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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보쿠아카] 부엉이의 눈

별골짜기 2016. 4. 23. 21:39

보쿠아카

부엉이의 눈

동양 AU 연상수

 

 

 

 

중서령(中書令).”

?”

또 자다가 나오신 겁니까.”

하하. 어떻게 알았어?”

 

아카아시의 시선이 스윽 쿠로오의 뻗친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의관을 아직 정제하지 않고 지나치게 자유로운 머리의 모양을 보면 그가 방금까지 어떻게 얼마나 자다가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아카아시의 시선 방향을 읽어낸 쿠로오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정돈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카락은 한 번 곧추서면 원래대로 돌아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 아무리 손으로 슥슥 빗어내려도 수습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관모를 쓸 것이기 때문에 가려지기야 하겠지만 여긴 황궁 내부였다. 지나다니는 궁인의 눈이 몇 개인데 이렇게도 자유로운 행색이라니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이해해줘. 오늘 동 틀 무렵에야 겨우 눈 붙였다고.”

저는 아직 눈도 못 붙였습니다만.”

 

이런 몰골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관료들의 기강을 중시하는 고리타분한 노친내들에게 공격을 받을 만도 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를 대놓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아카아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카아시가 아니어도 가능한 한 사람이 더 있긴 했지만, 그에게 지금껏 행색이나 몰골로 싫은 소리를 들어본 적 없었다. 너그럽고 인자한 아량이라기보다는 신경 쓰지 않는 것에 가까웠지만 황제도 문제 삼지 않는 일을 걸고넘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머리카락은 손 쓸 수 없어도 관복만은 나름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는 기묘한 불균형 상태라 지적이 꽤 애매하기도 했다.

 

이토록 젊고 자유분방한 이가 나라의 중대한 안건을 기안하는 중서성(中書省)의 재상이라는 사실은 처음 듣고 보면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피곤한 얼굴로 눈가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이유도 나이에 비해 쓸데없이 유능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 황궁 내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유들유들 가벼워 보이기는 해도 일단 공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면 냉철하고 날카로워져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도. 이 나라의 중대사라고 불릴만한 굵직한 안건들은 대부분 그의 손에서부터 나오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보낸 대로 통과시켜줬으면 됐잖아.”

 

그런 쿠로오에게 거리낌 없이 할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적자가 바로 문하성(門下省)의 시중(侍中) 아카아시였다. 쿠로오가 중서성의 재상이었다면 아카아시는 문하성의 재상이었다. 중서성이 보내온 안건을 심의해 황제께 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아카아시는 쿠로오와 함께 정사당이라는 기관에 동등한 품계로 속한 실력자였다. 몸 담고 있는 관직의 특성상 으르렁거리며 대립해도 이상할 것 없는 사이였지만 둘 사이는 그다지 나쁜 편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의 방향이 비슷했고, 무엇보다 그들은 동지였다. 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기로 충성을 맹세하고 생사고락을 함께 견뎌온 동료. 썩어가던 이 나라를 뿌리까지 태워 거름으로 두고자 손을 잡은 이해자.

 

그러게 계산을 좀 더 꼼꼼하게 하셨어야죠. 올해 26개의 현이 새로 편성되었으니 그곳의 가호(家戶)를 고려하여 공물을 거둬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 나인들 잊고 싶어서 잊었겠어. 26개 현 적용하는 거 내년부터인줄 알았다고.”

 

아카아시는 오래토록 붓을 잡아 뻐근한 손을 매만졌다. 쿠로오가 기안해오는 안건을 거부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정책을 좋아했지만 가끔 그가 자잘하게 실수하는 부분이 있어 그것을 확실하게 해두기 위해 돌려보내는 것뿐이었다. 오늘 새벽까지 쿠로오가 잠들지 못한 것도 최근에 추가로 편성된 현의 개수를 포함하지 않은 계산을 바로잡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중서성의 재상과 상서성의 재상이 의견대립이 격화될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놓은 정사당도 사실 별로 쓸모가 없었다.

 

다음부터는 제대로 계산해서 보내세요. 아카아시가 뚜렷한 어조의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계산만 잘못되지 않았다면 바로 안건을 통과시켜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쿠로오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중요하게 떠올라 곧 처리해야 하는 다른 민생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카아시의 시선이 저 멀리 황제가 기거하는 효곡(梟谷)궁을 짚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미로처럼 구불구불 복잡해 초심자는 길을 잃기 일쑤였지만 그들은 거의 매일 찾아가는 곳이라 그럴 일이 없었다. 쿠로오와 아카아시가 눈 감고도 익숙하게 찾아갈 수 있는 길을 걸어갈 때였다.

