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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보쿠아카] 두지붕 한가족

별골짜기 2016. 4. 29. 20:45

보쿠아카

두지붕 한가족

니썬님과 연성교환!

 

 

 

 

우당탕쿵탕. ! ! 짤그랑!

 

타나바치!! 밥 먹자!!”

 

덜그덕. ! 드르륵. 촤악. .

 

아빠.”

으악, 탄다!!”

 

보쿠토의 손이 다급하게 국자를 들어 계란을 뒤집으려다가 멈췄다.

 

! 뒤집개! 뒤집개가 어딨더라!!”

 

뒤집개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이 냄비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치익, , 가스렌지 위로 넘쳐흐르는 물을 보고 식겁한 보쿠토가 재빨리 가스밸브를 잠갔다. 그런데 후라이팬이 올려진 부분까지 한꺼번에 불이 꺼지는 바람에 다시 밸브를 켜고 따로 가스불을 키워야 했다. 보쿠토는 부산스럽게 계란을 뒤집고 찬장에서 접시를 꺼냈다. 꺼낸 접시는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이었던 데다가 허둥지둥 움직이느라 깨먹을 뻔한 위험한 상황이 수차례 연발됐다. 운동선수다운 빠른 반사 신경이 아니었다면 분명 아침부터 접시가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타나바치! 어딨어! 밥 이번엔 진짜 다 됐다!!”

 

우렁차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보쿠토가 식탁 위에 놓인 밥솥에서 밥을 퍼주는 동안 타나바치는 자리에 앉아 얌전히 밥을 기다렸다. 매일 아침 전쟁같이 지나가는 밥시간은 벌써 일 년이 지난 덕분에 익숙해졌다. 타나바치는 너무 익어 버석버석한 계란을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꼭꼭 씹어 먹었다.

 

보쿠토는 밥을 성큼성큼 먹다가 타나바치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얌전히 밥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그를 쏙 빼닮았는데 성격은 영 딴판이다. 그를 닮은 건 유전자의 신비가 작용하기도 했지만, 딱히 편식하는 게 없어 잔소리 할 것도 없는 모습은 후천적으로 어쩔 수 없이 생긴 변화였다. 보쿠토는 짠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생각을 그만 두었다.

 

타나바치, 유치원에서 종이 준 건 없어?”

. 없어.”

다행이네.”

.”

그런데 있잖아유치원에 그

 

보쿠토가 망설였다. 노란색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휘청거렸다. 골똘히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망설이던 눈동자의 움직임이 멎어든 것은 타나바치의 목소리가 들려서였다.

 

아카아시 선생님?”

허억!”

 

, 어떻게 알았지!! 보쿠토가 충격 받은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어린 아들은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할 뿐만 아니라 예리할 때가 있었다. 누나에게 애 앞에서는 할 말 못할 말 가려서 해야 한다고 등짝 스파이크를 맞곤 했을 때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 아카아시선생님 말이야. 유치원 온 지 오래됐어?”

 

타나바치가 하나둘 손가락을 접어 세달 전이라고 얘기해줬다. 보쿠토는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세달 전이라. 시즌이 새로 시작하고 더 바빠진 것도 세달 전이라 타나바치의 새로운 선생님을 이제서야 봤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타나바치의 선생님이 아카아시 케이지이고, 그것도 옆집에 살고 있던 이웃사촌이라는 사실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놀란 것도 아니다. 그건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아카아시 케이지. 아카아시가 유치원 선생님이 됐다니. 허둥지둥 타나바치를 데리러 간 유치원에서 아카아시를 마주하고 한순간이지만 모든 사고가 정지했었다. 심장이 스파이크를 얻어맞은 코트 바닥마냥 퍽 내려앉는 것 같기도 하고뭔가벌렁벌렁 숨을 들이마시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카아시가 유치원 선생님이 되어 옆집에 살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적어도 충격을 받고 놀라야만 했던 이유가 더 중요하고 컸다. 그렇기 때문에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미처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보쿠토상. 안녕, 타나바치.”

.”

안녕하세요.”

 

그래,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목구멍이 콱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대신 보쿠토는 집 앞에서 만난 아카아시를 샅샅이 살폈다. 아카아시는 고등학교 때와 달라진 게 없었지만, 편하게 차려입은 티셔츠와 청바지가 더 이상 운동복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타나바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말했다.

 

지금 출근하나봐.”

.”

유치원 선생님이 됐을 줄은 몰랐네.”

 

타나바치가 다니는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해도, 어색하게 잘라 붙인 존대가 불편하고 어색해 보쿠토는 오기로라도 반말을 썼다. 괜히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나간 말을 듣고도 아카아시는 태연하게 답했다.

 

누굴 돌보는 게 적성에 꽤 잘 맞아서요.”

, ……

 

구는 왜 안 하는 거냐고 물으려 했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흐름에도 맞지 않는 말이, 아카아시를 다시 만나고 나서부터 줄곧 궁금했다는 이유만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늦지 않으셨습니까? 덤덤하게 묻는 말에 보쿠토는 시간을 확인했다. 꽤 일찍 일어나는데도 늘 집안일이 익숙지 못해 빠듯했다. 보쿠토는 타나바치에게 인사를 시킨 뒤 세워둔 차에 올라탔다. 미련 없이 뒤를 돌아 유치원으로 출근하는 아카아시의 단정한 걸음걸이가 보였다. 걷는 모습마저 바뀐 게 없는데. 보쿠토는 핸들에 손을 올리고 잠시 그 뒷모습을 살폈다.

 

고등학교 때도 배구를 했다. 배구를 하며 느끼는 수많은 감정, 그중에서도 특히 승리의 기쁨과 쾌감을 배운 시기였다. 지금 당장 돌아가도 좋은 빛나는 추억의 일부인 그 시기에, 한 학년 아래인 아카아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게 공을 보내주는 세터로서 아카아시는 꽤 훌륭하고 헌신적이었다. 그도 인정하는 뒤죽박죽인 컨디션을 자유자재로 컨트롤 할 줄 알았다. 당연히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아꼈고 졸업이 아쉬울 정도로 그와 함께 하는 배구가 당연했다.

 

하지만 보쿠토가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아시는 일찍 배구부를 은퇴했다고 들었다. 그것도 타인에게건너건너 들은 말이었다. 당시 보쿠토는 무척 큰 충격을 받아 후쿠로다니 학원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은 건지 그가 피하는 건지 아카아시를 볼 수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찾아갔어도 끝끝내 그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유치원 선생님이 되어 있다니.

그렇게도 매정하게 모든 걸 끊어버리더니 이제와서 오랜만이네요.’라고 인사를 하다니.

 

배구부를 그렇게 빨리 은퇴하지 않았다면, 아니, 적어도 그가 찾아갔을 때 만나주었다면, 그의 연락을 받아주기라도 했다면 유치원 선생님이 된 아카아시를 미리 알았을 테고 충격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정지했던 사고가 다시 자리를 되찾아 흐르기 시작하면서, 반가움보다 서운함이 앞서고 기쁨보다 심술이 먼저 튀어나왔다. 어차피 유치원에 들를 거 아카아시 한 명 더 태운다고 차가 부서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보냈던 괜한 치기와 맥락을 같이 했다. 차에서 내내 조용했던 타나바치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면서도 본능적으로 아직 오지 않았을 아카아시를 눈으로 찾는 동안, 보쿠토는 그의 근처를 배회하며 떠날 생각을 하지 않던 서운함과 섭섭함과 허탈함을 실로 오랜만에 느꼈다.

