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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게히나ts] 그래도 연애

별골짜기 2016. 4. 20. 19:54

카게히나ts(히나타ts)

그래도 연애

안봐도 상관없는 전편 : http://byeoljari.tistory.com/19

 

 

 

 

수업이 끝나는 종이 쳤다. 한참 열띤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이 아쉬운 표정으로 교실을 나가고, 그제야 숨통이 트인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재잘재잘 떠드는 학생들 사이로 히나타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업 내내 하도 무료하게 턱을 괴고 있었더니 어깨와 고개가 뻐근했다. 무성의하게 목을 매만진 히나타는 곧장 교실 한가운데로 향했다. 아직도 자는 중인지 종이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이 보여 혀를 찼다. 어떻게 깨울까. 히나타는 고민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가 잠든 책상 앞에 쭈그려앉았다. 손을 뻗어 엎어진 머리카락 몇 가닥을 손에 쥐었다. 까만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고 돌돌 말다가 풀기를 몇 번 반복해도 카게야마는 잠에서 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카게야마. 카게야마 토비오. 이름을 불러도 도통 일어나질 않으니 결국엔 최후의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히나타는 쭈그려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카게야마의 뒤로 갔다. 양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어깨를 주물주물하는데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이상하다. 너무 약하게 주무르고 있는 건가? 허리를 숙여 카게야마의 얼굴을 살피려 하는 순간, 카게야마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카게야마의 살벌한 눈초리가 휘휘 앞을 살피다가 뒤를 돌았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주물주물 주무르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카게야마의 눈이 커지고, 약간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여 히나타는 헷 웃었다.

 

이제 일어나네.”

, 뭐야?”

 

카게야마가 고개를 틀어 자신의 어깨를 보았다. 히나타의 손이 쪼물거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그의 눈동자가 험악하게 흔들렸다. 어떻게 받아쳐야 하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사이 히나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안 일어나니까 어쩔 수 없잖아.”

말로 깨우면 되는 거 아냐.”

말로 하면 안 일어나잖아! 몇 번 시도했거든?”

 

오만상을 찌푸리던 카게야마는 조금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그의 손이 어깨 위에 놓인 히나타의 손을 잡아 내렸다. 카게야마는 휙 고개를 돌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멍청이. 어어? 영 이쪽을 쳐다보질 않고 반대쪽만 쳐다보는 카게야마의 태도에 히나타가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양 볼을 붙잡았다. 히나타는 붉어져 뜨끈하게 닿는 그의 얼굴에 키득 웃으며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지금 점심시간이냐?”

시계를 보시죠, 멍청야마군.”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도륵 굴러 시계를 향했다. 이제 막 점심시간이 시작된 것을 알아차렸을 정도로 오전 내내 잠에 취해 있던 그는 늘 그렇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히나타가 그의 얼굴을 놓아주고, 순순히 허리를 똑바로 편 카게야마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뒤적거리며 오니기리를 꺼내는 그를 본 히나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도시락을 꺼냈다. 카게야마가 손에 든 봉지를 확인한 히나타는 그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자판기 갈 거지?”

.”

 