 

황제에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정숙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고 침묵의 밀도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눈이 멀어 보지 못하고 귀가 먹어 듣지 못하고 혀가 굳어 말하지 못해 죽은 시늉밖에 할 수 없는 이들이 걸음걸이마저 조심스럽게 내딛는 곳이었다. 하지만 살금살금 바람을 갉아먹는 소곤거림이 들렸다. 이곳에서는 절대적으로 들려서는 안 될 은밀한 목소리였다. 아카아시가 걸음을 멈췄다. 쿠로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카아시는 무섭도록 차가워지고 쿠로오는 난감해졌다는 차이만이 있었다.

 

어젯밤에도 폐하께서 주안상을 들이셨다며?”

. 어제 내가 차려 들어갔는걸.”

, 정말이야? 그럼혹시 어제 효곡궁에 누가 들었는지 알아?”

으응? 문하성 시중께서 드셨지.”

. 역시.”

놀랄 것도 없잖아. 두 분 사이 각별한 건 알려져 있고.”

각별이라기보다는그 소문 있잖아폐하랑 문하성 시중이그보다 더깊은 사이라는

 

아카아시는 굳이 인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자박자박, 몇 안 되는 모래가 신발 아래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전각 구석에 숨어 대화를 나누던 두 궁녀가 가까워지는 아카아시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평소에도 풍부하지 않아 황제에게 빈축을 사곤 했던 표정이 지금은 더욱더 완벽하게 지워져 있었다. 내리깐 눈에도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말없이 지그시 보고 있었을 뿐인데도 궁녀들의 바들바들 떠는 어깨가 보였다.

 

쿠로오는 낭패라고 생각했다. 궁에 들어와 일을 하기 시작하며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혀를 놀리는 법이거늘, 사과를 베어 물듯 가벼이 속삭이는 입놀림을 하필 당사자에게, 그것도 황제의 최측근 중에서도 최최측근에게 들키다니. 운이 없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황궁 돌아가는 사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 시간에 황제께 향하는 길목에서 이런 대담한 언행을 보이지는 않았을 테니 후자라고 봐야 맞을 것이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생각한 쿠로오는 혀를 찼다. 상대를 향한 동정이 아니었다. 미련한 경거망동을 탓하는 뜻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 송구하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고개가 곧장 바닥에 닿을 것처럼 처박혔다. 벌벌 떠는 모습이 보였다. 아카아시의 단정한 눈썹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그것이 이 상황이 희망적으로 마무리될 것임을 뜻한다고 착각한다면 오산이다. 쿠로오는 궁녀 둘을 한번 쳐다보고 생각했다. 그러게 송구할 일을 왜 저질러.

 

입궁한지 몇 년이나 되었느냐.”

, 반년이옵니다

반년이라

 

아카아시가 잠시 생각을 마치더니 조용히 사람을 불렀다.

 

여봐라.”

 

마침 지나가던 노상궁(老尙宮) 하나가 아카아시 앞에 이르러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를 본 궁녀 두 명의 안색이 더욱 파리하게 질렸다. 오들거림이 더욱 심해져 꼭 부여잡은 두 손이 덜덜 떨리는 모습이 환히 보일 정도였다. 상궁 중에서도 산전수전을 다 겪고 버텨낸 노상궁의 노쇠하였지만 날카로운 눈동자가 입을 방정맞지 못하게 놀린 두 궁녀를 살폈다. 아카아시는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의 지척에 쥐새끼가 있어서야 되겠는가.”

를 보셨사옵니까.”

기어들어온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도 모르고 겁도 없이 곡식을 갉아대고 있으니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겠네.”

그렇지요, 빗자루질로 속히 쓸어 잡겠사옵니다.”

 

아카아시의 차디찬 까만 눈동자가 궁녀들에게 떨어져 내렸다. 이 나라 정책을 결정하는 실세 중의 실세, 황제를 지금의 자리로 있게 올려놓은 공신 중의 공신, 그리고……

 

달이 뜨지 않았다 하여 이토록 천지가 어지럽다면 달이 뜬다 하여도 고개를 들 수 없지 않겠는가.”

명심하겠사옵니다.”

 

황제를 위해서라면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쏟아도 후회 없다는 맹약을 건 무조건적인 군사.

아카아시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아카아시의 얼굴은 더욱더 메마르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시나무 떨듯 몸을 움츠린 두 궁녀가 느린 걸음으로 노상궁을 따라 사라지는 것은 발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본 쿠로오는 느릿하게 아카아시를 따라가며 말을 붙였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었나?”

