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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보쿠아카] 부엉이 도련님

별골짜기 2016. 6. 29. 22:01

보쿠아카

부엉이 도련님

<키다리 아저씨>에서 따왔습니다.

 

 

 

 

[A]

 

413

 

안녕하십니까, ‘부엉이.

여전히 어감은 별로 좋지 않군요.

새학기가 시작되고 처음 편지를 드리는데 혹시 기다리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올해 배구부 부주장이 되었다는 건 일전에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는 단순 인수인계 과정에 불과했다면 졸업 시즌이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일을 도맡아 하게 되어 좀 바빴습니다. 그래도 두 달에 한 번은 꼭 편지 드릴 여유는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메일이 아니라 자필 편지를 고집하시는 부엉이상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는 건 아닙니다만제가 헤아리지 못할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부족한 건 없습니다. 보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집에 쌀도 많이 있고 반찬도 가끔 해먹습니다. 맛은 별로 없지만요. 형광등을 갈아야 하긴 하는데 매번 깜빡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한쪽 형광등만 켜고 있습니다. 아예 안 보일 정도도 아니고 생각난 김에 내일 꼭 사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동안의 근황에 대해 뭐부터 말씀드려야 할까 고민을 했는데 역시 배구부 얘기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1학년들은 곧바로 레귤러로 세우기는 많이 부족하지만 잘 다듬고 키우면 좋은 전력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저를 제외한 2학년들이 각각 3학년 레귤러 선배들에게 매일같이 특훈을 받고 있는 것처럼 내년이 되면 각자의 자리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겠죠. 최근에는 인터하이 예선을 앞두고 훈련 강도를 더 높이는 바람에 2학년들이 죽는 소리를 하던데…… .

 

쓰다 보니 갑자기 의문이 생기네요. 제가 전에 스쳐가듯 말씀드린 보쿠토상 기억하십니까? 이번에 저와 함께 배구부를 이끌 에이스이자 훌륭한 주장입니다. 기복만 없다면 전국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만그 기복이 최대약점이라 문제지만요. 아무튼보쿠토상은 지금은 생각해보니 따로 특훈을 챙기는 2학년이 없네요. 다른 선배들은 해당 포지션에 맞춰 2학년들을 최소 한명씩 담당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차기 에이스인 2학년을 맡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코노하상이 맡고 있는 것 같군요. 주장이라 예외인 건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주장이 해야 하는 일까지 제가 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는 2학년이니 1학년을 전담해 가르쳐야 하는 게 맞겠죠. 3학년이 된 이후를 대비해 이번에 새로 세터를 뽑았는데 아주 마음에 듭니다. 공을 올리는 기술은 부족하지만 타고난 센스가 그걸 커버하는 스타일입니다. 주변 공기를 읽는 눈치도 탁월하고요. 귀엽게 생겨서 은근히 강단도 있는 것 같고. 벌써부터 1학년들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고 잘 챙기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더군요. 계속 주시하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줄 생각입니다.

 

. 그리고 최근에 쿠로오상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쿠로오상 기억하십니까? 작년 후쿠로다니 그룹 합숙 때 처음 만난 네코마의 미들블로커입니다. 지금은 아마 주장이 되었을 겁니다. 합숙 때 개별 연습을 도와주다가 번호를 교환하고 좀 친해졌는데이번에 온 연락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더군요. ‘내가 진짜 대박인 걸 알아냈어, 나 정말 감동받아서 눈물 날 뻔했어, 보쿠토한테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말아줘, 도와주고 싶은데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참고 있어등등.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계속 하길래 나중에 얘기하라고 끊었는데 생각해보면 좀 이상합니다. 쿠로오상이 알아낸 건 뭐고 뭘 도와주겠다는 걸까요?

 

깊이 생각해보고 싶지만 사실 그럴 시간이 없네요. 1학년도 가르쳐줘야 하고 보쿠토상 추가연습도 도와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숙제가 밀려 있어서 이만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아카아시 케이지.

 

 

 

 

611

 

안녕하세요 부엉이상.

부엉이라고 부르라고 하신 지 일년 하고도 반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이제야 아무렇지 않아졌습니다. 사실 그동안 사람이 아니라 동물에게 편지를 쓰는 것 같았거든요. 부엉이상이 저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차라리 도련님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 호칭도 꽤 맘에 듭니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가 봅니다.

