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히나ts] 아마도 썸 上
카게히나(히나타ts)
아마도 썸 上
안 봐도 상관없는 전편 : http://byeoljari.tistory.com/14
“어이, 괴짜들! 도착했어!”
모두가 내리고 비어 있는 버스 안, 유일하게 남아 있는 까만 머리카락의 남학생과 주황색 머리카락의 여학생은 서로의 어깨와 머리를 기대 잠들어 있었다. 타나카는 그 모습을 보고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잠들어서야 얌전해지는 두 사람이 지금만은 사이좋아 보인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는지, 그런 주제에 사귀는 건 절대 아니라고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눈에 선해 슬퍼해야 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필이면 주장 다이치가 그를 지목해 이 배 아픈 광경을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불우하고 기구한 상황을 탓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니 저러니 해도 두 사람은 그가 책임지고 챙겨야 할 1학년 후배. 타나카는 붙여놓으면 시끄럽기 그지없는 두 사람이 평소와는 달리 평안하게 잠들어 있는 이 고요를 깨야 하는 작금의 상황이 안타까웠으나, 더 늦어지면 다이치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히나타와 카게야마의 이름을 힘차게 불렀다.
기합이 세게 들어간 목소리가 이름을 부르자, 한참 단잠에 젖어 있던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히나타는 자신이 카게야마의 어깨에 기대서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서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못 닿을 것이라도 닿은 것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멀찍이 떨어졌다. 그래봤자 버스 안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있는 것은 똑같아 히나타는 창문에, 카게야마는 팔걸이에 매달린 꼴이 되었지만 말이다. 두 사람을 잠에서 깨운 장본인인 타나카는 쯧쯧 혀를 차며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서로 기대서 잘만 자던 것들이, 왜 이제 와서 내외야? 하여튼 너희 둘 진짜 이상해.”
“이, 이상하다니요!”
“아주아주 이상해!”
사귀는 것도 아닌데 어떤 때는 커플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신혼 같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천하에 둘도 없을 원수 같기도 했다. 하루에 몇 번씩 그 온도가 바뀌는 두 사람을 보며 선배들이 참 이상한 사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던 게 어느새 ‘괴짜’라는 단어로 통칭하게 되었다. 사실 괴짜라는 단어 뒤에 ‘커플’이라는 단어도 오곤 했지만, 들으면 노발대발 할 것을 염려해 선배들끼리 있는 자리에서만 사용한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아직 몰랐다. 타나카는 도착했으니 어서 내리라는 말을 남기고 버스에서 내렸고,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서로를 노려보다가 다투기 시작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멍청아!”
“내, 내가 기대고 싶어서 기댔어?! 그러게 왜 옆에 앉고 그래! 내가 앉지 말랬잖아!”
“자리가 없는데 어떡하라는 거냐! 떡하니 그 자리 차지하고 앉은 게 누군데!”
“멀미 때문에 여기 앉은 거잖아! 창가 자리는 여기 밖에 없었으니까!”
“그럼 창문이나 보고 있지 잠은 왜 자!?”
“배가 고픈데 안 먹어? 넌 그게 된다고 생각해?”
“이놈들!!! 어서 안 나와!!!”
단 둘이 남겨진 버스 안에서 그새를 못 참고 왁왁거리고 싸우는 두 사람을 참다못한 타나카가 다시 고개를 들이밀며 소리쳤다.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씩씩대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두 사람이 작게 투닥거리는 모습을 버스 창문 너머 생중계로 목격한 나머지 부원들은 허허 웃기만 했다. 저건 늘 있던 일 중의 하나라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조금만 더 늦게 버스에서 시간을 지체했으면 직접 뛰어 들어갈 기세였던 다이치를 진정시키며 스가와라는 두 사람을 달랬다. 다이치는 금방이라도 설교를 늘어놓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그들을 마중 나온 네코마 부원들이 보여 나중으로 미루기로 한 듯했다.
“어? 켄마!”
카게야마에게 머리가 눌려 바둥거리고 있던 히나타는 게임에 심취해 있으면서도 그들을 데리러 나온 켄마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히나타의 목소리를 들은 켄마도 게임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히나타는 얼른 카게야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켄마 앞으로 뛰어갔다. 이번으로 고작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꽤 친해진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별로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철탑이 도쿄타워냐는 질문에 쿠로오가 잠시 풉 비웃었다. 그 모습에서 익숙한 이의 향기를 느낀 야마구치는 하마터면 ‘미안 츳키!’라고 반사적으로 대답할 뻔했다. 겨우겨우 그 말을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는 것을 성공한 야마구치의 안도를 모르는 채 츠키시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학교 건물 쪽으로 나란히 걸어가며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네코마의 세터와 히나타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쫓아가는 카게야마의 불만스러운 표정도. 당장이라도 그의 옆에 붙어 그의 심란할 마음을 북북 긁고 싶었으나 쿠로오의 질문에 조금 참아보기로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며?”
“뭐가?”
“켄마 말로는 1학년들 기말시험 낙제 안 받으려고 장난 아니었다는데.”
“1학년‘들’이 아닙니다. 정정해주세요.”
“오오, 안경군은 범생이 쪽?”
츠키시마는 쿠로오의 말에 대꾸하지 않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하. 스가와라와 다이치는 그런 츠키시마를 보며 웃은 뒤 대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번 주말합숙을 위해 카게야마와 히나타와 타나카와 니시노야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말이다.
