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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게히나] 구름 뒤에 숨어

별골짜기 2016. 4. 15. 18:08

카게히나츠키

구름 뒤에 숨어

 

 

 

 

딸깍딸깍. 볼펜을 똑딱이는 소리가 유독 컸다. 한참 영어 독해 문제를 풀고 있던 츠키시마가 슬며시 미간을 구기며 히나타를 쳐다보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가라앉은 눈동자는 교과서 위를 향해 있었지만 정작 굴러가지는 않았다. 손가락으로 시끄럽게 딸깍거리는 주제에 헛생각까지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눈을 내려 교과서를 살펴보자 역시 풀이가 되어 있는 문제는 없었다. 바로 직전까지 신나게 수학 공식을 이해시켜주었건만 하나도 풀지 않았으니 금방 잊어버려 제대로 써먹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알려주었던 공식을 다시 한 번 설명해주게 되겠지.

 

츠키시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히나타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카게야마가 빨랐다. 히나타 옆에 앉아 있던 카게야마는 스윽 고개를 돌리더니 들고 있던 볼펜으로 히나타 앞에 놓인 교과서를 소리나게 두드렸다. 탁탁탁.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소리에 히나타는 불쑥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츠키시마나 카게야마 두 사람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멋쩍게 웃었다.

 

이상한 생각 말고 빨리 풀어.”

 

카게야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히나타는 괴로운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카게야마가 보고 있는 책을 기웃거렸다. 카게야마는 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공책을 살피니 한자들이 뜻과 함께 줄줄 적혀 있었다. 이번에도 작년처럼 암기 위주로 공부를 해 점수를 올리겠다는 목표를 가진 카게야마이기에 꽤나 열심이었다. 히나타는 그런 카게야마의 모습에 자극을 받은 건지 얼굴이 절로 단호해졌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츠키시마가 말했다.

 

제왕 너는 언제까지 한자만 팔 건데? 독해 안 되면 고득점 불가능하다고 했을 텐데.”

하아? 나는 낙제만 면하면 된다.”

작년에도 낙제만 면하려고 공부하다가 결국 보충 듣게 된 건 기억 안 나나봐?”

 

도쿄에 가기 위해 치욕을 무릅쓰고 츠키시마에게 나머지 공부를 부탁했지만 결국 한 과목 낙제를 당해 합숙에 늦게 참여해야 했던 일년 전을 떠올리자 카게야마의 표정이 어둡게 구깃해졌다. 문학에서 하필이면 암기형이 아닌 해석형이 많이 나오는 바람에 낙제선 아래로 보기 좋게 미끄러졌던 것이다. 올해도 그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면 카게야마에게는 치명적이었다. 히나타는 그래도 독해는 조금 하는 편이었으니 운이 나쁠 경우 이번 보충수업은 카게야마 혼자만 들을 수도 있었다.

 

제길. 카게야마가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겼다. 긴 지문이 나오자 카게야마의 눈이 어두워지고 얼굴에는 그늘이 졌다. 더욱 헬쓱해진 기운이 솔솔 풍겼다. 그의 눈이 느릿하게 문장 하나하나를 읽는 것을 확인한 츠키시마는 히나타에게 고개를 돌렸다. 히나타는 다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보다 못해 들고 있던 볼펜으로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 날카롭게 난 소리에 히나타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넌 안 풀고 뭐해? 아까 알려준 공식에 대입하라고.”

으윽공식?”

설마 10분 전에 알려준 공식을 잊어버렸다는 멍청한 소리는 아니겠지.”

 

히나타가 합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잊어버렸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츠키시마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히나타는 일단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혼자 풀어보려고 끙끙댈 것이다. 그러다가 공식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혼자서는 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금슬금 츠키시마의 눈치를 볼 것이고. 츠키시마가 그 시선을 모르는 척하고 보던 영어책에만 집중하면 어쩔 수 없다는 듯 큰 목소리로,

 

모르겠어! 한번만 더 알려줘 츠키시마!”