 

뭐야 아침부터……

 

보쿠토가 바로 쿠로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전화를 받아서야 막 일어난 것인지 쿠로오의 목소리는 반쯤 잠겨 있는 비몽사몽한 목소리였다.

 

쿠로오. 나 아카아시 봤다.”

너 잠 덜 깼냐

우리 옆집 살아.”

허어?’

 

잠시 침묵하던 쿠로오가 스스로의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가 들려 보쿠토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다 때렸어?”

.’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의 그 아카아시 케이지를 다시 봤는데 알고 보니 옆집에 산다는 말 아냐.’

그렇지.”

엄청난 우연인걸. 너 한참 아카아시 만나고 싶어 했잖아. 오랜만에 선후배가 만났으니 반갑게 회포도 풀고 그러면 되겠네. 경축! 그럼 난 이만.’

, 성의 없어! 그게 축하할 일이냐고! 아니, 그보다 또 자게??”

너 때문에 더 잘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거든. 그리고 축하할 일이 아니면 뭔데? 설마 쪼잔하게 그때 일 맘에 두고 데면데면하게 군 건 아니겠지.’

…….”

 

보쿠토는 정곡을 찔려 아무 대답도 못했다. 보쿠토의 대답에 쿠로오가 알 만 하다는 듯 푸하하 폭소하며 말했다.

 

에라이~ 못난 부엉아. 감격의 드라마를 찍어도 모자랄 판에 무슨. 이미 아카아시는 네 실체 다 알고 있어서 힘 줘 봤자 먹히지도 않을걸.’

그래도!! 내가 졸업하고 얼마나 노력했었는데, 너무하다고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잖아.”

그건 당사자한테 말하고 푸셔야지 저한테 이러시면 씁니까? 하여튼 나 더 잘 거니까 전화하지 마라.’

쿠로오? 쿠로오오? 헤이헤이?!”

 

보쿠토는 가차 없이 끊긴 전화를 원망스럽게 내려 보다가 조수석에 휙 던져버린 뒤 다시 핸들을 잡았다. 앞을 보자 저 멀리 유치원 정문으로 들어서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이제 와서 내 눈에 잘 띄어봤자 무슨 소용이야. 보쿠토는 안전벨트를 다시 착용한 뒤 차를 출발시켰다. 쿠로오의 말처럼 보쿠토가 속 좁고 쪼잔한 걸지도 몰랐다. 반갑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아카아시의 앞에 서면 옛날 고등학생 때처럼 친근하게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겨우겨우 붙잡느라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 아카아시 없어??’

. 오늘 조퇴 했는데요.

……?’

아카아시가, 혹시 자기 없을 때 선배 찾아오면……

찾아오면?’

전 이제 배구부도 아니니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만 귀찮게 하고 그만 찾아오세요라고전해달라고 했어요정말 죄송합니다.’

 

그때의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난생 처음으로 세상을 이루고 있던 무언가가 사정없이 뜯겨나가는 듯한 그 기분을 보쿠토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보쿠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른이 되어 새삼 느낀 건 세상 일이 모두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보쿠토는 그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며 늦은 저녁 초조하게 집안을 걸어 다녔다. 당장 내일이 국가대표 소집이다. 오늘 밤에는 본가에 들러야 하기도 했다. 지금 당장 출발해야 내일 아침에 도착할 비행기를 탈 여건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국가대표로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타나바치가 어디에서 지내느냐였다. 그동안 보쿠토가 팀 스케줄이나 국대 스케줄상 하루 이상 집을 비워야 할 때마다 쿠로오를 비롯해 가까운 친구나 후배나 동창에게 타나바치를 부탁하곤 했다. 보쿠토의 사정을 아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흔쾌히 아이를 봐주곤 했지만 내일, 아니, 오늘은 아니었다.

 

보쿠토는 핸드폰 주소록을 살폈다. 쿠로오도, 시로후쿠도, 코노하도, 모두 공교롭게도 시간이 안 된다고 했다. 이렇게 모두가 짜기라도 한 듯 사정을 봐줄 수 없다고 해온 적은 처음이라 그는 적잖이 당황해 있었다. 회사일, 집안일 때문에 안 된다며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게 느껴져 더는 떼를 쓰고 부탁해볼 수도 없었다.

 

[‘아카아시는 어때?’]

 

마지막으로 통화한 쿠로오가 제안했던 목소리가 생생해 보쿠토는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벽 너머에 있을 아카아시 방향이었다. 쿠로오의 말처럼 타나바치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낯선 타인보다는 유치원에서 늘 지켜보고 있을 아카아시만큼 제격인 인물은 없었다. 그렇지만……

 

으으윽!”

 

재회한지 팔년 만에, 고작 이틀밖에 안 지났고, 데면데면한 인사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이고, 그것도 끝마무리가 좋지 못한 아카아시라니. 서운하고 섭섭한 그의 감정은 둘째 치고 이런 부탁을 해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한 번만 만나서 얘기 좀 하자는 수많은 부탁들이 거절당하고 묵살됐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또 거절당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보쿠토는 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아있는 타나바치를 보았다. 어깨에는 직접 싼 듯한 가방을 메고 있었다. 엄마가 살아있을 적엔 이리저리 옮겨 다닌 경험도, 지금 보쿠토와 단둘이 살면서도 남의 집에서 잔 경험도 많으니 익숙한 듯했지만 보쿠토는 그게 마음이 아팠다. 부모님에게 데려가도 홀대를 받으며 눈칫밥을 먹을 타나바치를 알기에, 보쿠토는 긴긴 고민을 마치고 손을 뻗었다. 타나바치가 소파에서 일어나 보쿠토의 손을 잡아왔다. 다른 한 손에는 자신의 짐을 들고 집 밖으로 나와 곧바로 아카아시의 집 앞으로 향했다. 거절당하는 건 싫지만 다시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딩동딩동. 초인종을 눌렀다. 타나바치가 눈을 크게 떴다. 여기 아카아시 선생님 집인데. 그 말에 보쿠토는 고개만 한 번 끄덕인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아카아시를 보았다. 늦은 저녁을 준비 중이었는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하마터면 옛날처럼 스스럼없이 아카아시 앞치마 잘 어울려!!’라고 무심코 소리칠 뻔한 것을, 입을 합 다무는 것으로 재빨리 추슬렀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흐르자 보쿠토는 눈을 데굴 굴렸다. 뭐라고뭐부터 말해야 하지. 빤히 바라보는 아카아시의 눈을 마주치자 본능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앗 맞다, 인사!!

 

, 안녕 아카아시놀랐지?”

, 조금요. 타나바치 안녕.”

안녕하세요.”

일단 들어오세요. 들어와.”

