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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보쿠아카] 외다리 사랑 上

별골짜기 2016. 6. 8. 20:51

보쿠아카

외다리 사랑

모브 비중이 꽤 있으니 주의하세요

 

 

 

 

빗소리가 유독 컸다.

투둑 투둑 떨어지는 비가 우산 위를 두드리는 소리는 속절없이 허공에 흩어지고 허무한 긴 숨이 얼어버린 흰 입김으로 발치에 떨어져 내렸다. 멍하니 깜빡거리는 노란 눈동자가 당혹스럽게 굴렀다. 어디를 짚고 지탱해야 할지 모르는 시선이 주춤주춤 제 다리를 따라 움직였다. 갈팡질팡 휘청거리는 이해는 키를 잃은 배처럼 바람결에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보쿠토는 눈을 비벼 시야를 확인하는 어린아이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다만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앞에 닥친 광경을 관망할 뿐이었다.

 

아카아시가 왜?

 

처음 든 생각은 의문이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고 그의 상상도 아니었다. 바람에 불어닥치는 빗방울이 그의 팔뚝에 차가운 감각을 남기며 현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아카아시를 이런 광경으로 볼 수 있을 줄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가 작정하고 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늘 그렇듯 주말에 있는 배구부 소집 때문에 조금 일찍 집을 나서서, 세터와 함께 미리 연습을 하면 효율이 두 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짝 방향을 틀었고, 익숙한 집 앞에 멈춰 핸드폰을 꺼내들려는 순간 어느새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는 아카아시를 발견했다. 아카아시도 연습이 고파 일찍 집을 나서는 건가, 반가운 마음이 앞서 걸음이 한 발 먼저 튀어나갔지만 끼익 멈추는 까만색 차가 먼저였다.

 

전역에 널려 있는 까만색 차가 새삼스러웠다는 건 아니다. 보쿠토가 한순간 시선을 빼앗기고, 충격에 가까운 당황을 받았던 건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카아시가 쓰고 있는 우산 아래로 스스럼없이 들어간 남자가 내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손을 들어 아카아시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그 손을 바로 제지하며 저는 어린애가 아닙니다.’라고 할 것 같았던 아카아시는 얌전히 그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눈치가 아주 좋은 편은 아니지만 두 사람이 내는 분위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쿵쾅거리는 심장이 먼저 직감하고 있었다.

 

손을 매만지는 습관처럼 주변을 살피는 아카아시의 모습이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골목 코너 쪽으로 몸을 숨긴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못 봤을 수도 있다는, 답지 않게 침착한 생각도 했지만 몸을 조금 기울여 벽 너머로 확인한 아카아시는 여전히 남자와 한 우산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손을 들어 눈 밑을 조금 쓸어주는 남자의 섬세한 손가락이 보였다. 볼을 쓸어내리다가 우산을 쥔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투둑 투둑, 분명 두 사람의 입모양으로 보아하니 무언가 말하고 있는데 우산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의 노란색 눈동자가 땅바닥을 짚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몸이 함께 움직여 보쿠토는 아카아시와 남자를 등지게 되었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신발코가 젖었지만 그는 눈치 채지 못했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이 예사롭지 않았다. 보쿠토는 자동차가 내는 배기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골목길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아카아시와 남자 사이에 돌았던 묘한 기류만이 그의 기억을 적시고 있을 뿐이었다.

 

 

 

 

보쿠토상!”

!?”

 

그를 부르는 아카아시의 목소리에 보쿠토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가 적절하게 띄워준 공은 보쿠토의 손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허무하게 코트 바깥으로 튕겨나가 버렸다. 임의로 팀을 갈라 연습게임을 하고 있었지만 보쿠토는 시작부터 영 집중을 하지 못했다. 간혹 컨디션이 바닥을 치면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했던 부원들은 시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 그의 상태에 당황해 있는 상황이었다. 늘 그의 컨디션을 헤아려 대책을 마련하는 아카아시의 눈에도 근심이 서려 있는 것을 보면 모두들 보쿠토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었다.

