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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아카
당신을 맞춰 언젠가 6
사망소재 주의
아카아시가 손을 들었다. 덮은 눈가는 뜨끈뜨끈했다. 눈물이 새어나올 것 같아 그는 대신 길게 숨을 뱉어냈다. 또 한 번의 죽음이 찾아왔다. 보쿠토의 눈앞에서, 그를 대신해서. 그 얼마나 이기적인 행동인가. 간접적으로 품고 있는 마음을 고백한 상대에게 다시금 아물 수 없는 상처를 줘버렸다. 처음 난 상처 위로 덧그리고 또 덧그려진 상처는 나을 수 있는 방법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몇 번째인지 모를 사과를 했지만 그건 아마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린 격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금방이라도 ‘하지 말라’고 뻐끔거릴 것 같았던 그의 마지막 입모양을 떠올리며 아카아시는 깊은 자책과 절망에 잠겼다.
‘아카아시.’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에게 이름이 불리는 순간순간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외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어떻게든 희생은 내가 한다. 살리는 건 보쿠토상이다. 그것이 아카아시의 방식이었으니까. 아카아시는 손을 내렸다. 침대 위로 힘없이 떨어진 팔은 힘을 줄만한 의지가 떨어져 있었다. 이게 몇 번째지? 아마… 일곱 번째던가. 수도 없이 되풀이되는 죽음에 횟수마저 헷갈리기 시작해 결국 사고의 순간들을 하나하나 짚어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나가야 하는데. 갈 곳이 없었다. 보쿠토는 만나면 죽기 때문에 그럴 수 없고 부모님은 살고 있는 곳을 모른다. 다른 아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모른다. 막막하고 힘이 없었다. 거듭되는 죽음에 그는 지쳐 있었다. 선택할 수 있는 거라곤 죽음뿐이었다. 아니, 그마저도 선택이 아닐 수 있었다. 너무나 짧게 주어지는 시간들은 보쿠토의 표현대로 희망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카아시는 무력하게 일어섰다. 한 번 휘청거렸지만 이내 똑바로 선 그는 익숙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2031년과 2028년에 보았던 방과 똑같았다. 아카아시는 책상 위에서 탁상달력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력이 없었다. 방 구석구석을 기웃거려도 벽걸이 달력은 물론 숫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 있는 거라곤 노트북뿐이었다.
아카아시는 하는 수 없이 노트북을 열었다. 파란 배경화면이 뜨자 우측 하단에 표시된 날짜를 곧장 확인했다. 5월 22일이었다. 그리고 2033년.
아카아시는 조금 멈칫했다. 가장 먼 미래의 보쿠토는 그가 두 번째로 봤던 38세의 보쿠토였다. 그런데 2033년이라는 건 아카아시 39세, 보쿠토 40세라는 소리가 됐다. 바로 전에 깨어난 시간에서 35세의 보쿠토를 만났으니… 또 한꺼번에 5년을 뛰었다. 이제 규칙을 찾아내는 건 포기했다. 아카아시는 눈을 내리깔고 노트북을 덮으려 했다. 하지만 파란색 배경화면 한가운데에 못 보던 파일이 하나 만들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남의 노트북, 함부로 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족해 파일까지 뒤져보는 취미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 파일을 무시하고 그대로 종료할 수 없었던 이유는……
파일 제목에 ‘아카아시 케이지’라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아카아시의 눈이 커졌다. 쿵덕쿵덕 뛰는 심장이 잔뜩 긴장했다. 덩달아 딱딱하게 굳은 손을 겨우 움직여 파일을 열었다. 노트패드 프로그램이 열리고 커다란 글자가 아카아시의 눈에 담겼다.