 

아카아시가 문을 더 활짝 열고 보쿠토를 들여보냈다. 우물쭈물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아카아시가 타나바치의 어깨에서 가방을 내려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 자연스러워 새삼스럽게 놀라며 보쿠토가 사과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괜찮습니다. 저녁 드셨습니까?”

우린 먹고 왔어.”

그렇습니까. 어디 가던 중이셨나본데요.”

 

아카아시의 까만 눈동자가 보쿠토의 손에 들려있는 가방을 보았다. 보쿠토는 본론을 말해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그는 타나바치의 눈치를 보았다. 아카아시의 집안을 신기하게 둘러보는 타나바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깐 목소리로 보쿠토가 말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왔어. 그러니까내가 지금 국가대표 소집이 있어서 가봐야 하는데며칠 걸릴 거라타나바치 급하게 부탁할 데가 없어서혹시 괜찮으면

 

우물쭈물 말하던 보쿠토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만난 이후로 보쿠토가 내내 퉁명스럽게 굴었던 건 당사자인 아카아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섭섭했는지 알아달라는 시위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아카아시의 눈동자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를 빤히 쳐다보는 눈이 익숙하고 낯설었다. 아카아시 눈빛이원래 저랬던가? 잠시 딴 생각을 하던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대답을 들었다.

 

그러세요.”

, 진짜??”

그럼 가짜도 있습니까.”

 

아카아시의 무덤덤한 말에 보쿠토는 더욱 기분이 묘해졌다. 정말 앞치마만 빼면 옛날 후쿠로다니 배구부 시절의 아카아시를 앞에 둔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면 대답을 해줄까. 그땐 왜 연락을 받지도 않고 피하고 도망치고 날 만나주지 않았냐고, 배구부까지 그만둘 정도로 중요한 일이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면 나에게라도 말해줬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푸념해볼까. 아니면 내가 정말 귀찮고 싫었냐고, 2년간 함께 배구 했던 관계가 순식간에 백지로 돌아갈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었냐고 따져볼까. 19세의 보쿠토라면 시간과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털어놓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스스럼없이 다가가 털어놓기엔 그 뒤로 많은 시간이 지나고 보쿠토는 어른이 되었다.

 

어차피 같은 유치원이니 상관없습니다. 밥이야 1인 몫만 더 차리면 되는 거고.”

그럼 부탁할게.”

.”

타나바치, 아빠 다녀온다.”

나는? 여기 있는 거야?”

.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해!”

으응

 

타나바치야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였으니 걱정할 건 없었다. 보쿠토는 다시 아카아시를 한 번 쳐다보았다. 아카아시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한 손으로 다른 손을 매만지는 버릇은 여전했다. 이젠 배구도 안 하면서. 보쿠토는 입을 꾹 다물고 아카아시의 집 현관을 나섰다.

 

 

 

 

보쿠토는 시트에 몸을 깊이 묻으며 본가에 들러 만나고 온 부모님을 떠올렸다. 부모님의 타나바치를 향한 강경한 태도는 여전했고 원하는 것도 꾸준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뜻대로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보쿠토의 고집을 직접 겪어 알고 있는 부모님은 가타부타 말을 길게 하진 않았지만 기분이 썩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소집 첫날부터 컨디션이 저조하게 생겼다고, 비행기 창밖을 바라보며 보쿠토는 생각했다.

 

컨디션 관리를 잘 해야 하는데. 졸업 전과 후를 두고 봤을 때 가장 차이나는 것은 컨디션이었다. 졸업 이후가 되어서야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얼마나 대단한 세터인지를 새삼 실감했다. 수많은 경기에서 잦은 컨디션 저하를 겪으면서 그 스스로도 느끼기 어려웠던 컨디션의 싸이클을 파악해 효과적으로 대응했던 아카아시가 그립고 절실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아시가 배구부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이 겹쳤다. 보쿠토는 그 말을 믿기 어려워 곧바로 아카아시를 만나기 위해 후쿠로다니를 찾아갔었다. 혹시 아카아시도 컨디션이 나쁜 게 아닐까, 혹시 아카아시도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닐까, 아카아시가 매 경기마다 그를 케어했던 것처럼 보쿠토도 한번쯤은 그러고 싶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거라면 같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주고 싶었다. 그가 그태껏 해준 게 쉽고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서 더욱더.

 

하지만 끝까지 아카아시가 그를 만나주지 않았을 때. 생각과는 달리 아카아시는 그의 도움이 필요 없는 건 아닐까. 이렇게 쉽게 단절하고 끊어버릴 정도로 어쩌면 아카아시는 그가 지겨웠던 건 아닐까. 수많은 나쁜 종류의 생각들이 그의 머리와 마음을 휩쓸었고 보쿠토는 그게 화가 났다. 보쿠토는 아직도 그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머리가 허용하는 이상으로 복잡해지는 기분이라 보쿠토는 눈을 감고 머리에 쓰고 있던 안대를 내려버렸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고등학교 시절 아카아시와 유치원 선생이 된 아카아시가 번갈아 떠오르는 바람에 쉽사리 잠에 들기는 어려웠다.

 

잠을 자는둥 마는둥 찌뿌둥한 몸으로 공항을 빠져나오는 보쿠토의 핸드폰이 울렸다. 당연히 쿠로오 아니면 소속팀 혹은 코칭스태프 전화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놀랍게도 타나바치의 영상통화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서둘러 전화를 받는데 화면 가득 타나바치의 웃는 얼굴이 채워졌다.

 

아빠.’

! 타나바치!!”

비행기야?’

아니, 비행기에서 방금 내렸어. . 맞다! 우리 타나바치한테 비행기 보여줘야 하는데! 여기서는 안 보이네. 아쉽다.”

 

급한 일이 따로 없는 건가? 보쿠토가 생각할 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유치원 다녀오겠다고 해야지.’ 보쿠토의 눈이 커졌다.

 

유치원 다녀올게.’

 

, 조심히 다녀와.”라고 대답하는 보쿠토의 눈이 본능적으로 화면 가장자리를 향했다. 타나바치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듯한 팔이 살짝 보였다. 보일 듯하면서 보이지 않는 팔에 저도 모르게 보쿠토가 집중하게 될 때, 아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쥐고 있는 핸드폰을 건네려는 듯 아이가 내미는 탓에 아카아시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카아시의 집 천장이 보이고, 금방이라도 전화가 끊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카아시.”

 

잠시 움직임이 멎더니 아카아시의 얼굴이 드러났다. 보쿠토는 그가 불러놓고도 당황했다. 내가 아카아시를 왜 불렀지?? 할 말도 없는데?? 아카아시와의 이유 없는 눈싸움이 한동안 이어지고, 먼저 입을 연 건 아카아시였다.

 

별 일 없습니다.’

.”

시차 때문에 이따 자기 전에는 연락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합류한 다음 스케줄 알려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아이에겐 아빠가 필요합니다.’

 

단호한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흐르던 침묵은 아카아시의 말에 의해 잘렸다.

 

그럼 이만 끊죠.’

잠깐!”

 

보쿠토가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고마워.”