 

보쿠토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침에 공들여 세우고 온 머리카락이 조금 무너졌다. 상태가 별로이고 집중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내내 지적을 당해 알고 있었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최상의 컨디션으로 돌아올 것이라 부원들이 믿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건 아카아시가 매번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쿠토는 더욱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의 집중력을 빼앗고 있는 당사자가 다름 아닌 아카아시이기 때문이었다. 아카아시가 아무리 그의 컨디션을 잡고 끌어올리려 해도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아카아시의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아침에 본 낯선 남자와의 모습이 자꾸 머릿속을 헤집었다. 떠올려봤자 별로 좋은 일도 아닌데 왜 자꾸 머릿속을 괴롭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보쿠토상.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습니까?”

 

보쿠토는 나직하게 그를 부르며 상태를 파악하려는 아카아시를 빤히 보았다. 그의 시선이 물끄러미 아카아시의 머리카락과, 눈과, 볼을 차례대로 지나쳤다. 아카아시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표정을 하고 싶은 건 보쿠토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묻고 싶었다.

 

아카아시는 그 남자와 사귀고 있어?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이곳이 체육관이고, 그를 지켜보는 것이 아카아시뿐만이 아닌 전 부원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아카아시와 단 둘이 남은 상황이었다고 해도 물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남자와 남자가 사랑을? 그건 일개 고등학생, 경험이라고 해봤자 배구로 세계대회에 출전한 것밖에 없는 그가 입 밖에 내기에는 무척 불편하고 무거운 주제였다. 그리고,

 

아카아시와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말이기도 했다.

 

아니, 별로.”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이내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카아시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다기에는 조금 화가 나 보이는데요.”

화 안 났어.”

그럼 어디 아프십니까?”

안 아파.”

무슨 일이 있으면 말씀을 해주셔야-”

아무 일도 없다니까!?”

 

잠시 체육관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과민하게 소리쳐놓고도 보쿠토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카아시의 표정이 어두워졌기 때문이었다. 아이씨. 이러지 않으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데 애써 피한 보람이 없었다. 보쿠토는 감독에게 잠깐 밖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시로후쿠 손에 들린 수건을 하나 챙겨들고 체육관을 나섰다. 짜증스럽게 수건으로 얼굴에 흐른 땀을 닦아낸 보쿠토는 부실로 들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아카아시와 남자가 보였던 행동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그 남자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빗소리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전해지지 못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가 맞다면, 아니 이미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농도 짙은 대화가 아니었을까.

 

머릿속이 수학시간보다 더욱 복잡하게 꼬여들었다. 그는 남자와 남자간의 사랑에 대해 제대로 유심히 깊이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에게 사랑이란 당연히 남자와 여자가 하는 거였고 남자와 남자의 경우는 가까운 곳에서 한 번도 목격한 적도 없는 먼 이야기였다. 단지 별나네정도로 평하고 넘어가기 일쑤인, 그저 그런 해프닝. 하지만 그와 가깝다고 단언할 수 있는 아카아시가 알고 보니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얕게만 생각했던 그것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는 방향으로 그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카아시에 대해 새롭게 적대감이 싹텄다는 건 아니었다. 같은 배구를 해도 할 수 있는 모든 열정을 다 바치는 경우가 있는 반면 단지 부활동의 일환으로 보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혹은 에이스가 좋아 윙스파이커를 하고 싶어 하거나 정확한 토스를 올려 팀에 기여하는 세터를 하고 싶어 하는 선수로 갈리는 것처럼, 사랑의 종류를 그렇게 작정하고 이해한다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보쿠토는 조금 억울했다. 갑자기 아카아시의 취향을 알아버렸다. 그건 보쿠토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 일이었고, 그걸 미리 말해주지 않은 아카아시에게 실망한 것일지도 모른다. 알아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름 아카아시와는 주장과 부주장에이스와 세터가까운 선후배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보쿠토는 짜증스럽게 수건을 던졌다. 힘껏 날아간 수건이 애꿎은 라커 하나를 명중시킨 뒤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덜컹 소리를 낸 건 라커만이 아니었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온 아카아시 때문에 보쿠토의 심장도 속절없이 덜컹거렸다. 미간을 찌푸린 보쿠토의 눈에 천천히 수건을 주워드는 아카아시가 보였다. 아카아시는 매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덤덤하고 좀처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카아시는 모르겠지. 내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봤다는 사실을. 내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봤다고 얘기하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보쿠토는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가 입을 다물었다. 마신 숨이 다시 잇새로 빠져나왔지만 가슴이 답답했다.

 

무슨 일 있으신 거 맞잖아요.”

 

보쿠토는 아니라고 부정하려다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카아시는 그를 너무 잘 알았다. 아니라고 해봤자 믿지 않을 것이 뻔했다.