주말에 있을 도쿄합숙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동의서를 받아오건 뭐건 일단 ‘낙제’를 피해야 하는 게 우선순위였다. 보충수업이 주말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게야마와 히나타와 타나카와 니시노야의 평소 성적은 몇 개의 과목만 겨우 낙제를 면할 정도로 간당간당한 편이라 아예 도쿄에 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여, 네 사람은 각각 엔노시타와 츠키시마에게 특별과외를 받았고, 특히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5반의 야치 히토카에게도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갑자기 공부한다고 해서 성적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기적은 없었다. 연이어지는 쪽지시험에서 느리게느리게 한두 문제씩을 더 맞출 뿐인 상승세에, 불안감을 느낀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한 가지 비책을 생각해냈다. 두 사람끼리 내기를 건 것이다. 누구 한 명이라도 낙제를 받아 연습에 참가하지 못한다면 그 한 명은 하루 동안 다른 한 명이 요구하는 대로 뭐든지 굴복해야 하는 몹시 위험한 도박이었다. 자존심 싸움에서 절대 지고 싶어 하지 않는 두 사람은 혹시 모를 낙제에 대한 공포로 내기를 후회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어떻게든 상대의 콧대를 눌러주리라는 다짐이 우선한 덕분에 한 과목도 낙제를 받지 않는 기적을 보였다.
물론 턱걸이 점수이긴 했지만 쪽지시험에서 두 자리 수를 맞아본 적 없는 이들로서는 무척이나 대단한 결과였다. 서로를 하루 동안 맘대로 부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에 임했던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이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왜 낙제 안 했냐’, ‘내기의 의미가 없잖냐’를 두고 한참동안 다퉜지만 어쨌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연습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3학년들에겐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쿠로오는 푸하하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같이 걷고 있던 야쿠도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시미즈와 야치를 쳐다보느라 이야기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던 야마모토가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볼 정도였다.
카라스노 배구팀이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있던 도쿄의 고교팀들이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먼저 웜업이라도 하고 있던 것인지 모두가 일순 행동을 멈추고 이쪽을 응시하는 것은 엄청난 박력이었던 터라, 히나타는 슬그머니 옆에 서 있던 카게야마의 뒤로 몸을 숨겼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앞을 보며 그들 중 세터를 찾아내리라는 일념으로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다가도 살짝 걸음을 옮겨 히나타를 조금 더 가렸다. 우와. 야마구치는 체육관의 분위기에 한순간 압도당하면서도 카게야마와 히나타의 본능적인 움직임에 혀를 내둘렀다.
그럼 잘 해보자구. 쿠로오가 씩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인 뒤 부원들에게 돌아갔다. 어? 그런데 히나타는 네코마 쪽 부원들 중 못 보던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부정하게 서 있어서 그렇지 딱 봐도 키가 장난 아니었다. 거기에 머리카락은 은빛이었고, 눈동자 색은 초록색이었다. 외국인이 왜 여기에? 카게야마 뒤에서 삐죽 얼굴을 내밀고 그를 살피던 히나타는 시선이 딱 마주쳐버린 뒤 얼른 다시 고개를 카게야마 뒤로 숨겼다.
“네코마는 못 보던 얼굴이 있네?”
스가와라의 질문에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있던 야쿠가 눈을 가늘게 떴다. 휙 고개를 돌려 히나타가 쳐다보고 있던 남학생을 노려보자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그는 뭔가 찔린 듯 재빨리 리시브 받는 동작을 취했다. 히나타의 눈으로 보기에도 꽤나 엉성한 동작이라 그런진 몰라도 야쿠의 얼굴이 더욱더 왕창 굳어져 역효과를 낳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하이바 리에프야. 러시아 혼혈이래.”
“우와. 혼혈?”
“응. 신입. 배구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엄청 서툴러.”
“그래도 신체조건이 아주 좋은데?”
“뭐… 서브 리시브가 하도 엉망이라 고생 좀 하겠지만… 야! 리에프! 손목만 올리지 말라고 했지!!”
야쿠가 도저히 참지 못할 리에프의 자세에 분노하며 와다다 달려가고, 그 고함을 정면으로 받아낸 리에프의 기겁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카라스노 배구부도 둥그렇게 모여 섰다. 오늘내일은 본격 합숙 전에 얼굴 익힐 겸 간단하게 모인 것이니 모든 팀과 한 번씩 연습게임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라는 우카이 코치의 말이 이어졌다.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히나타와 야치는 부원들이 입을 조끼를 준비했다. 져지를 벗어 가방을 내려둔 곳에 가져다둔 그들에게 각자 등번호에 맞는 조끼를 하나씩 들려준 뒤 분주하게 스포츠 드링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충분히 가져온 분말을 적당량 덜어 통에 담던 히나타는 헉 소리를 냈다. 야치가 물었다.
“왜 그래?”
“분말 너무 많이 넣었어……”
아직도 드링크를 잘 만들지 못하는 히나타를 알기에 시미즈가 핏 웃었고, 야치는 그녀의 어깨를 도닥거리며 괜찮다고 위로해주었다.
“물 넣을 때 기억해뒀다가 살짝 버리고 다시 물 채우면 농도가 연해질 거야.”
“앗, 그런가??”
역시 야치는 똑똑해! 히나타는 눈을 반짝였다. 다이치가 연습상대를 정하기 위해 주장들 사이로 뛰어간 사이 가볍게 웜업을 하고 있던 카게야마가 귀신같이 그 말을 듣고 히나타를 쳐다보았다. 히나타는 야치의 말을 듣고 마음이 가벼워져 있었지만 들리는 서늘한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뜨악 입을 벌렸다.