 

라고 소리치겠지. 옆에서 카게야마가 혀를 차고 츠키시마는 그제야 영어책에서 시선을 뗀 뒤 히나타를 보았다. 히나타가 간곡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어 짧게 한숨을 내쉰 츠키시마는 볼펜을 내려놓고 히나타가 쥔 샤프를 빼앗아 책을 끌어당겼다. 책이 멀어지자 히나타는 자리를 옮겨 츠키시마 옆에 앉았다. 조금 기울어진 머리통이 보였다. 눈에 띄게 치우쳐진 머리통을 금방이라도 멀리 밀어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맞은편에서 카게야마가 빈 옆자리 한 번, 츠키시마 옆에 앉은 히나타를 한 번 보았다.

 

츠키시마는 카게야마가 그러건 말건 히나타에게 공식을 또 한 번 설명해주었다. 예제를 들어 공식을 어떤 식으로 대입하고 어떤 식으로 계산을 하는지 보여주자 히나타가 순수한 감탄을 던졌다. “츠키시마는 역시 수학 잘하는구나!” 10분 전 처음 이 공식을 전개해 문제를 푸는 시범을 보였을 때도 들은 말이었다. 이 녀석은 정말 학습능력이 없는 게 아닐까. 츠키시마는 고민했다.

 

츠키시마가 알려준 대로 히나타는 문제 하나를 풀기 시작했다. 교과서에 머리를 박다시피 숙이고 느릿느릿하면서도 꾸역꾸역 문제를 풀어갔다. 물론 순탄하게 풀지는 못하고 중간중간 막히는 과정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츠키시마가 심을 집어넣은 볼펜 끝으로 툭툭 틀린 부분을 지적해주면서 그럭저럭 문제를 풀 수 있었다. 히나타는 자신이 푼 답과 해설지에 나와 있는 답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크게 기뻐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츠키시마를 본 그가 소리쳤다.

 

봤어? 봤어? 내가 정답 맞혔어!!”

그래, 기본 문제 가지고 5분이나 걸리다니 대단해.”

카게야마, 카게야마, 봤냐! 내가 이거 맞혔다!!”

 

카게야마가 가늘게 뜬 눈으로 히나타와 츠키시마를 번갈아 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시끄러워.”

뭐야, 칭찬은 못해줄망정!”

그 정도는 나도 푼다 멍청아!”

카게야마 너 쪽지시험 점수 바닥인 거 다 안다!”

 

츠키시마는 유치하게 물고 늘어져 이어지는 두 사람의 다툼에 이마를 짚었다. 츠키시마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하는 편이 아니었다. 굳이 그 역할을 따지자면 야치가, 야치가 없다면 야마구치가 해당됐으면 해당됐지, 츠키시마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대신 히나타의 멱살을 틀어쥐고 험악하게 미간을 찌푸린 카게야마에게 툭 던져 말했다.

 

초등학생한테 지고 싶지 않으면 보던 문학 지문이나 보시지? 제왕이 서민보다 독해 능력이 떨어진다는 걸 신입생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안타까워할까.”

이 자식……

 

츠키시마가 비웃음이 역력한 말을 던지자 카게야마는 이를 아득 갈았다. 만약 그의 머릿속 온도를 잴 수 있다면 끓는점인 100도는 가뿐히 넘었을 것이고, 그 위에 물이 든 주전자를 올린다면 금방 김이 폴폴 솟을 것이다. 그만큼 뜨거운 시선으로 츠키시마를 노려본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멱살을 놓고 다시 펜을 쥐었다. 입을 앙다물고 책이 뚫려라 집중하는 카게야마를 본 히나타도 자극이 되었는지 츠키시마에게 다른 공식도 알려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와 히나타를 번갈아 보다가 히나타에게 다른 공식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선배님들 대단해요!! 입부하고 계절이 한번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신입생들은 카게야마와 히나타의 속공을 볼 때마다 여전히 눈을 반짝거렸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미들블로커들도, 윙스파이커들도, 세터도 의외로 속공을 가르쳐달라는 말은 없었는데, 그건 카게야마와 히나타 두 사람의 합이 압도적이어서일 것이다. 쫓아가려고 해도 승산이 있어야 시도하는 거지. 츠키시마는 그들을 그렇게 평했다.