 

빨리 회복할게.”

무슨 일이신지는말씀 안 해주실 겁니까?”

 

너도 내게 다 말하지 않았으면서. 보쿠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카아시에게서 수건을 돌려받았다. 수건을 꽉 쥔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갔지만 그는 의식하지 못했다. 아카아시에게 금방이라도 물어보고 싶은 것을 애써 꾹꾹 눌러 참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찼다.

 

정리되면.”

그러세요. 대신 빨리 기운 차리셔야 합니다.”

 

아카아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쿠토는 돌아서는 아카아시를 자신도 모르게 불러 세웠다.

 

아카아시.”

.”

오늘 부활동 끝나고

 

곧장 돌아선 아카아시에게 보쿠토가 겨우겨우 말을 짜냈다.

 

. 추가연습!! 오늘 제대로 연습 못했으니까

오늘 끝나고요?”

 

아카아시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약속이 있는데

무슨 약속?”

주말이잖습니까.”

 

아카아시는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오늘 아침의 일을 겪지 않은 보쿠토라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목도해버린 이상, 보쿠토의 질문과 완벽하게 상응하는 대답이 아니라는 점에서 순간 깨닫고 말았다. 이따 있는 약속이 어쩌면 그 남자와의 약속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래서였을까. 보쿠토는 자기도 모르게 아카아시에게 말했다.

 

중요한 약속이야??”

 

나랑 추가연습 못해줄 정도로?

아카아시는 대답하지 못했다. 시선을 비스듬하게 내려깐 그는 조금 망설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중요하긴 합니다.”

 

보쿠토의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도 잠시,

 

그래도 꼭 가야하는 건 아니니

……정말!??”

 

아카아시가 선택한 방향에 보쿠토의 눈이 커졌다. 보쿠토는 무심코 목소리를 높였다. 쿵쾅쿵쾅 심장이 뛰었다. 아카아시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쿠토상 오늘 연습 부실한 건 맞으니까요.”

냉정하잖아!”

그래서 안 하실 겁니까?”

아니!!!”

그럼 일단돌아가죠.”

 

보쿠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가 먼저 뒤를 돌았다. 그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보쿠토의 눈동자가 아카아시의 뒷모습을 담았다. 살짝 드러난 목덜미에 땀이 고여 있었다. 보쿠토는 충동적으로 그 땀을 닦아내려다 허공에서 손을 멈췄다. 에이씨. 머리를 북북 헝클어뜨린 그가 손에 들려있는 수건을 아카아시의 목에 걸어주었다.

 

뭡니까?”

 

의아하게 묻는 아카아시를 성큼성큼 지나쳐가며 보쿠토가 말했다.

 

들고 가기 귀찮아.”

수건보다 배구공이 백배는 더 무겁겠는데요.”

 

보쿠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유가 너무 빈약한 것을 스스로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더 이상 질책하지 않았다.

 

 

 

 

부실에서 시간을 보낸 이후 보쿠토의 경기력은 약간이나마 상승했다. 중요한 순간 가끔 실책을 범하는 횟수가 평소보다 잦긴 했지만, 부실에 다녀오기 전보다는 훨씬 상태가 나아진 덕분에 부원들은 아카아시에게 잘했다는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보쿠토도 아까보다 한결 상태가 나아진 스스로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따 아카아시와 추가 연습을 할 생각으로 들뜬 것도 있었다.

 

아카아시와의 추가 연습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본연습 때보다 둘만 남아 연습하는 지금 이 순간이 오히려 더 잘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배구공이 손바닥에 착 감겨오는 느낌이 그가 원하는 바와 점점 근접해졌고, 그럴수록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한 번 더! 다시!’를 연이어 외쳤다. 아카아시는 지치는 기색 없이 보쿠토에게 끊임없이 토스를 올렸다. 보쿠토와 어울리다보면 없던 체력도 강철이 되기 마련이었다.

 

쉬었다가 하죠.”

 

그런 아카아시가 쉬었다가 가자고 할 정도면 꽤 시간이 지났을 테다. 보쿠토는 순순히 그러자고 했다. 두 사람의 추가연습은 자주 있는 일이라 매니저들이 당연하게 타놓고 간 드링크가 바닥에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그 옆에 주저앉아 하나를 집어 들고 마신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보았다. 아카아시는 체육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있었다. 9시가 다 되어가고 있는 늦은 시간이었다. 귀가가 늦어지는 것 때문에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가끔은 아카아시가 자진해서 연습을 더 하고 가자는 제안을 할 때도 있었으니까. 둘에게는 아직 이른 시간이기도 했다.