“너 또 실수했지? 멍청이 히나타!”
“내, 내, 내가 뭘!?”
히나타는 분명히 무언가 실수한 것이 역력한 얼굴로 잡아뗐다. 히나타, 얼굴에 다 써있는데……. 스가와라는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 히나타가 곤란해진 모습을 본 야치가 얼른 아니라고 힘을 얹어주었지만 본능과 직감으로 살아가는 카게야마는 별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야치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카게야마가 곧 토스를 올리느라 바빠 이쪽으로 신경 쓰지 못하게 된 덕분에 빠르게 물을 채우러 밖으로 대피할 수 있었던 히나타는, 한순간 말을 더듬어 상대가 공격할 수 있게 틈을 준 스스로가 한심해 꾸물꾸물 작은 몸부림을 쳤다. 그래도 야치가 도와준 덕분에 창피는 모면했지만 어쩐지 억울했다. 아니, 내가 뭐 드링크 분말 좀 많이 넣긴 했지만, 그게 뭐, 이렇게 몸 사려야 할 수준인가? 그런데 나는 대체 왜 쫄아가지고는! 히나타는 시미즈 대신 같이 나와 준 야치에게 말했다.
“아무튼, 야치가 같이 와줘서 기뻐!”
“앗, 아, 아니야…! 나야말로 괜히 폐만 끼치는 게 아닐지…!!”
야치는 배구부 매니저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히나타가 체육시간에 자유 시간을 가지고 뛰어 놀다가 우연히 친해지게 된 야치는 손재주가 아주 좋았다. 어머니가 디자인회사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했던 것 같다. 배구부 포스터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히나타와 시미즈에게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해결을 봐주었을 뿐만 아니라, 히나타가 카게야마라는 짐덩어리를 데리고 공부를 가르쳐달라는 어려운 부탁을 했음에도 흔쾌히 수락해줄 정도로 큰 도움을 받았는데, 이렇게 합숙까지 도움 받게 된 것이다.
원정 합숙이 처음인데다가 (골든위크 합숙 때의 일을 계기로) 히나타는 자신이 도움이 잘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므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상황이었다. 야치에게 이런저런 고민 상담을 털어놓던 히나타는 자신보다 훨씬 손도 야무지고 똑똑한 야치에게 같이 매니저 일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부탁해버렸다. 거절해도 어쩔 수 없었지만, 야치는 의외로 고민을 해주었고, 일주일 동안의 원정합숙 문제는 제쳐두고 일단 1박 2일의 주말합숙을 함께 지내보기로 했다. 히나타는 마음 같아서는 배구부에 들어오라고 야치의 치맛자락이라도 붙잡고픈 심정이었다.
“어? 카라스노?”
그들은 도중에 타학교의 여자 매니저로 보이는 이들을 만났다. 파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후쿠로다니의 것이었다. 후쿠로다니도 여자매니저가 두 명이구나……! 히나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꾸벅 인사했다. 야치도 덩달아 인사했다. 후쿠로다니의 매니저들도 드링크를 타가는 중이었단 듯 한아름 안고 있었다. 단발머리를 한 여학생이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나는 시로후쿠 유키에야.”
“나는 스즈메다 카오리. 우리 둘 다 3학년인데, 너희는?”
연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스즈메다에게 히나타가 말했다.
“저는 히나타 쇼요입니다!”
“저는 야, 야치, 히토카라고 해요!”
“저희 둘 다 1학년입니다!”
“아~ 어쩐지 귀엽다 했어. 다른 한 명 더 있던데 그 친구도?”
“아, 시미즈상은 3학년이에요!”
“우리랑 동갑이네?”
“카라스노는 매니저가 세 명이나 되고 부럽다. 우리도 얼른 1학년 구해야 하는데.”
매니저가 세 명이나 된다는 소리를 들으니 초초초강호교 같은 느낌이었다. 야치는 그녀들의 말을 정정하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히나타의 말이 빨랐다.
“후쿠로다니는 강호고교죠??”
“으음… 그렇지? 3년 연속으로 전국대회 나갔으니까.”
“우와. 대단해요!”
“그런가? 우리팀 주장이 들으면 좋아하겠어.”
“누군데요?”
“있어, 보쿠토 코타로라고, 주장답긴커녕 막내 같기만 한……”
“맞아. 애먼 아카아시가 고생이지.”
“이번 합숙 일도 아카아시가 도맡아하고 있다지?”
후쿠로다니 매니저들이 재잘재잘 그들의 주장인 보쿠토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쩐지 자동적으로 아카아시라는 사람에 대한 내용으로 흐름이 귀결되긴 했지만 한마디로 아카아시라는 그 사람이 엄청, 많이, 대단하다는 소리였다. 히나타는 딱 봐도 솔직해 보이는 매니저들의 칭찬을 매일같이 듣고 살 아카아시에 대해 조금은 궁금해졌다.