 

아카아시는 별 변화 없는 얼굴로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쿠토는 한참 동안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가끔 타나바치를 맡겼던 시로후쿠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영상통화였다. 게다가 스케줄에 맞춰서 다시 전화를 걸어주겠다니확실히 그와 아이에게는 좋은 섬세한 배려라 보쿠토는 더욱 기분이 기묘해졌다.

 

 

 

 

아카아시는 그가 해외에 나가 있는 며칠 동안 적어도 하루 한 번은 꾸준히 연락을 해주었다. 스케줄을 알려주자마자 시차 계산을 한 건지 바로 그 당일 연습을 마치자마자 칼같이 연락이 왔다. 연락을 받으며 놀란 것은 타나바치의 태도였는데, 아카아시와 있는 아이의 얼굴은 환히 웃음꽃이 펴 있었다. 보쿠토가 보기 여간 어려워하던 표정이 아카아시 옆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튀어나왔다. 엄마를 잃은 뒤 지나치게 조용해지고 말수가 적어진 게 아닌가 걱정했던 마음이 무색하게도 밝아 보여 눈을 부릅뜨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어쩌면 보쿠토 가()에 특화된 조련사가 아닐까?’]

 

아카아시에게 타나바치를 맡기게 된 경위와 아카아시가 매일 걸어오는 전화, 타나바치의 눈에 띄는 변화를 전해주자 쿠로오가 진지하게 농담을 했다.

 

[‘사례는 제대로 하도록 해. 아카아시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뭘 어떻게 해주지?’

아카아시에게 뭐가 좋을 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카아시에게 어떻게 사례할지에 대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아카아시는 타나바치를 며칠 동안 맡아주고 연락까지 꾸준히 해주며 보쿠토를 안심시켰다. 덕분에 그가 해외에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아져 큰 활약을 하기도 했으니, 결과적으로도 고마운 일이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걸 어떤 식으로 사례할 것인지였다.

 

? 아카아시를 따로 고용한 것도 아닌데 너무하는 것 같아 생각과 동시에 수면 아래로 묻어버렸다. 그럼 생필품? 좋은 생각 같긴 했지만 뭐가 필요한지 잘 모른다. 보쿠토는 타나바치를 맡길 때 처음 아카아시의 집에 들어가 봤고 그 내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짧게 머무르고 나왔다. 옷이나 신발을 사주기엔 그의 취향을 모른다. 고등학생 때라고 해봤자 8년 전인데다가 기억하는 건 교복과 운동복을 입은 모습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이제 운동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운동복을 사다줄 수도 없었다.

 

보쿠토는 결국 그의 기준에서 가장 합리적인 것을 찾아 샀다. 이걸로 되나 싶기도 했지만 아무리 비행기에서 몇 시간을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아카아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다른 것을 생각해봐야겠다고 무심결에 결정내리며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집 앞에 섰다. 일본은 벌써 날이 캄캄해져 있었다. 딩동, 초인종을 누르자 얼마 걸리지 않아 아카아시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고개를 내리자 아카아시의 다리 뒤로 타나바치의 동그랗게 뜬 눈이 보였다. 아카아시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인사해야지.”

다녀왔어?”

공손하게 말하면?”

다녀오셨어요?”

잘했어.”

 

타나바치가 존댓말을! 보쿠토는 조금 감명을 받았다. 그 사이 아카아시가 한발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 .”

 

얼떨떨하게 타나바치의 말을 곱씹으며 현관 안으로 발을 디뎠다. 문이 닫히자 곧바로 느끼지 못했던 향긋한 음식 냄새가 났다. 음식 냄새를 맡자마자 배가 미친듯이 고파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배를 쥔 보쿠토를 눈여겨 본 아카아시가 말했다.

 

식사 전인데 잘 됐습니다. 드시고 가세요.”

그래도 돼?”

손부터 씻으신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가 하는 음식과는 차원이 다른 냄새에 보쿠토는 크게 소리치자마자 너무 친근하게 굴었나 싶어 조금 머쓱해졌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서 용기를 낸 보쿠토가 뒤로 숨기고 있던 쇼핑백 하나를 아카아시에게 건넸다. 아카아시의 눈동자가 지그시 쇼핑백을 훑자 보쿠토는 괜히 긴장이 되어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티나바치 봐줘서 고맙기도 하고맨날 시간 맞춰서 연락 주느라 고생하기도 했고근데 내가 아카아시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아카아시가 쇼핑백을 열었다. 손으로 잡아 건져 올린 것은 깔끔하게 포장된 반찬팩 여러 개였다. 보쿠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카아시에게 중얼거렸다.

 

고등학생 때 좋아하던 걸로 사왔어.”

 

하지만 그 걱정이 기우라는 듯 유채겨자무침으로 꽉꽉 채워진 쇼핑백을 보며 아카아시는 희미하게 웃었다.

 

……잠깐, , 웃었어?!

 

보쿠토가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어버버하는 사이 아카아시가 말했다.

 

아직 기억해주셨네요.”

. 당연하지.”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웃는 얼굴을 정신없이 쳐다보느라 자기가 무슨 말을 뱉는지도 자각이 없었지만 아카아시는 한결 기분이 좋아보였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마침 다 떨어져서 사러 가려던 예정이었는데 다행입니다.”

.”

그런데 뭐하십니까?”

……?!”

 

아카아시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쿠토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손 씻고 오세요.”

알았어.”

 

보쿠토는 순순히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다. 비누칠까지 해 뽀득뽀득 손을 씻고 나온 그는 타나바치가 아카아시를 도와 식탁 위에 반찬을 올려놓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그가 한번 음식을 하게 되면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쑥대밭이 되는 주방과는 달리 아카아시가 음식을 하는 주방은 마치 딴세상처럼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유치원 선생님은 요리하는 법도 배우는 건가? 보쿠토가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카아시가 뒤를 돌았다. 처음 타나바치를 부탁하러 왔을 때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손에 국자가 들린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주부라 보쿠토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아빠, 빨리 앉아. 저녁 먹어야지.”

. 알았어.”

 

식탁 위에는 그가 사온 유채겨자무침을 비롯해 매실장아찌, 시오카라, 어묵 등 여러 가지 밑반찬들이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보쿠토는 눈을 크게 떴다. 반찬들은 맛도 아주 좋아 물어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이거 다 아카아시가 만든 거야?”

.”

어떻게!?”

인터넷에서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요.”

 

내가 인터넷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정체를 알 수 없이 완성되던데!! 보쿠토는 반쯤 감탄을 섞어 아카아시를 보았다.

 

타나바치 말로는 보쿠토상이 아침마다 반찬 없이 계란만 내놓는다고 하던데요.”

그랬지?”

. 아빠는 맨날 아침마다 계란만 해주는데 가끔 계란도 까맣게 타요.”

성장기 어린이인데 잘 먹여야죠.”

잘못했습니다?”

. 아시면 됐습니다.”

 

보쿠토가 시무룩해져 수저를 들었다. 확실히 그가 해주는 밥은 맛이 없을 뿐더러 부실하기까지 했다. 이미 자랄 대로 자란 보쿠토는 몰라도 한참 무럭무럭 커야 할 아이가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건 문제일 수 있었다. 아카아시가 지적하기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라 한참 반성하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상황들이 낯설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쿠토가 무언가 실수를 연발하고, 아카아시가 그것을 지적하면 시무룩해지고,

 

정 요리가 어려우면 가끔 여기 와서 밥 같이 드시든가요.”