 

아카아시의 매서운 시선이 쿠로오에게 닿았다. 쿠로오는 그 시선을 모르는 척 고개를 자연스럽게 돌려 피하며 말했다.

 

보쿠, 아니 폐하께 불경스러운 말을 한 건 사실이지만 네 선에서 처리할 수 있던 일을 내명부로 보낸 이상 저 둘 무사하지 못할 거야.”

그래서 동정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어이, 그럴 리가 있냐. 나는 단지 네가……

 

네가 어쩌면 그 말을……. 쿠로오는 말끝을 어물거렸다. 망설이는 표정과 말투에서 그의 말을 귀신같이 눈치 챈 아카아시는 서둘러 그의 입을 막았다.

 

쓸데없는 소리라면 그만두세요. 더 이상 입 밖으로 냈다간 아무리 중서령이라도 그 죄를 중히 물을 것입니다.”

아아, 알겠다고.”

이제 곧 폐하를 알현할 테니 의관을 정제하시지요. 시중으로서 대접도 부탁드립니다.”

 

말에 더욱 격식이 붙었다. 쿠로오는 한숨을 내쉬며 관모를 뒤집어 쓴 뒤 대답했다.

 

그러지요, 재상.”

 

 

 

 

폐하.”

 

아카아시가 나지막이 보쿠토를 불렀다. 쿠로오와 아카아시의 보고를 들으며 잠깐 졸던 그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언제 졸았냐는 듯 눈가에 힘을 팍 주고 손에 든 두루마리를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자연스럽게 옛날 일이 떠올랐다. 보쿠토가 황위에 오르기도 전 아주 철없고 어렸던 10살의 어느 날, 그가 가르치는 경전을 읽으면서도 나른한 봄기운에 못 이겨 꾸벅꾸벅 졸다가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어떻게든 집중하려 애쓰지만 속절없이 다시 졸음기에 파묻혀버리던 그 옛날의 일상이. 하지만 그건 돌아갈 수 없는 과거였고 지금의 보쿠토는 황제였다. 봐주지 않는 척 봐주었던 그때와는 달랐다.

 

그래서 제가 간밤에 일찍 침수에 드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처리할 게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었, .”

 

잠기운에 미약하게 잠식되어 되는 대로 말을 뱉던 보쿠토는 그가 실언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하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아카아시의 냉정한 시선이 이어졌다. 언제 받아도 괜히 찔리고 저절로 성찰하게 되는 눈빛이었다. 보쿠토는 늘 그렇듯 익숙하게 그의 눈동자를 피했지만 엄격한 목소리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간밤 주안상을 권하실 땐 다 끝나셨다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그랬는가아?”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는 여전히 잘 기억나지 않는 척 딴청을 피웠지만 사실이었다. 보쿠토는 밤이 적적하다는 핑계를 대고 아카아시를 불러 주안상을 차리곤 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침수에 드시어 부족한 잠을 보충하라는 아카아시의 간언에도 그는 꿋꿋했다. 아카아시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빠져나오려고 하면 황제의 명이라는 득달같은 무기가 내세워졌다.

 

황제의 명, 그리고 재상의 간언. 언뜻 보면 두말할 필요 없이 전자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 같은 줄다리기는 의외로 매번 팽팽했다. 보쿠토에게 아카아시는 그저 재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를 황제의 자리에 있게 만들어준 공신이라는 것보다 더 큰 유대가 둘 사이에 있었다. 보쿠토가 황제도, 태자도, 계승 서열에 한참 밀려 아무것도 아니었던 10살 남짓한 어린 시절부터 그를 가르치고 돌보고 아껴준 스승이라는 점이 지금의 아카아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비록 그가 원한 일이 아닐지라도.

 

하지만 보쿠토만큼 아카아시도 만만찮게 약했다. 스승님 스승님 하며 잘 따랐던 어린 제자가 그의 키를 추월하고 덩치가 커지고 만인지상의 황제가 되었다고 해도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옛 모습 때문에 더욱 그랬다. 분명 장단을 맞추면 안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한수 물러 그의 뜻을 관철해주고야 마는 일이 반복되었다. 늦은 밤 주안상을 차려 담소를 나누는 것도 기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지만 아카아시는 꼼짝없이 붙들리곤 했다.

