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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게히나ts] 아마도 썸 下

별골짜기 2016. 3. 16. 19:07

카게히나(히나타ts)

아마도 썸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배구 때문에 기뻐하고 행복해하다가도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맛본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배구를 좋아했던 만큼 마지막에 남은 좌절이 너무 커서, 후폭풍이 너무 커서 나는 그게 너무 싫고 무서워. 내가 응원하는 사람의 꿈이 꺾여서 절망하는 모습 지켜보는 거 더 이상 싫어. 다시는 그런 경험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다시는 안 그럴 거야.’

내가 보여주면 되잖아.’

?’

결승도, 전국에서도 끝까지 코트 위에 남아있는 건 나야. 코트 위에 가장 오래 남아있는 건 승자이고, 그러기 위해서 강해질 거야. 내가 가장 오래 남아있겠어. 그러니까 지켜봐. 일본 정상이라도, 세계라도.’]

 

히나타는 그날 복도에 오래도록 나와 있었다. 카게야마가 끌고 가던 방향이 여자들이 묵기로 한 교실이었던 건지 금방 길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곳을 목전에 두고 히나타는 계단 쪽에 쭈그려 앉아 팔에 얼굴을 묻었다. 속상한 마음이 치미는 것과 별개로 카게야마에게 화를 낸 것에 대한 미안함이 스며들어 더 눈물이 났다. 카게야마가 한 말은 사실인데, 겸허히 인정해야하는 종류일지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 서운한지 몰랐다. 매일 화를 내고 구박을 해와도 이렇게까지 몰리는 기분은 아니었는데. 카게야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순순히 인정했을 것이다. 사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게야마라서 다르다는 것을 히나타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는 건지는 모른다. 히나타는 다만 지금이 중요했다. 지금의 히나타는 이정표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히나타의 얼굴을 본 시미즈와 야치가 깜짝 놀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히나타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먼저 잘게요. 나란히 누워 수다 떠는 건 히나타도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좀처럼 그럴 수가 없어 이불을 뒤집어썼다. 옆자리의 야치가 연신 걱정스럽게 돌아보았지만 히나타는 이불 밖으로 한 번도 고개를 내밀지 않았다. 매니저들이 도란도란 불 꺼진 교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지만 그 내용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빨리 자고 싶을 뿐이었다.

다음날 일정 역시 마찬가지로 골든위크 합숙 때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매니저들은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고, 남자 부원들은 배식을 받은 뒤 식탁에 앉아 오전 연습을 위해 열성적으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계란말이 담당이었던 히나타는 무슨 일 있냐는 켄마의 질문을 들었지만 웃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그 뒷순서인 쿠로오가 키득거리며 치비쨩 남친군도 어제 화장실로 도망쳤다가 돌아온 후부터는 죽을상이던데~”라고 말했다가 좋지 않게 어두워지는 히나타의 얼굴을 보고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켄마의 한심하다는 표정을 보고서야 건드려선 안 될 부분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쿠로오는 반성의 의미로 입술을 제 손으로 두어 번 찰싹 때린 뒤 얌전히 계란말이를 받고 자리를 떠났다.

옆에서 햄을 나눠주던 야치는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카게야마군이랑 싸웠어?”라고 물어봤지만 히나타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온 카라스노 부원들이었다. 타나카와 니시노야는 매니저들이 주는 반찬을 겸허히 받으며 이 세상 행복에 대한 진리를 통달한 표정을 지었다. 다이치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매니저들에게 일일이 해주었으며, 스가와라는 히나타의 표정을 보고 잠시 흠칫하는 듯했지만 장소와 때를 파악하고 여기서 물을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스쳐 지나갔다. 츠키시마의 경우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금방 히나타의 얼굴을 꿰뚫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선 늘 걸던 시비도 걸지 않은 채 휙 사라져 버린 츠키시마의 뒤로 카게야마가 나타났다.

카게야마의 분위기와 표정은 평소보다 더 어두웠다. 마치 까마귀의 현신 그 자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칙칙한 분위기에 같은 카라스노 부원들조차 그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야치도 햄을 몇 개 집어주다가 흠칫하고 놀랐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인 뒤 히나타에게 계란말이를 받기 위해 식판을 내밀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적당량을 얹어주었다. 평소대로라면 더 달라고 고집을 부렸을 카게야마는 그러지 않고 휙 몸을 돌려 지나쳤다. 거기서 카라스노 부원들은 확신했다. 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시미즈도 히나타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히나타는 고개를 젓기만 할뿐이었다.

 

 

 

 

그날 주말 합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까지 카게야마와 히나타 사이에 오간 대화는 한 마디도 없었다. 처음에는 둘 사이의 심상찮은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던 타나카와 니시노야도, 버스에서까지 따로 자리를 잡아 앉는 모습을 보고서는 눈을 크게 떴다. 히나타가 꾸벅꾸벅 졸며 창문에 머리를 살짝살짝 부딪쳐도 반대편 창가 자리를 잡고 앉은 카게야마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따로 앉게 되는 바람에 히나타 옆자리에 앉게 된 츠키시마가 한숨을 푹 쉬고 히나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할 정도였다. 히나타가 창문에 머리를 박는 소리가 나지 않아서야 카게야마는 어느 때보다 날 선 눈으로 히나타를 돌아보았다. 츠키시마의 어깨에 기대 잠든 히나타를 확인한 카게야마의 눈 밑이 더욱 거뭇해졌다.