 

지난번 답장에 동봉해주신 장학증명서는 잘 받았습니다. 공부에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운동이나 마음껏 하라는 말도 감사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 후쿠로다니 학원에 입학하게 된 것 전부 부엉이상이 힘 써주신 일이라는 거 압니다.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사고로 고아가 된 제게 아무 대가 없이 후원하시는 이유로 미래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 미래에 아낌없이 투자해주시는 부엉이상의 호의에 부응하기 위해서 제가 그만큼 공부로 노력해 갚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려하시는 것처럼 시간이 없다고 운동을 그만둘 일은 없습니다. 그만두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거든요.

 

서두부터 무거운 이야기를 해 죄송합니다. 좀 기분 좋은 얘기를 해볼까요. 형광등은 잘 갈아 끼웠습니다. 사실 산다고 해놓고 또 잊고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쿠토상이 형광등 잊지 말라고 말해주지 뭡니까. 제가 형광등 가는 거 매번 잊어버린다고 연습 전에 흘리듯 했던 말을 잊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잊어버리지 않고 곧바로 형광등을 새로 살 수 있었죠. 그런데 좀 놀란 건 형광등을 갈 때였습니다.

 

제가 갈겠다는 걸 굳이 자기가 끼우겠다고 끙끙거리는 게 사실 좀 재밌었거든요. 보쿠토상에 대해 잘 알려진 건 없지만, 이런 곳에서 형광등을 갈고 있을 사람은 아니라서대충 소문으로는 엄청난 집 아들이다, 정도로밖에 못 들었지만 후쿠로다니에서 그런 소리 들을 정도면 대단한 거겠죠. 일전에는 제가 살고 있는 집에 처음 들어와서 휘휘 둘러보더니 역시 작아라고 못마땅한 듯 말했던 적도 있습니다. 저 혼자 살기에는 (감사하게도) 쓸데없이 넓은 집인데 말이죠.

 

그런데 형광등을 가는 손바닥에 뭔가 까맣게 적혀 있는 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겨우겨우 형광등을 갈아 끼우는데 성공하고 뿌듯하게 웃는 모습에 대고 말하긴 조금 죄송했지만, 좀 보여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싫다고 하더라고요. 억지로 봤더니 손바닥에 볼펜으로 아카아시 형광등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보쿠토상은 자기가 해야 할 숙제 기한이 언제까지인지도 잊어버리고 수학 점수는 최근에 몇 점 받았는지도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관심 없으면 금방 지워버리는, 어떻게 보면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데 후배를 위해 손바닥에 낙서까지 해가면서 기억하려고 애써줬다는 거죠. 고마운 내색을 빤히 드러내기 어려워서 저녁을 차려드렸는데 제가 한 반찬이 별로 맛이 없을 텐데도 잘 먹어주셔서 다행이었습니다. 좋은 사람입니다, 보쿠토상은.

 

지난번에 1학년을 계속 주시하고 도울 게 있으면 그럴 거라 말씀드린 것 같은데결론만 말하자면 딱히 성과는 없습니다. 1학년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이상하게 자꾸 방해를 받더군요. 하루는 보쿠토상이 공을 올려달라고 하질 않나, 하루는 보쿠토상이 손이 삔 것 같다며 사람을 놀래키질 않나, 하루는 보쿠토상이 스트레칭을 도와 달라질 않나, 하루는 보쿠토상이 숙제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같이 찾아주질 않나. 이렇게 적어놓고 나니 전부 보쿠토상이 방해했군요. 물론 우연이겠죠. 제가 다른 사람과 연습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는 이상한 (지워진 흔적이 있다) 소유욕이 있지만, 제가 1학년을 계속 주시하다가 도와줄 거란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니 보쿠토상이 알 리가 없거든요. 결국 늘 그랬듯 보쿠토상과 연습하는 날들이 쭉 이어졌습니다. 사실 1학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쪽과 연습하는 게 더 스릴 넘치긴 합니다.