 

신입생들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티가 역력한 히나타는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자기보다 한 뼘은 더 큰 후배에게 붕붕 뛰며 카게야마의 토스를 치는 느낌을 설명하는 건 분명 칭찬이었다. 정작 칭찬을 하는 당사자는 그에 대한 자각이 없을 테지만 말이다.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카게야마가 그를 스윽 돌아보았다. 평소 같으면 선배 구실을 하라고 잔소리를 하면서 끌고 갔을 카게야마는 의외로 얌전히 손톱 다듬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츠키시마는 그의 손놀림이 눈에 띄게 느려진 것을 눈치 챘다. 히나타가 여전히 카게야마의 토스를 칭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게야마의 입매가 근지러운 듯 삐쭉삐쭉 올라가려는 것이 보였다. 츠키시마는 혀를 찼다. 그 소리를 귀신같이 들은 듯 카게야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츠키시마를 보자마자 언제 웃으려고 했냐는 듯 카게야마의 표정이 퉁명스럽게 변했다. 마치 뭘 보냐는 듯, 기분 나쁘다는 얼굴이었다. 카게야마는 카라스노 배구부가 되고 일년을 넘게 보내며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츠키시마의 비웃는 표정에 일일이 열받아하는 모습만은 여전했다. 카게야마가 발끈하려 했지만 엔노시타가 그들을 부르는 게 더 빨랐다.

 

이만 모이라는 엔노시타의 말에 그들은 모두 옹기종기 앉았다. 앞에 흰 칠판이 놓여 있고 우카이 코치와 타케다 선생이 나란히 서 있었다. 우카이는 이번 여름 합숙에서 시험해볼 공격 옵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2, 3학년들은 작년부터 연습해온 것들이고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은 그에게서 입부 초부터 훈련을 받아왔기 때문에 이해는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여름 합숙을 잔뜩 기대하는 게 역력한 얼굴로 우카이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상상하는 듯했다. 카게야마는 각 공격을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처럼 손목을 움직였고, 그와 나란히 앉은 히나타는 가만있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기대가 깨진 것은 타케다 선생의 말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려면 낙제를 면제받아야 한다는 거 알고 있죠?”

 

낙제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진 이들 중 타케다가 카게야마와 히나타를 쳐다보며 말했다.

 

작년과는 달리 학교 스케줄상 올해 여름 보충수업은 합숙 기간과 이틀이나 겹쳐요. 귀중한 일주일 중 이틀이나 허비하고 싶지는 않죠?”

이틀이나요!?”

…….”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급격히 말수가 줄었다. 카게야마는 딱딱하게 굳어서, 히나타는 처연한 표정으로 미동도 하지 못했다. 3학년의 낙제 위험군 니시노야와 타나카, 그리고 비슷한 처지인 신입생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지만…… 무엇보다 카게야마와 히나타 두 사람은 작년 여름과 겨울 내내 보충수업에 시달려야 했던 전적이 있었다.

 

그래도 츳키랑 야치가 저 두 사람을 가르쳐주고 있으니 이번에는 낙제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야마구치의 말에 묘한 굴욕감을 느낀 카게야마와 히나타의 어깨가 더욱 축 처졌다. 츠키시마는 피식 웃으며 거기에 한 움큼 더 얹었다.

 

“‘이번에는두 사람이 가르친 보람을 느끼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카게야마는 츠키시마를 이글이글 노려보았고, 히나타는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두 사람은 꼭 한 과목에서 아슬아슬하게 점수가 모자라 마의 40점을 넘지 못하곤 했으므로 모두가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우카이는 팀의 귀중한 전력이 일주일 중 이틀이나 빠지는 것은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어떻게든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격려를 건넸지만 당사자들이 오히려 더욱 침울해지는 역효과를 낳았다. “선배님들이랑 같이 가고 싶어요!” 라고 아우성치는 신입생들의 말도 마찬가지였다.

 

이틀이라니!! 일주일 중에 5일밖에 합숙을 할 수 없다니!!”

 

자전거를 끌고 가며 히나타가 괴로워했다. 배구에 살고 배구에 죽는 그가 일주일 중 하루도 아니고 무려 이틀이나 학교에 콕 박혀 공부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카게야마도 마찬가지로,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배는 무시무시했다. 히나타처럼 직접 소리 내어 괴로워하지 않다 뿐이지 카게야마는 고요한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그 방향이 스케줄을 짠 학교 측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향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츠키시마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올해는 학기 초부터 공부해왔잖아? 그렇게 자신이 없어?”