 

다 안 끝냈어도 상대해줄 거였으면서. 쿠로오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 웃었으나 아카아시의 시선이 닿자마자 움찔하곤 온힘을 다해 웃음을 참았다. 보쿠토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끝까지 다신 그러지 않겠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걸 아카아시만 몰랐다. 알면서도 말로만 그러는 걸지도 몰랐고. 아카아시는 역시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한숨을 내쉬며 다음 두루마리를 보쿠토에게 내밀었다. 보쿠토가 냉큼 그에게서 받아든 두루마리를 펼쳐 읽었다. 이부(吏部)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이번에 있던 명경(明經)과에서 선발된 이들의 임명에 관해서는 이부상서(吏部尙書) 츠키시마 케이가 다시 올릴 것입니다.”

다들 나이가 꽤 있네. 난이도가 있었나?”

 

보쿠토가 소감을 말했다. 말이 지나치게 편했으나 아카아시와는 달리 딱히 문제 삼지 않는 쿠로오가 대답했다.

 

시험을 오래 준비한 이들에게 유리한 문제가 나온 모양입니다.”

누가 보면 진사(進士)과 합격 명단인 줄 알겠어.”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명경과에서의 합격자들은 나이가 꽤 있었다. 30세에 명경에 급제하면 너무 늦고, 50세에 진사에 급제하면 너무 빠르다는 말이 돌 정도로 상대적으로 합격자들의 평균연령이 낮은 시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카아시가 사견을 덧붙였다.

 

이부상서가 진사과 시험 문제를 너무 어렵게 냈다는 소문이 돌아서 몰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어렵길래. , 말 안 해도 돼. 문제까지는 안 궁금해.”

흐음. 정말이십니까? 황제 폐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는 아카아시는- (“시중입니다.” 아카아시가 정정해주었다.) , 편하게 얘기하고 싶은데. 시중은 누워서 떡먹기 아니겠소?”

글쎄요.”

시중은 진사과를 스물다섯에 합격하지 않았는가?”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워 아카아시는 시선을 피해버렸다. 옆에서 쿠로오가 최연소! 대단하시오!”라고 부채질을 하는 바람에 꽤 민망하게 되었다. 사실 아카아시도 될지 모르고 친 과거에 덜컥 붙어버린 거라 많이 놀랐었다. 보쿠토를 황제의 자리에 올려야겠다고 다짐하고 마음먹은 것과 동시에 조정 내부의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데, 붙으면 좋고 떨어져도 차선책은 있던 상황이라 가볍게 임한 과거에 붙을 줄은 누가 예상이라도 했던가. 쿠로오도 몰랐고, 그의 부모님마저 몰랐던 일을, 유일하게 보쿠토가 예상했다며 뛸 듯이 기뻐했었다.

 

그건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니질 않습니까. 일단 굵직한 안건은 이게 전부인데……

설마 또 있어?”

 

아카아시는 잠시 침묵하고 물끄러미 보쿠토를 보았다. 감히 황제의 용안(龍眼)을 꼿꼿이 선 고개로 보지 않는 그의 태도가 한순간에 바뀌었다는 건 아카아시가 재상으로서가 아닌 스승으로서 대하겠다는 뜻과도 같았다. 팔걸이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보쿠토가 손을 내렸다. 옆에서 똑바로 서 있던 쿠로오도 머리에 쓰고 있던 관모에서 해방되어 머리를 손으로 슥슥 쓸어 넘겼다.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에서 다소 벗어난 세 사람 가운데서 아카아시가 말했다.

 

내명부의 주인은 언제 맞이하실 생각이십니까.”

 

보쿠토의 눈매가 잠시 찡그려졌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했잖아.”

폐하께옵선 이미 약관(弱冠:20)을 앞에 두고 계십니다.”

아카아시는 이립(而立:30)을 앞에 두고 있지.”

 

아카아시가 끼어든 쿠로오를 쳐다보았다. 쿠로오는 관모의 안쪽을 살피는 척 만지작거렸다. 반면 아카아시가 걱정하는 젊은 황제 보쿠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직열아홉인 거지. 쿠로오 말처럼 스물아홉 아카아시도 아직 결혼 안 하고 있잖아.”

저와 폐하가 같습니까? 폐하는 이 나라의 지존이십니다. 황후의 자리가 오래 비워져 있으면 내명부의 기강이 흔들립니다.”

아카아시가 봐주면 되잖아.”

저도 한계가 있습니다.”

 

보쿠토가 팔걸이에 새겨진 황룡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아카아시의 얼굴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바닥까지 닿았다.

 

천천히 생각해볼게.”