봄고 예선 전에 있을 처음이자 마지막 장기 합숙. 일주일 동안으로 예정된 합숙이 가까워졌다. 남자 부원들은 더욱 바빠졌고, 그만큼 매니저가 할 일도 늘어났다. 아사히는 점프 서브를, 니시노야는 토스 연습을, 스가와라는 스파이크 연습을 했다. 또한 그들은 신젠 고교의 주특기인 싱크로 공격을 연습하기도 했다. 반면 카게야마는 홀로 체육관을 빌려 개인연습을 했다. 우카이 코치의 제안으로 멈추는 토스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몹시 어려운 토스라 애를 먹고 있다고 들었다.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는 몰랐다. 그의 연습은 시미즈가 도왔기 때문에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이다.

수많은 공격 패턴 연습을 돕다보면 하루가 눈 깜빡할 사이 지나갔다. 히나타는 부활동이 끝나고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었지만 자기 전에 꼭 사과와 칼을 집어 들고 식탁 앞에 앉았다. 졸린 눈을 부비며 사과 껍질 까는 연습을 한 탓에 가끔 손이 베여 피를 보는 날도 잦았다. 히나타는 엄지도, 검지도, 밴드투성이가 됐지만 그만두지는 않았다. 그래도 연습의 성과인지 삐뚤빼뚤하기는 해도 끊이지 않고 사과 껍질이 이어진다는 건 매우 다행인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 일주일짜리 장기 합숙 당일이 되었다. 밤부터 모여 버스 앞에 보인 부원들 중에는 야치도 섞여 있었다. 야치에게 정말정말 고맙다고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히나타는 창가자리에 올라탔다. 야치는 맨 앞에 시미즈와 앉는 것이 익숙했는지 그쪽으로 갔다. 히나타는 아예 출발하기 전에 잠들어버릴 요량으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의 단발마가 버스를 짧게 울렸다.

 

허억!”

 

히나타가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카게야마의 얼굴이 너무도 가까워 히나타는 뒤로 고개를 빼다가 창문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 히나타가 머리를 문지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카게야마 뒤를 따라오던 타나카가 무척 어색한 표정과 목소리로 딱딱하게 말했다.

 

.. .... ..하다. . ... .. .. ... .. ...... .. ... . . .. ..!”

 

누군가 밀어 넘어지기 직전의 상태로 시트를 꽉 붙잡고 허리를 숙인 모습이다 싶더니 타나카의 짓이었다. 카게야마가 스윽 고개를 돌려 타나카를 보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빈 바람소리만 나는 휘파람을 불며 뒷좌석으로 넘어갔다. 다른 자리도 부원들이 냉큼 차지하고 앉는 바람에 남는 자리가 여기밖에 없어져 선택의 기회도 없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 옆에 앉았다. 메고 있던 가방을 발치에 내려놓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반대쪽을 바라보았다. 절대 안 자고 버텨야지. 기대지도 말아야지. 히나타는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잠기운을 버티기 힘들었던 히나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끼무룩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 . 머리끈이 창문과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카게야마는 그 소리를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잊을만하면 들리는 소리가 신경줄을 건드렸다. 카게야마는 참지 못하고 휙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 잠든 히나타의 머리가 창문가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 하고 이를 악문 뒤 손을 뻗어 히나타의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 불편할 것 같아 어깨도 조금 내렸다. 푹 기대진 히나타의 머리는 가벼웠다. 얼굴에 살짝 닿아온 머리카락은 간질거렸다.

 

[‘그럼 제왕이 정말로 좋아하는 건 누군데?’

…….’

봐봐, 대답 못 하잖아. 제왕은 히나타 밖에 없대도.’

크윽, 그 귀요미를 벌써 찜해놓다니!’

,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데 히나타가 다른 남자애들이랑 친하면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거냐?’

타나카상! 제가 언제……

맨날 그랬지. 너희 데이트도 하잖아? 대체 고백은 언ㅈ…, ! , 스가상, 아프

타나카 말은 신경 쓰지 말고, ? 어디 가?’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뭐야. 치비쨩 남친군 도망치는 거야?’

빨리 다녀와야 돼~ 물어볼 거 많아~ 아참! 나간김에 리에프 찾으면 좀 잡아줘.’]

 

그 앞에서 히나타를 봤다. 처음부터 히나타가 유심히 관찰하던 리에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게 기분이 나빠서. 자꾸 화가 나서. 너무 억울해서 직전까지 곤란했던 만큼을 더 얹어 무심코 화를 냈다. 방법이 잘못 됐다는 건 알았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히나타가 관련된 일에는 이상하게 과민해지고, 모든 게 뜨거워지고, 어려운 것들이 자꾸자꾸 생겨났다.

카게야마는 연습을 위해서 눈을 붙여두는 게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 건 몹시도 어려운 문제였다.

틈틈이 잠을 설치던 카게야마는 도착 직전이 되어 여전히 어깨에 기대 잠든 히나타의 머리를 슬쩍 밀었다. 깨어나서 어깨에 기대 있는 것을 보면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게 되고 또 싸우게 될지도 몰랐다.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냉랭한 것 같기도 한 이 상태에서 싸우는 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뒷좌석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의 안타까움 어린 탄식을 미처 알지는 못했다.