 

그리고 쿠로오상에 대해 물어보셨는데, 연락 생각보다 잘 안 합니다. 제가 먼저 하는 일은 없고가끔 보쿠토상 일로 저쪽에서 해오는 일이 있긴 하죠. 근데 대부분 실없는 종류라예를 들어 보쿠토가 나한테 고민 상담을 했는데 고민이라는 한자를 모르더라고!’라든가.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닙니다. 흥미 있는 얘기긴 하지만요. 제일 최근에는 뜬금없이 아카아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라고 물어왔습니다. 대답은 안 했지만, 덕분에 있는 거냐고 누구냐고 핸드폰에 불나도록 라인이 와서 한동안 꺼놔야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 인터하이는 물론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좋은 성과를 만족스럽게 냈냐는 점에서는 조금 실망스러운 결과이긴 하지만 이번 대회를 인상 깊게 지켜본 스카우터 몇몇이 보쿠토상에게 제안을 한 모양입니다. 봄고가 남았으니 아직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자세한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아 더 알아내지는 못했지만기복이 나쁜 상태에서도 최소 전국 다섯 손가락에 드는 스파이커니 어느 곳을 가도 잘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 일이 화제가 되어서 3학년들이 벌써 미래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제대로, 프로로서 선수생활을 이어갈 사람은 아마 보쿠토상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다들 가고 싶은 대학과 학과, 혹은 취업하고 싶은 회사까지 모두 정해놓은 것 같았습니다.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졸업까지 반년 넘게 남았고 먼 미래라고 생각해서 아직 실감한 적은 없었는데 강둑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계획을 들으니 이들이 확실히 3학년 선배는 선배구나 싶었습니다. 제가 2학년인데다가 늘 함께 하는 레귤러 멤버들이다보니 조금 무뎌졌나 봅니다. 저와 함께 같은 코트를 밟으며 함께 호흡을 맞춰온 이들이 몇 개월이 지나면 모두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니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드네요.

 

곧 있으면 합숙이 있는데 준비를 하고 가야겠습니다. 작년처럼 따로 용돈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서 사용할 일도 없고요. 늘 감사합니다.

 

아카아시 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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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부엉이상.

합숙을 다녀오자마자 바로 봄고 준비를 하느라 하마터면 편지를 잊을 뻔했습니다. 편지를 한 번 더 주시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겠군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가 고백 받은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를 후원해주시는 분이고 제가 만날 수도 있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떻게 아셨는지는 좀 궁금합니다. 혹시 사람을 붙여두고 계시는 겁니까? 죄송하게도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궁금해 하시는 답을 드리자면, 아닙니다. 고백을 받긴 했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시간에 쫓긴다는 핑계로 거절하긴 했지만 사실 그건 제 마음과 관련된 이유입니다.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어 이 정도로만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지난번 편지로 분명 용돈 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동봉해온 액수가 좀 커서 당황했습니다. 이번달 생활비만 빼고 다시 돌려보냅니다. 다음달까진 생활비도 안 보내주셔도 됩니다.

 

합숙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일주일이었습니다. 원래 네 개의 고등학교가 모였던 합숙에 하나의 학교가 추가되었을 뿐인데 꽤 재밌게 돌아가더군요.

 

이번에도 보쿠토상, 쿠로오상과 따로 연습을 하긴 했습니다. 카라스노와 네코마의 다른 1학년들도 합류하긴 했지만 아마 셋이 한 연습이 가장 많을 겁니다. 그러면서 쿠로오상은 유독 저에게 말을 많이 걸었는데, ‘네가 글씨를 그렇게 잘 쓴다며.’라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말부터 시작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하도 캐묻는 바람에 곤란했습니다. 그 옆에서 보쿠토상도 궁금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게 신경 쓰여서 애써 화제를 돌리려고 해도 대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쿠로오상이 저에게 이런 질문들을 부쩍 묻는 게 좀 이상하기도 한데 짚이는 부분이 없습니다. 쿠로오상과 소꿉친구라고 하는 코즈메(저와 동갑입니다)에게 행동의 이유를 물어보기도 했지만 특유의 고양이를 닮은 눈동자로 꼭 들어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라는 말만 해올 뿐이었고요.