그녀들은 더 이야기하고 싶어했지만 곧 본격적인 연습경기가 시작될 거라며 아쉽게 자리를 떴다. 본격적인 합숙은 일주일이나 되니 시간은 많을 거라며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두 사람에게 히나타와 야치는 얼떨떨하게 손을 흔들어 보내고, 얼른 물을 채우기 위해 걸음을 바쁘게 옮겼다. 그들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시미즈가 할일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정신없이 드링크병에 물을 채우고 다시 한 아름 안고 되돌아오니 이미 연습경기가 시작되어 있었다. 첫 연습상대는 신젠고교였다. 히나타는 품에서 드링크를 와르르 쏟아냈다. 야치는 남은 드링크병을 채우기 위해 다시 잠시 자리를 비웠고, 그 사이 히나타는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정리했다. 점수판과 의자는 시미즈가 준비해두었고 뿐만 아니라 이미 기록도 진행 중이었다. 옆 벤치에는 하얀 티셔츠를 입고 한쪽으로 머리를 묶은 갈색 머리카락의 여학생이 똑같이 기록 중인 것 같았다. 저기도 여자 매니저가 있어! 히나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쿄합숙에 참여하는 팀답게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특히 동시다발적으로 스파이커들이 돌진해오는 싱크로 공격에 능해, 누구에게 토스가 올라갈지 쉬이 방심할 수 없었다. 잊을만하면 허를 찔러오는 공격에다가 그냥 평범하게 해오는 공격도 기본이 워낙 탄탄해 카라스노는 조금 밀리는 양상을 보였다. 결국 첫 경기를 2점차로 뒤지고 카라스노의 배구부원들은 패널티를 소화해야 했다. 패널티는 플라잉을 무한 반복하며 코트 한 바퀴를 도는 거였다. 잠시 숨도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플라잉을 하는 카라스노를 걱정스럽게 보는 매니저들에게 한 여학생이 다가왔다.
“카라스노는 그래도 빨리 적응하네요.”
시미즈와 히나타와 야치의 시선이 향했다. 신젠 고교의 매니저로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시미즈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다들 기다려왔으니까요.”
인터하이 예선에서 아오바죠사이에게 패한 이후로, 줄곧. 히나타는 눈을 들어 플라잉 중인 카게야마를 보았다. 카게야마가 네트 앞에 무릎 꿇고 망연자실하게 오이카와를 보던 모습을 아직 잊지 못했다. 그날 수건을 가져다주는 히나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카게야마의 모습도. 히나타는 드물게 화를 냈었다. 다음 경기가 없는 것도 아닌데. 뛰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왜 사과 하냐고. 그 이후 카게야마는 다신 사과할 일을 만들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다. 그의 전국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기회는 아직 남아 있었다.
“저는 오오타키 마코예요. 신젠 매니저, 2학년입니다.”
오오타키가 소개를 해왔다. 시미즈와 히나타와 야치도 차례대로 인사를 했다. 이따 밥시간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며 그녀가 사라졌다. 그때를 맞춰 카라스노 부원들의 패널티도 끝났다. 다음 상대인 네코마가 아직 후쿠로다니와 경기 중이었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남았다. 그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방금 전 경기에 대한 소회를 나누었다. 쉽지 않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실제로 전국대회에서 만났다면 어느 하나 까다롭지 않을 상대들이니 당연한 말인지도 몰랐다. 히나타는 그들에게 수건과 드링크를 하나씩 챙겨주었다.
“크헉. 켈록, 켈록…!”
그런데 드링크를 한 번 마신 카게야마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더니 곧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너무 집중하고 긴장해서 저러나, 하고 잠시 생각했던 히나타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카게야마의 눈이 사납게 그녀를 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손에 들린 드링크를 보았다. 설마 하며 기억을 재빨리 더듬었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는 것 같았다. 아까 실수로 분말을 적당량보다 조금 많이 넣어 어떻게든 만회하려 했던 것을, 후쿠로다니 매니저들을 중간에 만나 그만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으악! 그게 왜 하필이면 카게야마에게!!! 히나타는 경악했다.
“미안! 조금 농도를 낮춰본다는 게! 급해서 까먹었어!”
“까먹는 게 말이 되냐, 멍청아!”
카게야마가 성난 목소리로 히나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지럼증이 도질 것 같아 히나타는 재빨리 소리쳤다.
“다, 다른 거 먹으면 되잖아!”
“네가 탄 다른 드링크가 뭔데! 빨리 내놔봐!”
“이- 이걸 놔야- 내가- 주지-!!”
그제야 히나타를 놔준 카게야마는 그녀가 비틀거리는 손으로 집어든 드링크 하나를 받아들었다. 마치 미슐랭 스타를 목전에 둔 셰프마냥 비장한 얼굴로 그의 감상평을 기다렸지만……
“멍청이! 이것보다 좀 적게 타야지! 넌 항상 너무 많이 넣어!”
“도대체 ‘적게’가 어느 정돈데!? 나도 나름 적게 타는 거야!”
“내가 맨날 보여주잖아!”
카게야마가 히나타의 어깨를 잡아끌어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분말통을 집어 들어 직접 눈으로 보여주었다. 늘 보여주던 만큼이었지만 히나타는 억울했다. 나도 이정도 탄다고! 맛이 다르잖아! 네 입맛이 너무 까다롭다곤 생각 안 해봤어? 전혀! 다른 사람들은 잘만 마시거든? 이젠 말하기도 지쳐서 그런 거겠지!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릴 수준이 되자, 다이치가 중간에 나타나 그들을 제지했지만 이미 시선은 거하게 받아버리고 난 후였다. 씩씩대며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을 보며 네코마는 익숙한 듯 킥킥 웃었으며 (야마모토는 카게야마를 부러워했다) 신젠이나 우부가와, 후쿠로다니도 재밌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야치가 히나타의 입을 막고, 스가와라가 카게야마의 입을 막고, 두 사람을 강제 격리 시켰지만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라도 더 쏘아주고 싶어 바둥거렸다.
