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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보쿠아카] 막이 내리면

별골짜기 2016. 4. 5. 18:25

보쿠아카

막이 내리면

보쿠아카 데이 기념 / 요원 AU

 

 

 

 

1.

 

보쿠토는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한손으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간혹 입에 대기도 했지만, 커피의 양이 좀처럼 줄어들지 못했다. 한모금 커피를 마시는둥 마는둥 조금 머금고 다시 내려놓은 뒤 미끄러지듯 커피잔에서 멀어진 손이 테이블을 짚었다. 검지가 느리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검지와 테이블 사이에 이 지루함이 전부 짓이겨지길 바라며 보쿠토의 눈이 나른하고 지루하게 깜빡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이번에 증여받을 주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자랑 같은 고민을 털어놓는 말이 들렸지만 따분하기만 했다. 별로 부럽지도 않았고 대단하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강조한 구색을 위해서는 성의가 없을지언정 최소한의 맞장구는 쳐야 했다. 애초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나온 자리였다. 여기서 체면을 차리지 않을 거라면 아예 이 자리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30분만 더 버텨볼까. 보쿠토가 생각하며 손목에 걸친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보쿠토가 무슨 생각으로 이 자리에 나왔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듯 여자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부모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이런 종류의 맞선자리라면 본인보다는 가정환경이나 배경에 대해 말이 오가는 게 당연했지만 역시 정말 재미없었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집보다는 역시 본부의 사무실로 가는 게 낫겠지. 그에게 가장 최선의 계산을 끝마치며 보쿠토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선을 볼 때마다 늘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 상대는 꽤 끈질겼다. 보쿠토가 지금껏 단 한 번도 웃은 적 없으며 시선도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과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을 텐데 답이 꼬박꼬박 나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지 열심이었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다신 만날 일 없을 텐데. 조금 안쓰러워져 보쿠토가 그냥 지금 끝낼까, 라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부모님이 최근 뮤지컬에 관심을 가지셔서 투자하실 곳을 찾고 있어요. 그런데 듣자하니 보쿠토씨도 후원하는 극단이 있다고 하던데……

 

보쿠토의 시선이 순간 카페 구석을 향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무심한 눈을 하고 있는 단정한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보쿠토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여자가 하는 말은 이제 제대로 귀에 박혀들지도 않았다. 모든 신경이 집중되는 곳은 단 한군데였다. 당황인지 반가움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순식간에 변한 보쿠토는 이곳에서 보낸 모든 시간을 통틀어 처음으로 생기 있는 모습이 되었다. 그 사실을 캐치한 여자가 보쿠토의 시선의 방향을 좇았다. 여자의 눈에 한 남자가 보였다.

여자의 시선까지 받게 되어서인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바른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 걸음은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지만 절대 가볍거나 경박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림같이 다가온 남자가 보쿠토를 똑바로 마주보고 섰을 때, 여자는 모든 감각을 빼앗겨버린 듯이 구는 보쿠토의 태도를 보고 놀란 눈을 크게 떴다.

 

, 아카아시?”

 

보쿠토가 어색한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보았다. 아카아시의 눈이 진중하게 보쿠토와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을 여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쿠토와 아카아시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얽히는 시선들 가운에서 보쿠토만이 아카아시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조금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카아시, 네가 지금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알겠는데……

……오해, 입니까.”

 

. 보쿠토가 고개를 숙였다. 별로 감정을 담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늘 날이 벼려져 있는 것 같이 어떤 힘이 있었다. 힘들이지 않고 집중하게 만든다거나, 꾸짖는 게 아닌데도 반성하게 만든다거나. 아카아시의 말이 담담하게 이어졌다.

 

며칠 전부터 예상하긴 했습니다. 제 연락도 피하시고, 만나도 시선 피하느라 바쁘고, 말도 얼마 없었고요. 저는 다 이해하는데 미리 말씀이라도 하지 그러셨습니까.”

아카아시, 난 그게 아니라……

저는 변명 들어드릴 생각 없는데요.”

용서해줘 아카아시!!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니라……

 

. 보쿠토가 입을 딱 다물고 맞은편의 여자를 보았다. 여자의 감은 빠르고 정확하다. 그녀의 표정은 벌써 무언가를 예감한 듯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이해합니다. 보쿠토상 이제 혼기도 다 차셨고, 슬슬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야 할 때가 되셨죠. 저같이 여러모로 부족한 남자보다는 저 여자분처럼 더 좋은 분을 만나시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죠.”