느릿하게 걷던 카게야마는 길게 하품을 한 번 더 한 이후로 히나타와 속도를 맞춰 나란히 걸었다. 오늘 메뉴는 볶음밥이다! 카게야마 너 오니기리 오늘도 두 개 사왔어? 아침 연습 때 츠키시마가 애들 봐줬지? 수업시간에 또 필기 안 했고? 카게야마는 재잘재잘 끊임없이 말하는 히나타가 잡고 있던 팔을 빼냈다. 대신 자유로워진 손으로 히나타의 손을 잡았다.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하던 말이 끊이지 않는 히나타에게 카게야마도 별다른 변화 없이 대답했다. , 두 개. 츠키시마 녀석이 나한테도 몇 명 떠넘겼어. 필기 따위 할까 보냐.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에는 각각 도시락통과 오니기리 봉지가 덜렁덜렁 흔들렸다. 학교 건물 바깥에 있는 자판기로 가기 위해 복도를 걸으며 스쳐지나간 수많은 친구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해준 히나타는 그녀들이 카게야마와 맞잡은 손에 한 번씩 시선을 주고 꺄르르 웃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했다. 옆에서 히나타의 친구들에게 데면데면하게 인사하던 카게야마도 마찬가지였다. 맨날 싸우면서도 사이가 참 좋은 게 신기하단 말이야. 복도에서 만난 친구들뿐만이 아니라, 어느새 앞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지켜보고 있는 같은 반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생각했다.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새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었다. 사실 수업만 다르게 들었다뿐이지 아침연습 참여하지 점심도 같이 먹지 방과후 부활동도 꾸준히 함께해 별다른 변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같은 반이 되었다는 건 생각보다 더 좋았다. 두 사람은 자리를 바꿀 때마다 가까운 곳에 앉을 수 있을지 두근거리는 묘한 긴장감에 사로잡혔고, 같은 구역에서 청소를 할 수 있었고, 체육시간에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배구를 할 수 있었고, 수업이 끝나면 서로의 반 앞에서 기다릴 필요 없이 함께 체육관으로 향하면 됐다.

 

히나타 잘가! 응 너도! 히나타가 교실을 빠져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지나갈 때마다 인사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히나타와 같은 반이 아닐 때 반 앞에서 기다리는 일이 하도 많아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는 했지만 막상 같은 반이 되어보니 더 신기했다. 분명 새학년 새반 같은 반친구들이라는 동일한 조건임에도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아닌 다른 친구들과 자의로 대화를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히나타와 있으면 꽤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게임에서 죽어 경험치가 깎여버리는 것처럼 그들과의 친밀도는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카게야마는 버벅이며 히나타의 친구들에게도 인사했다. 고장난 로봇처럼 어색하게 손을 들어준 카게야마를 보며 여학생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웃긴 건가.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비웃는 게 아니라고 히나타가 부연설명을 해줬다. 그래도 여전히 왜 웃는지는 의문이다. 카게야마는 눈을 지그시 접어 뜨며 히나타를 보았다. 단순히 여학생들이 웃는 이유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같은반 남학생들도 히나타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물론 카게야마에게도 인사가 날아왔지만 친밀도에서 히나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히나타와 같은 반이 되며 새삼 깨닫게 된 사실 또 하나. 여학생들뿐만 아니라 남학생들과도 어마무시하게 친하다는 것. 카게야마는 쉬는 시간마다 잠을 자기 바빠 잘 몰랐지만, 같은 반이 되고 나니 히나타 근처에 사람이 많은 것을 선연히 체감할 수 있었다. 여학생들과 섞여 수다를 떨기도 하고 남학생들의 장난에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 목소리를 눈을 감고 들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근처의 남학생들이 거슬리긴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히나타의 목소리는 좋았다. 교실 안 이리저리 뒤섞인 수많은 음성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구분해낼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인사를 마친 한 무리의 남학생들과 헤어지고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끌어당겼다. 더 이상 지체되면 연습에 늦을지도 몰랐다. 히나타도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카게야마와 발맞춰 빠르게 걸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얼굴을 한 번 스쳐가듯 살핀 뒤 무덤덤하게 물었다.

 

아까 걔네랑 언제 친해졌어?”

? 누구?”

마지막으로 인사한 애들. 이름 몰라.”

 

히나타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번지며 물었다.

 

아직도 이름을 몰라??”

꼭 알아야 돼?”

배구부 애들은 이름 듣자마자 외웠잖아?”

그건 당연한 거고.”

 

역시 배구 바보잖아! 히나타는 결론 내렸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카게야마 머릿속 사고회로는 온통 배구로 이루어져 있어서 모든 것은 배구와 관련 있는 것배구와 관련 없는 것으로 철저하게 이분되어 있질 않은가. 배구와 관련 없는 교과 내용 암기는 쥐약이어도 공격 사인은 곧바로 외워버린 것처럼, 배구와 관련 없는 학우의 이름은 몰라도 새로 들어온 배구부원들의 이름은 곧바로 새겨버린 것일 테다. 우카이는 카게야마를 두고 그의 단순한 판단력이 어쩌면 효율적인 배구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체육 이론 시험에서 배구 문제가 나왔을 때는 가차 없이 100점을 받아 모두를 놀라게 한 전적도 있고. 당시 히나타는 한 문제를 틀려 카게야마에게 밀리는 바람에 한동안 츠키시마의 놀림을 받아야 했었다.