 

신젠 고교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오랜만에 만난 여자 매니저들은 여전히 유쾌하고 발랄했다. 그녀들은 카라스노가 없던 작년에는 여자 넷이서 네 팀을 케어하느라 힘들었다며, 올해는 세 명이나 더 늘어 기쁘다고 했다. 어느덧 히나타는 그녀들과 친해져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며 본격 합숙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남자 부원들은 이미 체육관으로 들어가 웜업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히나타와 야치와 시미즈는 조끼를 챙겨 들고 황급히 체육관으로 향했다.

히나타는 팔에 들린 9번 조끼를 보았다. 카게야마의 번호였다. 연습은 잘 되고 있는지 어려운 건 없는지 최근 들어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 없어 묻지 못했지만, 도대체 언제 물어볼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평소에는 금방 싸우고 금방 풀리고 언제 싸웠냐는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것이 익숙했는데 막상 오래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처음이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카게야마가 여전히 밉고 서운한 건 맞다. 하지만 계속 말하지 않는 것도 어쩐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내민 조끼를 말없이 받아 끼워 입기만 할뿐 시선을 건네지도 않았다. 히나타는 다시 속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매니저일에 골몰했다.

 

저 녀석 하이스펙 보통이 아니잖아……

 

어느 포지션에 넣어도 잘할 사기적인 녀석이라며 우카이 코치뿐만 아니라 우부가와의 감독과 코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습경기 중 타나카의 얼떨결 토스를 받은 카게야마가 사정없이 스트레이트를 상대팀 코트로 꽂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히나타는 나이스킬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슥슥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는 카게야마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지만 금방 떨어져 나갔다.

카리스노는 아직 새로운 시도들을 맞춰나가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손발이 잘 맞지 않았다. 우카이 코치는 가끔 핀치서버로 야마구치를 투입해 연습시키기도 했지만 운이 좋아 네트를 간신히 넘기거나 회전이 걸려 쉬운 서브로 가는 수준에 그쳤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발전이 눈에 보였다. 물론 패널티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신젠의 뒷동산을 뛰어올라갔다 오는 패널티를 소화하고 나면 드링크는 금방금방 동났다. 히나타는 자신이 만든 것을 골라 마시는 카게야마를 보았다.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카게야마는 그 드링크를 꼬박꼬박 마셨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히나타는 야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히나타, 내 생각에는카게야마가 정말 네 드링크를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닐 거야.’

맞을걸? 많이 타면 많이 탄다, 적게 타면 적게 탄다, 보여준 대로 딱 맞춰서 타도 막 꼬투리만 잡는다니까?’

그걸 반대로 생각하면카게야마는 맨날 히나타가 탄 드링크만 마신다는 거 아닐까?’

……역시 날 괴롭히려고 작정한 거지!?’

글쎄카게야마가 히나타의 드링크를 정말 싫어했다면 아마 아예 마시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아예 안 마신다고?’

. 정말 싫어한다면, 굳이 마셔서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잖아.’]

 

못 타는 드링크 맛없다는 드링크 굳이 맛보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카게야마가 미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카게야마가 드링크에 손도 대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것보다는 백배천배 나았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로 히나타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한 것처럼 보였지만, 차라리 그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나타는 부원들이 다 마신 드링크 병을 주섬주섬 껴안았다. 다시 타야 했기 때문에 정리를 좀 해야 했다. 히나타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던 참이었다.

 

히나타! !!”

 

? 히나타의 눈이 커졌다. 후쿠로다니와 신젠의 연습경기 코트에서 리시브를 잘못 받아 튕겨 나온 공이 히나타 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까딱하면 얼굴 정면을 맞겠다고 생각한 히나타가 재빨리 눈을 감고 몸을 틀었다. 키는 작아도 반사 신경만은 재빨라 다행이라고 생각한 히나타는 퍽 소리를 내며 벽면을 맞고 떨어진 공을 보며 후덜덜 떨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저 벽 대신 얼굴이 맞아 얼얼했을 터였다. 한 번 리시브 된 공임에도 어마어마한 파워를 가진 스파이크의 주인공 보쿠토가 당황한 얼굴로 괜찮냐고 물었다.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정신 빼고 있으면 안 되지.”

 

츠키시마가 비웃으며 말했다. 히나타가 내가 언제!”라고 항의했지만 날아오는 공에 신경 쓰지 못했던 건 사실이었으므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괜찮아?”

 

시미즈가 물었다. 히나타는 조금 놀란 것 빼고 괜찮다고 대답하며 바닥을 굴러다니는 드링크병을 다시 주웠다. 아까 공 때문에 놀라서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후쿠로다니 매니저들이 미안하다며 같이 주워주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다시 한아름 드링크병을 안게 된 히나타의 눈에 마지막 남은 병 하나를 카게야마가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얼떨떨한 히나타에게 말없이 드링크병을 안겨준 카게야마는 공을 주워 바닥에 탕탕 튕겼다.

 

 

 

 

연습이 모두 끝나갈 무렵 히나타와 야치는 시미즈가 불러 따라갔다. 체육관 정리는 배구부원들이 할 테니 저녁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히나타는 의욕이 활활 불타올랐다.

 

감자부터 좀 씻어줄래?”

!!”

 

히나타가 크게 대답하며 시미즈가 가리킨 감자 포대를 보았다. 바구니에 적당히 담아 물을 틀어놓고 감자를 씻었다. 시미즈는 히나타가 다 씻고 건넨 감자를 잘게 썰거나 큼직하게 썰었고, 군더더기 없는 자세의 칼질을 확인한 히나타는 시미즈에 대한 존경심을 더욱더 불태웠다. 여신님은 요리도 잘 한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히나타에게 다른 학교 매니저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히나타는 늘 열심이네!”