……말씀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시선이 동시에 여자에게 향했다. 아카아시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부드러운 봄바람 같았던 여자의 표정은 차디찬 겨울바람처럼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부모님이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네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자가 보쿠토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 분위기를 이끌어가기 위해 성실하게 임했던 여자는 맞선 상대인 보쿠토가 알고 보니 남자를 연인으로 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백이면 백 모두 그랬다. 보쿠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에 섞여 나온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주 약간의 죄책감도 가미되어 있었다. 별로 미안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더 그랬다. 누구에게? 곧 이름을 잊어버릴 맞선 상대에게.

 

오늘 연기도 훌륭한걸, 아카아시?”

 

머릿속으로 생각의 정리를 마친 뒤 고개를 숙였던 보쿠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자마자 허리를 쭉쭉 펴고 팔을 이리저리 돌려 스트레칭을 했다. 하도 오래 앉아 있었더니 좀이 쑤셔 죽는 줄 알았다. 맞선 상황이라는, 결코 달갑지 않은 숨 막히는 공기 가운데 있었던 것도 있지만, 누구보다 활동적인 그에게 답답한 호텔 라운지에 틀어박혀 있으라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보쿠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미리미리 핸드폰 배터리를 뽑아 아무렇게나 분리해 주머니에 쑤셔 넣은 그가 아카아시에게 말했다.

 

아카아시! 고마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반성은 그걸로 끝이십니까?”

무슨 반성?”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져 여자가 떠난 자리를 살피고 있었다.

 

아까 그 여자분 많이 화나신 것 같던데.”

어쩔 수 없어.”

 

보쿠토가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결혼까지 할 수는 없으니까.”

 

보쿠토는 팔을 들어 아카아시의 어깨에 걸쳤다. 무겁게 무게를 싣기까지 하자 아카아시가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걷어내려 했지만 보쿠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포기가 빠른 아카아시에게 보쿠토가 말했다.

 

오늘 도와줬으니까 내가 쏠게!! 뭐 먹을래 아카아시! 말만 해!!”

별로 먹고 싶은 거 없는데요.”

그래? 그럼 내가 정해도 돼? 우리 호텔 스위트룸 빌려서 룸서비스 시킬까? 내 이름으로 너랑 숙박 끊는 것만큼 우리 부모님한테 확실한 건 없을 텐데……

사양하죠.”

거절 빨라 아카아시!”

 

보쿠토가 서운하다는 듯 소리쳤지만, 아카아시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의 시선이 여자가 걸어나간 길을 훑었다.

 

 

 

 

2.

 

벌써 몇 번째지. 아카아시는 곰곰이 생각하며 손가락을 헤아렸다. 벌써 세네 번째 보쿠토의 장단에 맞춰주고 있었다. 아까 있던 작업(?)에서는 보쿠토에게 오늘 연기도 아주 훌륭하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요원 일을 하면서 날로 느는 게 연기밖에 없는 터라 당연한 소리였지만, 칭찬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해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 고민해본 건 처음이었다. ‘같은 성별의 연인이 맞선 보는 자리에 나가 그 자리를 파토 내는 남자연기가 자랑할만한 게 아닌 이유이기도 했고, 그에게는 어느 정도의 진심도 섞인 일인 이유도 있었다. 물론 보쿠토는 모르는 그만의 비밀이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아카아시는 이 일을 처음 시작하게 된 두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보쿠토의 나이가 적당히 결혼하기 좋은 나이가 되어서인지 그는 부쩍 부모님의 전화를 받는 일이 잦아졌다. 눈 밑이 퀭해져 전화를 받으러 나가더니, 돌아올 즈음에는 눈에 띄게 착잡해져 있었다. 그때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아니었는데.

 

[‘아카아시!! 나 좀 살려줘!!!’

보쿠토상? 이것 좀 놓으세요.’

도와준다고 할 때까지 안 놓을 거야아!!’]

 

다짜고짜 그의 팔을 붙잡아오며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보쿠토의 모습에 아카아시는 적잖이 놀랐었다. 못 이기는 척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냐고 물었더니 연인 행세를 하며 맞선을 파토내달라고 했다. 처음 아카아시는 못하겠다고 며칠을 버텼다. 연인 행세라니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카아시는 순간적인 충동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철저한 예측을 통해 행동하는 타입이었다. 아카아시의 예측에 따르면 보쿠토의 부탁을 받아 이 일을 시작하게 될 경우 위험부담이 커졌다. ‘연인이라는 껍데기에 불과한 단어에 얽매여 어느 순간 스스로 그의 감정을 드러내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무릎까지 꿇으려 하는 보쿠토의 고집을 못 이겨 결국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이대로라면 납치당해 꼼짝없이 부모님이 골라준 사람과 손을 잡고 결혼식장 안으로 들어서야 할지도 모른다는 보쿠토의 애원을 들은 이후였다. 결혼하는 보쿠토는 아직 상상해보지 못했다. 보쿠토가 식장에 들어가는 그 순간이야말로 아카아시가 그를 정말로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아카아시는 아직 스스로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로 마음을 포장했다.