정말???”

 

보다 못한 아카아시가 타협점을 제시해 그의 기분을 다시 북돋는 일련의 과정들이. 보쿠토의 얼굴이 표정 관리를 벗어나 대번에 환해졌다. 한순간이지만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를 밀어내지도 않고 못이기는 척 그의 사정을 봐주는 아카아시라고 생각하자, 섭섭하고 서운한 모든 감정들을 떠나 지금은 그냥 좀 기쁘고 반가웠다. 그가 잘 하지 못해 애를 먹는 요리에 대한 걱정이 덜어졌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8년 전 가차 없이 끝이 나 다시는 탈 수 없으리라 여겼던 그 사이클에 다시 포함되어 그와 마주보고 있는 지금이 좋아서,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이고 있던 꿉꿉한 감정들을 그냥 다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어서 드세요. 타나바치, 꼭꼭 씹어 먹어.”

.”

.”

 

보쿠토는 밥을 크게 한 숟갈 우물거렸다. 타나바치도 조금 상기된 얼굴로 눈을 반짝거리며 반찬에 젓가락을 뻗었다.

 

 

 

 

아카아시우리 왔어.”

. 들어오세요.”

 

아카아시안녕

아침 드시러 오신 거죠?”

번거롭게 해서 미안.”

 

아카아시 안녕?”

들어오세요.”

저기, 오늘 메뉴는 뭐야?”

하이라이스요.”

 

좋은 아침 아카아시! 이거 받아.”

뭡니까?”

맨날 빈 손으로 오기 그래서지난번에 세제 다 떨어졌다고 했던 것 같아서 생각난 김에 샀어.”

그렇다고 한 박스를 사옵니까

 

아카아시, 타나바치가 스파게티 먹고 싶대.”

지금요? 지금은 소스가 없,”

사올까? 나 지갑 가져왔어! 만들 수 있어? 사올까? 얼마나 사야 돼? 말만 해, 아카아시!”

보쿠토상이 먹고 싶으신 거였습니까.”

 

헤이헤이, 아카아시! 우리 왔어!!”

들어오세요. 이건 또 뭡니까?”

타나바치가 과자 먹고 싶대서

아침부터 과자 주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타나바치, 아침에는 과자 안 돼.”

그랬지.”

네에

둘 다 풀죽지 마세요.”

 

 

 

 

그래서, 요새 맨날 아카아시 집에서 밥 먹는다 이거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그런 주제에 옛날 고등학교 때 얘기는 아직 안 풀었고?’

 

보쿠토는 입을 다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고등학교 때의 일을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쇠해 녹이 슬었거나 날이 무뎌졌다는 것도 아니었다. 보쿠토는 그때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카아시에게 섭섭하고 서운했다. 매일 아침 함께 밥을 먹고 심지어 저녁도 먹는 빈도가 점점 잦아지는 동안에도 보쿠토는 늘 그때 일에 대해 물어봐야지 물어봐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건, 그를 꼬박꼬박 챙겨주는 아카아시의 얼굴을 보면 그 생각들이 자취를 잃고 쑥 얼굴을 숨겨버리기 때문이었다.

 

아카아시와 어느 정도 관계를 회복한 이후에는 더욱더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배구부를 설명 없이 은퇴하고 그를 피해 도망 다니고 귀찮다는 말을 전하던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하게 가라앉다가도, 어느새 일상으로 자리잡아버린 아카아시와 식사를 할 때면 물 위에 둥둥 뜨는 얼음처럼 마음이 서서히 솟구치곤 했다. 적어도 행동에 모순됨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보쿠토에게 이건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였다. 해결되지 않은 고등학교 때의 일. 그때의 일을 굳이 끄집어내지 않는 건 어쩌면 지금 아슬아슬하게 돌아온 일상을 깨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풀어야지.”

너 그말만 벌써 몇 주 된 거 알지?’

그건 알아서 하고, 넌 오늘 휴가라 늘어져 있겠지만 난 아니거든. 일 들어온다. 끊어.’

 

쿠로오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보쿠토가 입을 삐죽이며 핸드폰을 저 멀리 밀어두었다. 보쿠토는 타나바치가 오물오물 먹고 있는 과자를 눈여겨보다가 슬그머니 하나를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타나바치는 그런 보쿠토를 모르는 척 해주었다. 어느새 사이좋게 하나하나 과자를 우물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 과자봉지가 몇 개 쌓였다. 보쿠토가 소파에 기대앉아 있는 옆에는 들어오자마자 벗어둔 옷가지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타나바치가 앉아 있는 자리 옆에는 비교적 동화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비교적 보쿠토 근처보다는 깔끔하긴 했지만 과자를 먹다가 흘린 부스러기는 아무리 조심해도 어쩔 수 없었다.

 

보쿠토는 타나바치가 읽고 있는 동화책을 보았다. 그가 어릴 적에는 뛰어 노는 걸 좋아했는데 타나바치는 그보다 독서를 하길 좋아했다. 참 여러모로 신기한 아이였다. 아무래도 누나를 닮은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타나바치가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보쿠토를 보았다. 엄마를 똑 닮은 노란빛 눈동자가 물끄러미 그를 보더니 말했다.

 

아빠, 아카아시 선생님이랑 친하지?”

? 으음그렇다고 해야 하나.”

아카아시 선생님도 아빠랑 같이 배구했댔는데 지금은 왜 안 해?”

아카아시가 그래?”

. 아빠 일본에 없을 때 그랬어.”

 

타나바치를 아카아시에게 맡겨두었을 때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누었던 걸까? 아카아시의 입에서 먼저 배구 얘기가 나왔다는 게 잘 믿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단순 의아함만이 스며드는 종류가 아니었다.

 

아카아시 선생님은 배구가 좋고 아빠가 좋았대.”

……?!”

배구가 좋고 아빠가 좋으면 아빠랑 같이 배구하면 되잖아. 근데 왜 안 하는 거야?”

, 글쎄?”

 

보쿠토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타나바치가 한 말이 자칫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린아이가 한 말이라 지나치게 간략하고 직설적으로 들리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걸 보쿠토는 지난 일 년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좀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타나바치에게 캐물어보려는 찰나였다.

 

. . 삐비빅.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보쿠토와 타나바치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현관문을 연 건 아카아시였다. 아카아시는 두 사람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으며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널린 쓰레기와 옷가지와 책들을 살필 따름이었다. 뜨끔한 보쿠토가 눈을 굴렸다. 곧 엄한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쿠토상, 집안 꼴이 이게 뭡니까?”

그게, 오랜만에 쉬는 날이니까! 나도 모르게 좀 긴장이 풀어져서 그렇다고나 할까!”

과자도 보쿠토상이 다 먹은 거죠?”