아 그런가요?”

. 드링크도 열심히 타고, 요리도 열심히 하고.”

그래도 잘은 못해서요……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거야!”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우부가와의 매니저가 히나타의 어깨를 탕탕 쳤다. 히나타는 그 격려에 조금이나마 힘을 얻어 열심히 채소를 씻고 다듬었다. 그것을 야치에게 토스하면 야치가 잘게 썰었다. 히나타는 그와 동시에 냄비에 물을 붓고 불 위에 올려 계란을 삶는 야치의 멀티테스킹에 감탄했다. 나도 요리를 배우면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히나타는 멍하니 있다가 야치에게 감탄을 내뱉었다.

 

우와, 야치는 정말 요리 잘하는구나.”

? , 아니야!! 그냥 상 차릴 수 있을 정도……

요리를 따로 배운 거야?”

아니. 엄마가 회사일 때문에 바쁘셔서…… 내가 차려서 준비해야 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는걸.”

야치 어머니 멋지다.”

 

히나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야치는 조금 놀란 눈을 들어 히나타를 마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자립심을 길러주려고 강하게 키우신 거 아닐까? 이렇게 써먹을 데가 있잖아. 나는 엄마가 하도 요리를 잘 해줘서 막상 나오면 제대로 하는 게 없어. , 우리 엄마도 조금은 나를 엄하게 키웠어야 했는데.”

, 아니야! 나야말로 히나타 어머니는 늘 잘 챙겨주시는 것 같아서 부러운걸!”

나는 이번 합숙 오려고 얼마나 사정사정했는지 몰라. 쓸데없이 걱정이 많아서 밤마다 나츠한테 전화를 걸어주는 조건으로 왔다니까! 오죽하면 내가 칼질도 제대로 못하겠어!”

 

히나타가 양손가락을 펴들었다. 밴드를 더덕더덕 붙인 히나타의 손가락은 성한 곳이 없었다. 야치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가 물기 젖은 히나타의 손을 덥썩 끌어안고 경악했다.

 

이 손으로 계속 물 만진 거야?”

? .”

안 돼, 덧난다구!”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씻을 때마다 물 들어가는 건 마찬가지야.”

그래도……

아무튼 중요한 건 내가 칼질을 잘 못한다는 거야…… 사실 주말합숙 끝나고 계속 연습했거든. 그런데도 잘 안 늘어. 혹시 이건 성적 같은 걸까? 난 분명 시집도 못갈 거야.”

 

시무룩해진 히나타가 중얼거리자 야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제일 빨리 갈 것 같은데……

으응?”

, 아니야. 아무것도! 그런데 히나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분주하게 손을 놀려서인지 야치가 만드는 소스 냄새가 향긋하게 풍겼다. 어떻게 카레 소스와 샐러드 소스와 스파게티 소스를 동시에 만들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찰해본 히나타가, 저 멀리 국을 젓고 있는 시미즈의 말을 따라 끓는 물에 면을 넣었다.

 

카게야마랑은…… 언제 화해할 거야?”

, ?”

카게야마도 히나타를 꽤 신경 쓰고 있는 눈치던데……

에이, 아니야. 그 눈치 없는 단세포 배구바보가?”

 

면이 익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젓가락으로 한 가닥을 들어 조심스럽게 입에 넣어보는 히나타에게 야치가 망설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말합숙 이후로…… 가끔 복도에서 만날 때마다 카게야마가 히나타에 대해 물어봤어.”

나를?”

 

의외의 말에 히나타가 눈을 깜빡였다. 야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간단한 질문들이긴 한데알다시피 나나 카게야마는 별로 친하지 않잖아. 그걸 감수하고도 나한테 물어볼 정도면 꽤 신경 쓰고 있는 걸 거야.”

……그랬구나.”

 

히나타는 눈을 내리깔았다.

 

두 사람이 왜 싸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싫어해서 싸운 건 아닐 거야, 정말로.”

고마워.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 아니야! 나야말로 참견한 건 아닌지!”

아니야, 정말 고마워.”

 

히나타는 진지하게 말한 뒤 체에 면을 건져 찬물에 식혔다. 그리고 후라이팬을 새로 올려 야치가 잘라놓은 채소들 일부를 볶았다. 야치는 히나타의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이 신경 쓰이는지 연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저 앞에 낯선 조합이 어슬렁거리며 걷는 모습이 보였다. 네코마의 쿠로오와, 후쿠로다니의 보쿠토 아카아시, 카라스노의 츠키시마였다. 크게 양보해서 네코마나 후쿠로다니는 원래 친한 학교라고 쳐도 츠키시마가 저기는 왜 있느냔 말이다. 표정을 보니 딱히 원해서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우연히 만나서 친해진 것 같지는 않고, 그러고 보니 아까 저 넷이 느지막이 들어온 것 같기도 했다. 대체로 늦은 저녁을 먹는 경우는 자율연습 때문인데……. 츠키시마가 추가로 남아 연습을 했다는 건 별로 상상이 안 됐다. 그런데 그때 보쿠토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뒤에 있는 히나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카라스노 매니저!”

 

앞서가던 넷이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츠키시마도 뒤를 돌아 히나타를 보았다. 그 사이 보쿠토가 성큼성큼 다가와 히나타에게 말했다.