처음 보쿠토의 맞선 장소와 시간을 알려 받고, 미리 맞췄던 대로 연인인 척 실망했다는 말을 늘어놓았던 날, 아카아시는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순진한 여자들을 속였다는 알량한 죄책감 같은 건 아니었다. 맞선 상대를 대하던 보쿠토의 태도가 자꾸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아카아시 앞에서는 늘 웃고 떠들고 활동적이었던 사람이 억지로 마련된 자리에 앉기만 하면 웃지도 않고 말도 없이 죽은 듯 무신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건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보쿠토식의 표현이었다.

그건 아까도 마찬가지였다. 카페에 들어와 미리 정해둔 자리에 앉은 아카아시는 맞은편에 바로 보이는 보쿠토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 지겹고 지루해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표정. 항상 즐겁게만 사는 것 같았던 보쿠토의 얼굴 이면에 드러난 다른 모습은 몇번을 보아도 적응이 어려울 정도로 낯설었다. 너무 과도하게 집중해서인지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와버렸다는 사실을 들켜버릴 정도였다.

보쿠토는 늘 솔직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웃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면 웃지 않는다. 그래서 아카아시는 그의 마음을 쉽사리 드러내지 못했다. 그의 마음을 알게 된 보쿠토가 보일 표정의 변화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솔직한 것과 별개로 보쿠토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아카아시 정도의 위치를 가졌던 상대라면 분명 예의상 웃어주는 법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카아시는 그를 대하는 보쿠토의 얼굴에 연기가 덧씌워지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변해버린 낯선 얼굴을 대하는 것도 싫었다.

 

오야? 아카아시 아직 퇴근 안 했네?”

 

순간 아카아시는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고개를 들어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너무 깊게 생각에 빠져 있던 탓인지 다른 사람들이 모두 퇴근해버린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제대로 인사도 못했네. 아카아시는 후 한숨을 쉬며 막 사무실에 들어서는 보쿠토를 보았다. 퇴근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보쿠토는 오히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출근이라도 하는 듯했다.

 

보쿠토상은 퇴근 안 하시고 뭐하십니까? 그건 다 뭐고요.”

앗 그게…… 여기서 자려고.”

왜요? 집 안 들어가십니까?”

가려고 했는데집 앞에 사람이깔려있더라고.”

 

드디어 보쿠토의 부모님이 무력이라도 행사할 모양이었다. 집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본부 사무실에서라도 지내야겠지.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서 고개를 돌린 뒤 주섬주섬 책상 위의 짐을 챙겼다.

 

퇴근하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보쿠토가 물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넘어 있었다. 오늘은 급한 임무도 없으니 편히 들어가서 쉬면 됐다. 하지만 자리를 떠나려던 아카아시의 손목을 보쿠토가 붙들었다.

 

가지 마.”

 

무심결에 세게 잡힌 손목을 본 아카아시가 보쿠토와 눈을 마주쳤다. 흠칫 놀란 그가 서둘러 아카아시의 손목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 그게사실우리집 앞에 사람이 깔려있는 거면 아카아시네 집 앞에도 깔려있지 않을까 해서

그게 무슨 소립니까?”

몇 번 맞선 깨지고 부모님이 슬슬 아카아시에게도 관심을 가질 때가 됐거든…… 괜히 끌어들인 게 찔려서 말 못했어, 미안해.”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빤히 보았다. 미안하기 때문인지 영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그에게, 아카아시는 가벼운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그렇게 의기소침하실 필요 있습니까?”

, ?”

귀한 댁 자녀들 앞에서 얼굴까지 드러냈는데 제가 그만한 각오도 안 했을까봐요.”

예상 한 거야??”

드라마 같은 거 보면 자주 나오지 않습니까. 정말로 저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요.”

드라마에선 어떤 식으로 나오는데?”

 

호기심 어린 표정의 보쿠토를 힐끗 본 아카아시는 짐을 챙기려던 것을 그만두고 사무실 가운데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따라 소파 옆자리에 앉았다. 아카아시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자기 아들이랑 눈 맞은 여자를 따로 불러내서 물을 뿌린다든가…… 현금을 다발로 던져버린다든가…… 협박을 한다든가…… 여러 가지가 있죠.”

, ? 현금? 협박???”

 

보쿠토가 꽤 충격 받은 얼굴이 되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잣집 남자와 가난뱅이 여자, 집안의 반대는 아직도 통용되는 꽤 고전적인 클리셰다.