 

이상한 건 주장회의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사실 보쿠토상이 주장 노릇을 하는 건 주장회의가 끝난 다음입니다. 주장회의가 끝난 다음 잠들기 전에 여러 가지 게임을 하는 게 어쩐지 의례처럼 굳어져서, 가끔은 다음날도 연습이 있는 걸 잊은 사람들처럼 굴곤 하는데합숙 다섯째날이었던가요. 연이은 연습과 주장회의에 조금 피곤해서 주장들이 게임을 할 때 조금 눈을 붙였습니다.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 쭉 그랬던 터라 다른 사람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고요. (심지어 보쿠토상은 게임에서 내기로 절 걸기까지 했습니다) 끝나면 깨우라고 보쿠토상에게 당부를 하고 눈을 감았는데얼마나 잤을지 모를 때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쿠로오상과 보쿠토상이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정신이 없어서 정확히는 듣지 못했지만 , 손도 못 대겠어?’건드리지 마.’와 비슷한 말들이 들리는데 확실히 해두지 못하고 다시 잠들어버린 걸로 기억합니다. 눈을 떠보니 숙소였고요. 보쿠토상은 왜 절 깨우지 않았을까요? 숙소까진 누가 저를 데려다놨을까요? 합숙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 꽤 됐지만 지금도 가끔 그 대화가 떠오릅니다.

 

사실 지금 저는 이 편지를 제정신으로 잘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줄곧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해왔지만 최근 들어 그게 힘들어졌습니다. 자꾸 눈에 보여서일까요. 한순간 기대하는 저를 발견하는 게 조금 당황스럽고 조금 무섭습니다. 편지를 쓰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생각이 쓸데없이 오르락내리락 치솟았다가 추락하기를 반복합니다. 제게 고백을 해왔던 여학생들도 이런 생각이었을까 가늠해볼 정도로.

 

아마 무슨 말인지 모르실 겁니다. 저도 저를 잘 모르겠으니 말입니다. 상당히 혼란스럽고, 간혹 가다 떠오르는 가정에 기뻤다가도 한순간 슬퍼지기도 하고, 이럴 때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아보기도 해도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그저 흔들릴 뿐입니다.

 

정돈되지 않은 말 죄송합니다.

 

아카아시 케이지.

 

 

 

 

911

 

안녕하십니까 부엉이상.

갑작스러운 편지에 놀랐습니다. 최대한 빨리 답장해달라는 말도요. 예정일이 아닌데 보내신 걸 보면 최근 무척 조급해보입니다. 지난번에도 두 번이나 편지를 보내셨죠. 이번에는 늘 깔끔하게 프린트하고 접어서 보내신 편지와는 달리 멋대로 접혀진 종이를 보고 당황했습니다.

 

제가 왜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부엉이상은 제가 잘 지내고 있는지 학교생활에 애로사항은 없는지 알기 위해 편지를 요구했다지 않으셨습니까? 최근 선을 넘어 과도하게 제게 궁금해 하시는 것 같아 곤혹스럽습니다. 물론 제게 아낌없이 후원해주시는 건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사생활에 지나치게 개입하려 하시는 건 제가 부엉이상께 미덥지 않을 정도로 신뢰를 얻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는 최대한 편지에 많은 것을 쏟아 넣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편지 너머 당신이 너무 편해서 쓸데없는 부분까지 섞여 들어갈 정도로요.

 

. 부엉이상이 적어 보내주신 것처럼, 제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맞고 제가 겁을 내는 것도 맞고 두려워하는 것도 맞고 무서워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게 제가 좋아하는 사람때문이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이 감정을 깨달은 건 꽤 됐습니다. 아마 반년 좀 넘어갈 겁니다. 그 사람 옆에 있으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들고 쓴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들고 기대했다가 실망했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혼란스럽습니다. 이 상황이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부엉이상은 자꾸 자세한 상황만을 요구합니다. 조금,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는 없나요? 정리를 마치고 말씀드리면 안 되는 겁니까?

 

좋아하는 사람은 정리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카아시 케이지.

 

 

 

 

920

 

안녕하십니까 부엉이상.

지난번에 보낸 편지를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지를 보내고 생각하니 제가 다소 감정적이었던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도 트러블이 있었던 때라 더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엉이상은 두 달에 한번 정도 편지를 보내라고 하셨으니 조금 자주 보낸다고 해도 괜찮겠죠.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별 내용 없거든요. 편지지가 아까워 더 덧붙여보자면오늘은 자주 말씀드린 보쿠토상의 생일입니다. 연습도 쉬고 다들 놀러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전 안 갔습니다. 사이가 최근 좋지 않거든요.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 드렸는데 속이 쓰립니다. 작년 제 생일 때는 과분하게 큰 걸 받아서 올해는 꼭 보답하겠다고 돈을 모아왔음에도 애써 준비한 선물을 건넬 자신도 없었습니다.