 

아까 공 맞을 뻔했지? 미안!”

사과가 너무 늦지 않습니까, 보쿠토상.”

아앗, 그렇지만 아까는 경기 중이라 정신이 없었다구! 정말 미안해!”

아 전 괜찮아요! 맞지도 않았고, 좀 놀라기만 했어요. 리시브 된 공인데도 어떻게 그렇게 세죠? 깜짝 놀랐어요!”

어엇, 정말? 그렇게 생각해? 하핫 쑥스럽게!”

!! 정말 대단해요!”

거기서 우쭐해지면 어쩌자는 겁니까……

치비쨩은 띄워주기 최강이라니까.”

 

놀랐다면 대신 사과하겠다며 아카아시가 정중한 어조로 말해오자, 히나타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여 받았다. 왜 후쿠로다니 매니저들이 아카아시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카아시가 투덜거리는 보쿠토의 비위를 영혼 없이 맞추며 다시 그를 이끌었고, 쿠로오는 피식 웃고 뒤돌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우두커니 멈춰 있던 츠키시마에게 히나타가 물었다.

 

웬일로 자율연습 했나보다?”

어쩌다 잡혀서 한 거야.”

 

츠키시마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히나타가 키득 웃으며 말했다.

 

복 받은 소리를 잘도 하네? 강호고교 세터랑 에이스들 틈에서 연습했다고 부러움 받을 텐데.”

누가 부러워해? 제왕이?”

 

츠키시마의 말에 히나타는 입을 합 다물었다. 츠키시마는 히나타의 기색을 한 번 읽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너 제왕이랑 싸웠지?”

아니? 안 싸웠는데?”

안 싸웠는데 왜 얘길 안 해? 그것도 지난 주말 합숙 때부터.”

그건……

무슨 일 있었지. , 고백 듣고 거절이라도 했냐?”

무슨 소리야!”

아니야? 난 또- 그날 화장실 다녀온 제왕 얼굴이 말도 못 붙일 정도로 험악해졌길래 분명 너랑 관련된 문제가 터졌구나 싶었는데.”

 

히나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츠키시마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뭐 땜에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화해하지. 선배들이 너희 눈치를 봐야겠어?”

맞는 말인데네가 하니까 기분 나쁘다.”

그럼 언제까지 이럴 건데?”

…….”

너나 제왕이나 멍청하고 단순하고 눈치 없는 건 똑같아.”

뭐야? 시비 거냐!”

그런 너희가 입 꾹 닫고 귀 막고 있는다고 풀 수 있을 것 같아? 단세포는 단세포 방식으로 해결해야지. 솔직하게 말하는 건 너희 특기면서 왜 그러고 있어?”

 

츠키시마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히나타를 보았다. 그것이 억울했지만 반박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빨리 해결 봐. 보는 내가 다 답답해서 짜증날 지경이니까.”

, 신경 꺼!”

신경 끄고 사는 내가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어?”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츠키시마의 말에 히나타는 최근 부원들의 태도를 떠올렸다. 히나타를 볼 때마다 작게 헛기침을 했던 다이치. 히나타와 대화를 할 때마다 뭐가 말할 듯 말듯 주저하던 스가와라. 수건을 받아들 때마다 뭔가 불안한 눈빛이었던 아사히. 장난스러운 놀림을 눈에 띄게 줄인 타나카와 니시노야. 약간의 근심을 담아 보던 엔노시타 키노시타 나리타. 말없이 시선만 주고받던 츠키시마와 야마구치. 늘 무슨 일이냐고 묻던 시미즈와 야치. 히나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본의 아니게 또 폐를 끼치고 말았다.

 

그리고 너 타임아웃 때마다 떠들던 거 요즘 왜 안 해? 요즘 통 안하니까 타나카상 노야상이 힘을 못 내잖아.”

맨날 시끄럽다고 하던데……

누가? 제왕이?”

 

츠키시마가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 그가 말했다.

 

넌 그게 진심이라고 생각하냐? 하아. 이래서 단세포들이란……

너 지금 욕하는 거야 뭐야?”

당연히 욕이지.”

 

츠키시마가 쯧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생각해 봐, 진짜 그게 시끄럽고 싫었으면 타임아웃 때마다 네 근처에서 알짱거리고 있겠냐? 일부러 네가 탄 드링크 골라 마시면서?”

 

츠키시마는 안경을 고쳐 쓴 뒤 뒤를 돌아서며 말했다.

 

나머진 너희 둘 대화로 풀어.”

 

저벅저벅. 멀어지는 츠키시마의 뒷모습을 보며 히나타는 느릿하게 걸었다. 츠키시마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카게야마는 늘 히나타의 근처에 있었다. 아까 토스 좋았다고, 진짜 대단했다고 칭찬하면 기묘하게 찡그려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시끄럽다고 면박을 줬다. 그렇지만 딱히 제지한 적도, 싫어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일부러 히나타가 탄 드링크를 마시며 잔소리를 하면서도……

 

저녁은 먹었어?”

 

히나타가 계단을 오르는 와중, 막 내려오던 시미즈와 만났다.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디 가세요?”

네가 안 오길래 찾아보고 있었어.”

. 잠깐 츠키시마를 만났거든요!”

 

히나타가 손을 내저으며 걱정할 필요 없었다고 하는데 시미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어버버하는 사이 시미즈의 손가락이 히나타가 대충 감은 밴드에 닿았다. 히나타가 칼 연습을 하다가 베여버린 상처들이었다. 시미즈는 히나타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아주고 말했다.