 

우리 부모님은 그럴 성격이 아니신데!!”

?”

내가 같이 갈 거니까 걱정 마, 아카아시!!”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손을 꽉 잡고 외쳤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보쿠토가 끊임없이 덧붙였다.

 

그럴 리는 없지만! 우리 부모님이 아카아시에게 물을 뿌리려고 하면 내가 대신 맞아줄 거고! 현금을 뿌리면 내가 대신 갚아줄게!! 나 통장에 돈 많아 아카아시! 그리고 협박도 최대한 막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

…… 감사합니다. 그러니 이 손 좀……

그러니까 걱정 말고 부모님 보러 가자!!”

……?”

 

아카아시는 순간 잘못 들었거니 생각했다.

 

어차피 부모님이 조만간 널 어떻게든 찾아내서 데리고 갈 거란 말이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너와 내가 정면승부를 거는 거지!!”

싫습니다.”

 

아카아시가 딱 잘라 거절했다.

 

거절 단호해 아카아시……

시무룩해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안 갑니다.”

 

보쿠토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아시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자신이 보쿠토에게 얼마나 물러 터졌는지 새삼 느끼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아카아시는 합당한 이유를 들기 위해 노력했다.

 

보쿠토상에 대해 모르는 지금까지의 상대와는 다릅니다. 부모님까지 완벽하게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아닌데! 우리 부모님 엄청 잘 속아 넘어가셔!”

……사업가이신 보쿠토상 부모님께 무척 실례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지금까지 맞선 상대들 잘 속였으니까!”

안 됩니다.”

으윽!”

 

보쿠토의 말처럼 지금까지 두 사람의 연기는 성공적이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발견할 때마다 놀란 건지 반가운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색한 연기를 선보였는데. 맞선 상대들은 왜 모두 그 허술하고 어색한 연기에 속아 넘어갔을까. 아카아시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건 보쿠토가 연기여도 아카아시에게는 연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보쿠토의 부탁을 받아 나간 맞선 자리에서 아카아시가 내뱉는 말들은 거짓을 가장한 진심이었다. 그것을 보쿠토의 부모님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보쿠토의 부모님을 통해 그의 감정이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이 서툴기 짝이 없는 연기마저 이어나갈 수 없게 된다면…… 아카아시는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늘 최악의 최악을 가정해 연습해보았지만 막상 닥치면 연습한대로 잘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애절한 표정을 보지 못한 척했다.

 

 

 

 

3.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앉아있는 거지……?

아카아시는 그를 빤히 관찰하듯 쳐다보는 보쿠토의 부모님을 앞에 두고 침착함과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할 수만 있다면 어젯밤으로 돌아가고픈 심정이었다. 사무실에서 짐을 챙겨들고 친구집으로 가든 호텔로 가든 보쿠토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했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하게 굴었다. 어젯밤 보쿠토가 부모님께 정면으로 맞서자는 의욕 활활 제안을 하자마자 싫습니다라고 거절을 한 게 충분한 답이 되었다고 방심한 탓이었다. 치졸하게 그가 꾸벅꾸벅 조는 사이 대답을 들어내다니.

 

[‘아카아시.’

내일 우리 부모님 보러 같이 가는 거지?’

후회하지 않는 거다?’

으음네 그래요’]

 

하도 보쿠토의 말을 들어주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언젠가부터 잠결에 , 그래요.’라는 말을 반복하는 잠버릇이 생겨버렸는데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녹음파일을 들이대버리니 할 말이 없었다. 작전을 수행할 때도 이렇게 치밀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부에서 지급받은 녹음기는 쓸데없이 성능이 좋아 제3자가 들어도 분명한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목소리였다. 아카아시가 자신이 아니라고 발뺌해도 사무실에 널린 게 CCTV, 음성 분석 프로그램이었다.

그 후 1분 동안 아카아시는 직업을 바꿔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정확히 10분 뒤 아카아시는 무슨 생각 하냐는 쿠로오의 질문에 무얼 입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쿠로오가 아카아시 순응 빨라!’라고 소리치며 폭소했지만 아카아시는 진지했다. 우려하던 상황이 터졌으니 다음은 그 대비였다. 최악의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는 않으면 좋을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상황에서도 무심함을 유지해야 희망이 있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격식 차릴 필요 없이 대충 입어도 된다고 해서 사무실에 가져다놓은 옷 중 그나마 단정하고 깨끗한 것을 골라 입었는데, 차라리 백화점에 들러 새로 옷 한 벌이라도 샀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흰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와는 달리 보쿠토의 부모님은 정장을 쫙 빼입고 딱 봐도 부자입니다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이래서야 정말 부잣집 아들내미를 넘보는 가난뱅이 여자, 아니, 그것도 남자인 천하의 몹쓸놈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아니, 보쿠토가 바라는 연기가 그런 종류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부모님이 데리고 들어온 호화 호텔 식당의 한 룸에서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 노력했다.