맞아. 츳키가 얼마나 열심히 가르쳐줬는데.”

 

열심히라는 단어가 거슬려 야마구치를 보자 야마구치가 해맑게 미안 츳키!”라고 사과했다. 너 내가 뭐 때문에 쳐다보는지 알고는 사과하는 거냐. 할말이 없어진 츠키시마가 다시 카게야마와 히나타를 보며 말했다.

 

“40점 넘는 게 얼마나 어렵다고 낙제를 확정지어? 정 힘들 것 같으면 배수진이라도 치고 공부하든가.”

배수진?”

 

그게 뭐야.’ 라고 말하는 듯한 두 사람의 표정에 츠키시마가 이를 아득 깨물고 말했다.

 

배수진(背水陣)!! 물을 등지고 진을 친다! 물러설 곳이 없으니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하는 거라고 얼마 전에 했잖아!”

! 맞다. 그때 카게야마가 왜 물을 등지는데 물러설 곳이 없냐고 물어봤었지?”

 

히나타가 그제야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당시 카게야마는 물을 등지고 진을 치는데 왜 물러설 곳이 없냐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뒤에 물이 있다면 수영을 해서 도망가면 되지 않냐는 참으로 간단명료한 질문이었다. 카게야마도 그 질문이 떠오르는 듯 히나타의 머리를 꽉 쥐었다. “시끄러워!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 “카게야마가 멍청하니까 그렇지!” “하아? 멍청이는 너지 배구 허접아!” 히나타가 아파하며 버둥거렸다. 무슨 말을 못하긴. 츠키시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카게야마의 손에서 힘겹게 벗어난 히나타가 선언했다.

 

이번에도 내가 너보다 더 점수 잘 받을 거니까 각오하시지!!”

그렇게 되게 둘까보냐!”

카게야마 너 맨날 나보다 점수 낮았잖아?”

 

히나타가 한껏 카게야마를 도발하자 쉽게 걸려든 카게야마가 이를 아득 갈고 소리쳤다. 이번엔 다를 거다!! 그래도 카게야마보다는 늘 점수를 더 받아왔던 히나타는 여유롭기 그지없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럴 수 있으면 그래보라는 듯한 표정에 카게야마의 인상이 더 나빠졌다. 그건 승부욕이었다. 카게야마가 늘 코트 위에서 상대편에게 점수를 한 점 먹힐 때마다 나오던 분위기와 비슷했다. 반면 히나타는 카게야마와 다투며 기분이 좋아졌는지 키득 웃다가 휙 몸을 돌리는 카게야마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카게야마 삐졌어?”

시끄러워!”

진짜 삐졌나본데?”

 

히나타가 폴짝폴짝 뛰어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려 기웃기웃거리는데 카게야마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밀었다. 그런데도 히나타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키득 웃으면서 카게야마를 따라붙었다.

 

히나타, 자전거.”

, 맞다!!”

 

카게야마에게 바짝 붙어 앞서 나간 히나타에게 야마구치가 자전거를 언급하자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히나타가 뒤를 돌았다. 그들의 뒤를 따라가던 츠키시마는 혀를 차며 바닥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더 빨리 핸들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야마구치도 아니고, 히나타도 아니었다. 어느새 자전거 핸들을 쥐고 성큼성큼 걸어 앞서나가는 카게야마가 투덜투덜 히나타를 구박했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집은 어떻게 가려고 자전거를 잊어?”

카게야마 네가 먼저 가버리니까 그렇지!!!”

열 받게 하려고 정신 팔린 거겠지.”

에이 그럴 리가…… , 혹시 카게야마 너 열 받았어?”

시끄러워 멍청아!”

푸훕

…….”

으아아악! 알았어 안 웃을게! 자전거나 줘.”

됐어. 쓸데없이 또 까먹지 말고 잘 따라오기나 해.”