 

어쨌든 그런 카게야마가 이름 모를 남학생들과 히나타가 언제 친해졌는지 궁금해 하는 건 좀 신기한 일이었다. 배구 관련된 걸 빼곤 주변에 관심을 가지는 타입이 아닌 그 카게야마가!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종류라서 그런가, 히나타는 호기심이 생겨 그에게 물었다.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내가 먼저 물어봤어.”

지난번에 선생님 심부름 가던 거 도움 받다가 친해졌거든.”

뭘 도와줬는데?”

숙제 들고 가는 거.”

왜 나 안 깨우고 걔네 도움 받아?”

카게야마 너 자고 있었잖아.”

깨우면 되지 멍청아. 맨날 잘만 깨우더니 정작 그땐 왜 안 깨워??”

너 깨우는 거 싫어하잖아! 일부러 배려해서 안 깨운 건데 뭐가 어째??”

내가 언제 싫어했냐!! 네가 깨우는 건 싫어한 적 없어!”

연습하느라 피곤한 것 같아서 자라고 두는 거지 내가 괜히 그래!?”

네가 여자애들이랑 노는 게 좋아 보이니까 그냥 겸사겸사 자는 거지 다른 남자애들이랑 놀라고 자는 건줄 아냐!!”

 

험악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빙자한 다툼을 하며 학교 건물을 빠져나오던 히나타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아차 싶은 카게야마도 걸음을 멈춘 뒤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히나타가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랐건만, 애석하게도 그의 자그마한 소망과 현실은 달랐다. 히나타가 카게야마에게 한걸음 가까워져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카게야마너 질투한 거였어!??”

 

. 카게야마는 최대한 히나타를 외면했다. 히나타가 그의 얼굴과 마주보기 위해 팔을 붙들어왔지만 필사적으로 피했다. 까치발을 세운 히나타가 폴짝폴짝 뛰며 그의 이름을 몇 번 더 불러서야 카게야마가 휙 고개를 돌려 마주보았다. 확실히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어떤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았지만 일단은 접어둔 히나타가 웃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참 솔직하지 못하네~”

시끄러워!”

진짜 시끄러워? 아니지? 그럴 리가 없는데?”

 

히나타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그 얼굴을 가려버렸다.

 

조용히 안 하면 후회할 짓 만들어버린다.”

 

카게야마로서는 최후의 통첩이었지만 히나타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알았어. 어쩔 수 없는 상황 빼고 친하게 안 지낼게. 그래도 역시 카게야마군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네요~ 카게야마군은 역시 나를……

젠장!!”

 

카게야마가 기어코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버럭 소리친 그가 히나타를 끌어당겨 입술에 뽀뽀했다. 눈이 순식간에 왕방울만해진 히나타가 처음으로 조용해졌다. 도장을 찍듯 입술을 콱 부딪힌 카게야마는 서둘러 히나타를 다시 밀어내고 빠르게 몸을 돌렸다. 반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히나타가 환하게 웃으며 카게야마를 돌아보았다. 귀끝이 시뻘개져 체육관을 향해 도망치듯 뛰어가는 다급한 걸음이 보여, 히나타도 얼른 그 뒤를 쫓았다. 발랄하게 가벼운 목소리가 카게야마를 따라갔다.

 

이게 후회할 짓이야? 카게야마, 나 후회 안 되는데 어떡해??”

조용히 안 해?? 히나타 멍청아!!”

우하하하 바보야마 도망간대요!!”