“역시 언제나 보기 좋아~”
“으잉? 저 둘 사이 나쁜 것 같은데?”
잠시 시합을 멈추고 두 사람을 구경하던 쿠로오와 보쿠토가 대화했다. 의아해하는 보쿠토에게 쿠로오가 말했다.
“다른 때 보면 사이 엄청 좋다니까? 사랑싸움이야, 사랑싸움. 그치, 켄마?”
“……글쎄.”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딱 한 경기가 끝나자마자 문제아로 찍혀버린 상황에 대해 다이치에게 크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의 설교에서 벗어난 것은 네코마의 시합이 끝난 이후에야 가능했다. 다이치가 쿠로오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펭하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시 드링크를 타기 위해 쭈그려 앉은 히나타는 투덜거렸다.
“차이 나면 또 얼마나 차이난다고…… 쪼잔해, 쪼잔야마. 멍청이. 바보. 똥싸개. 맨날 화만 내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히나타에게 다가온 야치가 그녀의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아 다 마신 드링크병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 히나타,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
“카게야마는 진짜 못됐어. 맨날 맛없다고 잔소리만 하고.”
“음… 히나타, 내 생각에는… 카게야마가 정말 네 드링크를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닐 거야.”
“맞을걸? 많이 타면 많이 탄다, 적게 타면 적게 탄다, 보여준 대로 딱 맞춰서 타도 막 꼬투리만 잡는다니까?”
야치가 조그맣게 웃었다. 고개를 돌려 카게야마를 힐끗 쳐다본 그녀는 카게야마가 이쪽을 보고 있다가 후다닥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을 발견하고 더 웃었다.
“그걸 반대로 생각하면… 카게야마는 맨날 히나타가 탄 드링크만 마신다는 거 아닐까?”
“……역시 날 괴롭히려고 작정한 거지!?”
“글쎄… 카게야마가 히나타의 드링크를 정말 싫어했다면 아마 아예 마시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아예 안 마신다고…?”
“응. 정말 싫어한다면, 굳이 마셔서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잖아.”
잘 이해가 되지 않아 히나타는 눈을 찌푸렸다.
“아무튼, 일단 다시 타오자.”
“응. 고마워.”
“아니야.”
야치가 히나타를 일으켜주었다. 히나타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코트 안을 보았다. 네코마 선수들과 마주보고 있는 카게야마는 그새 쉬었다고 다시 컨디션이 생생해 보였다. 켄마에게 인사를 하려던 히나타는 키 때문에 저절로 시선이 간 리에프와 눈을 마주쳤다. 리에프는 초록색 눈동자를 조금 휘며 웃었다. 엄연히 배구부 매니저여도 키 큰 상대에 대한 면역이 떨어지는 히나타가 은근슬쩍 야치 뒤로 숨었다. 하지만 그녀보다도 작은 야치가 가려줄 수 있을 리 만무해, 계속 시선이 마주쳤다. 리에프의 시선을 읽은 듯 카게야마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시간은 바쁘게 흘러갔다. 날이 꽤나 무더워 드링크는 금방금방 동이 났다. 깨끗하게 씻고 다시 드링크를 타고 남은 것들을 비우고 다시 타는 일이 반복되었고, 그들이 던져 놓는 수건들도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젖게 되면 재빨리 세탁기에 돌리는 일도 있었다. 기록은 시미즈와 히나타와 야치가 한 경기마다 번갈아가며 했다. 야치는 극구 사양했지만 누가 필기의 신 아니랄까봐 히나타가 한 것보다 여러모로 나아, 조금 시무룩해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매니저들은 식사준비도 도와야 했다. 배구부가 학교 전체를 거의 전세 내다시피 한 거라 각 학교 선생들과 매니저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요리를 해야 했다. 인원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그들의 식욕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양을 조절하고 맞추는 데에 애를 먹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후쿠로다니의 매니저들의 활약이 빛났다. 그녀들은 3학년으로서 3년 내내 이런 합숙을 경험해왔기 때문에 양을 맞추는 데에 능수능란했다. 연륜이라고 해야 할까, 그건 후쿠로다니 매니저들 뿐만 아니라 신젠의 매니저와 우부가와 매니저(‘미야노시타 에리’로, 2학년이라고 했다)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2학년에다가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는 덕분이었다. 히나타는 많이 배워가는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히나타는 요리를 잘 하지 못하는 편이라 애를 먹었다. 지난번 골든위크 합숙 때 음식 준비를 할 때도 도움이 된 게 없어서, 너무 편하게 살아온 스스로를 반성하며 엄마에게 이것저것 배우고 요리를 몇 번 연습하긴 했지만 단번에 실력이 늘지는 않아 여전히 서툴렀다. 다른 매니저들은 농땡이만 피우지 않으면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다고, 어차피 배구 바보들은 배가 부르면 장땡이라고 말해주었지만 히나타는 감자 깎는 칼로 당근 껍질을 벗겨내며 조금 우울해했다.
저녁 준비를 완벽하게 마치고, 저녁을 배식한 뒤, 설거지는 각 학교에서 몇 명을 뽑아 맡긴 다음 그제야 매니저들의 일과도 끝이 났다. 점심과 저녁을 준비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부쩍 친해진 여자 매니저들은 늦은 저녁을 먹으며 아까까지 나누던 이야기를 연장했다.