 

행동거지가 참 단정하구나.”

 

물은 아직 쏟아지지 않았다. 대신 칭찬이 날아들었다. 아카아시는 그게 너무 놀라워 하마터면 젓가락을 떨어뜨리는 무례를 저지를 뻔했다. 사실 한 짝을 순간 놓치긴 했지만 누가 요원 아니랄까봐 다른 손가락으로 재빨리 수습해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었다. 보쿠토가 옆에서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맞장구쳤다.

 

아까 보지 않았어?? 우리 아카아시는 행동만 단정한 게 아니라 걷는 것도 그렇다니까.”

그래, 그렇더구나.”

 

보쿠토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아카아시가 상상하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처음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고, 그를 깔보거나 폭언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저 우아하고 상냥하게 아카아시에게도 예의를 차리며 대해줄 따름이었다. 그때 보쿠토의 아버지가 말했다.

 

코타로와 같은 일을 한다고 들었다.”

……, 맞습니다.”

 

요원이라는 사실은 극비 중의 극비이지만 요원의 가족이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아카아시가 순순히 인정했다. 그의 정체를 부모님께 흘린 보쿠토에게 나중에 지적해줄 거라는 다짐도 하면서.

 

코타로가 기업 이어받을 생각도 없이 난데없이 위험한 일에 뛰어들겠다고 해서 걱정이 많았어. 코타로가 네게 신세를 많이 졌다는데 고맙다.”

 

또 칭찬이다. 아카아시는 심장이 지나치게 벌렁거리는 탓에 침착함을 유지하기 힘들었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쁜 말을 듣는 것보다 어째 좋은 말을 듣는 게 더 심장에 나빴다. 아카아시는 힘겹게 말했다.

 

저야말로 도움 많이 받고 있습니다.”

 

보쿠토가 아니었다면 이 일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었을까? 작전을 하나하나 성공시킬 때마다 보쿠토에게 넘쳐흐르도록 보이는 희열과 성취감에 압도되어 전율하는 그 순간들이 아니었다면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지 않았을까?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이야. 아가, 정말 후회하지 않겠니?”

 

쿨럭. 보쿠토 어머니의 말에 아카아시는 막 목을 넘어가던 유채무침의 겨자가 순간적으로 걸려 사레에 들렸다. 톡 쏘는 매운 맛이 코끝을 찡하게 했다. 아카아시가 갑작스럽게 콜록거리자 옆에 앉아있던 보쿠토가 당황하며 아카아시에게 휴지와 물잔을 내밀며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빠른 대처에 부모님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모르고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카아시는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그건 보쿠토의 부모님 탓도 일정부분 있다고 생각했다. 곤혹과 당황 사이에서 아카아시는 휴지를 꽉 쥐었다.

아카아시는 어디까지 이 연기를 해야 할지 몰라 기침을 핑계로 고개를 숙였다. 보쿠토는 부모님이 강제로 불러들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자고 했다. 보쿠토의 부모님이 아카아시를 보려고 한 이유는 맞선 때마다 그가 어김없이 나타나 파토 냈기 때문임이 분명했고. 보쿠토는 맞선을 보지 않기 위해 아카아시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래, 결국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이거였다. 그가 여자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로서 아카아시가 그의 부모님 앞에 등장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가라니? 아카아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차분하고 조용한 대응이었다. 그건 마치 아카아시를 보쿠토의 짝으로 인정한다는 듯한 묘한 뉘앙스로 들리기도 했다. 착각이겠지 했지만 보쿠토의 부모님이 짓는 표정은 너그럽고 인자하기만 했다. 아들을 멋대로 꼬여낸 희대의 몹쓸놈을 대하는 거라기엔 너무 부드러웠다. 거기에 거듭되는 칭찬과 긍적적인 말들. 아카아시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보쿠토를 보았다. 하지만 보쿠토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당연하지!”라고 아카아시가 해야 할 대답을 낚아채버리기도 했다.

아카아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잠시 보쿠토를 밖으로 불러내기 위해 그에게 살짝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보쿠토는 그런 아카아시를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보쿠토상, 잠깐 저랑……

? 이것도 먹어봐, 아카아시!”

아니 이건 보쿠토상이 좋아하는 음식이잖아요. 보쿠토상이 드세요. 그보다……

으악, 흘렸어!”