 

카게야마가 그대로 자전거를 끌고 걸었다. 히나타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츠키시마는 그 표정을 어디서 봤는지 알고 있었다. 공부를 하다 다른 생각을 파고들 때마다 짓곤 하는 표정이었다. 츠키시마는 그 생각을 헛생각으로 치부하곤 했지만 사실 당사자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흰 도화지 위에 찍힌 점에 잠시 넋을 잃듯 모든 생각과 모든 감각이 빼앗기고, 층층이 쌓인 상황과 감정이 빠르게 넘어가는 책장처럼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을.

 

주황색 눈동자에 담겨 크게 요동치는 그것을 수습하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히나타가 큰 목소리로 웃었다. 저 둘 아무리 싸워도 엄청 친하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걷는 야마구치의 말에 츠키시마는 아무 말 없이 손바닥을 펼쳤다가 쥐기를 반복했다.

 

 

 

 

일주일 중 이틀이나 보충수업에 빼앗길 수 없다고 다짐한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더욱 공부에 매진했다. 자기보다 점수가 낮다며 히나타가 카게야마를 도발한 이후이기도 했다. 그 말이 자극제가 되긴 했는지 카게야마는 꽤 협조적으로 공부에 임했다. 공부가 배구에 무슨 도움이 되냐면서 매일같이 하기 싫어하던 표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어떻게든 정복하고 말겠다는 열의가 엿보였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이거 알려 달라 저거 알려 달라 떼를 쓰는 두 사람에게 면박을 주는 츠키시마의 모습이 반 학생들도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야치에게 가서 물어보라는 말에도 너무 자주 찾아가면 방해가 되어 안 된다는 말에 츠키시마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 나는 방해해도 된다는 소리냐? 불쾌하게 던진 말에도 히나타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귀찮게 해도 츠키시마는 뭐든 잘 하잖아! 카게야마는 그 말에 인상을 구기긴 했지만 반박하지 않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츠키시마는 더 이상 날 선 말을 할 수 없었다.

 

기말시험 결과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둘 다 낙제에서 면제되었다. 카라스노의 배구부가 한 명도 빠짐없이 여름 합숙을 가기 위한 목표에서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두 사람은 1학년 겨울 때보다도 훨씬 더 점수가 향상되어 낙제 커트라인인 40점을 웃도는 점수를 받았다. 카게야마와 히나타가 유독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학기 초부터 꾸준히 해온 공부의 효과가 크다고 엔노시타가 그들을 칭찬했다. 당연히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했고, 그들의 공부를 도와주었던 야마구치와 야치는 다행이라고 안도했지만 츠키시마는 그것밖에 못 받았냐고 구박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통틀어 낙제를 받은 부원은 없었다. 장기합숙에, 낙제도 없이 홀가분하고, 더군다나 반가운 얼굴이 많은 도쿄로 간다는 사실에 특히 히나타는 들떴다. 작년에 함께 합숙한 3학년들은 졸업했지만 다른 1, 2학년들을 볼 수 있었다. 켄마나 리에프 같이 꾸준히 연락을 해오고 있던 이들을 만나러 가는 것도 들뜬 이유 중 하나였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에서 내린 히나타는 마중 나온 켄마를 보자마자 와다다 달려갔다. 오자마자 정신 빼지 마! 카게야마가 득달같이 히나타를 따라가며 소리치고 츠키시마는 카게야마를 외면하는 켄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별로 친하지 않아 고개만 꾸벅 숙여 인사하고 츠키시마는 선배들을 따라 체육관으로 향했다. 켄마와 함께 그들을 마중 나온 토라가 졸업한 시미즈를 떠올리며 니시노야 타나카와 함께 수도 없이 눈물을 찍어냈다. 츠키시마는 야치의 어깨를 살짝 밀어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날씨가 무척 흐렸다.

 

체육관에 들어서자 몸을 풀고 있는 후쿠로다니와 네코마, 신젠과 우부가와가 보였다. 우카이 코치와 타케다 선생이 네코마의 감독과 인사를 나누고 주장인 엔노시타는 타학교 주장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엔노시타를 보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아카아시가 그 너머로 츠키시마를 발견한 뒤 한손을 올려 인사했다. 츠키시마도 꾸벅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커다란 음성들이 한 데 섞여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렸다. 합숙 후 첫 연습 경기가 일제히 시작되었다. 카라스노의 상대는 우부가와였다. 이곳에 오기까지 계속 우카이 코치가 강조한대로 그들은 연습했던 공격 옵션들을 치열하게 이용해 말 그대로 연습했다. 영어단어는 겨우겨우 외웠으면서 새 학년이 되어 새로 바뀐 싸인은 보자마자 외워버린 카게야마가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냈다.