 

두 사람이 술래잡기를 하는 건지 경쟁을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급박하게 달려갈 즈음,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본 츠키시마와 야마구치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

 

, 방금 두 사람

 

야마구치가 넋을 잃고 중얼거리고, 츠키시마는 불쾌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안경을 고쳐 썼다. 두 사람의 애정행각은 언제 어디서 보아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저 두 당사자들은 주변에 누가 보고 있는 줄도 몰랐을 게 뻔하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보게 될 줄 알았다면 그들이 뒤따르고 있음을 눈치 채게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곧 츠키시마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주소록을 바쁘게 찾기 시작했다. 야마구치는 그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불안하게 물었다.

 

츳키 뭐해? 핸드폰은 왜 들고 있어?”

응징하려고.”

, 응징!?”

교내 풍기문란죄로 교감한테 신고할 거야.”

잠까아안-!!”

 

츠키시마가 교감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야마구치가 이성을 잃은 그를 필사적으로 막으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소리쳤다.

 

잠깐만!!”

이거 놔.”

미안 츳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 교감이 배구부 예산 줄이면 어떡해! 조금이라도 꼬투리잡히거나 밉보이면 분명 골치아파질 테니 조심하라고 엔노시타상이 그랬던 거 기억 안나?”

 

츠키시마는 그 말에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껐다. 금방이라도 교감에게 신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야마구치의 말을 들으니 그럴 수 없어졌다. 어쨌거나,

 

그들은 3학년이었고, 츠키시마는 주장이었다.

 

 

 

 

3학년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배구부를 함께 하고 있었다. 매니저를 제외한 3학년 부원이 셋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국대회에 출전한 덕분인지 1학년과 2학년 부원은 많았다. 진학반인 츠키시마와 야마구치마저 빠지게 된다면 3학년 부원은 카게야마밖에 남지 않는 셈이 되었지만, 그렇게 되면 1학년과 2학년이 불쌍하다고 말하며 츠키시마는 주전을 내어줄지언정 끝까지 부활동을 마치겠다고 했다. 야마구치도 마찬가지로 츠키시마와 부활동을 마무리 할 예정이었다. 물론 매니저인 히나타가 끝까지 남아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곧 있으면 인터하이 예선이라 연습은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츠키시마가 카게야마를 불러 2학년 세터를 봐주라고 신신당부했다. 카게야마는 순순히 알겠다고 답했지만 그는 설명에 일가견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 느낌가는대로, 으로 이어지는 카게야마의 본능적인 설명을 난감해하는 2학년 세터의 모습을 본 츠키시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늘 그렇듯 잘 좀 설명하라는 츠키시마의 잔소리에 카게야마는 발끈했지만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츠키시마가 그러기 위해 주장직을 맡은 거였으니 말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히나타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츠키시마가 자기는 절대 주장직을 맡지 않을 거라며, 차라리 야마구치를 시키라고 했을 때가 떠올랐다. 야마구치는 자긴 절대 못한다며 도망칠 기세였고, 엔노시타가 하는 수 없이 카게야마에게 주장을 줘야겠다고 말하며 일어날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주었다. 아마 쉬는 날은 없을 거고, 매일매일이 합숙 때의 훈련 강도일 거고, 연습 상대 잡아오라고 닦달당할 거고, 주장의 권한으로 제왕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할 거고, 기타 등등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말에 츠키시마는 결국 겸허히 주장직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히나타는 카게야마가 진땀을 빼며 후배들을 지도하는 모습을 좋아했다. 얼굴에 흔치 않게 당황이 어려 있기도 했고, 어떻게든 이해를 시키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색달랐기 때문이다. 카게야마가 2학년 세터에게 하는 수 없이 시범으로 설명을 대체하는 모습을 보는데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2학년 미들블로커의 목소리였다.

 

히나타 선배 또 카게야마 선배 보고 있네요!!”

으아악! 조용히 못 하냐!”

 

놀리는 게 역력한 목소리에 히나타가 당황하며 소리쳤지만 이미 츠키시마와 카게야마와 2학년 세터가 그들을 돌아본 이후였다. 히나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그들의 시선을 피했지만 짓궂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히나타 선배가 계속 쳐다보고 있었어요! 그것도 웃으면서!”