젓가락질은 제대로 해야 한다고 했잖습니까. 주먹 쥐듯이 하지 마시고.”

어떻게 쥐라고 했더라?”

이렇게 하세요, 이렇게……

 

아카아시가 손을 뻗어 젓가락을 쥔 보쿠토의 손가락을 일일이 교정해주는 모습을 본 보쿠토의 부모님이 감탄했다. 정확히는 보쿠토가 아카아시가 고쳐 쥐어준대로 젓가락을 움직이는 모습을 본 이후였다. 보쿠토의 어머니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내가 그렇게 쥐라고 할 때는 죽어도 안 들었으면서?”

으응? 내가 그랬어?”

그래, 젓가락질 고쳐주려고 하면 나 밥 안 먹어! 밥 주지 마!’라고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바람에 지적도 못했잖아.”

 

보쿠토의 어머니가 하는 말에 아카아시는 스윽 그를 돌아보았다.

 

힘들게 차린 밥상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좋은 예가 아닙니다.”

그렇지. 그때는 내가 잘못했어!!”

 

냉큼 그때 일을 사과해오는 보쿠토의 모습에 부모님은 결국 두손두발을 다 들었는지 웃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부드러웠지만 이 순간을 기점으로 더욱 유연하게 풀린 분위기에 아카아시는 당황했다. 굉장히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실례를 무릅쓰고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뒤따랐다.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언제쯤 쥐고 나가는 게 좋을지 속으로 고심하는 사이, 그는 좀 더 일찍 나가지 못했음을 후회하게 될 말을 듣고야 말았다.

 

그래서 언제 합치려고?”

……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웃었다.

 

최대한 빨리?”

잘 되라는 강요는 더 이상 안 할 테니까 대신 맞선 두 번은 더 봐.”

에엑?”

이미지 만회해야지. 괜히 네 내자 될 사람 끌어들여서 망치지 말고.”

! 그런가?”

그래. 생각도 못하고 있었지? 아가한테는 미안해. 수습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적당한 날 잡아서 다시 보자꾸나. 여보, 가요.”

 

아카아시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떠나는 보쿠토의 부모님을 무슨 정신으로 배웅했는지 몰랐다. 맞은편에 비어버린 자리에 남은 식기들을 보니 분명 이건 현실이 맞는데? 허벅지 꼬집어서 아픈 걸 보니 꿈이 아닌데? 아카아시는 멍하니 자리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자리에 도로 앉은 보쿠토가 즐거운 목소리로 뭐 더 시킬까? 먹고 싶은 거 있어?”라고 물었을 때여서야 그는 입을 열 수 있었다.

 

보쿠토상.”

.”

이 상황 뭡니까?”

?”

진짜 합치기라도 할 셈입니까?”

 

아카아시가 고개를 돌려 보쿠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분명 결혼하기 싫다는 보쿠토의 애원을 못 이겨 시작한 일인데. 어쩌다가 그는 보쿠토의 부모님까지 만나 허락 비슷한 것까지 받아냈다. 그건 보쿠토가 두 번의 강제 없는 맞선을 본 이후로는 더 이상 결혼에 대한 부담이 없을 거라는 의미와도 같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했다는 뜻과도 같았지만 아카아시는 절대로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죠?”

…….”

말해보세요.”

 

보쿠토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자 아카아시는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실히 무언가 있다고. 이윽고 보쿠토가 말했다.

 

화났어 아카아시?”

. 조금요.”

 

보쿠토가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그의 사정을 봐줄 생각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화라도 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저는 분명 처음 보쿠토상을 도와드릴 때 맞선을 깨면 된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기억하시죠.”

그랬나……

그랬습니다. 그게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네다섯 번이 되었어도 도와드렸습니다. 제 얼굴 팔리는 거 전부 감안해서 말입니다.”

. 고마워.”

 

아카아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이 일을 시작하고, 이 얘기를 꺼낸 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맞선을 보기 시작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결혼을 운운하는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모님 귀에도 들어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장단에 굳이 맞춰준 것도 조금이나마 그 시기를 늦추고 싶어서였다. 아카아시가 마음 놓고 보쿠토를 좋아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아카아시는 화를 낼 거였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과는 별개로 그의 부모님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보쿠토의 부모님은 보쿠토가 그를 이 자리에 끌고 나온 진짜 목적을 모른다. 그들이 정말로 아카아시를 마음에 들어 했다면 더욱 이럴 수는 없었다. 그저 결혼을 피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택한 방법이었다고 하면 분명 크게 실망할 테니까.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도 그 연장선 아닙니까? 결혼하기 싫어서 미리 선수 친 것 치고는 설정이 너무 과하네요. 결혼 피할 수 있다면 저랑 정말로 같이 살기라도 하시려고요?”