[미안해]
[시간은 반복된다]
단 두 문장이었지만 아카아시는 숨이 막혔다.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시간은 반복된다. 무슨 사간이 반복된다는 건데? 아카아시 케이지라는 파일 이름.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꼭 내가 여기 올 거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이 노트북 주인, 이 집 주인은 나를 알고 있는 건가?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졌다. 늘 그의 집을 빌려 이곳에서 눈뜬다는 사실을, 이 집주인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 집 주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카아시는 노트북을 덮었다. 크게 뜬 눈으로 방 안을 살폈다. 지금 시대에 발달된 기술의 정도는 모른다. 어딘가에 교묘하게 숨은 녹화 카메라 같은 거라도 있는 걸까? 아카아시 마치 이곳에서 처음 눈 떴던 그날처럼 새삼스럽게 방을 살피며 나섰다. 거실도, 주방도 지나치게 깨끗하고 사람 사는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집을 나선 아카아시는 눈을 크게 떴다. 비가 오고 있었다. 어쩐지 방 안이 좀 어두컴컴하다 했다. 부슬부슬 바람과 섞여 내리는 비라서 아카아시는 그냥 골목길을 걸었다. 콘크리트 바닥이 까맣게 젖어 들어가고 있는 탓인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정적이 지나칠 정도로 위화감 있어 그는 멍하니 방향도 모르는 채 걸었다. 어떤 느낌적인 무언가가 그의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외면하고 싶은 위화감 때문일까.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머릿속에 든 생각은 너무 많았고 그걸 정리해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피로해 있었다.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서, 앞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해보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아카아시가 손을 들어 비를 조금 가렸다. 이미 살짝 머리카락이 젖기 시작하고 있었다. 근처 편의점에라도 들어가서 우산을 좀 살까… 아카아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편의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비가 조금씩 굵어져 큰일나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
우산으로 머리 위를 가려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어딘지 모를 골목길에서, 아카아시는 고개를 들었다.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는 노란빛 눈동자가 칙칙한 배경을 하고도 선명해 심장이 쿵쾅거렸다. 파란색 우산이 그의 하늘을 완벽하게 가리고 비냄새보다 더 진한 그의 향취에 아카아시는 물 먹은 솜으로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에는 때 지난 원망과 미움마저 완벽히 지워져 있어 더욱 그랬다.
“오랜만이네.”
마지막으로 봤던 때 들었던 절박하기까지 한 목소리와는 달리 담담한 목소리가 전해들어와 아카아시는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기다리길 잘했어.”
보쿠토가 메고 있던 가방에서 수건을 꺼냈다. 보송보송하게 잘 마른 하얀 수건이 아카아시의 머리 위에 씌워졌다. 얼굴이 가려진 덕분에 그는 붉게 물든 눈가를 보이지 않아도 됐다. 얼굴을 닦는 척, 머리카락을 닦는 척 아카아시는 수건에 눈을 묻었다.
“…왜 기다리셨습니까. 안 그래도 되는데.”
“네가 올 거라고 믿었으니까.”
가만히 수건에 얼굴만 묻고 있자 보쿠토는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천천히 아카아시의 얼굴을 문질러주었다. 약간의 망설임이 묻었지만 최대한 다정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 아카아시는 입술을 깨물고 그의 손을 밀어냈다.
“볼 일 있으시면 가보세요.”
“너 보러 온 거야.”
“……?”
아카아시는 당황하며 보쿠토를 보았다. 보쿠토는 여전히 메마른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네가 또 죽고 궁금해졌어. 너는 대체 어디서 어떻게 깨어난 걸까. 네가 전에 그랬잖아. 모르는 사람 집에서 깨어났다고.”
“…….”
“그래서… 제일 최근에 널 만났을 때… 그 길거리를 중심으로 알아봤어. 혹시 설치되어 있었을 녹화 카메라가 있으면 네가 어떤 경로로 거기까지 왔는지 알 테니까.”
보쿠토의 손이 수건을 잡고 있는 아카아시의 손 위에 겹쳐졌다. 그는 그 손을 잡은 채로 아카아시의 머리카락을 털었다. 비를 많이 맞지 않아 이만하면 됐겠다 싶은 상태가 되자 그가 수건을 거둬 다시 가방에 넣었다. 끝이 살짝 젖어 구불구불하게 진 아카아시의 머리카락을 꿋꿋이 정돈하며 보쿠토가 말을 이었다.
“그 경로를 따라 알아보니까 이 골목이 나왔어. 그런데 더 이상은 알 수가 없더라고. 아카아시는 늘 5월 22일에 깨어났으니까… 매년 5월 22일마다 나는 계속 여기서 너를 기다렸어.”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아카아시는 그의 쉰 듯한 목소리에서 그의 끈질긴 노력을 읽어낼 수 있었다. 겹쳐지고 쌓여지는 시간에 부식된 그의 뜨거움과, 그러면서도 그를 이곳에 매년 서 있게 한 지나친 미련이 보였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가 봐오고 그가 아는 한 이렇게 나약하게 느껴질 정도로 약하지 않았는데. 메마른 식물처럼 생기 없지 않았는데. 아카아시는 그가 보쿠토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 하셨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모난 말을 하며 냉정하게 입술을 사려 물었다. 비가 더욱 거세졌다.