 

부엉이상 생일은 그러고 보니 아직도 모르네요. 작년에 선물 동봉해 보내실 때 나중에 알려주신다고 했는데 언제 알려주실 건가요?

 

아카아시 케이지.

 

 

 

 

1017

 

안녕하세요 부엉이상.

이미 생일이 지나셨다니 아쉽습니다. 자세한 날짜는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9월이라고 하셨죠. 내년에는 꼭 챙기겠습니다. 그리고 약소하지만 선물을 동봉합니다. 늦은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리고 꽤 오래 고민했습니다. 말씀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부끄러운 일이지만무슨 짓이라 해도 상관없다고 하셨으니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9월 첫째 주에그러니까 부엉이상으로부터 편지를 받기 직전에 일이 있었습니다. 시작은 별 일 아니었습니다. 후쿠로다니 배구부는 매일 최소 한 세트씩 연습게임을 합니다. 대부분 3학년 레귤러팀과 1, 2학년 중에서 뽑은 정예멤버끼리 팀을 가르거나 섞어서 팀을 가르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저는 B(라고 하겠습니다)와 같은 팀이 되었습니다. 이런 연습게임에서 한 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어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게임이 무척 안 풀렸고, 저나 B나 실수를 연발하면서 어이없게 한 세트를 잃었습니다. 승부욕이 넘치는 B는 당연히 다음 세트를 요구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힘겹게 그 세트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죠. 이쪽이 2325로 이기는 순간 B가 저에게 달려들어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쌌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처를 조금 엉성하게 한 겁니다. 지나치게 부자연스럽게 피한 티가 난 건지 B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습니다.

 

뭐라고 얘기를 들었더라연습게임이 끝나자마자 다짜고짜 저를 끌고 체육관 구석으로 데려간 B는 저한테 물었습니다. ‘내가 싫어?’라고요.

 

제가 거기서 뭐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요. 솔직하게 대답해도, 거짓으로 대답해도, 그 어떤 대답을 해도 상대는 분명히 화가 날 텐데요. 오히려 저를 싫어하게 될 텐데요. 그래서 저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경멸보다는 서운함이 낫지 않을까. 알량한 욕심에 그랬습니다. 예상대로 B는 상처받은 얼굴로 내가 싫어? ? 어떻게 하면 좋, 싫어하지 않을 건데?’라고 소리쳤습니다. 체육관에 남아있던 부원들이 전부 이쪽을 쳐다보는 바람에 저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은 채아니 할 수 없는 채로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그 이후로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갑자기 B가 어떤 여학생과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여학생은 이름만 대면 다 알 기업의 손녀로 알고 있는데 누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고 그러더군요. 사실 함께 있다는 말뿐이었지만 고등학생 남녀가 함께 있었다는 목격담이 퍼지는 건 딱 하나의 이유밖에 없습니다. 평범하게 우연히 같은 장소에 있던 게 아니라 다른 목적, 이를테면 묘한 분위기가 섞인 광경이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났다는 거죠. 대다수의 학생들이 두 사람을 두고 끼리끼리 만나는 거라며 부러워하고 시기했습니다.

 

그리고 저는그동안 절 사로잡아왔던 공포가 현실로 닥쳐옴을 느꼈죠. 어쩌면 날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희망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수없이 가정한 희망들로 제 자신을 고문했던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 정말 안 되는구나. 정말 끝이구나. 애초에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당연한 결말이었는데도 끝까지 미련을 놓지 못했던 제 자신이 너무 싫고 비참해서 쉽게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정리되면 말씀드리겠다고 한 것 같지만사실 아직도 정리를 마치진 못했습니다. 왜 내가 자길 좋아하게 만들었는지, 다른 부원들 가르치려고 한 건 왜 사사건건 방해했는지, 형광등은 왜 갈아줬는지, 맛없다는 반찬을 왜 꾸역꾸역 먹어준 건지, 합숙 때는 왜 깨우지 않고 업어 데려다 주었는지,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왜 자꾸 오해할만한 말을 한 건지이미 해도 늦었을 원망밖에 할 게 없었죠.

 

죄송합니다. 더럽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변명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공부와 운동에는 지장 없을 겁니다. 지난번 편지도 이번에 도착할 편지도 되도록 잊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카아시 케이지.

 

 

 

 

1023

 

안녕하세요 부엉이상.