“나는 글쎄… 이번에 네코마에 들어온 1학년 러시아 혼혈?”
“그래? 하긴, 초록색 눈동자도 신기하고, 아까 네코마 리베로한테 하는 거 보니까 잘 따를 것 같더라. 네코마는 매니저가 없어서 확신할 순 없지만…… 어쨌든 유키에는 연하취향인걸로~”
“에엑? 그 정도까진 아니라구.”
남들의 갑절은 더 먹는 신들린 식성을 보이는 후쿠로다니의 매니저가 친구의 말에 일단은 부정했다. 신젠의 매니저가 시미즈에게 물었다.
“시미즈상은 어느 쪽? 인기 많을 것 같은데 그냥 골라도 되는 수준 아니에요?”
“맞아요, 시미즈상 인기 진짜 많아요!”
히나타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웃음을 터뜨린 신젠 매니저가 말했다.
“너도 많을 것 같은데? 네 스타일은…… 아아. 하긴 너는 남자친구 있지?”
“……네?”
히나타가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진짜진짜? 다른 매니저들이 묻고 야치와 시미즈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쳐다보는데, 신젠 매니저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 카라스노에 까만 머리카락 하고 키 크고 인상 좀 무섭게 생긴 세터 있잖아.”
“어, 설마, 아까…… 저랑 싸운…… 카게야마 말하는 거예요?”
“응. 사이 좋아 보이던데. 남자친구 맞지?”
“아, 아, 아닌데요!!”
히나타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후쿠로다니 매니저들은 히나타의 얼굴을 보고 이유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고, 우부가와 매니저도 흥미진진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야치와 시미즈가 말없이 웃고만 있는 사이, 신젠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상하다.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데. 진짜 아니야?”
“네, 넵! 진짜 아니에요!”
“아, 그럼 썸 타는 중인가?”
후쿠로다니 매니저들이 서로의 팔을 치며 “웬일이니!”하고 꺄르르 웃었다. 히나타는 입을 반쯤 벌리고 시미즈에게 도움을 청하듯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웃으며 밥만 묵묵히 먹을 뿐이었다. 야치도 웃으며 밥을 먹었고, 두 사람의 태도로 히나타와 카게야마 사이를 심상치 않은 것으로 확신한 여자 매니저들이 재잘재잘 다른 주제로 넘어갔지만 히나타는 대화에 제대로 섞이지 못했다. 카게야마와 이리저리 엮이면서 사귄다는 오해는 많이 받아봤지만 지금은 신경이 쓰이는 기분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봐도 사귀는 것처럼 보이나? 라는 생각에 너무 고심했던 탓인지 히나타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간다는 것이 그만 학교 안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처음 보는 학교에다가 도쿄 교외에 있어도 건물이 꽤 크기가 있다 보니 히나타는 잠시 당황했다. 깜깜한 밤이라 어둑어둑해진 복도를 혼자 걷는 건 역시 무서웠다. 그냥 미안한 걸 알아도 야치에게 부탁할걸 그랬다고 후회한 히나타가 빛이 나는 부근을 발견해 따라 걸어갈 때였다.
어? 히나타가 눈을 크게 뜨고 가까이 다가갈 때였다. 아무래도 여자들이 잘 방은 아니었는지 가까이 갈수록 남자 목소리들이 들렸다. 히나타는 잘 됐다고 생각했다. 이왕 남자들방 쪽으로 온 거 창피하지만 길을 잃었다고 사정을 말해 길을 찾으면 될 것이다. 여차하면 카게야마라도 데리고 나오면 되고. 히나타가 걸음을 빨리 해 그들의 목소리를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게 된 지점이었다.
“역시 난!! 일편단심 카라스노의 시미즈상라고나 할까…! 그분의 존재만으로도 빛이 나는데, 카라스노는 복 터졌어! 우리는 없는 매니저가 카라스노는 셋이나 있다니!”
“정확히는 둘이죠. 한 명은 도우미니까.”
“딱딱하긴! 그게 그거지!”
네코마의 야마모토와 츠키시마의 목소리였다.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매니저들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 히나타는 걸음을 멈췄다.
“그럼 안경군은 어느 매니저가 괜찮은데?”
“이런 대화 별로 관심 없습니다.”
“에에~ 재미없긴. 어차피 그쪽도 우리들 중에 누가 맘에 드는지 인기투표하고 있을걸? 매년 연례의식이야.”
“별로.”
“아잇. 그럼 너, 천재 세터군은?”
남학생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깨달은 직후부터 민망해져 그냥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시도가 멎은 것은 야마모토가 카게야마를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히나타는 무서움도 당황스러움도 다 잊고 움직이지 못했다.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그 방향은 명백히 카게야마 쪽이었다. 카게야마의 대답이 무엇인지 전력으로 궁금해 하는 스스로에게 히나타는 놀랐지만, 그 놀라움마저 제대로 맛볼 틈도 없이 긴장이 한 발 앞섰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갑작스럽게 빨리 뛰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듣고 싶다는 생각과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동시에 공존했다.
“…? 꼭 대답해야 하는 겁니까?”
“제왕은 물어볼 필요도 없지~ 일편단심이니까.”
“뭐야?”
“제왕 여친 자리는 어차피 히나타 고정이잖아?”
츠키시마가 피식 웃으며 한 말에 야마모토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이야? 카라스노의 매니저 한 명이 이미 임자가 있다고오오!!?”
“그런 거 아닙니다.”