 

카게야마와 히나타 사이는 배구부원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거고 카게야마를 지켜보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이럴 때는 좀 당황스러웠다. 뭐라고 해야 하나, 작정하고 얼굴에 철판을 두르는 것과는 좀 다른 마음이라고 해야 하나……. 몹쓸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히나타는 들고 있던 빈 드링크병으로 후배의 등을 마구마구 때렸다. 후배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자 츠키시마가 질색이라는 표정을 짓고 카게야마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히나타는 민망해져 팔에 걸고 있던 새 수건을 하나 들어 얼굴을 가렸다. 구석으로 총총 걸어 그들의 시야를 벗어나는데 척척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다! 히나타는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어깨에 닿는 손에 그럴 수 없어졌다. 얼굴을 가리려 수건을 든 팔을 잡아챈 카게야마가 조금 허리를 숙여 히나타의 얼굴을 살폈다. 히나타가 기겁하며 고개를 요리조리 피했다.

 

뭐해??! 가서 연습이나 해!”

왜 내가 볼 땐 안 웃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카게야마가 물었다. 히나타는 속으로 외쳤다. 부끄러우니까 그렇지 바보야마! 그렇지만 부원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순 없었다. 히나타가 소리쳤다.

 

, 비웃은 거다!!”

하아?”

. 아니 그게 아니고.”

아니고?”

아 하여튼 일단 연습이나 해!!”

 

하지만 불만스러운 얼굴이 순순히 물러나겠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 히나타는 당황했다. 어쩌자는 건데?? 주위를 살피니 아직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1학년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몇몇은 충격 받은 얼굴로, 몇몇은 당황한 얼굴로, 몇몇은 흥미진진해 죽겠다는 얼굴로. 예전 같았으면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전에 니시노야와 타나카가 그들을 제지했겠지만 지금은 그들이 최고참이 되어버렸으니 히나타는 최후의 수단을 썼다.

 

코치님!!! 다들 연습 안 하는데요!!!”

 

히나타가 큰 목소리로 외치자 타케다 선생과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친 부원들이 슬슬 눈치를 보며 다시 연습에 돌입했다. 딱 한 명을 빼고. 우카이 코치는 혀를 차고 체육관 안을 둘러보더니 그들을 소집했다.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카게야마가 자의로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아 히나타는 억지로 그의 등을 밀어 부원들이 모인 쪽으로 데려갔다.

 

우카이는 카게야마와 히나타를 한 번 보고선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흰 칠판에 붙였다. 부원들의 눈이 커졌다. 타케다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싶더니 인터하이 예선 대진표였다. 작년 대회에서 전국에 진출했기 때문에 그들은 시드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 조에는 작년에 만난 팀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팀도 있었다. 강호라고 불릴만한 팀들은 작년 4강까지 치열하게 경쟁했던 탓인지 그들과 같은 조에서 만나지는 않았다. 우카이가 총평했다.

 

작년과 비슷한 전력의 팀들이 같은 조가 됐어. 우리의 실력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특히 우리와 같은 쪽에 시라토리자와가 있어.”

 

이대로 쭉 이긴다면 준결승에서 만날 상대였다.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대진표를 살폈다.

 

작년 인터하이 전국대회 진출 팀으로서 과한 방심은 금물이지만, 과한 겸손도 떨 필요 없어. 어차피 전력을 다해 이겨버리면 그만이다. 어차피 우리는 청소년 국가대표도 한 명 데리고 있잖아?”

 

우카이의 말에 한 곳으로 시선이 쏠렸다. 카게야마쪽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최선을 다해 이길 겁니다.”

 

카게야마는 올해 처음으로 배구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작년에 치러진 인터하이와 봄고에서 전국 강호를 상대로 접전을 펼친 카라스노의 중심에는 세터 카게야마가 있었다. 신기에 가까운 정확한 토스 컨트롤 능력만으로도 충분했으나, 어색하긴 해도 팀원들의 능력을 이끌어내려 노력하는 모습도 긍정적으로 비춰진 덕분이었다. 카라스노에 오고 카게야마는 마음가짐부터 많이 달라졌다. 그렇기에 그 지극히 당연한 말에도 우카이는 만족스러워하며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맞다, 인터뷰 한 건 언제 나온댔지?”