…….”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보쿠토가 침울하게 중얼거리듯 답했다. 아카아시는 그에게서 무겁게 시선을 떼어냈다.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고개를 숙여 본연의 재상으로 돌아온 아카아시는 조그맣게 혀를 차는 쿠로오를 보지 못했다. 대신 입술을 꾹 깨물 따름이었다.

 

 

 

 

아카아시는 일주일 만에 정무를 마치고 겨우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아직 해가 떠있을 때였지만 지난 일주일 내내 밤을 새느라 고생한 것에 비하면 하루는 통으로 받아도 모자를 일이었다. 특히 주변국과의 교역 범위에 관하여 보쿠토와 쿠로오와 아카아시 세 명 간에 약간의 의견 마찰이 있던 것을 세심하게 조율해야 했으므로 신경이 더욱더 곤두서 있었다. 결국 보쿠토가 처음 내놓은 의견에 가깝게 마무리가 되어 수출 금지 품목을 몇 가지 정해두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가졌건만 혹시 놓친 부분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이러다가는 쉬는 것도 쉬는 게 아닐 것 같아 아카아시는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시중을 받으며 몸을 풀었더니 눈가가 노곤했다. 거의 날밤을 새며 일을 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무렇게나 펼친 이부자리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으니 잠이 들락 말락 했다. 스승님은 잠도 불편하게 드시네요. 앳된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조그만아니, 기억보다 커다래진 손이 그의 얼굴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스승님을 연모해.

 

! 아카아시는 들려던 잠을 헤치고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지자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화로를 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온 몸이 뜨끈뜨끈했다. 아카아시는 놀라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자책감이 어른거리는 숨과 섞여 그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내가 뭐라고. 내가 어떻게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을 조이는 죄악감이 불안했다.

 

잠에 들기 전 늘 바람이 투영된 환상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마음을 대충 짐작하고 있을 쿠로오조차 그의 숨은 욕심을 알지 못했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어떻게 황제자리에 앉으신 분인데. 이 나라에 군림하고 이 나라를 이끄는 데 이토록 적합한 분이 없는데. 추문 따위에 이름이 더렵혀질 분이 아닌데. 주군으로 선택하고 그 뒤를 따르며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해주고 있는데. 정작 그를 풍랑에 내던진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스승은 삐뚤어진 마음을 먹고 왜곡된 상상을 하며 거짓된 가면을 썼다.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하는 것조차 아득하여 아카아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못내 귀엽기만 했던 어린 제자가 그를 향해 등을 내어줄 때였던가. 부서질까 조심히 부여잡았던 작은 손이 어느새 혼란스러운 전쟁통에도 그를 단단하게 끌어당길 때였던가. 해맑은 미소를 띠며 이대로 살아도 좋다 그리 말하던 얼굴이 단호한 의지를 끌어안은 채 황제가 되겠다며 번뜩일 때였던가. 어느 순간을 짚어보아도 이 마음이 미련하지 않은 적이 없어 언제 끝날지도 기약이 없는 것일까. 아카아시는 속이 쓰렸다.

 

외면하고 무시해보아도 잊을 때쯤 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그것이 완전히 시들어버리고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아카아시는 방황했다. 외면해보기도 하고 매정하게 굴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밀려드는 자책과 자책을 빙자한 합리가 그의 속을 태웠다. 그러니 짝을 지워주면 되지 않을까. 적당한 규수를 골라 떠넘기듯 안겨주면 억지로나마 이 마음을 걷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황실의 후계라는 구실 좋은 핑계로 그는 스스로를 설득하고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피어나려는 반론은 싹이 틔기도 전에 밟아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나라의 절반이 여자다. 신분의 고하(高下)는 상관없었다. 배경이 과한 것보다는 아예 없는 것이 나았다. 그까짓 것쯤은 그의 손짓 한 번이면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었다. 그러니 좋은 여자를 찾아야 한다. 황제가 되는 길을 선택한 이후로 바람 잘 날 없었던 그를 보듬고 위로하고 살펴줄 좋은 여자를.

 

아카아시는 촛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아직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모든 경우의 수를 파악하는 그의 본업을 빗대어 어둠보다 한 발 앞서야 했다. 어둠이 지고 시야에 까만빛이 드리우면 그는 또 멋대로 상상해버릴 테니까. 일어나지 않을 일을 원하게 될 테니까. 없는 일을 만들어내서라도 그 마음을 밀어내야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나으리, 나으리!”

 

아카아시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약해진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모두가 알고 있는 이 나라 최고의 재상 아카아시 케이지의 모습으로 돌아와 엄하고 강단 있는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일이냐.”