“아시잖습니까. 저와 보쿠토상은 만나봤자 좋을 거 없습니다.”
만나면 사고가 난다. 혼자서는 하루도 살아 있을 수 있었지만, 보쿠토와 만나면 꼭 어떤 사고라도 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는 지금 역시 마찬가지로 불안했다. 언제 또 어디서 사고가 날지 몰라서. 금방이라도 홍수가 나서 이곳이 쓸려 들어갈 것 같아서. 금방이라도 불어난 강물에 발을 헛디뎌 질식해버릴 것 같아서.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사이라 그는 겁이 나고 두려웠다.
하지만 보쿠토는 오히려 팔을 들어 아카아시를 감쌌다. 아카아시가 조금 몸을 뒤틀었지만 오히려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그 품에 잠시 안도하고 익숙해져버릴 것 같아서 아카아시는 차갑게 말했다.
“전 사고 나기 싫습니다. 제발 못 본 척 가주세요.”
“…….”
“별로 보쿠토상 보고 싶지 않아요. 일부러 보쿠토상에 대한 것도 안 찾은 지 꽤 됐습니다. 궁금하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으니 그냥 모르는 척 헤어지는 게 좋습니다.”
보쿠토의 손에서 잠시 힘이 빠졌다. 내리는 거센 비에 웅덩이에서 튄 물방울이 바짓단을 적셨다. 축축해진 바지 밑단보다 아카아시는 모순에 헤엄치는 심장이 더 신경 쓰였다.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는 보쿠토의 행동을 기다렸다. 우산을 거두고 가면 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래야 되는데. 그럼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 좀 편해져?”
하지만 보쿠토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이 마주쳤다. 화를 내지 않는 그의 눈에는 심상찮은 슬픔이 들어차 있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과, 아카아시의 마음이 상통하는 그런 짙은 슬픔이.
“생각해봤어.”
“…….”
“네가 왜 자꾸 나를 구하려고 대신 죽는지.”
바깥에서 우산 안쪽으로 튀어 들어오는 빗방울이 차가웠다. 심장이 다시 쿵쾅거렸다. 보쿠토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나름의 답을 추론하고 던지는 말이었다. 아카아시도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작년… 그러니까 2011년에 맞이했던 생일날 스스로 깨닫게 되었던 답이었고, 새로 2학년이 된 그날 부모님에게 주었던 답이기도 했다.
“그걸 이제 깨달았다는 게 나 스스로한테 화가 날 정도라서 자존심이 상해.”
눈이 커졌다는 것을 스스로가 느껴 표정을 수습하려 했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보쿠토는 한손을 뻗어 아카아시의 어깨를 잡았다. 마주보고 잡힌 그 어깨에 힘이 실렸다.
“그렇지만 아카아시는 아마 나한테 말해주지 않겠지.”
쏴아아…
장대처럼 굵어진 비가 후두둑 쏟아졌다. 기울어진 우산에 보쿠토의 가방이 젖었다. 보쿠토는 개의치 않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해서 네 마음이 편하다면 상관 안 해.”
“…….”
“하지만 모르는 척 갈길 가자는 말은 못 따라.”
아카아시는 주먹을 꼭 쥐었다. 주먹 안에 스며든 물기가 질척했다.
“널 보지 않는 것만은 내 맘대로 할 거야.”
“보쿠토상.”
“널 볼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
“저는…”
“네겐 네 방식이 있듯이 이건 내 방식이니까.”
대체… 보쿠토상은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제 방식은… 여기서 헤어지는 겁니다.”
“싫어.”
“비가 와서 그런 거라면 근처 편의점까지만 데려다주세요.”
“근처에 편의점 없어.”
보쿠토의 딱 잘라 떨어지는 말에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나랑 가고 싶은 다른 곳을 말해.”
막막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어디 갈래?”
당장 이곳을 벗어나 보쿠토와 멀리 떨어져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보쿠토의 고집을 꺾기엔 그의 마음이 늘 너무나 물렀다.
