지나간 시간과 섞여 아주 먼 곳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떠내려갔다.

 

 

 

 

.

 

 

 

 

 

사실 마지막 고백 장면은 넣을까 말까 하다가... 몇 번째인지 모르게 아주 오래토록 이어진 악순환이 드디어 깨진 두 사람이 아무 걱정 없는 모습으로 마무리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덧붙인...ㅋㅋㅋㅋ

여덟번 죽고 아홉번 깨어날 때마다 달라져있는 보쿠토와 여전히 사랑하는 아카아시가 보고 싶었습니다. 보쿠토가 달라진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 당위성을 고려하면서도 최대한 다양한 모습을 넣고 싶었다는 뜻에서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취향 타는 소재, 쓸데없이 보쿠아카 괴롭히는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읽어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