 

보쿠토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면 안 돼? 아카아시는 싫어?”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구는 보쿠토의 태도에 아카아시는 침을 삼켰다. 진짜로 같이 살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 한켠에서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카아시는 휴지조각을 다시 세게 쥐었다. 모르는 척 도와주는 척 보쿠토의 말을 따라 그와 함께 살 수도 있었다. 이번 일로 당분간 보쿠토는 결혼하지 않을 테니까, 보쿠토의 부모님도 그들의 사이를 오인하고 허락했으니까, 아카아시는 대외적으로 보쿠토의 연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다 연극이 아니던가. 고작 연극의 연장이지 않은가.

모든 내용이 끝나고 막이 내리면 아카아시에게 남는 게 무엇일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분명 과하게 몰입해버릴 테니까. 연인으로 가장해 맞선을 파토 내는 것도 과분하고 마음이 제어가 되지 않아 불길한데 같이 살기까지 하면 아카아시는 자신의 인내심이 어디까지 버틸지 알 수 없었다.

보쿠토상은 아무 것도 모르죠. 나는 솔직히 지금도 한계인데.

 

아뇨. 좋습니다.”

 

보쿠토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더 억울해져서, 아카아시는 그동안 숨겨온 마음이고 뭐고 다 털어놓기로 했다.

 

좋아서 싫습니다.”

……어어?”

좋다구요. 저는 보쿠토상이 좋아서, 보쿠토상과 같이 살기 싫습니다.”

 

보쿠토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보쿠토상이 좋다는 말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같이 살기 싫다는 말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평생 숨기려고 했는데 결국 말해버린 이상, 이왕 들켜버린 거 아카아시가 계속 말했다.

 

지금 당장이야 저랑 같이 살면 결혼 얘기 안 들려서 좋겠죠.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나이 조금이라도 더 먹으면, 맘에 드는 여자라도 만나면, 결혼하고 싶어지실 거 아닙니까? 그때 제가 안 놔드리면 어떡하려고 그러십니까? 보쿠토상이랑 결혼한 것처럼 사는 게 익숙해지고 당연해진 제가 도저히 못 놔주겠다고 사사건건 방해하면 어쩌시려고요?”

 

보쿠토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아카아시는 표정의 변화 없이 말했다.

 

절 너무 믿으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지만, 저는 괜히 보쿠토상 뒷바라지하고 챙긴 거 아닙니다. 원래 남에게 그렇게 관심 있지도 않고 신경은 더더욱 안 쓰고요. 그런데 보쿠토상에게는 왜 그랬겠습니까? 이번 일, 보쿠토상 맞선 상대에게 남자랑 붙어먹는 놈으로 얼굴 팔릴 텐데 제가 왜 나섰겠습니까? 보쿠토상 좋아해서 그랬습니다. 보쿠토상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이제 아셨습니까? 제가 왜 보쿠토상과 살 수 없는지. 저는 희망고문 당하고픈 생각 없습니다.”

 

어디선가 아우성을 치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이게 뭐냐고, 내가 생각한 내용의 연극이 아니라고, 당장 환불하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이제 물통이 날아올 차례인가. 연극은 끝났다. 막상 말을 쏟아내니 후련하기도 하고 울적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선후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같은 팀원이었다. 특히 두 사람은 작전 중 파트너로 많이 활동하는만큼 앞으로 얼마나 불편해질지, 임무에 얼마나 많은 지장을 초래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하겠지. 그가 마음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지방으로 전출 신청이라도 해야 하나.

다시는 무대 위에 올릴 수 없는 마지막. 쫓겨나가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칠 요량으로 아카아시가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무실에서 뵙죠.”

 

아카아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룸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순간 턱 소리와 함께 그의 손목이 붙잡혔다. 아카아시의 손목을 붙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난 보쿠토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아카아시를 잡아먹을 듯 일렁이는 눈동자를 마주친 순간 그는 말과 행동을 잃었다.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눈을 뗄 수도 없었다. 아카아시는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그가 늘 작전의 말미에 이르러 짓곤 하던 표정이었다.

 

아카아시, 정말 날 좋아해?”

 

이제 됐다. 끝이다. 성공이다. 넘쳐흐르도록 보이는 희열과 성취감에 압도되어 전율했던 그 순간들처럼 보쿠토의 눈만 보고도 알 수 있는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그 인과관계를 논리적으로 생각하기도 전에 그가 보쿠토에 의해 가까이 끌어당겨졌다. 번뜩이는 노란색 눈동자가 코앞에 이르러 아카아시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아카아시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카아시를 억지로 잡아두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야.”