“어딜 가야 네가 죽지 않을 수 있어?”
이미 만나버린 이상 피할 수 없을 거란 거 아시면서… 아카아시는 눈을 꼭 감고 말했다.
“오랜만에… 학교나 가죠.”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좋지. 그렇게 말하는 보쿠토의 눈은 별로 기뻐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후쿠로다니 학원 앞에 도착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그런지 학교 앞은 인기척이 없었다. 보쿠토는 택시기사에게 돈을 꺼내 계산을 했다. 먼저 내려 우산을 받치고 있던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지갑을 보고 잠시 굳었다. 그가 택시에서 빠져나와 다시 그와 마주보고 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촤륵. 물과 바퀴가 마찰하고 부웅 소리를 내며 택시가 사라졌지만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들고 있는 지갑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 말 없이 슬며시 가방에 넣으려는 지갑을 아카아시가 잡아챘다. 우산을 보쿠토가 들어주고 아카아시는 그의 지갑 안을 살폈다. 색이 조금 바랜 메모지가 지갑 안에 붙어 있었다. 아카아시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글자를 짚었다.
[요리 잘 하시네요.]
그는 그 문장을 기억했다. 그가 잠가놓은 집안에서 나가기 직전. 몰래 이곳을 떠나 사고를 피하고자 했던 순간. 보쿠토가 그를 발견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마지막으로 적어놓은 문장. 2028년의 아카아시가 남긴 유서가 되어버린 그 작은 메모지를… 보쿠토는 줄곧 간직해오고 있었다.
죄송하다는 말이 싫다던 그 말이 떠올라 적었던 ‘요리 잘 하시네요.’라는 말. 아카아시는 후회했다. 그가 이 문장을 적고 보쿠토에게 보인 이상 매 끼니마다 그가 남긴 이 말을 떠올렸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카아시는 지갑과 메모지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보쿠토가 그 손을 잡아채 그러지 못하게 했다.
“떼지 마.”
“보쿠토상.”
보쿠토의 눈이 단호해 아카아시는 손을 거두었다. 아카아시가 그를 떠올리게 하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어 하는 반면 보쿠토는 어떻게든 그를 떠올리려는 방식의 차이일 것이다. 아카아시는 눈을 내리깔았다. 보쿠토는 지갑을 접어 가방에 던져 넣은 뒤 걸음을 옮겼다. 거창해진 바람소리와 물기에 젖은 운동장 모래가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밟히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학교 앞처럼 건물과 가까워져가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체육관 쪽으로 가면 아마 운동 중일 학생들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 다 그쪽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그에 대해서는 둘 다 일언반구도 없었지만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아마 보쿠토가 27세일 때 체육관에서 있었던 사고가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수업을 듣는 음악실이나 미술실보다도 자주 간 것이 체육관인데 의식적으로 그곳을 피하고 있는 현실에 아카아시는 마음이 씁쓸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체육관 코트를 밟으며 배구를 계속 해달라고 했던 요청이 정말로 이기적이었구나 싶었을 정도로.
“배구는 언제 은퇴하셨습니까?”
중간에 경비원을 만났지만 잃어버린 교과서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들어오며 아카아시가 말했다. 교복을 입은 덕분에 쉽게 들어온 그의 옷차림새를 물끄러미 보던 보쿠토가 말했다.
“30살 되는 해에.”
“…배구는 계속 하셨네요.”
그가 27세 때 죽으면서 배구는 계속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아마 오기로 계속 하지 않았을까. 복도에 물기를 아무렇게나 털어내며 보쿠토는 자연스럽게 아카아시가 다니던 반 앞에 섰다.
“쉬는 시간마다 매점 가고 싶으면 아카아시네 반 앞에서 이렇게… 창문으로 쳐다봤었는데.”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돌아보았다. 그는 창문에 딱 붙어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아카아시의 자리였던 창가 쪽에 닿아 있었다.
“처음에는 배가 고파서, 다른 애들은 자느라 바쁘니까, 같이 매점 가 줄 사람이 없어서 아카아시를 찾아온 거였나. 그런데 나중에는 알 수가 없어졌어. 매점을 가는 게 기쁜 건지, 아카아시를 보러 가는 게 기쁜 건지.”