편지가 이틀 만에 답장이 와 놀랐습니다. 바로 답장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리고 놀랐습니다. 바로 이해한다고 말씀해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누를 끼치지 않게 더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밥 잘 먹고 운동도 잘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B와 사귄다고 소문이 났던 그 여학생은 알고 보니 사촌이었다고 하더군요. 그 소문을 처음으로 낸 건 제 옆 반의 반장으로 밝혀졌는데, 크게 처벌받은 모양입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처벌받을 일은 아니었는데 그 여학생 집안이 후쿠로다니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좋았을 거라고 다들 그렇게 추측하더군요. 반면 B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3학년들과 대화를 나누는 걸 봤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오랜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B와의 관계를 묻는 말이었지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B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널 소중히 하고 있어.’라고요.

 

그래도다시 관계를 회복하진 않을 생각입니다. 그 말에 괜히 휘청거리는 마음이 지긋지긋합니다. 마음이 정리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아마 졸업 이후로도 힘들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말입니다.

 

아카아시 케이지.

 

 

 

 

1030

 

안녕하세요 부엉이상.

 

제 마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말씀, 피하지 말라는 말씀, 그 사람도 같은 마음일 거라는 말씀 모두 감사합니다.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네요. 부엉이상이 아니었다면 B를 피해 다니는 걸 넘어서 아예 도망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저를 잘 압니다. 최대한 빨리 끊어내지 않으면 이게 얼마나 갈지 모릅니다. 저는 나약해지는 게 싫습니다. 제가 붙잡고 있는 이건 저를 약하게 만들 뿐입니다. 가망이 없는 싹은 어서 잘라내야겠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카아시 케이지.

 

 

 

 

115

 

부엉이상.

놀라지 말라고 하시는 건 똑똑히 읽었습니다만갑작스러워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어 미안하다는 말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는 말도 잘 이해가 되지 않고요. 오래 숨기고 싶었다는 말은 얼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게 이해를 구하시려는 뉘앙스가 곳곳에 있어서 잘못 읽은 건가 했습니다.

 

그래서 보내주신 편지를 몇 번 더 읽어봤는데,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편지로만 저와 교류를 하셨던 점이나 신원을 파악할 만한 정보들은 무조건 배제하셨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럴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제가 실망하고 멀어질까 걱정하시는 것 싶은데저는 인간적으로 당신에게 감사하고 또 당신을 많이 좋아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웃게 만드는 말투가 누군가와 닮았거든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말씀해주신 날짜와 시간에 맞춰 나가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아카아시 케이지.

 

 

 

 

[B]

 

52

 

아카아시에게.

 

아카아시 부주장 됐구나, 축하해! 내가 자필 편지를 보내달라는 이유 전에 얘기 안 했나?? 귀찮았다면 미안해, 그렇지만 나는 아카아시의 글씨를 많이 보고 싶은걸! 아카아시 글씨는 단정하고 또박또박하잖아? 서예 배운 적도 없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글씨를 잘 쓰는지 신기해!!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랑 가정교사한테 얼마나 혼나면서 배웠는지 몰라. 그런데도 글씨가 개판이라 워드 쳐서 보내는 거 이해해줘!!!

 

근데 아카아시!!! 아직도 형광등을 안 고쳤단 말이야?!!! 형광등 망가졌다고 한지 한 달은 넘게 된 것 같은데 집 안 깜깜해?? 아카아시 맨날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자는데 눈 나빠지면 어떡해?? 사람은 건강이 우선이라고 우리 할아버지가 입에 달고 살았어!!

 

그러니까, 이왕 말 나온 김에공부보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하는 게 어때? 공부는 해도 어렵기만 하잖아? 혹시 장학금을 타서 학비를 충당해야 하는 이유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후쿠로다니 장학 재단 엄청 잘 되어있다고 내가 얘기 들었어. 그게 여의치 않으면 외부 장학 재단에서 끌어다줄 수도 있으니까 너무 몸 망가져가면서까지 공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공부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

 

그런데 음쿠로오라는 친구가 아카아시에게 연락을 했구나원래 그렇게 연락을 자주 하는 친구인가? 그 친구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굳이 신경 써서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

 

. 길게 쓰고 싶은데 왜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잘 정리가 안 되는 거지. 아무튼 아카아시 부주장 된 거 진심으로 축하하고 인터하이도 힘내서 하길 바랄게!!! 아카아시 토스 실력은 좋으니까 분명히 잘 해낼 거야! 1학년 새로 들어온 세터도 열심히돌봐줘. 답장 기다릴게!