 

집에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친구?”

아니요.”

그럼

 

오늘 만나려던 사람은 누구냐고 물으려던 보쿠토는 이내 그만두었다. 그가 예상하는 대답이 나오면 짜증이 날 것 같았다. 아니, 벌써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분명 추가연습이 끝나고 라커에서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연락을 보내는 것 같았는데. 한 번 연락 보내서 못 볼 것 같다고 했으면 끝 아닌가? 왜 자꾸 신경을 쓰는 거지? 약속을 취소한 게 아닌가? 미룬 건가? 그렇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9시나 됐는데 만나서 뭐하려고?

 

연습하자.”

 

드링크로 목을 축이던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가봐야 한다는 말은 끝까지 없었다. 시계를 볼 때 살짝 드리워져 있던 어두운 근심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정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는 그 표정을 보며 보쿠토는 안도하는 동시에 불안했다. 이토록 그가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쳐 간 것이 대체 얼마나 많을까라는 생각에. 그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이라도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아카아시가 약속을 취소한 게 아니라 미룬 거라고 해도 연습을 일찍 끝낼 생각은 없었다.

 

보쿠토는 한 시간이나 더 연습을 한 뒤여서야 아카아시와 함께 체육관을 나섰다. 그는 학교 앞에 있는 택시를 잡아타고 아카아시의 집 근처로 내려달라고 했다. 거리상 보쿠토의 집이 더 가까워 아카아시는 신경 써주실 필요 없다고 했지만 보쿠토는 고집을 부렸다. 아카아시의 집 근처 주소를 읊는 그의 말에 잠시 난감한 기색이 스쳤던 얼굴 때문에 더욱 오기가 생긴 것이기도 했다. 택시가 움직이는 동안 아카아시는 핸드폰을 몇 번 만지더니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았고 보쿠토 역시 마찬가지로 달리는 택시 너머로 보이는 정경만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택시를 내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아카아시의 집 쪽으로 걸었다. 아카아시는 손에 핸드폰을 들고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고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보쿠토는 그 모습을 못 본 척 하며 익숙한 골목을 걸었다. 오늘 아침에도 왔던 길이었다. 지금은 비가 그쳐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처럼 고요했지만 (‘, 맞다. 우산 두고 왔다.’ 보쿠토는 잠시 딴생각을 했다.)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저 멀리 골목길에 서서 한 우산 아래 나란히 서 있던 아카아시와 낯선 이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왜 여기까지 온 걸까. 왜 고집을 부려서 왜 괜히?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하기만 했다. 잊을 만하면 지적받는 것처럼 제대로 된 이유도 찾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행동하고 있었다. 적어도 아카아시에게 추가연습을 하자고 떼를 쓸 때는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어서라는 거창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연습이 끝난 부주장 후배를 굳이 데려다주는 건 확실한 이유가 없었다. 아카아시도 분명 의문을 품고 있을 것이다. 아카아시가 질문하면 뭐라고 대답해줘야 하지. 그 기본적인 질문조차 답을 구할 수 없어 보쿠토는 쩔쩔맸다.

 

하지만 그 미약한 머릿속 흐름마저 뚝 끊긴 것은 아카아시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차종이 멈춰서 있는 것이 보여서였다.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내려 두 사람이 걸어오는 쪽으로 뚜벅뚜벅 가까워진 남자의 모습에 보쿠토는 물론이고 아카아시도 함께 당황한 듯했다. 아카아시가 재빨리 남자와 거리를 좁혔다. 보쿠토는 하마터면 그 팔을 잡아챌 뻔했다. 애매하게 들리다 만 팔이 다시 사그라졌다. 아카아시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게

자꾸 이러면 곤란해요.”

. 미안.”

일은 끝난 겁니까?”

. 아카아시는 연습하고 오는 길?”

 

남자의 까만 눈동자가 보쿠토를 잠시 향했다. 보쿠토도 지지 않고 눈을 마주했다. 어쩐지 속 안에서 활활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한 보쿠토를 눈치 챈 것인지 남자의 표정도 조금 굳어졌다. 보쿠토는 상관하지 않았다.

