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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보쿠아카] 허용선

별골짜기 2016. 3. 11. 22:09

보쿠아카

허용선

아카른 전력 60(주제 : 질투)

 

 

 

 

보쿠토가 손을 내밀었다. 아카아시는 자연스럽게 사물함 열쇠를 건네주었다. 보쿠토는 헷 한 번 웃은 뒤 사물함을 열었다. 필요한 것을 단번에 찾아 골라낼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게 섞이고 정체를 알 수 없이 찢긴 종이조각들이 굴러다녔다.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 구겨진 소프트 커버 표지까지 찬찬히 살핀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돌아보았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다음 수업 때 필요한 전공 서적을 찾는 손길이 부산스러웠다. 쓰레기통처럼 보이는 안을 거리낌 없이 휘젓는 동안 사물함의 내부는 더욱더 처참해졌다. 참다못한 아카아시가 보쿠토에게 말했다.

 

사물함 안이 꼭 보쿠토상 방 같네요.”

 

주인의 방을 닮은 사물함 안을 쳐다본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드디어 찾던 책을 끄집어내고 문을 닫으려는 것을 제지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그의 짐을 보쿠토에게 떠넘기듯 건넨 뒤 그를 밀었다. 사물함 앞에서 밀려난 보쿠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아카아시는 사물함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구겨지고 찢어진 자질구레한 종이조각들을 일일이 확인해 필요한 거면 반듯하게 폈고, 필요하지 않으면 곧장 바닥에 버렸다. 아무렇게나 눕혀져 있어 꺼내지 않는 한 제목을 알 수 없는 전공 서적들도 하나하나 위치를 바꿔 책등이 보이도록 가지런히 세워두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난잡했던 사물함 안이 깨끗해지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보쿠토는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카아시는 사물함은 집과 달라서 보쿠토상이 정리해야 합니다.”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보쿠토는 습관적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가 하지 않아도 알아서 아카아시가 해줄 테니까. ‘직접 하세요.’제가 왜 합니까?’라고 뾰족한 말을 해도 정작 둥근 그의 손놀림이 부드럽게 모든 일을 해결해주는 것은 너무도 익숙한 패턴이었다.

 

다음부터는 혼자 제대로 정리하세요.”

 

깔끔하게 탈바꿈한 사물함 정리를 끝마치고 바닥에 잠시 버려두었던 쓰레기를 주우며 아카아시가 말했다. 보쿠토는 채 5분도 뇌리에 남지 않을 그럴게!”라는 대답을 던졌고, 아카아시는 그 대답이 탐탁지는 않은 듯했지만 넘어가 주었다.

 

점심 뭐 먹으러 갈까?”

오늘은 자판기에서 간단하게 뽑아먹죠.”

아아~ 그래도 식당을 가는 게 낫지 않아?”

수업 1시간도 안 남았는데 나갔다 오는 건 무리……

 

보쿠토의 간곡한 눈망울을 본 아카아시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최대한 빨리 다녀오는 겁니다. 체념이 반쯤 섞인 허락에 보쿠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의 손목을 잡고 신나게 정문 쪽을 향해 걸으며 그는 다시금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기분이 좋았다. 보쿠토에게 있어 하루는 아카아시가 유독 자신에게 무른 구석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순간들의 총합이었다.

 

 

 

 

오늘 경기 일정 나온다고 했던가요.”

. 그랬지.”

뭐가 . 그랬지.’입니까. 그건 보쿠토상이 먼저 챙기셨어야 하는 거잖습니까.”

잊고 있었어!! 그래도 아카아시가 말해줬으니 괜찮지 않아?”