보쿠토가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카아시도 천천히 그를 따라 들어갔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자리를 찾아 눈으로 짚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탓인지 두 개의 책상 중 고민을 하는 것 같아 아카아시가 정확한 자리를 알려주었다. 고마워. 보쿠토가 작게 중얼거리며 아카아시의 자리였던 의자를 빼서 앉았다.
“그거 기억나? 아카아시가 처음 나랑 맞춰봤을 때.”
“작년… 아니 1학년 때 인터하이 끝나고 여름합숙 때였죠.”
“그랬나? 그때 주장한테 혼났던 것 같은데.”
“단체연습 끝나고도 너무 무리한다면서 혼나셨죠. 아직 체력 완성도 안 된 애 잡는다면서요.”
“그때 아카아시 나름 나한테 잘 맞춰주지 않았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당시 1학년이기도 하고 실전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주전이 아니라 벤치로 밀려나 있었던 아카아시는 주전이었던 보쿠토와 여름합숙 때 처음으로 토스와 스파이크를 맞춰봤었다. 몇 번의 주고받음을 거쳐 서로가 나름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손을 떠난 공이 보쿠토의 손바닥에 의해 코트에 처박히는 순간 화악 오르던 열을 아직 잊을 수 없었다.
“그랬어?”
“제가 그랬잖습니까. 중간에 리타이어해서 체육관에 드러누워 있기도 했는데요.”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보쿠토가 창문 밖을 보았다. 창문 밖은 여전히 바람 섞인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있었다.
“내가 우산 안 가져와서 아카아시가 씌워준 날도 있었지?”
“네. 제가 분명 전날 연락드렸는데 말입니다.”
보쿠토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연락까지 했었어? 그날 엄청 기분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보쿠토상이 컨디션이 유독 좋긴 했을 겁니다.”
“어려워하던 거 성공이라도 했나.”
“다음해 주장으로 지명된 게 그날이었죠, 아마.”
아카아시의 담담한 말에 보쿠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아카아시는 다 기억하고 있네.”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무리 그가 여전히 18세이고 실제로는 일년도 되지 않는 기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라지만 지나치게 정확하고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오해가 아니라 보쿠토가 혹여 추측하고 있다면 그것이 맞았지만…
“나는… 나는 이제…”
보쿠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었다. 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린 그가 중얼거렸다.
“너와 보냈던 시간이 이젠 잘 기억이 나질 않아.”
약해진 보쿠토의 모습에 아카아시의 심장이 쾅 주저앉았다.
“너와 온전히 함께 한 건 고작 2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적어놓을걸. 더는 놓치지 않을 수 있게 더 기억해놓을 수 있게 미리 그랬어야 했는데.”
“…….”
“사고가 날 때마다 느꼈던 온갖 절망과 슬픔이 무뎌지는 건 그렇다 쳐도 너와 함께 있던 그 순간들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서…”
보쿠토의 숨이 길게 빠져나왔다. 탄식 같기도, 한숨 같기도 한 호흡이었다.
“어쩔 땐 이상하고 꿈만 같아. 어쩔 때는 불안하고 화가 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아있는 건 네가 살려준 목숨이랑 네가 남긴 이 종이밖에 없었으니까. 같이 있어도 절대 가까워질 수가 없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건 꼭…”
보쿠토가 말을 잠시 멈추고 생각을 고를 때, 아카아시는 힘겹게 가시처럼 걸린 말을 뽑아냈다.
“위성같네요.”
보쿠토상 주변에 묶여서… 다가갈 수 없이 돌 수밖에 없는 그런 위성 같은 존재.
“그런 건 싫어.”
보쿠토가 손을 내리고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한 번만 안아도 돼?”
아카아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까운 책상에 기대 서 있던 아카아시는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온기를 나누고 나면 처음부터 몰랐던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워질 텐데. 망설이는 사이 보쿠토가 그의 앞에 다가왔다. 손을 뻗어 아카아시의 등을 쥐고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가 안긴 그에게 보쿠토가 중얼거렸다.
“말 안 해줄 거야?”
“뭘요.”
“나 좋아한다는 말.”
“누가 들으면 신고해요.”
보쿠토는 웃지 않았다. 대신 깊은 한숨이 아카아시의 어깨 위로 흩어졌다. 한숨과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또 죽을까봐 그런 건 아니고?”