 

보쿠토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서린 얼굴로 아카아시를 보았다. 아카아시의 눈이 커졌다.

 

최근 들어서 고민이라는 걸 했어. 어떻게 하면 아카아시가 자연스럽게 나와 살아줄까. 맞선도 싫고 결혼도 싫고 나한테는 오직 아카아시뿐인데 어떡하나. 아카아시 마음을 일찍 알았다면 이렇게 귀찮은 일 벌이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게무슨 말입니까?”

나 아카아시가 맞선 파토 내는 거 안 도와주면 물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엄청 겁먹었다고.”

무슨마음대로 무를 수 있는 거였습니까? 아니 설마, 저 때문에 일부러 맞선을 잡았다고 해석해도 됩니까?”

! 엄마 아빠도 알고 있었는걸?”

 

아카아시는 자신이 너무 긍정적으로 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닐지 비판적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적으로 보려고 해도 보쿠토의 말, 표정, 태도, 모든 것이 그가 상상하던 방향과 정반대였다. 그래서 그는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오늘그렇게 자연스럽게

내가 좀전부터 티를 많이 내서. 엄마 아빠는 아카아시가 드디어 내 마음을 받아준 걸로 알고 있을 거야!”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이야. 아가, 정말 후회하지 않겠니?’]

 

지나치게 해맑은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는 허탈해졌다. 그 많은 맞선을 파토내면서, 여기까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자책이 동반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는 사실이 무척 억울했다. 그러니까 그의 생각이 맞다면……

 

보쿠토상이연극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정말 몰랐다. 너무 감쪽같아 화도 안 났다. 현실에 서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모두 연극의 일부분이었다니. 그것도 그가 아닌 보쿠토의 주도로 이루어진 무대였다니.

 

, 미안해 아카아시!!”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덥썩 안았다. 반성과 사과의 의미라기보다는 지나치게 불순한 의도가 가득했지만,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밀어내지 않았다.

 

더 숨겨진 내용은 없는 거겠죠.”

더 있었으면 좋겠어?”

아니요.”

 

긴장이 한순간에 풀려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몸을 기댔다. 보쿠토가 그를 더욱 단단하게 안아들었다. 그의 귓가에 보쿠토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연극은 끝났어.”

 

보쿠토가 중얼거렸다. 아카아시가 덧붙였다.

 

이제 무대에서 내려가야겠네요.”

 

막이 내렸다. 가리고 숨기고 있던 것을 모두 내던진 본연의 모습으로, 서로가 속삭였다.

 

좋아해, 아카아시.”

. 저도요.”

 

 

 

 

4.

 

아카아시, ?”

 

소파에 기댄지 얼마나 됐다고 꾸벅꾸벅 조느라 바쁜 아카아시를 기웃기웃 쳐다보며 보쿠토가 물었다. 오늘만 해도 보쿠토 맞선 파토에 일조하느라 신경을 썼을 테고 본부에 돌아와서는 상부에 끌려 다니느라 많이 피곤했을 터였다. 금방이라도 깊은 잠에 빠져들 것 같지만 피곤할수록 그의 옅은 수면이 꽤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보쿠토는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때만을 노려 얻어낸 것이 꽤 많으니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늘 그렇듯 보쿠토는 그의 책상을 뒤져 녹음기를 찾아냈다. 얼마 전 상부에서 지급받은 훌륭한 성능의 녹음기였다. 능숙하게 녹음을 시작하며 보쿠토가 물었다.

 

아카아시, ?”

아카아시.”

내일 우리 부모님 보러 같이 가는 거지?”

후회하지 않는 거다?”

으음네 그래요

 

무슨 말을 해도 무조건 , 그래요.’ 라는 대답만 나오는 시간. 내일 아카아시가 일어나면 분명 어이없어할 테지만 별 수 없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게 될 것이다. 조금 치사한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같이 살자고 하면 너는 어떤 대답을 할까?

 

아카아시……

으음

우리 결혼할까?”

같이 살래?”

그래요

 

진심이라고는 하나 없는 잠꼬대와도 같은 대답인걸 알면서도 보쿠토는 행복하게 웃었다.

 

아카아시.”

으음

나 좋아해?”

네에

정말?”

예에

 

옅은 잠이 끝나버리고 완전히 깊이 잠든 듯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보쿠토는 그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 언제쯤이면 이 연극을 끝낼 수 있을까. 언제쯤 무대에서 내려와 너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을까.

 

나도 좋아해 아카아시.”

 

어떻게든 빨리 해주고 싶은 말을 중얼거리는 보쿠토의 눈이 다정하게 아카아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쿠아카 결혼기념일 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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