 

햇수로 따지면 벌써 4년째였다. 후쿠로다니 학원에서 2, 그 사이 1, 도쿄의 대학에서 1. 아카아시는 여전히 그의 컨디션을 가장 잘 보살피는 사람이었다. 보쿠토는 그것을 그 사이 1지점에서 깨달았다. 아카아시가 보쿠토보다 한 살 어린 탓에 함께 있지 못한 1년 동안은 배구를 해도 하는 것 같지 않은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스트레이트를 멋지게 내리꽂아도, 크로스를 수백 번 갈겨보아도 채워지지 않는 어떤 갈증에 보쿠토는 슬럼프를 겪었다. 경기 중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컨디션 난조와 같은 종류가 아니었다. 그건 좀 더 근원적인 것에 있었다.

 

늘 그의 상태를 진단하고 적절한 처방을 내리는 아카아시는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을까. 반년 만에 찾은 후쿠로다니 학원에서, 보쿠토는 주장으로서 훌륭하게 팀을 이끄는 아카아시를 보았다. 연습 중 막무가내로 쳐들어가 토스를 올려달라고 한 보쿠토는 오늘만이라고 익숙하게 단서를 단 토스를 받자마자 손에 감기는 공의 감촉에서 깨달아버렸다. 그에게 지금껏 줄곧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그의 토스를, 그의 마음을 요구했다. 그가 거절해도 할 말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카아시는 그에게 물렀다.

 

드르륵.

 

핸드폰이 진동했다. 진동하는 바람에 핸드폰 위에 올려둔 지갑이 중심을 잃고 테이블 위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보쿠토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같은 과 여자 동기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점심 먹었냐는 짧은 질문이었다. 보쿠토는 힐끗 아카아시를 보았다. 아카아시는 유채겨자무침을 먹느라 이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보쿠토는 짧게 답장을 보낸 뒤 핸드폰을 다시 테이블 위에 뒀다.

 

드르륵.

 

내려놓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진동했다. 아카아시가 물었다.

 

급한 연락입니까?”

? 아니.”

 

보쿠토가 고개를 저으며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렸다.

 

같은 과 여자앤데 요새 자꾸 시답잖은 걸 물어보더라고. 밥 먹었냐, 뭐하냐, 연습은 잘 하냐, 이런 거?”

그래요?”

 

아카아시는 짧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기만 하고 다시 먹던 음식에 손을 댔다. 보쿠토는 고개를 기울여서 살짝 숙여진 아카아시의 얼굴을 읽으려 했다. 하지만 평소처럼 무표정하고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이 까만 물감처럼 번져 있을 뿐이었다. 결국 아카아시는 아무렇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너는 이마저도 나에게 무른가?

 

아카아시가 그에게 약하고 무르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순간은 스파이크를 성공시킬 때와 비슷한 짜릿함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별로 그렇지 못했다. 추욱 처져 시무룩해진 보쿠토가 아카아시에게 다시 말하려던 참이었다. 스르륵, 식당의 출입문이 열렸다.

 

? 아카아시!”

 

출입문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은 아카아시를 부르는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 보쿠토가 뒤를 돌아 소리 나는 방향을 보았다. 상큼하게 차려입은 여학생이 친구들과 들어서다말고 아카아시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밀조밀 들어찬 이목구비가 귀여운 얼굴이었다. 아카아시와 꽤 친한 것인지 수줍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여 보쿠토가 맞은편의 아카아시를 보았다. 아카아시는 여학생에게 짧게 손을 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누구야?”

과 동깁니다.”

친해?”

. 얼마 전에 과제 같이 했습니다.”

 

보쿠토는 뒤를 돌았다. 그들과 멀지 않은 자리를 골라 앉은 탓에 여학생과 아카아시는 위치와 거리상 마주보기 좋은 각도에 앉아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카아시를 신경 쓰듯 흘낏 쳐다보는 것이 보여 보쿠토야말로 신경이 슬슬 긁히는 기분이었다. 일부러 아카아시와 여학생 사이를 가릴 수 있는 최적의 자리로 의자를 고쳐 앉은 보쿠토가 앞에 놓인 음식을 먹었다. 아카아시는 그의 태도에 대해 뭐라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는 것 같았다.