카게야마가 말했다. 어쩐지 인상이 찡그려진 모습이 상상됐다. 저런 오해를 듣고 난 다음에는 늘 하던 표정이었으니 말이다.
“뭐야. 아니라잖아.”
“맞는데?”
“아니야.”
“엥?”
“아닙니다.”
너무 단호하게 대답하는 카게야마의 표정이 많이 안 좋았던 모양이었다. 한 학년 위로 알고 있는 야마모토는 더 이상 캐묻지 못하고 “어어….” 라는 약한 대답을 했다. 츠키시마가 비웃음이 역력한 목소리로 “그럼 제왕이 정말로 좋아하는 건 누군데?”라고 묻는 것을 마지막으로 히나타는 자리를 벗어났다.
히나타는 어둠이고 복도고 하나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냥 여기까지 묵묵히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갈 뿐이었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매우 별로였다. 부정적인 쪽으로. 히나타는 어렴풋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았다. 카게야마의 말을 들은 이후로 기분이 급작스레 곤두박질쳤으니 카게야마 때문이다. 그렇게 싫었나? 히나타는 생각했다. 되짚어보면 ‘너희 둘이 사귀냐’ 혹은 ‘언제 사귀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카게야마는 늘 화를 냈다. 히나타도 화를 내긴 했지만, 그건 카게야마가 옆에 있어서 더 길길이 날뛴 게 컸다. 혼자 있을 때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상대적으로 침착할 수 있었지만, 카게야마와 같이 있을 때 그런 말을 들으면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됐다.
아까 히나타도 분명 여자 매니저들에게 아니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부정한 건 맞는데. 카게야마도 자기처럼 그저 아니라고 부정한 것에 불과할 텐데. 히나타의 기분은 놀랄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단호하게 아니라고 할 건 뭐야. 히나타는 웃음기 없이 싹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정했던 카게야마를 떠올리다가 흠칫했다. 아닌 게 맞는데 무슨 상관이야? 다른 사람들이 오해 안 해서 좋기만 하네 뭐! 히나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계속 걷다가 또 길을 잃어버렸다. 근처를 둘러보니 화장실 앞이었다. 아까 히나타가 들른 화장실. 히나타는 한숨을 내쉬며 이번엔 반대방향으로 가볼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히나타가 선 곳으로 그림자가 졌다. 히나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고개를 돌리자 남자화장실 앞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경기 도중에 몇 번 시선을 마주쳐서인지 유독 익숙해 보이는 기분이었다. 히나타는 눈앞의 이 남학생이 러시아 혼혈이라는 말을 기억해내고 어버버했다. 이름이 리에프였던가. 아는 러시아어가 없었다. 심지어 하이, 봉쥬르, 구텐탁 같은 간단힌 인사말조차! 히나타는 학교에서 왜 러시아어 인사말은 알려주지 않는 거냐며 속으로 절규한 뒤 일단 영어를 해보기로 할 때였다.
“어? 카라스노 매니저?”
“어… 어어? 러, 러시아… 아, 아니 일본어!?”
“응. 나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러시아어 하나도 못해.”
“오오…… 그랬구나…… 너 미들블로커지? 아까 봤어.”
“응! 난 네코마의 에이스가 될 몸이라고~ 물론 이 말을 하면 타케토라상이 화내지만. 근데 넌 여기 왜 있어?”
어쨌든 러시아어를 할 필요 없어 다행이었다. 히나타는 리에프의 질문에 머리을 긁적이며 답했다.
“사실 길을 잃어버려서……”
“푸핫, 진짜?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너 재밌네.”
“아까부터?”
“그래. 너 처음에 나 보고 너희 천재 세터 뒤에 숨었잖아. 그 다음엔 너보다도 작은 매니저 뒤에 숨질 않나. 그리고 틈날 때마다 너희 천재 세터하고도 엄청 싸웠지? 켄마상이 너희는 원래 맨날 싸운다고 했어.”
히나타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여긴 숨을 곳도 없었다.
“그 세터한테 가려지는 거 보고 진짜 작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엄청 작네.”
리에프가 신기하디는 듯 말했다. 히나타는 상대의 키가 츠키시마보다도 더 크다고 생각하니 조금 두려웠지만 발끈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 그렇게 안 작아!”
“몇인데?”
“1…155cm.”
“작잖아? 난 194.1cm인데?”
“반올림하면 156cm야!”
리에프가 구부정했던 자세를 쭉 펴자 확실히 키가 엄청 컸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아보자 위압감도 엄청났다. 아까 경기 중에 채찍 같은 스파이크를 때리던 것도 떠오르니 히나타는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역시 키 큰 상대를 상대하려면 옆에 한 명은 더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찰나,
스윽, 새로운 그림자가 졌다. 히나타는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누구보다 깔끔하고 깨끗한 세트업을 할 때도, 경기 직후 정렬해 꾸벅 허리를 숙이기 전에도, 히나타가 만든 드링크를 굳이 찾아 입안에 털어놓을 때에도 많이 본 등이었지만, 무엇보다 히나타가 슬쩍 그 뒤에 숨을 때 많이 봤던 등이었다. 히나타는 입안으로 웅얼거렸다.
“카게야마.”
“멍청이. 남자 화장실 앞에서 뭐하냐?”
“오옷, 카라스노 천재 세터! 켄마상이 무섭다고 했던!!”
리에프가 눈을 반짝였다. 카게야마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너희팀 리베로가 찾던데.”