아니야, 타나바치도 같이 먹었

 

보쿠토가 고개를 돌려 타나바치를 보았지만 곧 할말을 잃었다.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는 언제 털어낸 건지 말끔한 얼굴로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선량한 어린 양의 모습은 막 과자를 해치운 보통 어린아이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보쿠토는 억울해졌다. 아니, 정말 타나바치도 같이 먹었는데!!

 

그보다.”

 

아카아시가 냉랭하게 보쿠토를 보며 말했다.

 

여긴 제 집입니다만, 어떻게 들어오셨는지 설명을 해보시겠습니까?”

 

타나바치가 가르쳐줬, 아니 내가 자꾸 타나바치를 팔아먹는 게 아니라, 핑계 대는 것도 아닌데, 진짜 사실, 앗 알았어, 미안해 아카아시!! 보쿠토의 외침이 집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카아시의 집 현관 비밀번호를 처음으로 보쿠토에게 유출한 주범 타나바치는 측은한 눈길로 보쿠토를 보았다.

 

보쿠토는 어지러운 집안을 아카아시의 주도 하에 깨끗하게 도로 치운 뒤 타나바치와 근처 공원으로 나가기로 했다. 아카아시는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타나바치는 선생님이 가지 않으면 자기도 그냥 책을 보겠다고 고집을 부려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휴가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 잠이 오지 않는 보쿠토가 시무룩해지는 바람에 나갈 수밖에 없던 것도 있었다.

 

타나바치는 집에서 들고 나온 배구공을 바닥에 튕기며 제법 잘 가지고 놀고 있었다. 보쿠토는 타나바치에게 공을 던져주기도 하고 타나바치가 던지는 공을 받기도 하며 즐겁게 뛰어다녔다. 타나바치는 보쿠토를 쏙 빼닮은 것과는 달리 스파이크에는 그만큼의 소질이 없었다. 다만 공을 던지는 각도나 폼새가 그럴싸해 차라리 세터를 하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것보다는 책을 손에서 놓는 게 우선이겠지만 말이다.

 

한참 타나바치와 공을 주고받던 보쿠토는 또래의 남자아이를 만난 아이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공원으로 나온 이후부터 가만히 벤치에만 앉아 있는 아카아시에게 다가간 그가 옆자리에 앉았다. 아카아시의 눈은 친구와 배구를 흉내 낸 공놀이를 시작한 타나바치에게 향해 있었다. 그 눈에 어린 향수 비슷한 것을 본 보쿠토는 궁금해졌다. 타나바치가 아닌 그를 보는 아카아시의 시선은 과연 어땠을지. 보쿠토가 눈을 깜빡이며 진득이 그를 관찰할 때 아카아시가 입을 열었다.

 

보쿠토상을 많이 닮았어요.”

타나바치?”

.”

 

보쿠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신기할 정도였다.

 

아무래도누나랑 내가 닮았으니 그런 거라고 생각해.”

보쿠토상보다 연상이었습니까?”

나보다 나이 많으니까 누나겠지?”

보쿠토상 머리카락처럼 하얗고 까만색이 섞인 색은 드문데신기하네요. 어디서 그런 분을 만나셨습니까?”

?”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디서 만났냐니? 우리 집에서 봤지.”

……?”

 

아카아시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뭔가 대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아카아시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보쿠토상 부인그러니까 타나바치의 엄마 말입니다.”

 

내 부인? 타나바치의 엄마?

 

저기 아카아시.”

.”

나 아직 결혼 안 했는데

결혼도 안 하시고 타나바치를 낳으신 겁니까?”

아아니! 그런 게 아니라!”

 

보쿠토가 펄쩍 뛰며 말했다.

 

타나바치는 내 조카야!”

?”

그러니까내 누나의 아들!”

 

아카아시의 눈이 짐짓 커졌다. 조금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거라는 사실에 집중하기보다는, 일단 해명이 우선이라 여겼다.

 

하지만, 보쿠토상에게 아빠라고 줄곧

누나랑 매형이랑 일 년 좀 전에 세상을 떠났거든.”

…….”

집안 반대 때문에 결혼도 못하고혼인신고만 해놓고 살던 중에 사고가 났어. 끝까지 환영받지 못한 가족이라부모님한테 맡기면 타나바치가 눈치 보느라 제대로 지내지도 못할 것 같아서 그냥 내가 맡아 기르는 거야. 어차피 나랑 많이 닮은 데다가 아빠라고 불리는 게 남들 눈치 안 보이고 편해서 내 호적에 올린 거고. 물론 부모님은 반대에 아직도 난리지만……

.”

 

아카아시가 짧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몰랐습니다. 죄송해요.”

아냐. 조카라고 해도 나랑 많이 닮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고 그게 더 좋아.”

많이라기보다는 거의 찍어낸 수준인데요.”

그래?”

유치원에서 처음 타나바치를 봤을 때 보쿠토상과 너무 닮아서 놀랐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유치원에 데리러 오신 보쿠토상 모습에 역시나 했고

 

잠시 대화가 끊겼다. 아카아시는 모르겠지만, 보쿠토는 그를 다시 만났던 그날을 되새기고 있었다. 멈췄던 사고가 다시 흐르기 시작하며 고등학교 때의 기억들이 휘몰아치고. 그를 만나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던 기억까지 이르자 반가움보다 서운함이 앞서고 기쁨보다 심술이 먼저였던 순간. 그래서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했던 인사.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바람에 푸른 잎사귀들이 쏴아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볕 가운데 만들어진 그늘이 바람을 따라 모양을 스물스물 바꿨다. 그 아래 앉은 아카아시의 머리카락이 적당히 데워진 바람에 흐트러졌다. 묵묵히 타나바치를 주시하고 있는 아카아시에게, 줄곧 묻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해 주저하던 것을 그제야 할 용기가 생겼다. 보쿠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카아시.”

.”

나 말이야, 사실 네가 미웠어.”

 

아카아시의 눈이 보쿠토를 향했다. 보쿠토가 황급히 덧붙였다.

 

. 미운 거라기보다는그게서운하고 섭섭했다고 해야 할까. 햇수로 따지면 8년 만에 본 거잖아.”

제가 멋대로 배구부를 은퇴아니 탈퇴해버리고 보쿠토상을 피해 다녀서 그런 거겠죠. 알고 있었습니다.”

 

아카아시의 담담한 말에 보쿠토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곧 희미하게 웃었기 때문이다. 느리게 이어지는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오히려 좋았어요.”

……?”

보쿠토상이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한다는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습니다.”

 

보쿠토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저는 보쿠토상처럼 대범하고 솔직하지 못해서그런 사소한 사실만으로 만족했습니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절 미워하고 서운해 하고 섭섭해 하는 감정이 남아있다는 건 그만큼 보쿠토상이 저에게 바라는 게 크고 많았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보쿠토가 조금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힘겹게 빠져나오는 물음과는 달리 심장은 머리보다 먼저 깨닫고 있는 듯 한 발 앞서 쿵쿵 뛰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가 그의 시선과 섞이고, 늘 그의 상태를 귀신같이 알아맞혔던 것처럼, 그의 생각을 헤아린 게 확실한 목소리로, 아카아시가 말했다.

 

좋아했습니다. 아니아직 진행형일지도 모르겠군요.”

 

보쿠토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달박음치는 게 더 빨라졌다.