송구하옵니다.”

 

그의 식솔 하나가 문밖에서 조심스럽게 아뢰어왔다.

 

급히 황궁으로 가보셔야 할 듯싶습니다.”

……?”

그게……

 

 

 

 

아카아시는 급히 의관을 정제해 집을 나섰다. 돌아온 지 반 시진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황궁으로 향하는 가마 위에서 착잡하게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식솔이 남긴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황궁으로 급히 갈 채비를 한 이유. 아카아시가 황제의 허락을 받고 돌아가 쉬고 있던 그 사이 보쿠토가 관료들과 진행하던 회의에서 큰 목소리를 냈다고 했다. 황제인 그가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균형과 중심을 잡기 위해서도 그의 목소리는 커야 했다. 하지만 오늘 그가 큰 목소리를 낸 이유는 균형과 중심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태상시(太常寺)의 경()…… 나으리가 계시지 않는 틈을 타 폐하께 간언을 올린 모양입니다. 문하성의 재상은 나이와 직책에 비해 과하게 중한 업무를 짊어지고 있으니 그 짐을 덜어주는 것으로 정사를 그르치지 않게 함이 옳다고……

 

다름 아닌 그 때문이었다. 아카아시가 처음 과거에 합격한 25. 그리고 빠르게 승진하며 조정 내외부의 상황을 파악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길 2. 전대 황제의 붕어(崩御) 직후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해 상대가 제대로 반격해오기도 전에 황궁을 점령하기까지 반년. 시국을 빠르게 안정시키고 기틀을 다져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 년 하고 반. 그 선봉에 선 것이 아카아시였고 쿠로오였다. 보쿠토는 그에게 문관 최고직인 승상 자리를 주려 하였으나 실무를 책임지기 위해 지금의 자리를 선택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은 꽤 많았다. 주로 전대 황제의 편을 들었던 잔재들이 그러했다.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간언하는 치졸함도 마찬가지였지만, 애써 포장하려는 성의도 떨어졌다. 나이와 직책에 비해 과하게 중한 업무. 고금(古今)을 통틀어 이 나라가 지금과 같은 태평성대를 누린 적은 없었다. 쿠로오와 아카아시가 그 나이와 직책에 비해 과하게 중한 업무를 맡아 쏟아 부은, 뼈를 깎고 살을 베어낸 피나는 노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보쿠토는 그렇게 대응하면 안 되는 거였다.

 

며칠 잠들지 못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노력이 폄훼되고 가치가 깎이는 일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인 이후부터 무뎌지고 익숙해져 화도 안 났다. 보쿠토에게도 그렇게 설명하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던 일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혹여나 그런 말을 듣는다 하셔도 웃어넘기십시오. 보쿠토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러지 못하겠다고 했었다. 황제는 균형을 지켜야 할 자다. 아카아시는 그것을 알고 있으리라 여겼으나, 보쿠토는 늘 솔직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가마에서 뛰어내리듯 내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걸음걸음 사이로 초조함이 묻어나왔다. 그를 발견한 익숙한 얼굴들이 인사를 해왔지만 그는 유례없이 성의 없게 그들을 대한 다음 쳐들어가듯이 보쿠토가 있을 효곡궁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왔음을 알리는 환관의 목소리에 응답이 들여오자마자 아카아시는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보쿠토는 앉아있지도, 누워있지도 않고 서 있었다. 아카아시가 그의 앞에 다가가 뭐라 말도 하기 전이었다.

 

폐하, 도대체 이 무슨……!”

 

아카아시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눈이 크게 떠져 하던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보쿠토가 그를 막무가내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기 때문이었다. 아카아시의 턱이 보쿠토의 어깨에 부딪치고, 반사적으로 한발 떨어져나가려 했지만 보쿠토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품에 꽉 붙들린 아카아시는 입술을 꽉 물었다. 얼굴이 보일 수 없는 자세라는 것이 다행이기도 했고 불행이기도 했다.

 

폐하, …….”

아무 말도 하지 마.”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그건 황제로서의 명령이라기보다는 보쿠토로서의 부탁에 가까웠다. 가벼운 숨이 아카아시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바짝 긴장한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말을 들었다.

 

혼내러 온 거 알아. 그렇지만 내 사정도 생각해줘. 화가 나서 어쩔 수 없었으니까.”

제가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카아시가 조용히 대꾸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늘 들어오던 말이니 상관없다고? 괜찮다고? 그러니 가만 있으라고? 나는 그 당부에 그러겠다고 한 적 없어.”