“야쿠상이?! 나 또 뭐 잘못했나?!? 리시브 연습 빼먹은 거 들켰나? 어라? 잠깐! 어디 가!”
카게야마는 리에프가 그를 부르건 말건 히나타의 팔목을 붙잡고 복도를 걸었다. 히나타는 리에프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것이 신경 쓰여 흘낏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때마다 카게야마가 세게 팔을 끌어당겨 멈출 수 없었다. 여긴 무슨 일이냐, 어디 가는 거냐, 묻는 말에도 아무 말도 없이 당기기만 하기에 답답해진 히나타는 겨우겨우 힘을 줘 카게야마의 손을 떼어냈다. 카게야마가 돌아섰다. 복도엔 불이 꺼진 탓에 달빛만 창문 너머로 들어왔지만 무섭다기보다는 다른 것이 더 커 떨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뭐하는 거야?”
히나타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더 어둑해진 것 같은 눈으로 히나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답이 나오지 않아 재차 물었다.
“제대로 인사도 못했는데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게 어딨어?”
“너…… 왜 자꾸 친해지려고 하는 거야?”
“뭐?”
“저 녀석은 네코마 미들블로커잖아. 왜 친해지려고 해?”
부정하려던 히나타는 말을 멈췄다. 친해지지 않고 싶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본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친해지면 안 돼?”
“너는… 이미 네코마 세터와도 친해졌잖아.”
“그게 뭐?”
“친해지면… 너, 좋다고 하잖아.”
“……?”
카게야마의 중구난방인 말을 완벽히 꿰어 맞추기 어려웠다. 히나타가 눈을 찡그렸다. 카게야마가 다시 말했다.
“친해지지 마.”
“…….”
“어차피 적으로 만날 상대잖아.”
평소라면 ‘뭐야, 카게야마군 혹시 질투?’라는 시답잖은 농담을 던졌을지도 몰랐다. 아니, 확실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만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럴 기분도 나지 않았고 그럴 뜻도 없었다. 그 이유는 모른다. 단순한 변덕인지, 심술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히나타가 물었다.
“왜 그래야 하는데? 적이면 무조건 사이 나빠야 해? 아니잖아. 난 그럴 생각 없어.”
“굳이 친해야 할 이유도 없잖아…!”
카게야마가 버럭 소리치곤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이 나쁘다는 증거였다. 그렇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아니, 그러기 싫었다.
“아니? 난 그러고 싶은데? 팀 상관없이 적으로 만날 예정이든 뭐든 난 친해지고 싶은데? 세터든 미들블로커든 리베로든 친해질 건데? 네가 무슨 상관인데 친해지라 마라야?”
“넌… 넌…”
카게야마가 한 번 입술을 물었다가 놓은 뒤 소리쳤다.
“넌 카라스노 매니저잖아!”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
“남의팀 선수들하고 친해져서 무슨 이득이 있냐고!”
“친해지지도 않고서 그걸 어떻게 알아!”
히나타가 씩씩대며 소리쳤다.
“매니저라고 상대팀이랑 엇나가야 해? 나 이미 다른 팀 매니저들하고도 친해졌어! 나만 그런 거 아니라 야치랑 시미즈상도 그래! 근데 왜 나한테만 그래? 친해지지 못하게 하려면 내가 납득할만한 정당한 이유를 대보라고!”
“나도 몰라! 그냥 싫다고, 멍청아!!”
카게야마는 홧김에 크게 소리친 뒤 이를 아득 씹었다. 그는 타오르는 눈으로 히나타를 훑었다.
“나는… 나는…”
“…….”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히나타가 입술을 깨물었다. 카게야마의 표정과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넌 드링크도 못 타고, 기록도 제대로 못해서 쩔쩔매고, 세탁기 돌릴 줄도 몰라서 한참을 헤매고, 매니저로서 할 줄 아는 것도 없잖아. 근데 다른팀 선수들이랑 친해지려고까지 해. 나는 네가,”
그래서 히나타는 더는 참지 못하고 카게야마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는 드링크도 못 타고 기록도 오늘 처음 해본 야치보다도 못하고 세탁기도 능숙하게 못 돌리는데다가 요리도 제대로 못해! 매니저로 있으면서 내가 3년 동안 잘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시미즈상 졸업해버리면 나 혼자 어떻게 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까 무서워! 나도 알아, 안다고! 근데 넌 적어도 그러면 안 되잖아! 적어도 너는…… 너는……”
“…….”
“너는 내가 매니저를 하고 있는 이유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히나타는 눈을 꼭 감았다. 떨군 고개에서 몇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카게야마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보고 싶지도 않았다. 서러웠다. 히나타도 알고 있었다. 얼마나 매니저로서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지. 합숙은 이번으로 두 번째였지만 첫 번째 골든위크 합숙 때는 요리도 제대로 할 줄 몰라 시미즈에게 폐만 끼쳤다. 늘 연습하는 기록도 집중력이 흐트러져 제대로 하지 못했다. 드링크는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도 농도가 뒤죽박죽이었다.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건 히나타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카게야마의 입으로 듣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속상하고, 서럽고, 눈물 나는 일이었다. 히나타는 고개를 숙인채로 카게야마를 스쳐지나갔다. 카게야마가 뒤를 돈 것 같았지만 히나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1. 신젠이랑 우부가와 매니저 정보 너무 없어서 그냥 둘 다 2학년으로ㅎㅎ 후쿠로다니 둘다 3학년이니까 밸런스상 1학년 아니면 2학년이겠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