 

부엉이가.

 

 

 

 

71

 

아카아시에게.

 

아카아시의 뜻은 잘 알았어. 아카아시에게 미래를 기대하고 후원을 시작한 건 맞아. 하지만 아카아시가 내가 원하는 미래에 지나치게 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공부로 성공한 아카아시만을 바란 적 없고, 내가 생각하는 성공은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인 것만도 아니야.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슬프다. 그렇지만 아카아시가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것 같으니 이해할게. 그래도 너무 열심히 해서 건강 상하면 안 되는 거 알지?

 

그래도 다행인 건 아카아시가 더 이상 도련님이라고 부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거야! 나는 그 말이 정말 정말 싫어!! 내가 어릴 때부터 뭐라도 하려고 하면 그러면 안 됩니다 도련님’ ‘그러지 마세요 도련님맨날 도련님 도련님 도련님. 그래서 나는 집 밖이 좋아. 집에 있으면 답답하거든. 부모님은 제발 붙어 있으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지 음하하. 혹시 주변에 늦게까지 연습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아카아시는 잔소리 하지 말고 이해해줘! 어울려주면 더 좋고!! 예를 들어, !

 

! 그리고 드디어! 형광등을 갈았구나!!! 그 보쿠토라는 선배 참 대단한 친구인 것 같아! 아카아시에게 직접 형광등 갈라고 말하기까지 엄청나게 고민하고 또 생각하지 않았을까??! 좀 그렇잖아. 남의 집 일인데 괜히 참견하는 것 같고, 또 워낙 잘 잊어버리는 성격에 그거 기억하려고 얼마나 많은 방법을 썼을까!!? 좋은 사람?? 흐흐. 맞아. 좋은 사람 같아. 앞으로도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네! 고민이라는 한자를 모르긴 하지만, 그때만! 딱 그때만 우연찮게 생각 안 났을 수도 있는 거고!! , 그거 모른다고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그치?!

 

쿠로오라는 친구가 보쿠토라는 친구에 대해 재밌게 표현해줬는데근데아카아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 왜 쿠로오라는 친구한테 답장 안 했어? 이제 합숙 가면 만날 테니까 그때 가서 말해주려고 하는 건가? 아 그리고! 합숙 가는데 용돈이 필요 없다는 건 말이 안 돼!! 합숙 기념으로 옷 살 수도 있는 거고! 운동화 새로 살 수도 있는 거고! 편지랑 같이 보낼 거니까 쓸 데 없어도 맛있는 거 많이 사먹도록 해. 그거 좋아하잖아. 유채겨자무침!! 유채 많이 사가서 매니저들한테 만들어달라고 해봐. 답장 기다릴게!

 

부엉이가.

 

 

 

 

730

 

아카아시.

 

답장을 기다려야 하지만 조금 많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졌어. 내가 건너건너 들은 건데혹시 아카아시 고백 받았어? 아무한테도 그 일에 대해서 제대로 얘기 안 해줬다는데 어떻게 됐어? 받아줬어? 그 여자애랑 연애할 거야? 답장 빨리 부탁해.

 

부엉이가.

 

 

 

 

97

 

아카아시. 텀이 짧아서 미안해. 하지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랬어. 아카아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 쿠로오라는 친구한테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어. 한참을 들여다봤는데 뭔가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고 겁내는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워한다거나 무서워하는 것 같아 보였어. 아카아시가 나한테 편지를 보낸 편지들을 통틀어서 처음 있는 일이라 그래. 사실 좀 화가 난다고 해야 하나? 편지 쓰는 순간에도 다른 생각을 할 정도면…… 많이 좋아해? 아니, 이것부터 확인해야겠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있다면 누구야? 자세히 말해주면 안 되는 거야? 누군지 말해주지 않을 정도로 깊이 좋아하는 건가? 빠른 답장 부탁해. 부엉이가.

 

 

 

910

 

미안해 아카아시.

 

내가 너무 과하게 참견했구나.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해. 내가 썼던 편지를 다시 생각해봤는데 나만 생각해서 아카아시를 지나치게 몰아붙인 것 같아.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아카아시도 생각했어야 했는데선을 넘어버렸구나.