 

누구야?”

 

평소보다 날카롭게 나온 보쿠토의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당황하며 말했다.

 

아는 형입니다.”

아는 형? 내가 모르는 아는 형도 있었어?”

. 최근에 알게 된 사람이라.”

그럼 그쪽은

 

남자가 보쿠토에게 말을 걸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카아시가 둘 사이를 가로막아 대화가 진행되지 못했다. 아카아시는 남자를 등지고 보쿠토의 양팔을 잡았다. 그 순간 오싹할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흘러 보쿠토는 눈이 커졌다. 그의 눈동자가 스륵 떨어져 잡힌 팔을 보았다. 아카아시의 거듭되는 부탁이 이어졌지만 제대로 신경 쓸 수 없을 정도였다.

 

보쿠토상. 먼저 가주시겠습니까?”

…….”

제가 , 과 할 이야기가 조금 있어서요.”

 

간곡해 보이기까지 하는 아카아시의 부탁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눈동자에 가득 찬 자신을 한참 물끄러미 보다가 알았어. 월요일에 봐.”라고 짧게 인사한 뒤 뒤를 돌았다. 발걸음이 그리 가볍게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움직였다. 그래야 골목 코너에 몸을 숨길 수 있었으니까.

 

보쿠토는 비 내리던 아침과 똑같이 골목을 도는 모서리에 몸을 숨겼다. 아침의 대화는 빗소리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무런 장애가 없는 고요한 밤이었다.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조용히 나누는 대화였지만 가까운 거리의 보쿠토에게는 충분히 들릴 만한 거리였다.

 

제가 일이 있다고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방금도 문자 보냈는데 대체 여기 왜 있는 겁니까?”

궁금했어. 그 중요한 일이 뭔지.”

궁금하면 답니까? 뒷조사라도 하시지 그래요?”

잠깐아카아시 화났어?”

아침에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찾아오는 거 원하지 않는다고.”

으윽, 그렇지마안, 나 아카아시 보고 싶었고, 이렇게 찾아오는 걸로 화내는 건 너무하지 않아? 아침 때 반응이랑도 좀 다른데?! 혹시,”

전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제 생활이 있어요.”

그럼 아카아시, 나랑은 왜 만나는 건데?”

 

아카아시가 침묵하고 보쿠토도 숨을 잠시 멈췄다. 쿵쾅쿵쾅 심장이 뛰었다. 정말이었다. 정말 두 사람은 최소 사귀고 있는 사이였다. 상상을 하는 것과 실제로 듣는 건 들이닥치는 충격의 질감부터가 달랐다.

 

나랑하는 게 있긴 해? 아니, 나 좋아하긴 해?”

가세요.”

아카아시!”

제가 당신 만나는 거반응 다른 이유생각하는 그거 맞을 겁니다. 대답이 됐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보쿠토의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피어났다. 만나는 건 맞는데다른 이유가 있어? 좋아하지 않는 거야? 말을 왜 저렇게 어렵게 해? 그래서 결론이 뭔데?

 

곧 남자의 차 운전석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부웅 소리를 내며 차가 사라지고 보쿠토는 벽 너머로 아카아시를 보았다. 아카아시는 차가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집으로 걸어가는 것 같았다. 정말 어렵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좋아한다기에는 너무 매정하게 잘라냈다. 그런 주제에 멀어진 자리를 미련이 남은 것처럼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돌아가는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고.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하고 한편으로는 화도 났다.

 

좋아하는 거야, 좋아하지 않는 거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왜 만나는 건데?? 왜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건데?? 좋아해서 만나는 거라고 생각하면 보쿠토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뒤늦게 알았다는 서운함이나 아카아시를 향한 실망감이라고 생각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 가정은 뒤집어져 확실히 다른 방향이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차라리 아카아시가 그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여전했다. 왜 힘든 길을 사서 걸으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일까?

 

확신할 수 없었지만 보쿠토의 걸음이 제멋대로 튀어나갔다. 저벅저벅 걷는 걸음소리가 빨라졌다. 아카아시의 걸음은 반비례적으로 느려지고 그가 뒤를 돌아선 순간 보쿠토는 그의 팔을 잡아챘다. 보쿠토임을 확인하자 당황이 역력한 표정이 아카아시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잘 참았는데, 잘 견뎠다고 생각했는데, 그 얼굴을 마주하니 꼭꼭 눌러왔던 것이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튀어나와버렸다.