 

히나타. 매니저라고 해서꼭 모든 걸 잘할 필요는 없어.”

 

저 상처가 무엇 때문에 났는지 알고 있던 건지, 아니면 보자마자 예상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시미즈는 고요하게 히나타의 마음에 걸렸던 점을 짚어냈다.

 

나는 처음 다이치에게 매니저 제안을 받고배구와 매니저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시작했어. 고문 선생님은 늘 배구부를 떠나 있었던 데다가내가 무슨 일을 하면 되는지 알려줄 사람도 없어서 처음 1년 동안 참 많이 헤맸어.”

…….”

그런데 히나타는 아직 반년 째잖아. 실수를 하고 미숙해도 그걸 만회할 시간은 2년이나 남아 있어그러니 굳이 무리해서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따뜻한 시미즈의 말에 히나타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저는 배우는 게 너무 느려서실수도 잘 안 고쳐지고

그래서 내가 있는 거잖아.”

 

시미즈가 손을 들어 히나타의 어깨를 쥐었다.

 

“1년이 지나도 어렵다면, 언제든지 전화해도 돼. 전혀 귀찮지 않으니까 걱정도 하지 마. 벌써부터 반년 뒤를 걱정하는 건 낭비라고 생각해.”

시미즈상……

들어가자. 밴드도 다시 갈아야겠어.”

.”

 

시미즈는 말수가 적었지만 분명 이 카라스노 배구부에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배구부를 떠받치고 있는 게 시미즈라는 사실을, 반년동안 그녀와 함께 하며 히나타는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미즈가 없는 배구부를 생각하면 아직도 조금 무섭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었다. 히나타는 고개를 내려 아직도 물기에 젖은 밴드를 보았다.

 

 

 

 

야치, 츠키시마 그리고 시미즈와 연이어 이야기를 나눈 덕분인지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내일은 카게야마를 만나면 꼭 대화를 해야지. 히나타는 그렇게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서인지 기합이 단단히 들어가 밤새 근육통에 시달려야 했다.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떠버리기까지 했으니 히나타는 내심 긴장하고 있는 셈이었다. 일찍 일어난 김에 가장 먼저 씻은 히나타는 머리를 대충 말렸다. 히나타의 머리카락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지만 어차피 무더운 여름날이니 빨리 마를 터였다. 게다가 아예 못 말린 것도 아니고 마른 수건으로 충분히 감싸고 있었다.

옷을 대충 갈아입은 히나타는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로 구급약품을 뒤적여 밴드와 연고를 찾아냈다. 여기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기에는 아직 잠들어있는 여자 매니저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대충 챙겨들고 걸음을 옮겼다. 머리를 감은 탓인지 어젯밤 새로 간 밴드가 또 젖어 있었다. 히나타가 수건을 만지작거리며 계단 층계참으로 향할 때였다.

 

…….”

…….”

 

히나타는 막 계단을 내려가던 카게야마를 층계참에서 딱 맞닥뜨리고 잠시 굳었다. 이 아침부터 어딜 가냐고 물어보려다가 금방 답이 떠올랐다. 카게야마는 늘 아침에 러닝을 뛴다고 했다. 그래도 예의상 물어봐주는 게 나으려나. 분명 대화를 할 거라고 다짐하긴 했는데 둘만 있는 이 공간이 숨 막히게 어색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히나타는 내심 당황했다. 지금까지 카게야마와 단둘이 있었어도 이렇게 어쩔줄 모르겠는 기분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히나타가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카게야마의 시선은 재빠르게 히나타를 훑었다. 그의 눈동자가 히나타의 수건, 수건을 쥐고 있는 손가락으로 닿았다 싶더니 한순간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뭐야?”

“?!”

 

카게야마가 성큼 다가와 히나타의 손을 낚아챘다. 밴드가 몇 군데 감긴 손가락을 자세히 살피자 더욱 성나고 험악해진 표정이 보였다.

 

다쳤냐??”

 

히나타는 맨날 드링크 못 탄다고 구박받고 요리 못 한다고 놀림 받는 처지에 칼에 베였다고 하기까진 정말정말 싫었다. 두 사람이 싸웠다고 하기에도 미묘한 다툼의 화제도 비슷한 내용이었어서 그런지 더 그랬다. 하지만 너무 명백하게 베인 상처라 부정할만한 적당한 핑계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멍청이!! 언제 다친 거야? 요리도 못하면서 칼질은 왜 했어? 베인 건데 물은 왜 또 묻혀서 덧나게 만들어!”

, 내가 베이든 말든 덧나든 말든 신경 꺼!”

그게 될까보냐!”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손을 쥔 채로 휙 잡아당겼다. 가까운 계단에 억지로 히나타를 앉힌 카게야마는 다른 손에 들려있던 밴드와 연고를 우악스럽게 빼앗았다. 히나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침 러닝 안 가?”

시끄러워!”

 

히나타는 어쩐지 카게야마가 정말로 제왕이고 자신이 정말로 역적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되었다. 분명 걱정해주는 건 맞는 것 같은데 동시에 화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건지.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화내지 말라고 받아쳐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쭈구리가 되어 카게야마가 하는 양을 보았다.