?”

월간배구에서 취재해 갔잖아. 이번달 호에 실린다고 하지 않았어?”

. 인터하이 예선 마지막날에 나옵니다.”

 

무엇이든 배구에 맞춰 배구로 귀결되는 기억방식이었다. 히나타는 고개를 틀어 카게야마를 보았다. 청소년 국가대표에 선발되고 월간배구에서 취재요청을 했을 때 사진을 몇 방 찍어가기도 했었다. 주로 체육관에서 토스를 올리는 모습이었다. 여러 각도에서 많은 사진을 찍었으니 그중에서도 잘 나온 사진을 싣겠지. 카게야마나 히나타나 사진을 찍을 때마다 눈이 반쯤 감겨 나오곤 했지만, 그건 작정하고 포즈를 취할 때의 얘기였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순간을 포착할 때는 나름 눈을 뜨고 있었다. 아마 못나온 사진을 찾는 게 어려울 것이다.

 

생각해보니 좀 기분이 나빠졌다. 월간배구면 서점에 즐비하게 전시될 거고, 배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하나씩 사서 볼 거고, 그럼 카게야마가 잘 나온 사진을 볼 게 아닌가. 카게야마 인기가 더 많아지면 어떡하지?? 가뜩이나 중요한 시합을 앞두면 카게야마의 신발장을 열 때마다 팬레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여자애들이 쓴 것 같은 익명의 편지들을 힐끗힐끗 훔쳐보면 잘생겼다는 말은 꼭 빠지지 않고 들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퍼지면 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카게야마의 방을 가득가득 채울 팬레터를 생각하니 히나타는 조금 후회가 됐다. 인터뷰 할지 말지 고민할 때 말릴 걸 그랬나?? 하지만 후회를 해도 이미 늦었다. 카게야마가 어떤 인터뷰를 했을지 궁금해 발매 즉시 집으로 배달이 오게끔 예약까지 해놓은 상황이었다. 생각에 빠져 입을 툭 내밀고 있는데 카게야마가 손가락으로 히나타의 입술을 한번 두드렸다.

 

뭐가 불만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기에 손을 들어 카게야마의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려주었다. 우카이가 처음으로 만날 팀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알려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처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신입생들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윙스파이커 하나가 야마구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

 

야마구치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신입생이 소근소근 속삭이며 물었다.

 

카게야마 선배랑 히나타 선배 서로 좋아하나요?”

 

야마구치는 피식 웃었다. 입부한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둘의 관계를 헷갈려하는 게 꽤 재밌었다. 하긴, 그들이 1학년 때에는 지금보다 더 심하지 않았는가. 잠잠해질만하면 싸우고, 험악하다 싶으면 알콩달콩하고. 괜히 당시 사귄다는 소문이 돈 게 아니었다. 자각이 없는 것 같은데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야마구치조차 매번 두 사람의 관계를 헷갈려했으니까.

 

저 둘 사귄지 일년 됐어.”

네에!???”

 

깜짝 놀란 신입생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 시선을 받았다. 그의 눈이 당혹스럽게 주변을 훑었다. 말을 뚝 끊은 우카이와 선배들을 본 신입생은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 자연스럽게 카게야마와 히나타쪽으로 향했다. 어쩐지 매일 싸우는데 매일 붙어 있었다. 서로 좋아하는 것 같긴 한데 따로 본 스킨십 장면이 없어 썸 타는 건가 추측했는데 이미 저 멀리 앞서 나가 있었다니

 

죄송합니다!!”

 

신입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나머지 연습까지 마치고, 늘 그랬듯 그들의 우상이나 마찬가지인 카게야마와 하교를 하고 싶어 기웃기웃거리던 신입생들은 친구인 윙스파이커에 의해 그러지 못하고 억지로 끌려나갔다. 그들이 요 몇주간 저 두 사람에게 얼마나 폐를 끼쳤는지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집에 먼저 가도 상관없는 여매니저 선배가 굳이 나머지 연습까지 도와주고, 함께 연습했던 2학년 선배들이 은근슬쩍 자리를 피해 집으로 돌아가는데도 눈치가 없는 그들이 미처 몰랐었다. 마음속으로 백번 사죄한 신입 윙스파이커가 친구들을 한꺼번에 데리고 사라지자 딱 둘만 남았다.