 

우부가와의 스파이크가 츠키시마의 블록에 막혀 방향이 틀어졌다. 원터치! 엔노시타가 리시브를 받아 곧바로 카게야마에게 공을 보냈다. 싱크로 공격에 돌입한 스파이커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카게야마의 자세는 무척 깔끔해서 어디로 날아갈지 모른다. 다만 예측은 해볼 수 있었다. 카게야마는 늘 경기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누구에게 공을 올리면 점수를 딸 수 았을지 본능적으로 살펴 움직인다. 지금 상황에서는 블록이 하나도 없는 위치의 타나카가 알맞을 것이다. 하지만……

 

! 히나타는 두 명의 블록에 앞이 막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빈 공간을 찾아 그대로 공을 꽂아 넣었다. 바닥에 착지한 카게야마와 히나타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나이스 킬! 들뜬 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타나카에게 공을 올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지만, 카게야마는 일년 전과는 달랐다. 히나타 또한 마찬가지로 일년 전과는 달랐다. 상기된 얼굴로 잠시 서로를 마주본 카게야마와 히나타가 다시 기합을 넣었다. 카라스노쪽 점수판이 한 장 뒤로 넘어갔다.

 

카라스노 910번 콤비는 더 날카로워진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9번이랑 10번 아니었어? 번호 안 바꿨네?”

받은 번호가 맘에 들었나보지.”

 

타교의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츠키시마는 묵묵히 드링크를 마셨다.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2학년이 되어 좀 더 앞선 번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기존에 받았던 번호를 유지했다. 츠키시마는 6, 야마구치는 7번이 되었으며 8번은 자연스럽게 새로 들어온 윙스파이커의 차지가 되었다. 각각 9번과 10번을 고집하는 카게야마와 히나타의 이유를 궁금해 하는 시선들이 이어졌지만, 사실 말하지 않아도 이유를 다들 알았다. 물론 히나타 쪽의 이유였다.

 

히나타는 작은 거인을 동경해서 카라스노에 온 만큼 그가 달았던 번호에 대한 애착도 대단했다. 10번을 유지한다면 분명 그 이유였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지만 정말 궁금한 건 카게야마가 9번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카게야마는 쏟아지는 질문에 간단히 대답했다. ‘카라스노에 와서 처음으로 팀이라는 소속감이 생겼습니다. 이곳에서 처음 받은 9번이 좋습니다.’ 지금의 3학년들, 당시 2학년들은 카게야마의 말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미 졸업한 3학년들은 흐뭇해했다. 하지만 츠키시마는 카게야마가 9번과 6번을 두고 고민한 것을 안다. 고민이 묻은 시선 끝에 10번을 들고 있는 히나타가 있었다는 것도 안다. 어떤 이유가 더 컸든 카게야마는 결국 9번을 선택했다.

 

츠키시마는 11번 조끼를 입고 있는 신입생을 쳐다보았다. 히나타의 옆에서 까불까불거리며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근처에는 9번을 달고 있는 카게야마가 드링크를 마시며 두 사람 쪽을 힐끗 살피고 있었다. 히나타의 조끼는 10번이다. 츠키시마는 고개를 내려 그가 입고 있는 6번 조끼를 보았다. 10번과는 아무 연관도 없고 뒤집어야 9번이 되는 숫자. 츠키시마는 수건을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던졌다.

 

 

 

 

츠키시마는 제3체육관에서 추가연습을 했다. 그의 의지는 아니었다. 아카아시가 후쿠로다니의 새로운 에이스를 상대해 블록을 뛰어달라는 부탁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성격상 쿠로오가 있었다면 그에게 부탁했겠지만 아쉽게도 쿠로오는 졸업을 한 이후였다. 츠키시마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츠키시마가 아카아시와 연습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히나타와 리에프도 작년의 인연을 바탕으로 다시 합류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카아시가 공을 올리면 후쿠로다니의 새 에이스와 히나타가 차례로 공을 때리고 츠키시마와 리에프가 막는 식의 연습이 되었다.