아카아시는 눈을 감았다. 대답하지 않은 그에게 보쿠토가 중얼거렸다.
“나는 얼마나 더 너를 잃어야 하는 걸까…”
보쿠토의 목소리가 꽤나 지쳐 있는 투라 아카아시는 서글퍼졌다. 정말 아홉 번을 채워야 끝나는 걸까. 끝나기는 하는 걸까. 이제 일곱 번째 삶이었다. 그는 어느새 보쿠토와 여섯 번이나 이별을 경험했다. 아홉 번에서 멈출 수나 있을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그가 오늘 이름 모를 주인의 집에 있는 노트북에서 발견한 파일 내용이 떠올랐다.
[미안해]
[시간은 반복된다]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모른다. 무슨 시간이 얼마나 반복된다는 건지도 모른다. 그 집 주인이 어떻게 아카아시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현실적인 상황이었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범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확실한 건 그저 그 메시지가 아카아시를 향한 말이라는 것밖에 몰랐다.
반복. 어차피 만나게 될 거라면… 아홉 번이라도. 아홉 번을 넘게 된다 해도…
당신의 시간마다 스며들고 돌면서 채워나가다보면… 가까워질 수는 없어도 어쩌면 평생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보쿠토에게 못할 짓아라는 걸 알면서도 아카아시는 그의 희생을 전제로 했다.
“같이 죽을까?”
하지만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안은 품에서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보쿠토의 눈동자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죽은 이후의 보쿠토는 모든 게 무거웠다. 그의 말도, 표현도, 행동도, 플레이 스타일마저도. 지금 들려오는 말 역사 무겁기 매한가지였다.
“네가 언제 올지 몰라서 너랑 다시 언제 만날지 몰라서 죽지도 못했어. 하지만… 차라리 지금 같이 있으니까, 차라리…”
“싫습니다.”
아카아시는 단칼에 거절했다. 보쿠토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난 죽는 거 무섭지 않아.”
“제가 무서워요.”
“아카아시도 계속 죽고 있잖아!”
“저는 다시 깨어날 거라서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건 보쿠토를 향한 마음에 있었지만 아카아시는 돌려 말했다. 보쿠토가 입술을 한 번 씹고 말했다.
“벌써 네 번이야.”
“…….”
“19살 21살 27살 35살에 널 잃었어.”
네 번…? 아카아시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분명 사고가 또 일어나게 된다면 아카아시는 날 대신해 죽겠지. 그럼 벌써 다섯 번째야! 눈앞에서 널 또 잃으라고? 차라리 내가 죽어!”
“장담 못합니다. 같이 죽을 생각도 없어요.”
“아카아시…!”
“그러니까 제가 모르는 척 가달라고 했잖아요.”
아카아시가 보쿠토에게서 완전히 벗어나 뒤로 물러섰다. 울 것 같은 보쿠토의 팔이 속절없이 허공에 떴다.
“그럴 바에는 제가 자진해서 죽을,”
“하지 마.”
아카아시는 무섭도록 가라앉은 보쿠토의 목소리에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한걸음 다가와 아카아시의 팔을 잡았다.
“내가 잘못했어. 같이 죽겠다는 말 안 할 테니까, 그 말은 하지 마. 죽… 죽겠다는 말은 하지 마, 제발.”
아카아시는 대답 대신 눈을 내리깔았다. 보쿠토는 다시 그를 당겨 안았다. 혹시라도 그가 다시 죽어버리겠다는 말이라도 할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보쿠토의 품에서 아카아시는 그를 마주 안았다. 잇새로 새어나가려는 죄송하다는 말이 이젠 그걸 꺼내는 것조차 너무 미안하고 송구스러워서, 죽어도 나 혼자 죽을 테니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짐을 혼자 떠맡고 있으라는 이기적인 부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기적인 마음이 괴로워서 그는 아프게 이를 악물었다.
죽는 건 제가 할 테니까… 보쿠토상은 버텨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카아시와 보쿠토는 교실을 나왔다. 경비의 눈에 띄었기 때문에 너무 오래 안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대충 무언가를 챙겨 나온 척 학교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가로수가 비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인도를 걷기 시작했다. 아카아시에게는 익숙한 길이었다. 등하교를 할 때마다 지나다니던 장소는 나무의 종류가 달라진 걸 빼고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학교 자체도 리모델링은 했을지언정 구조와 위치가 달라진 게 없어 예상한 일이었지만 불쑥불쑥 이는 기시감은 생각보다 더한 것이었다. 그가 맨 처음으로 보쿠토를 대신해 차에 치인 것도 이 길목이었지만…
[‘아카아시!! 잠깐 눈 감아봐!!’]