 

왜 제가 배구부를 그만두었는지, 보쿠토상을 피해 다녔는지 궁금하셨죠. 배구가 좋고 보쿠토상이 좋아서, 둘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온전히 즐길 수 없을 것 같아서, 자신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아카아시 선생님은 배구가 좋고 아빠가 좋았대. 근데 왜 안 하는 거야? 이어질 수 없다고 여겼던 문장이 그 뜻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보쿠토상이 졸업한 이후로 배구가 재미없어졌어요. 저는 그게 무서웠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보쿠토상이 없는 후쿠로다니에 적응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저를 부르는 이름에 보쿠토상의 있지도 않은 목소리가 자꾸만 섞여들고 토스 타이밍이 자꾸만 어긋나면서 앞으로의 후쿠로다니를 기대하고 떠난 보쿠토상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거라는 게 두려웠습니다.”

…….”

보쿠토상과 합을 맞추면 괜찮을 것 같은데, 부탁하게 되면 보쿠토상이 이유를 물을 것 같아서, 얼굴을 보게 되면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마음을 쏟아내 버릴까봐, 좋아한다는 그 말 한 마디를 차마 못해서 피하고 도망쳤습니다. 일단 이 마음을 피하다보면 사그라지겠지, 괜찮아지겠지 달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데……

 

아카아시의 입꼬리는 여전히 살짝 들려 있었다. 나지막이 뱉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막상 저질러보니 후련하네요. 이걸 못해서 끙끙거렸던 게 어이없을 만큼. 그냥 좀 더 빨리 말해버릴 걸 그랬나 봅니다.”

아카아시.”

 

보쿠토는 어떤 감정보다도 먼저 묵직하게 내려앉는 안도를 느끼며 아카아시의 이름을 불렀다. 귀찮은 게 아니었어. 싫어한 게 아니었어. 마지막으로 전해들은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

 

나는네가 그런 거였는지도 모르고, 그동안 나는

괜찮습니다. 제 잘못도 크니까요. 아무 말 없이 배구부를 그만두고 사라져 버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내가 생각한 이유가 아니었다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아니,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아무리 과격한 운동을 해도, 5세트의 듀스까지 뛰었을 때도, 처음으로 생방송 인터뷰를 할 때도 이렇게까지 뛰어본 적 없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손톱 끝까지 피가 도는 기분이었고 속에서 충동적인 무언가가 차올랐다. 아카아시가 나를 좋아했어. 배구를 그만둘 정도로 나를 좋아했어. 아카아시는 아직도 나를 좋아해. 그리고 나는…… 나는……

 

슬슬 돌아가죠.”

 

자리에서 아카아시가 일어나서야 보쿠토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파도처럼 너울대는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마음을 철썩철썩 후려쳤다. 아무렇지 않은 아카아시와는 달리 보쿠토는 그러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았다. . . . 배구 경기 때마다 듣던 북소리보다도 더 커 가슴이 멍멍할 지경이었다.

 

 

 

 

보쿠토를 좋아한다고 고백해 온 그날 이후에도 아카아시는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셋은 함께 밥을 먹었고 여전히 아카아시는 타나바치의 등원을 책임졌으며 보쿠토는 그 두 사람을 유치원까지 태워다주었다. 보쿠토는 잠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게 맞는 거였다. 아카아시의 말에 따르면 8, 아니 9년 전부터 그를 좋아했으며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좋아해오고 있으니까 뭔가 태도가 변한다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됐다.

 

하지만 그걸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마다 보쿠토는 숨이 콱 막히기도 하고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얹히는 기이한 감각을 체험하곤 했다. 그 현상과 관련된 실마리를 찾을듯 말듯 하는 순간은 늘 한 발짝 늦게 찾아와 보쿠토가 제때 쥐지 못하고 놓쳐버리게 만드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 기분은 가히 좋은 게 아니라 보쿠토는 인상을 티나게 찌푸리는 일이 잦아졌다.

 

오늘도 그랬다. 휴일이 겹친 덕분에 아카아시와 타나바치는 보쿠토는 소속팀 리그 경기를 참관하러 왔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잠깐 얼굴을 보며 셋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동료가 보고 가족같다며 놀렸었다. 타나바치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고 보쿠토도 어쩐지 얼굴이 붉어졌지만 아카아시는 무덤덤하게 그런 거 아닙니다.’라고 동료에게 딱 잘라 말했었다. 시무룩해진 타나바치도 그렇지만, 보쿠토는 그 지나치게 단호한 말이 신경 쓰였다. 애초에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는 무던함이 싫기까지 했다. 다시 철썩철썩 그의 마음을 두드리는 거대한 감정의 파도가 용솟음치기 바로 직전, 그를 부르는 코치의 목소리에 몸을 돌려야 했다.

 

보쿠토는 입 안을 잘근잘근 씹었다. 경기 전부터 기분이 저조했던 탓인지 컨디션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다. 같은 팀 세터가 보쿠토의 눈치를 살피며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보쿠토는 더욱 부담감을 느끼며 스파이크를 때렸지만 상대의 블록에 한 번 걸리고 말았다. 제대로 리시브해낸 상대의 속공에 1점을 먹혔다. 스코어는 1315로 보쿠토의 팀이 2점 뒤지는 상황이었다. 보쿠토는 손을 들어 머리를 제멋대로 헝클어트렸다. 뻣뻣하게 세웠던 머리카락이 축 가라앉았다. 감독과 코치가 괜찮다고 벤치에서 소리쳤지만 나아지지 않는 기분 사이에서, 보쿠토는 관중석을 보았다.

 

정확히는 관중석에 앉아 있는 아카아시와 타나바치를. 아카아시의 또렷한 시선이 보쿠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침착한 눈매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 시선만 마주치고도 마음이 안정되었던 경험이 많았다. 그게 너무 편하고 당연해서 정작 앗아졌을 때여서야 소중함을 알았다.

 

타나바치가 보고 있습니다.’

 

아카아시의 입모양만 보고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숱하게 들었던 맨 앞자리의 여학생이 보고 있습니다.’와 같은 맥락의 말이었다. 아카아시는 그것도 모자라 손을 들어 타나바치의 손목을 잡고 대신 흔들어 주었다. 타나바치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고 아카아시도 민망한 듯 금방 그 손을 내렸지만 여전히 조금 웃고 있었다.

 

화악

 

그리고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뜨거운 파도가 보쿠토의 전신을 뒤덮었다. 체육관 코트. 그를 향해 오차 없이 날아오던 토스. 망설임 없이 내리꽂았던 스파이크. 1점을 얻어낼 때마다 주먹을 꽉 쥐고 웃던 얼굴. 햇빛이 들지 않는 체육관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찬란하게 빛나던 추억은 단지 추억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기분과 컨디션이 어떤지를 한눈에 꿰뚫어보던 아카아시. 그가 바라는 코스로 정확하게 토스해주곤 했던 아카아시. 그가 듣고 싶어하는 말만을 골라 담담하게 사기를 높여주던 아카아시. 그가 어려운 스파이크를 성공시킬 때마다 주먹을 꽉 쥐던 아카아시.