 

, 아까워!”

 

츠키시마가 히나타의 공을 막아냈다. 그가 작년 이 자리에서 보쿠토에게 전수받은 페이크를 쓸 거란 사실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츠키시마는 무심하게 히나타를 쳐다보았다. 같은 팀끼리 살살 좀 하라는 히나타의 투덜거림이 이어졌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히나타는 그런 츠키시마를 의아해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건지 유심히 관찰하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 블록 실력 아주 괜찮아졌는데.”

근력이 좀 붙어서요.”

키도 좀 더 큰 것 같아.”

.”

 

잠시 쉬는 사이 벽에 기대 앉아있는 츠키시마에게 아카아시가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그의 눈은 후쿠로다니의 새 에이스를 향해 있었다. 히나타나 리에프와 함께 스파이크에 대한 열정을 불사지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반면 츠키시마의 눈은 히나타를 살폈다. 히나타는 후쿠로다니 에이스의 스윙을 보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츠키시마가 말했다.

 

후쿠로다니는 보쿠토상 없이도 여전하군요.”

그럼 다행인데.”

아카아시상의 토스가 여전해서겠죠.”

보쿠토상과 많이 달라서 처음에 타이밍을 맞추는 건 확실히 어려웠지. 최악이었어.”

…….”

 

타이밍. 츠키시마는 히나타를 보았다. 히나타는 리에프와 후쿠로다니의 에이스에게 카게야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이름을 담는 눈은 늘 그렇듯 반짝반짝 빛났다. 그가 향하는 시선. 그리고 그를 향하는 시선. 히나타에게서 뻗어나가는 줄기에 이어 히나타에게로 뻗어 들어가는 줄기를 발견하는 타이밍은 츠키시마가 기억하는 인생을 통틀어 최악이었다.

 

지금은 잘 맞는 것 같은데요.”

노력했으니까.”

 

같은 최악의 타이밍이지만 츠키시마의 경우는 연습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종류였다. 방방 뛰는 히나타의 목소리가 컸다. 츠키시마의 귓가에 느긋한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들어왔다.

 

히나타도 공중에서의 테크닉이 나아진 것 같아.”

별로요.”

 

카게야마가 히나타에게 유독 혹독하게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지난 인터하이에서 히나타는 거의 공중을 장악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츠키시마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그의 말을 반대했다. 아카아시는 조용히 말했다.

 

그걸 막는 네가 대단하다는 말을 하는 건데. 아까만 해도 몇 번이나 막았잖아.”

그건잘 알기 때문일 겁니다.”

 

츠키시마가 히나타에게서 시선을 뗀 뒤 체육관 바닥을 보았다. 츠키시마의 말에는 단순히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아카아시가 의아하게 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성큼성큼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온 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체육관 바닥을 보던 츠키시마는 상대를 눈치 채고 고개를 올렸다. 신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히나타였다. 히나타는 조금 단호하게 말했다.

 

츠키시마! 나랑 얘기 좀 하자!”

난 할 얘기 없는데.”

 

딱 잘라 거절하는 츠키시마의 말에 히나타가 도움을 청하듯 아카아시를 보았다. 아카아시는 그 간곡한 얼굴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얘기하고 와.”

! 츠키시마, 빨리!”

 

히나타가 혹시 연습을 놓칠까봐 발을 동동 굴렀다. 츠키시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히나타를 따라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어둑한 길목에서 그는 쭈뼛쭈뼛 무언가 망설였다. 확실히 뭔가 물어볼 게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어떤 종류일까. 츠키시마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달빛이 히나타의 얼굴을 훑었다.

 

츠키시마, 사실 내가 아까얘기를 좀 들었는데

무슨 얘기?”

켄마가 그러기를네가 좀 화가 나 보인다고 했어.”

내가?”

 

츠키시마는 켄마를 떠올렸다. 오늘 연습 내내 은밀한 시선이 느껴진다 했더니 역시 그쪽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츠키시마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안경을 똑바로 고쳐 쓰며 아니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이어지는 말에 츠키시마는 몸을 굳혔다.

 

그러니까주로 내가 카게야마랑 같이 있을 때라고 하던데.”