억지로 어깨를 눌러 풀썩 주저앉게 된 만큼 엄청난 힘에 의해 히나타의 손이 끌어당겨졌다. 평소보다 거칠고 어두운 아우라가 풍기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카게야마가 히나타의 손가락에서 젖은 밴드를 떼어냈다. 늘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을 꺼내 히나타의 손가락을 한번 감쌌다가 풀어낸 그가 상처 하나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잠시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압도적인 기백과는 달리 히나타의 상처를 노려보며 연고를 바르는 손길은 생각보다 조심스러웠다. 연고를 충분히 바른 뒤 밴드를 하나 까서 상처 위에 두르는 동안에야 히나타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너 손톱 예쁘네.”

?”

 

카게야마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카게야마의 손톱은 반듯하고 깔끔하고 짧게 정리되어 있었다. 공을 만지다보니 늘 손톱 정리에 신경을 써서 그런가……라기보다는, 히나타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던진 건지 깨닫고 당황했다.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그만 엉뚱한 말이 튀어나와 버렸어! 히나타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빼내려고 하는 것을, 카게야마가 꽉 잡아 그러지 못하게 하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손톱은 못생겼어.”

…….”

손톱도 제대로 못 깎는 게 칼을 잡긴 왜 잡아? 칠칠맞은 멍청이가.”

 

약 한 번 발라주는데 생색은 엄청 낸다고 생각하며 히나타가 카게야마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또 억울해졌다. 말 따로 행동 따로, 멍청야마. 못된야마.

 

칼 쓰는 연습했다!”

?”

네가 한 말처럼, 나는 드링크도 못타고, 기록도 못하고, 요리도 못하니까 사과 껍질 까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카게야마의 표정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 지금 그 말……

나도 알아. 내가 매니저 지금 당장이라도 혼자 하라고 하면 제대로 못할 정도로 엉망인 거. 드링크도 제대로 못 만들고, 기록은 아직도 요점만 정리하는 게 어렵고, 요리도 칼질조차 겨우겨우 하지만, 나 아직 반년밖에 안 됐다고, 차차 나아질 거라고 시미즈상이 그랬어. 그러니까 나 계속 노력할거야.”

……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카게야마가 이를 악물었다. 히나타의 손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입을 굳건히 닫고 있던 카게야마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성질을 부렸다.

 

……젠장!!”

, 왜 화를 내?! 노력할 거라고 하잖아!”

내 말은, 그게 아니, 제길, 멍청이! 히나타 멍청이!”

……?”

너 뭔가 잘못 알고 있는데-”

내가 뭘 잘못 알아!? 네가 분명히 그랬잖아, 날 이해 못하겠다고!”

 

[‘넌 드링크도 못 타고, 기록도 제대로 못해서 쩔쩔매고, 세탁기 돌릴 줄도 몰라서 한참을 헤매고, 매니저로서 할 줄 아는 것도 없잖아. 근데 다른팀 선수들이랑 친해지려고까지 해. 나는 네가,’]

 

닥치고 들어!”

 

카게야마가 낮게 소리친 말에 히나타는 눈을 크게 떴다. 카게야마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히나타의 손을 한순간 꽉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이해 못하겠다는 말은 진심이었어. 하지만…… 네 매니저로서의 그노력이나공로 같은 걸젠장, 낮춰보는 건 절대 아니었어. 네가 그 말을 그렇게까지 싫어할 줄도 몰랐고나는 그때단지…… 네가 다른팀 선수랑자꾸 친해지는 게나는

 

카게야마가 잠시 이를 아득 씹은 뒤 말을 이었다.

 

나는그게 싫어서그런건데 갑자기 네가 우니까정작 할 말을 못해버리고…… 어쨌든네가 매니저 일을 잘 못하는 건 맞지만그게 싫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아무튼…… , 미안.”

 

카게야마는 어설픈 사과와 함께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히나타는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져 카게야마를 보았다. , 사과! 인터하이 예선에서 들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과 기분이었다. 히나타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진짜야? 싫다고 생각한 적 없어?”

, 그래!”

드링크 이상하게 타도?”

그래!”

세탁기 돌리는 법 까먹어서 물어봐도?”

!”

기록 헷갈려서 너한테 물어봐도?”

!”

요리 못해도?”

그래!”

, 그럼 타임아웃 때 힘내라고 말해주는 것도?”

제길, 그래, 그러니까 그만 좀 물어 멍청아!”

 

카게야마의 얼굴이 수습이 불가할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히나타는 잡힌 손이 괜히 뜨거워지는 기분이라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는 이를 갈며 말했다.

 

타임아웃 때, 우리가 지고 있을 때, 체력적으로 지쳐갈 때 네가힘내라고 하는 거, 그 말 들으면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되니까그거 하나는 최강이니까 계, 계속 열심히 하라고!!”

 

[‘생각해 봐, 진짜 그게 시끄럽고 싫었으면 타임아웃 때마다 네 근처에서 알짱거리고 있겠냐? 일부러 네가 탄 드링크 골라 마시면서?’]

 

히나타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츠키시마도움이 될 때가 있어! 히나타가 히죽 웃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철저히 외면하며 다시 다른 상처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푹 숙여진 까만 머리카락을 보며 히나타가 물었다.

 

정작 하려던 얘긴 뭔데?”

 

카게야마의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 히나타는 한참 뒤에야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과, 동시에 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랑 친해지면 좋아한다고 하잖아.”

? 내가 언제?”

작은 거인도네 중학교 친구도네코마 세터도.”