 

아카아시. 아까 그 남자랑 만나는 거야?”

보쿠토상?”

 

아카아시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침착하게 대답했다.

 

. 아는 형이니까자주 보는 편이죠.”

내 말은 그게 아냐.”

……?”

사귀고 있어?”

 

아카아시가 품고 있던 당황은 조금 변질되어 경악이 되었다. 질린 얼굴로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날카로워져 있었다.

 

보셨습니까?”

…….”

제가 먼저 가달라고 그렇게 부탁드렸는데, 결국 보셨습니까?!”

 

보쿠토는 대답 대신 물었다.

 

왜야?”

 

라는 단 한 글자에 함축된 의미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지만 보쿠토는 막 떠오르는 질문으로 만들어냈다.

 

왜 그 남자랑 사귀는 거야? 나는 하루 종일 그게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어.”

? 하루 종일이요? 그럼 설마 오늘 내내 집중 못했던 이유가,”

말해줘.”

 

아카아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침이군요.”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주로 무덤덤함만 스쳤던 얼굴에는 잠시 당황과 섞인 절망이 빠르게 눈꺼풀처럼 덮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보쿠토는 약간이나마 후회했다. 아침의 일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 아카아시의 표정이 궁금하긴 했지만 이렇게 극명하게 튀어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지금이라도 물러서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입에 제멋대로 움직였다.

 

왜 그 남자랑 사귀는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보쿠토상이 이미 봐버렸는데 제가 여자를 좋아하건 남자를 좋아하건 대답해 봤자 이제 와서 무슨!”

남자건 여자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만나고 있잖아.”

 

아카아시의 말이 뚝 끊겼다. 보쿠토도 더 말을 보태지 않고 아카아시를 쳐다보았다. 아카아시는 숨을 고르더니 한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게 중요합니까?”

.”

왜요?”

 

보쿠토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아직 적절한 대답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더듬거리며 아무 말이나 던졌다.

 

아카아시는그러지 않을 거라고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잘못 아신 겁니다.”

 

아카아시는 딱잘라 말했다.

 

제가 남자와 사귄다고 해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은데요.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사귀고 만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딱히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처음이 아니라고?”

 

보쿠토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아까 그 남자랑 사귀는 게 맞는데처음이 아니라고? 그것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그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 왜 좋아하지도 않는데 굳이 남자랑?”

“‘남자인 게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그냥그냥

 

생각이 완벽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보쿠토는 사랑에는 책임이 뒤따른다고 배웠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하는 데에 있어도 그럴 것을, 남자와 남자가 사랑한다고 하면 분명 더 무거운 책임이 따를 거다. 그런데 아카아시는 사랑도 하지 않으면서 책임만 지려는 꼴이 되는 게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얻는 게 없었다. 그래,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감정과 마음은 걱정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가정 역시도 완벽하지도 전혀 시원하지도 않았다. 벌써 몇 번이나 바뀐 가정이던가. 오히려 일그러지는 보쿠토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 아카아시가 말했다.

 

아니면 됐습니다. 그럼 제가 묻죠. 왜 저와 그 사람 이야기를 몰래 엿듣고, 왜 저를 이런 식으로 추궁하시는지 알고 싶은데요.”

그건

 

그냥 화가 났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아카아시가 싫어할 것 같았다. 아카아시의 성향에 분노했다고 오해라도 할 것 같았다. 그는 아카아시가 좋았다. 사소한 것으로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가장 합당하다고 판단한 대답을 꺼냈다. 이미 그의 안에서 사장된 가정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당장 생각나는 게 이것 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아카아시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

…….”

나는걱정도 되고그러니까이런저런 얘기를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아카아시는 묘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말해봤자 달라지는 게 있나요? 저는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 주의라서.”

기대?”

보쿠토상은 저에 대해 모르시는 게 많네요.”

 

아카아시는 뒤를 돌았다. 알 수 없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는 머릿속이 한계치까지 꽉 차 버렸다. 멍하니 바라보던 뒷모습이 잠시 돌아선 것은 그때였다.

 

감당할 수 없다면 신경 끄세요.”

 

날카로운 말이었지만 오히려 그를 위한 것처럼 들린다면 착각일까? 보쿠토는 더 이상 아카아시를 부르지도, 붙잡지도 못했다. 멀어져간 아카아시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도 그는 한참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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