아카아시는 환청처럼 들리는 보쿠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언젠가… 추운 겨울날이었다.
[‘뭐하려고 그러십니까?’
‘엑, 그건 아직 비밀이라고! 어서 눈 감아 아카아시!’
‘신용이 가질 않습니다만…’
‘선배로서의 명령이다아!’
‘선배 대접 받고 싶으신 겁니까?’
‘앗? 아니 그런 것까진 아니고… 아! 그럼 주장! 에이스로서!!! 세터한테 부탁하는 거야!!’]
아카아시는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이고 어떻게든 눈을 감게 하려는 보쿠토에게 결국 두손두발 다 들고 원하는 대로 했었다. 깜깜해진 시야에 코끝에는 찬바람이 스쳤다. 묘하게 꿈틀거리는 마음이 왜 이러는지 몰라 의아하기도 할 즈음 보쿠토의 손이 아카아시의 팔을 잡아 소스라치게 놀랐던 순간. 뜨거운 온도의 손이 아카아시의 빈 손을 잡았던 순간. 펄쩍 뛰는 심장이 놀라 콜록콜록 기침을 뱉어내는데 손에 따뜻한 무언가가 씌워졌었다.
[‘아직 눈 떠도 좋다고 말 안 했는데!!’
‘…이게 뭡니까?’
‘장갑이지!’
‘장갑을 왜…’
‘아카아시는 내 세터잖아? 세터는 손을 잘 관리해야지! 추운 날 그렇게 맨손으로 다니면 안 돼.’
‘하지만…’
‘참.’
‘……?’
‘생일 축하해, 아카아시.’]
아, 그러고 보니 그 날은 아카아시의 생일이었다. 남자들끼리 징그럽게 뭐하러 생일을 챙기냐고 타박하던 배구부였다. 9월에 있었던 보쿠토의 생일 때도 여자 매니저들이나 케이크와 선물을 준비해 건네주었을 뿐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못 해드렸는데요.’
‘내년에 해주면 되잖아?’
‘안 해도 된다는 예의상의 말은 안 하시는군요…’
‘그렇지만! 아카아시한테는 꼭 받고 싶은걸!’]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몰라 얼떨결에 ‘예’라고 대답하고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샤워를 하면서도 침대에 누워 잠들기 직전까지도 떠오르는 말을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해버린 그날. 이듬해 5월 22일에 사고를 당해버린 아카아시는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셈이 되어버렸다.
“혹시, 저한테 받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보쿠토가 슬쩍 아카아시를 돌아보았다.
“말해도 아카아시가 주지 않을 것 같은데.”
“…비싼 겁니까?”
보쿠토가 단조롭게 웃었다.
“응.”
아카아시는 그의 수중에 있는 돈의 액수를 떠올렸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보쿠토의 말에 눈을 덧없이 깜빡였다.
“날 좋아한다는 말.”
“…….”
“어때? 비싸지?”
“…그러네요.”
아카아시는 휘잉 부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우르르쾅쾅 쏟아지는 천둥번개소리도 들었다. 씁쓸한 마음에 스치는 잊고 있던 불안감이 들었다. 수없이 반복되다보니 잊게 될 수도 있는 걸까. 너무나도 익숙해 심장이 두근거리는 종류마저 헷갈린 걸까. 아카아시는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걸었다.
다섯 걸음, 네 걸음, 세 걸음…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느낌이 이런 건지 궁금했다. 보쿠토는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고 아카아시는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은 긴장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며 걷는 속도를 유지했다.
두 걸음, 한 걸음…
우르릉… 쾅! 천둥번개 소리와 바람에 의해 덜컹거리는 소리가 심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카아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학교와 가까운 주택가에서 날카로운 외부 난간이 뜯긴 것도 그 순간이었다.
“보쿠토상.”
그를 막아서며 아카아시가 말했다.
“버텨주세요.”
익숙해질리 없는 상처를 한 번 더 긁어내며 아카아시는 절망하고 또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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