 

저 셋을 좋아하기는 했다. 히나타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카게야마가 분통을 터뜨리듯 말했다.

 

넌 좋아하는 거랑 응원하는 거랑 똑같이 굴잖아! 계속 코트 위에 서 있는 거 지켜보기로 약속한 건 난데 왜 자꾸 다른 사람 끌어들여?”

너랑 그쪽은 다르지!”

뭐 어떻게 다른데?”

그거야……

 

히나타는 말을 뚝 멈췄다. 넌 내가 배구부 들어간 이유니까 별개라고, 특별하다는 말만 아무렇지 않게 해주면 되는데, 왜 이다지도 속이 울렁거리는지. 왜 자꾸 망설이고 주저하게 되는지.

 

그거야, ?”

 

카게야마가 상처에 감은 밴드를 천천히 문질러 완전히 붙인 다음 히나타를 보았다. 진지한 얼굴의 카게야마가 시선을 마주쳤다. 눈까지 마주치니 더더욱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에 턱 걸려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히나타는 카게야마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것으로 대답을 바꿨다.

 

카게아마군 욕심쟁이네~ 그거 카게야마 너만 보란 말로 해석해도 돼?”

시끄럽……

 

히나타 이 멍청이가……. 카게야마는 뒤로 허리를 기울이다가 어느 순간 멈칫거렸다. 카게야마의 눈이 히나타의 얼굴, 머리카락, 머리카락 끄트머리의 수건까지 차례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눈이 마주쳤다.

히나타는 바꾼 대답이 어쩌면 더 좋지 못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인지 심장이 급속도로 두근두근거렸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휙 돌렸다. 카게야마의 눈이 팍 찡그려지더니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근데 대체 머리는 왜 안 말리고 돌아다니는 거야?”

 

다시 고개를 돌린 카게야마가 입을 삐죽 내밀고 히나타에게서 수건을 빼앗아들었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히나타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만들며 털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손가락 사이에 머리카락이 찝히기도 하고, 멋대로 잡아당겨지기도 하는 바람에 히나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그만해. ! 그만하라곳!”

 

히나타가 카게야마에게서 수건을 다시 빼앗은 뒤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히나타의 머리카락 끝으로 향했다. 카게야마는 킁킁거리다가 손으로 히나타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코끝에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히나타가 뒤로 몸을 젖히며 물었다.

 

뭐하냐? 변태야?”

샴푸 냄새 좋아서.”

……

 

, 그러냐……?! 히나타는 다시 안정을 되찾은 카게야마의 표정을 보고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히나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코끝에 가져다대고 냄새를 맡았다. 별로 자각한 적은 없었지만 카게야마의 말을 들으니 정말 향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곧 히나타의 시선이 카게야마가 감싸준 밴드로 떨어졌다.

 

어쨌든. 연습을 해서 베이든 뭐하든 밴드 적셔두면 덧나니까 꼬박꼬박 갈아, 멍청아.”

 

히나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히나타는 카게야마가 붙여준 밴드 부분을 손으로 감싼 채 꽉 쥐게 되었다.

 

우와쿠로오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겠어!”

저 둘 사이 좋다는 말이요?”

! 그치? 아카아시 너도 알겠지? 모르겠다면 이 몸이 친히 설명을!”

별로 필요 없습니다.”

아카아시 단호하네그럼 나도 저거 해줘. 머리 털어주는 거~”

동물입니까? 그런 건 혼자 알아서 하세요.”

아아 싫다구, 안 해주면 나 오늘 연습 협조 못 해~!”

 

아카아시는 한숨을 푹푹 쪘다. 그는 계단에 나란히 앉아 있는 히나타와 카게야마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여기는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장소니까 다음에는 다른 장소를 찾는 게 좋겠다고.

 

 

 

타나카상 타나카상! 아까 이렇게 퍽하고 슉 내리꽂는 스파이크 진짜 대단했어요!!!”

오옷! , 정말이냐!?”

!! 아 그리고 노야상 노야상! 여기 이렇게 한 번에 툭 받아낸 그 리시브 최고예요!! 그것도 롤링썬더 종류인가요??!”

그러냐!?? 음하하! 롤링썬더 종류는 아니지만 내가 특히 엄선해서 만들어낸 기술로……

그거 그냥 리시브잖아.”

, 선량한 어린 양의 환상을 깨지 말아주세요, 스가상!”

노야 네 환상이 아니라?”

 

우카이 코치는 그가 개인 지시를 내리는 사이 종알종알 좋았던 점을 말하며 떠드는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그동안 잠잠하던 시끄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맞춰지는 새로운 진화와 더불어 청신호였다.

 

카게야마군과 원만히 해결된 것 같죠?”

좋은 방향인 것 같아 다행이네.”

 

타케다 선생과 우카이 코치는 히나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젠 카게야마 차례였다.

 

카게야마! 아까 거기서 투어택 쓸 줄은 몰랐어!! 넌 진짜 배구에서는 멋있다니까! 대단해!!”

시끄러워.”

 

카게야마가 또 오묘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예전과는 달리 화를 내는 듯한 버럭 목소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화를 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히나타는 이미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아사히는 드디어 화해했나보다며 감동의 눈물을 찍어냈다. 다이치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저기만 핑크빛……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둘에게 야마구치의 부럽다는 시선이 닿았다. 츠키시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 첫편 히나타 회상 '내가 아는 사람'=작은거인... 히나타 전직 작은거인 열성팬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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