 

보쿠토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쾌활하고 자신감으로 넘치는 사람이다. 황제가 되기 이전에도 그랬지만, 황제가 된 이후에도 그랬다. 정적을 가리지 않는 호탕함과 차별 없는 시원시원함으로 인해 진지함이 부족하다고 여겨져 나이 많은 관료들에게 낮추어 보이는 경향이 있었으나 그건 그들의 오만이자 착각이었다. 아카아시가 그를 선택해 황제의 자리까지 올린 이유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거늘. 보쿠토는 늙은 고관(高官)들이 측근인 아카아시를 욕보인 것이 자신을 무시했다 여길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카아시는 내 아버지이자 형제이자 스승이자 친우이니아카아시를 욕보이는 것은 곧 나를 욕보이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래, 단지 그뿐이다. 아카아시는 눈을 감았다. 보쿠토의 품과 목소리가 좋으면서도 서글퍼졌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모르는 위험한 정을 하나 더해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은 지 오래였으니까. 눈을 뜨긴 떴으나 내리깐 눈으로 그가 애써 화제를 돌렸다.

 

친우라기에는 너무 나이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만.”

, 아카아시, 분명 전에는 벗을 들이는 기준에 신분의 고하는 상관없다고 했으면서 나이 차이는 중요한 거야?”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품에서 떼어냈다. 당혹스럽게 커진 금색 눈이 보였다. 아카아시는 표정을 관리하려 애쓰며 답했다.

 

제가 그랬던가요.”

정확히 지학(志學:15) 둘째달 초하룻날 그랬다고!”

 

그건 어떻게 기억하고 있던 건지. 아카아시조차 가물가물한 기억이었다. 아카아시는 조용히 말했다.

 

이젠 잊어버리세요. 황제이신 이상 신분, 나이, 배경 모두 중요합니다.”

 

보쿠토가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난 아카아시와 계속 친우 할 거야.”

폐하.”

싫다고 하면 내일 일 안 해! 파업이다!”

 

보쿠토가 등을 돌려 팔짱을 꼈다. 꽤 단호한 움직임이었으나 그의 시선이 힐끗힐끗 등 뒤의 아카아시를 살피는 눈치가 보였다. 9, 거진 10년을 알아 왔다. 아카아시는 모를 리가 없었지만 보쿠토는 아직도 모르는 듯했다. 이 아무 뜻 없는 행동들이 그의 마음을 얼마나 괴롭히고 흩트리는지. 낮게 내리뜬 눈으로 아카아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뜻대로 하세요.”

정말이지?”

 

금세 환해진 보쿠토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아카아시가 대응할 새도 없이 보쿠토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

그럼 이왕 온 김에 친우와 술 한 잔 하시게나.”

폐하!”

게 있느냐! 주안상을 들여라!”

 

목적은 그거였나. 아카아시는 긴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보쿠토에게 끌려갔다. 손목을 감은 보쿠토의 손은 어느새 크고 굵어져 있어 아카아시의 마음을 바람 앞 등불처럼 흔들리게 만들었다. 폐하께옵선 모르시는 게 너무 많아서소신은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그 어렸던 시절처럼 이젠 제 마음마저 가르쳐드려야 하는 걸까요. 이 마음을 가르쳐드려도 저를 아버지라고, 형제라고, 친우라고, 스승님이라고 불러주실까요. 저를 어떻게 보게 되실까요. 아마 마지막 가르침이 되지 않을까요. 차라리 그게 나을까요. 재상으로서 정말 실격이라고,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또 한 번 잘게 침전시켰다.

 

 

 

 

아카아시, 기억나? 내가 열여섯 되던 해였나? 아카아시 과거 합격하고 한창 바쁠 때! 태자가 배우는 경전 공부하라고 책 산더미처럼 안겨주고는 입궁해서 며칠 만에 퇴궁하고 그랬잖아.”

 

보쿠토는 골막하게 찬 술잔을 입에 대며 중얼거렸다. 침상 위에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홀짝이는 술은 맛이 좋았다. 아카아시는 섭섭하게 느껴질 정도로 보쿠토와 있을 때는 시급한 민생현안에 대해서만 얘기하려고 했다. 반면 보쿠토는 어릴 적 있었던 즐거운 추억들을 꺼내놓길 즐겼다. 주안상이 차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까지는 아카아시의 의도대로 대화가 흘러갔다. 하지만 그걸 보쿠토가 받아주는 이유는 머지않아 그가 승기를 잡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때 아카아시 바빠서 내가 제대로 공부하나 공부 안 하나 감시도 제대로 못했잖아! 겨우 쓰러지듯 자버리기 직전에 문제 나한테 몇 개 시험해보기만 하고. 아카아시는 궁에 가 있을 때 내가 엄청 열심히 공부한 줄 알았지? 사실 공부하기 싫어서 몇 번 도망쳤다?”