 

무슨 일 있나?”

 

히나타가 급하게 사라지는 신입생들을 보며 물었다. 카게야마도 알 길이 없었으므로 그냥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자전거를 끌고 가는데 히나타는 문득 둘이서만 하교를 하는 게 참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잘 따르는 신입생들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길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카게야마와 둘이서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는 건 더 좋았다.

 

바람 좋다. 그치?”

.”

 

히나타가 있어서 좋다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둘이 가니까 그거 생각난다. 2학년 때 나 발목 삐었던 거 기억나? 너 나 업고 여기 내려왔잖아.”

멍청이가 칠칠맞게 체육시간에 발목이나 접질리고. 그걸 또 미련하게 말 안 했지.”

 

연습이 끝나갈 때쯤에서야 히나타가 발목이 안 좋다는 걸 카게야마만이 유일하게 눈치 챘고, 곧장 히나타를 업어서 언덕을 내려왔었다. 늘 버스정류장까지 향하는 길이 멀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만큼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듯한 기분은 느껴본 적 없었다.

 

아 그때 카게야마 진짜 멋있었는데~”

 

카게야마가 슥 고개를 돌려 히나타를 보았다. 험악한 얼굴이었지만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

?”

, 업히고 싶냐고!”

 

히나타가 카게야마의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카게야마가 히나타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전거 안 가져온 날 업어줘!”

 

비식비식 웃음이 터져 환한 얼굴로 걸어가는데 카게야마가 중얼거렸다.

 

아까 그렇게 웃은 건가.”

뭐가?”

 

히나타가 고개를 돌리자 카게야마는 재빨리 시선을 피해 외면했다.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 히나타가 의아하게 카게야마를 살폈다. 한참을 침묵하며 피했지만, 그 집요한 시선을 이기지 못한 카게야마는 결국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아까 2학년 세터 가르칠 때 나보고 웃고 있었다며! 방금 웃은 것처럼 웃고 있던 건가 했다!”

, 그걸 아직도 맘에 두고 있어? 쪼잔야마!!”

뭐야? 이게 왜 쪼잔한 게 되는 거냐!”

내가 비웃었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던 거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너니까 궁금해 하는 게 잘못됐어?”

 

끄아아악. 히나타는 갑자기 날아온 솔직한 말에 당황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아 반대쪽으로 시선을 치워버렸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본 카게야마도 얼굴이 빨개져 시선을 피하고 있는 건 똑같았다. 자박자박 길을 걷는 소리와 자전거 바퀴 굴러가는 소리밖에 나지 않는 조용한 거리에서 카게야마가 입을 열었다.

 

손 잡을까.”

.”

 

카게야마와 히나타가 손을 꽉 잡았다.

 

 

 

 

카라스노는 파죽지세로 타학교들을 꺾고 지역예선 토너먼트를 올라갔다. 결승까지 가는데 가장 큰 난관으로 생각했던 시라토리자와에게는 21로 이겼다. 결승 상대는 아오바죠사이. 1학년과 2학년 지역 예선을 통틀어 유일하게 매 대회 때마다 만난 상대였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만나게 되었다. 카게야마의 실력은 청소년 국가대표로 뽑힐 정도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지만 아오바죠사이도 만만찮게 강했다. 특히 쿠니미와 킨다이치를 카게야마는 많이 신경 썼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던 히나타는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바로 내일 있을 인터하이 결승에서 그 두 사람을 만날 카게야마는 아닌 척 하지만 늘 그들을 신경 쓰곤 했다.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싫어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한 그 세 사람의 기묘한 관계를 지켜봐온 히나타는 조금 신경이 쓰여 베개 옆에 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뭐라고 보낼까. 자판을 틱틱 두드리며 내용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던 히나타가 메일을 보냈다. 보내고 나서야 시간을 확인하니 밤 11시였다. 지금쯤이면 자려나. 원래 답장이 느리긴 하지만 오늘 밤엔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답메일이 도착했다.