 

아카아시. 아카아시. 아카아시.

아카아시가 있기 때문에 빛나던 추억이었다.

 

파도가 스쳐지나간 자리는 고속도로처럼 뻥 뚫렸다. 답답했던 마음이 활로를 찾은 듯 시원해졌다. 보쿠토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지속되던 상황을 타개할 정답을 찾아냈음을 깨달았다. 고등학교 때 설명 없이 은퇴하고 그를 피해 다닌 아카아시의 전언을 들었을 때나, 일상으로 자리잡아버린 아카아시와의 식사를 떠올릴 때마다 느꼈던 감정은 모순이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선상 위에 있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고백을 들은 이후로 줄곧 이 말을 말해주고 싶었던 거다.

 

나 역시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고.

내가 졸업하고 네 빈자리를 느끼면서 서서히 깨닫기도 전에 네가 도망치고 숨어버려서, 화가 나고 섭섭하다는 핑계로 너를 미워하게 된 것 같다고.

너무 늦게 깨닫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아카아시와 그에게만 느리게 느리게 흐르는 듯한 시간 사이에서, 보쿠토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금방 이길게.’

 

얼른 끝내고 너한테 해줄 말이 있어. 보쿠토의 말을 알아들은 듯, 하지만 이해는 하지 못한 얼굴로 아카아시가 빤히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몸놀림으로 세터가 보낸 공을 상대팀 코트로 꽂아 넣었다.

 

들썩들썩. 온전히 그에게 향하는 관중의 함성보다, 아카아시에게 해주고픈 말 때문에 보쿠토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 근처였나……

 

쿠로오가 머리를 긁적이며 핸드폰을 들었다. 보쿠토가 알려준 주소를 네비에 찍어 도착한 곳이니 맞긴 할 텐데. 문제는 보쿠토가 번지수 끝자리를 끝까지 적지 않은 채로 보냈다는 거였다. 빼먹을 게 따로 있지 하필이면 맨 마지막 숫자를 빼먹을 게 뭐냐.

 

켄마 넌 어디라고 생각해?”

 

쿠로오가 뒤로 돌며 물었지만 비협조적인 켄마는 저 멀찍이서 나무늘보와 경쟁할 정도로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쿠로오는 그가 도착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막상 가까워진 켄마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게임만 하느라 바빴다. 어쩔 수 없지. 쿠로오는 빠르게 납득한 뒤 핸드폰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보쿠토의 집임이 가장 유력한 두 집을 번갈아 가리켰다. 어디 보자……

 

, , , , , , , , , , , , , , , , , , , , , .”

쿠로 유치해

 

왼쪽에 있는 집이 선택됐다. 켄마가 중얼거리며 다시 게임 화면으로 고개를 내렸지만 쿠로오는 어깨를 으쓱이곤 곧바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데 들고 있던 핸드폰에 전화가 왔다는 화면이 떴다.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며 쿠로오가 보쿠토의 전화를 받았다.

 

어이, 보쿠토. 나 마침 너희 집 앞이다.”

오야? 벌써? 나 가려면 좀 걸려! 아카아시네 가 있어!’

헤에, 아카아시네 집? 너네 드디어 살림 합쳤,”

 

순간 문이 열렸다. 쿠로오의 찍기에 따르면 아무도 없어야 하는 집에서 문을 열고 나온 건 아카아시였다.

 

아카아시 너 왜 보쿠토 집에서 나와? 진짜로 살림 합친 거야?”

 

농담이 진담이 된 것만 같은 현실을 마주한 쿠로오의 얼빠진 목소리에 아카아시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안 합쳤습니다. 여긴 제 집이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본 건데 인사가 먼저 아닐까요. 쿠로오상.”

안녕. 오랜만이다 아카아시. 만나서 반가워.”

 

찍기가 틀린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무슨 말을 했었냐는 듯 영혼 없이 인사한 쿠로오가 보쿠토와의 통화를 끊었다. 그 사이 아카아시는 쿠로오 뒤에 선 켄마와 조용히 인사를 나누었다.

 

아카아시가 두 사람을 집 안으로 들이자 거실 쪽에서 쿠로오를 발견한 타나바치가 와다다 뛰어 그의 품에 안겼다. “어이구, 우리 타나바치 안 본 사이에 볼이 탱탱해졌네, 잘 먹나봐~”라고 너스레를 떠는 쿠로오의 시선이 아카아시의 앞치마에 닿았다. 그가 보든 말든 음식을 준비하는 아카아시를 확인한 쿠로오가 집안을 살폈다. 접시 세트 셋, 식탁 위 물컵 셋, 방석 셋, 쿠션 셋, 침대는 둘.

 

이거야 원안 합쳤다고 하기도 민망하지 않아?”

안 합쳤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조금 민망해하는 아카아시의 얼굴을 보며 쿠로오는 박장대소 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 보쿠토 언제 오나. 잔뜩 놀려줄 생각으로 가득 차 히죽 웃는 쿠로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켄마가 어딘가로 조용히 메일을 보냈다.

 

 

 

 

볼일을 마치고 아카아시가 좋아하는 유채겨자무침을 잔뜩 산 뒤 조수석에 소중히 모셔둔 보쿠토는 차 시동을 걸려다 문득 메일이 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혹시 아카아시!? [보고 싶어요 보쿠토상]이라든가, 아니면 [기다리기 힘드네요 보쿠토상]이라든가? 각각의 내용에 맞춘 답변을 수백 가지는 만들어놓은 보쿠토가 기대에 차 메일을 확인했다. 하지만 먼저 눈에 들어오는 발신인은 보쿠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코즈메 켄마

 

이게 누구더라, 쿠로오 소꿉친구. 오늘 같이 온다고 했었지. 보쿠토가 심각하게 켄마의 이름을 노려보았다. 아카아시가 아니라 실망한 건 둘째 치고, 번호가 저장되어 있는 게 신기할 수준인 데면데면한 사이의 켄마가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는 게 더욱 떨떠름했다. 쿠로오라면 몰라도 코즈메가? 그것도 나한테? 의아해하며 켄마가 보내온 메일을 읽는 보쿠토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쿠로가 두 사람 괴롭히는데]

 

보쿠토는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뒤 서둘러 시동을 걸고 핸들을 잡았다. 우리 아카아시와 타나바치를 괴롭히다니! 쿠로오 아무리 너라도 용서할 수 없다아아!! 보쿠토의 발이 힘껏 엑셀을 밟고, 부웅 소리와 함께 쏜쌀같이 튀어나간 차의 조수석에서는 안전벨트를 멘 유채겨자무침 쇼핑백이 덜커덕덜커덕 소리를 내며 주인에게 빠른 속도로 가까워져 갔다.

 

 

 

 

 

 

 

아이 이름은 칠석(타나바타)에서 따왔는데 이렇게 지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름 체계를 몰라서 그냥 멋대로ㅋㅋㅋ

한편 안에 눌러 담으려니 쓸데없이 길어지고 어색한 부분이 있네요ㅜㅜ 부자연스러워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니썬님 금썰 감사합니다!

썰원문: https://twitter.com/Nissun_HQ/status/724261545320947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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