 

보쿠토는 음식을 먹는 동안 뒤를 곁눈질했다. 신경 쓰이고 짜증나는 시선이 계속해서 아카아시를 향해 따라붙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회만 된다면 다시 말을 붙일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물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먹는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점점 젓가락질이 빨라지는 보쿠토를 눈치 채고 말했다.

 

천천히 드세요. 이따 연습경기 체해서 못나가지 마시구요.”

나가자.”

 

보쿠토는 결국 참다 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짜고짜 이어진 행동에 아카아시는 당황한 듯했지만 보쿠토는 곧바로 계산대로 가 카드를 긁은 뒤 어정쩡하게 일어선 아카아시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음식점 꽉 막힌 내부의 텁텁한 공기가 가시고 상쾌한 공기가 폐로 들어왔지만 보쿠토의 기분은 나아지질 않았다. 커다랗게 뜬 눈으로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여학생의 모습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아카아시의 손목을 더욱 꼭 붙들었다. 가까운 건물 사이의 좁은 틈새로 들어간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꽉 안았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거리에서 대담하게 안아온 보쿠토를 아카아시가 조금 당황한 손길로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보쿠토는 그를 더욱 꽉 안았다. 아카아시는 그에게 무르니까, 어차피 순응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보쿠토는 오히려 투정을 부렸다.

 

아카아시, 내가 여자들이랑 연락하는 거 짜증 안 나?”

별로요.”

? 나는 아카아시가 여자들이랑 연락한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데.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너무하는 거야?”

아니요, 그건……

그게 아니면 아카아시는 나에게 관심이 없는 거야? 아카아시는 나만큼 날 좋아하지 않는 거야? 대답해 봐. 역시 내가 막무가내라서 억지로 사귀는 건-”

 

아카아시가 한숨을 쉬었다. 그를 무작정 밀어내려던 손이 곧 보쿠토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왔다.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 위치로.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아카아시가 말했다.

 

저도 물론 보쿠토상이 여자들과 연락할 때 기분이 좋지만은 않죠. 하지만 여긴 대학입니다. 대학 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는 거 저보다 1년 먼저 대학생 된 보쿠토상이 더 잘 알 것 아닙니까. 무엇보다 저는…… 보쿠토상을 믿기 때문에 별로 걱정 안 합니다.”

 

보쿠토상은 그래서도 안 되고요. 아닙니까? 자장가를 부르듯 어조의 높낮이가 급하지 않은 차분한 말이었다. 긴장이 풀어지고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목소리. 그의 갈급함을 메우다 못해 넘쳐흐르도록 만들어주는 말.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어깨에 턱을 괴고 웃었다. 노랗게 번뜩이는 눈동자가 막 음식점에서 나와 이쪽을 보고 굳어진 여학생을 날카롭게 쏘아보는 동시에 휘어졌다.

 

반년 만에 찾은 후쿠로다니 학원에서 보쿠토는 주장으로서 훌륭하게 팀을 이끄는 아카아시를 보았다. 연습 중 막무가내로 쳐들어가 아카아시의 토스를 받자마자 그는 깨달아버렸다. 아카아시의 손에서 토스되는 공을 받은 후쿠로다니의 새로운 에이스를 향한 격렬한 투쟁심. 그동안 느껴본 적 없는 맹렬한 불안감.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토스를 해주길 바라는 동시에 그만의 에이스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토스를, 그의 마음을 요구했다. 아카아시가 거절해도 할 말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지금의 아카아시는 배구부 소속이 아니다. 오로지 보쿠토만을 위한 토스를 올린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보쿠토 코타로에게 놀라울 정도로 너그럽고 관대할 뿐만 아니라 받자했다. 그것이 무른 것의 기준이라면 불행하게도, 보쿠토 코타로는 앞으로도 아카아시 케이지에게 물러줄 생각이 없었다.

 

 

 

 

 

 

보쿠토 고집에 못이겨 결국엔 원하는대로 다 해주는 무른 아카아시와 반면 아카아시 사정 봐줄 생각 없는 보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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