 

말하지 않는 것도 이해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게 맞았다니 놀랐어. 마음고생이 심했겠다. 반년이 넘어가도록 몰래 좋아했는데도 주변 사람들이 모를 정도인데 아카아시 속은 괜찮은지 걱정된다. 나는 아카아시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상관없으니까 편하게 말해줄 날까지 기다릴게.

 

부엉이가.

 

 

 

 

929

 

안녕 아카아시.

 

답장을 언제 하는 게 좋을까 계속 고민(정확하게 한자를 쳐서 보냈다)했는데 아카아시도 자주 보내는 것에 익숙해진 것 같으니까 그냥 일찍 답장할래. 아카아시가 그 편지를 보낼 때 개인적으로 트러블이 있었구나. 이해해. 나도 그 비슷한 시기에 굉장히 싫은 말을 들어버려서 괜히 누가 말만 걸어도 신경이 곤두서고 짜증나고 우중충하게 얼굴 찡그리면서 다녔거든. 그래도 아카아시가 20일날 보낸 편지를 받으니까 기분이 좀 나아졌어! 아마 요새 사이가 안 좋다는 그 선배도 아카아시 마음을 알지 않을까?

 

생일은 원래 그런 거잖아. 화가 날 수 있는 날도 좀 너그러워지고 관대해지는 거? . 멋있게 쓰고 싶었는데 무슨 말인지 내가 써놓고도 모르겠다. 내 생일은자세히는 알려줄 수 없어. 미안해. 그렇지만 9월이야. 절대! 아카아시가 싫어서 안 알려주는 게 아니고 사정이 있어. 미안해!!!

 

부엉이가.

 

 

 

 

1019

 

아카아시.

 

그랬구나. 그랬구나……

.

답장을 해야 하는데 아무 생각도 안 나.

사실 답장 받고 어뭐라 그래야 되지. 아무 말도 안 나왔어. 하루 종일 멍하니 그냥 책상 앞에 앉아서 침대에 앉아서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썼던 것 같아.

 

아카아시. 나 아카아시 이해해. 절대 더럽지 않아. 구질구질하지도 않아. 아카아시는 진짜 구질구질한 사람을 보면 아마 기절할 거야.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연기도 하고 모르는 척도 하고 속인다는 양심의 가책 빤히 느끼면서도 이거 하나를 놓을 수가 없어서 안달내고 못 볼 꼴 보이고 치졸해지기도 하고아무튼 절대 그렇게 느끼지 않아. 편지 내용 잊지도 않을 거야. 내가 어떻게 잊어? 절대 안 잊어.

 

아카아시가 말한 B아카아시가 생각하는 그런 B가 아닐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밥 잘 챙겨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공부는 적당히 해. 약속해!!

 

부엉이가.

 

 

 

 

1027

 

아카아시.

 

밥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는 건 다행이지만왜 관계 회복하지 않을 셈인 거야? B가 그 사촌이라는 여자애랑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 소문을 쓸데없이 퍼트린 녀석도 처리했잖아. B도 아카아시와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아? 쿠로오라는 친구도 B가 아카아시를 생각보다 더 소중히 하고 있다고그렇게 얘기해줬다는데 왜 정리하려는 거야? 내 생각에는 B친구도 아카아시와 같은 마음일 거야. 그러니까 피하지 말고 포기하지 마. 분명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

 

일단B와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때?

 

부엉이가.

 

 

 

 

112

 

아카아시.

 

고민을 상당히 많이 했어. 이게 옳은 건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아마 아카아시는 이 편지를 읽으면 놀라겠지. 많이 놀라지는 않았으면 해. 사실 편지를 쓰는 지금도 망설여지고 있어. 나는 어쩌면 후회할지도 몰라. 내가 어거지를 써서라도 붙잡아왔던 끈이 끊겨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두려워. 나는 생각보다 꽤 겁쟁이라서 최대한 오래 너에게 나를 숨기고 싶었거든.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일까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밖에 방법이 없어.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다면 자꾸 피하고 도망칠 테니까. 미안해. 지금은 이 말을 이해할 순 없겠지만 미안하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줘.

 

1110일 밤 10시에 아카아시 집 앞으로 갈게. 거기서 봤으면 좋겠어. 거기서 보길 원하지 않는다면 답장으로 거절해줘. 기다릴게.

 

부엉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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