 

보쿠토는 고개를 돌려 아카아시를 보았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고개가 나른나른 흔들렸다. 보쿠토의 말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아카아시는 술에 약해 얼마 버티지 못하고 금방 졸곤 했으니까. 그렇기에 초반 조금만 견디면 보쿠토는 마음껏 아카아시에게 추억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었다.

 

물론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혹사라고 여겨질 정도로 심하게 몰아붙이곤 했다. 어린 시절, 그가 열다섯이 되기 전, 황제가 되겠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잘만 잤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아카아시가 제대로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보고 합격을 하고 관직을 얻었을 때는 이해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이룬 지금까지도 이상하리만치 잠들지 않는 것은 문제였다. 그래서 술의 힘을 빌려 그를 억지로라도 재우고 싶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잃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도 열어두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카아시도 알고 있겠지만, 아카아시가 가르쳐주지 않은 공부는 정말 하기 싫었는데 억지로 했어.”

 

보쿠토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는 한군데 진득이 눌러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억지로라도 했다.

 

공부하지 않으면 아카아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찾아서 떠났을 테니까.”

 

아카아시는 쿠로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주로 이 나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썩어빠진, 곪은, 도려내야, 인재, 황제, 혈통…….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그가 열다섯이 되는 해여서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아카아시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황제. 아무 힘도 권력도 없는 태자. 호시탐탐 황위를 노리는 서열권 황자들. 흉흉해진 민심. 톡 건들면 터져 나올 불만으로 혼잡스럽기 그지없는 이 나라에서, 아카아시가 가진 그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황실의 고귀한 피와 황족임을 상징하는 황금빛 눈동자.

 

아카아시가 그에게 알려준 것은 많았다. 진정한 황제의 자세. 바르게 굴러가는 세상의 모습. 백성들이 살아가는 방법.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게 끊임없이 나오는 지식. 이 세상의 이치. 그리고아카아시의 습관. 아카아시가 좋아하는 음식. 아카아시가 싫어하는 행동. 아카아시를 웃게 만드는 방법. 아카아시를 속상하게 만드는 방법.

누군가를 절절하게 원하는 마음까지.

 

내가 왜 황제가 되었는데.”

 

아카아시가 모든 것을 바쳐 충성을 맹세할 사람이, 아카아시가 어떻게든 떠받들고 지키려들 사람이, 아카아시가 밥을 굶고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신경 쓸 사람이, 아카아시가 힘들고 지쳐도 간혹 웃음지어 줄 사람이 그가 아닌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어서. 아니,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는 황제가 되기로 했다.

 

난 아카아시가 아니면 안 돼.”

 

아카아시는 그가 하루바삐 달을 맞이하기를 원하지만 보쿠토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황제가 되었고 그가 원하는 정책을 펼치며 그가 원하는 대답들을 들려주었으나, 이것만은 그럴 수 없었다. 준비는 이미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스승님.”

 

열다섯, 비가 내리던 밤 아카아시의 앞에 서서 황제가 되고 싶다 청했던 그날 이후로, 깨어있는 그의 앞에서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 없는 말을 입에 또 한 번 담았다.

 

스승님은 늘 이리도 불편하게 잠들고

 

둘 사이를 차지하고 있던 주안상은 저 멀리 치워버린 지 오래였다. 보쿠토의 뻗은 손이 아카아시의 어깨를 가볍게 짚어 침상에 뉘었다. 지그시 내린 눈으로 아카아시의 눈 감긴 얼굴을 살피던 그가 볼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가만가만 속삭였다.

 

내가 스승님을 연모해.”

 

취해서야 편히 잠드는 아카아시에게 꾸역꾸역 밀어 넣은 이 말을 직접 들려주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보쿠토는 확신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고요히 타오르며 빛났다. 어차피 승기는 보쿠토의 손에 넘어와 있었다.

 

 

 

 

 

 

당나라 관%제를 따오기는 했지만 여러 개 짬뽕해서 손가는 대로 막 썼습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ㅜㅜ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보쿠토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을 뿐...

보쿠토 19세 아카아시 29세 쿠로오 +1~2세 보쿠토는 두 사람에게 전부 반말 사용. 아카아시는 두 사람에게 전부 존댓말 사용. 쿠로오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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