 

츠키시마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겹쳐 지나갔다. 고작 부활동에 쓸데없이 열과 성을 다하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 사실은 누구보다 그러고 싶은 자신을 대변하는 불편한 모습. 재수 없다 열 받는다 입에 달고 살면서도 공부 가르쳐달라며 성가시게 구는 귀찮은 모습.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어딘가를 집중해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모습. 금방 깨달아버린 그 시선이 향하는 곳. 그와 동시에 가능성 없는 열망을 품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최악의 타이밍. 생각마다 얇은 기름종이에 덧칠된 수많은 감정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 수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들켜버린 건가? 미처 주워 담지 못한 게 있던가? 핸들을 대신 쥐어주고 싶었으나 선수를 빼앗겼던 그 날처럼 츠키시마가 손을 꽉 쥐었다가 폈다.

 

네가 왜 그러는지 생각해봤는데아무래도

 

곤란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히나타의 말에 츠키시마는 침을 삼켰다. 뒷걸음질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배수진(背水陣). 모순적이게도 그는 그토록 비웃었던 카게야마의 말처럼 수영이라도 해 이곳을 도망가고 싶었다. 그의 감정을 잘못 주워든 거라면, 그걸 보고야 말았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츠키시마는 히나타를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곧 히나타가 말했다. 이어지는 말에 츠키시마의 눈이 커졌다.

 

우리가 감사인사를 제대로 안 해서 그런 거지?”

 

츠키시마는 환청을 들었다. 등 뒤에 흐르던 물이 세면대로 흘러내려가듯 빠져나가 말라버리는 소리였다. 곤란한 표정. 우물쭈물 망설이는 어투. 히나타는 츠키시마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게우리가 싹 입만 닦고 끝내려고 했던 건 아니고기회가 없었달까?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너무 바빴고, 아무튼, 미안!!”

…….”

그리고 진짜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어! 특히 올해는 시험기간에만 도와준 게 아니라 평소에도 도와줬으니까! 야치도 츠키시마 네가 엄청 대단한 거라고 했어. 고맙고 미안해!!! 진심이야!”

 

츠키시마는 말없이 히나타를 보았다. 히나타는 츠키시마에게서 도통 대답이 나오지 않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화 많이 났어? 미안! 미안합니다!!”

……됐어.”

 

히나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뜯어보던 츠키시마는 더 지나서야 대답했다.

 

그보다, 제왕은 사과까지 작은 쪽에게 맡기는 건가?”

 

히나타가 재빨리 손을 저으며 변명했다.

 

카게야마는 1학년 세터 가르치느라 바쁘고켄마가 나한테 알려준 지도 얼마 안 됐어!”

그럼 나중에 같이 오든가.”

 

츠키시마는 히나타에게서 몸을 돌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히마타가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말했다. 알았어! 그리곤 츠키시마보다 먼저 들어가기 위해 와다다 체육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츠키시마는 그 뒤를 느릿하게 따라 걸었다.

 

매일 머릿속으로 히나타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상상을 했다. 그때마다 히나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둡고 무거운 얼굴로 사과했다. 네 마음은 고마워. 하지만 미안해. 고마워. 미안해. 고맙고 미안해. 이미 다른 주인이 차지하고 들어앉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수없이 고백을 반복하고 수백 번 사과를 받아냈다. 사과를 받지 않기 위해 사과를 받아내야 하는 얄팍한 인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충동질 당했다. 극과 극을 뛰노는 이 마음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견딜만하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다. 네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지만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기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이타적인 마음을 먹게 만드는 순간순간을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다가도 수용했다.

 

어차피 질게 뻔한데. 어차피 결과가 눈에 보이는데. 코트 위에서는 이를 악물고 싸우는 주제에 이 모순되는 생각들이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무거운 얼굴과. 고마워. 미안해. 예상하면서도 피하고 싶어서,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벽을 세우고 블록을 치는 것뿐이었다.

 

츠키시마! 블록! 블록!!”

 

널 너무 잘 알기에.

나는 너만은 꼭 막을 거다.

 

츠키시마는 눈을 깔았다. 그림자가 옅어졌다. 흘러가는 구름이 달을 가리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늘 그렇듯 인내와 다짐이 손 틈새에서 커졌다가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삼각은 역시 잘 못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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