 

[뭐해?]

[준비]

 

히나타는 키득 웃었다. 카게야마는 메일 보내는 것을 꽤 어려워했다. 매번 빠지지 않고 오타가 포함되어 날아오는 메일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모습이 눈에 선해 장난기가 들었다.

 

[집 가서 지금까지 뭐했어?]

 

아마 카게야마는 집에 돌아가서 저녁을 조금 더 먹고 씻은 다음 개인적인 운동을 한 뒤 침대에 누워 공을 좀 만지작만지작거리다가 잘 준비를 하고 있었을 거란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어도 굳이 물어본 건, 카게야마가 그 많은 문장을 쓰기 벅차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1학년 때 처음으로 카게야마와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메일을 보냈을 때 온 답신을 보고 얼마나 비웃었는지 모른다. [카게야마 체육관 키 너한테 있어???] 라고 물어봤을 때 한참이 지나서야 온 메일이 뭐더라……

 

[구래ㅁ ㅓㅇ청야]

 

무슨 말인지 한참 고민하면서 해석하다가 [다시 보내주면 안 돼?] 라고 물어봤다가 곧장 전화가 걸려와서 깜짝 놀랐었다.

 

우우웅, 우우웅

 

바로 지금 득달같이 걸려오는 전화처럼, 당시에도 조금 심장이 주저앉으며 쿵쿵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여보세요?”

멍청아, 너 일부러 물어본 거지?!’

~ 아닌데?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카게야마는 나한테 알려주기 싫은가보다?”

 

카게야마는 잠시 말이 없었다. 히나타는 개구지게 웃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일결승 준비하고 있었는데.’

저녁 먹고 씻고 운동을 한 다음에 침대 누워서 공 던졌다가 받았다가 하면서 내일 결승 시뮬레이션?”

젠장, 역시 너 일부러 물어본 거 맞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새로운 거 있나 싶어서 물어봤는데. 역시 없구나.”

뭐냐, 그 기분 나쁜 말투.’

 

카게야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히나타는 소리 내서 웃다가 잠시 멈췄다. 카게야마가 한 말 때문이었다.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결승이라서?”

그것도 있지만

?”

네가

 

카게야마는 잠시 말이 없었다. 히나타는 전화가 끊어진 게 아닌가 잠깐 확인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네가

?”

젠장, 됐어! 시끄러워!’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지만 확신이 없었으므로 히나타는 그냥 넘어가며 말했다.

 

이제 큰 대회는 딱 하나 남았네.”

왜 하나야?’

봄고 남았잖아.”

아직 인터하이 본선 남았거든.’

당연히 지역 예선 우승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넌 아니야?’

나도 너랑 같아.”

 

아직 둘 다 잊고 있지 않을 약속이 떠올랐다. 지켜볼 거니까,

 

내일 잘해.”

싫은데.’

?”

틀렸잖아. 내일 잘 하자라고 해.’

 

히나타는 환하게 웃었다.

 

내일 잘 하자.”

그래.’

 

 

 

 

그리고 카라스노는 아오바죠사이를 이기고 인터하이 지역 예선 우승을 차지했다. 전국대회로 가는 티켓을 거머쥔 부원들은 모두 뛸 듯이 기뻐했다. 5세트에 이르기까지 경기 내내 마음 졸이며 지켜본 히나타도 마찬가지였다. 기쁨에 도취되어 있을 새 없이 히나타는 다 쓴 드링크병을 모으고, 수건들을 취합해 가방에 넣고, 경기 중에 기록했던 것을 소중히 챙겼다. 응원을 와준 야치와 새로 들어온 1학년 매니저가 히나타를 도왔다.

 

2학년 때 혼자 매니저일을 다 하느라 우왕좌왕 바쁘고 시미즈에게 시도 때도 없이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거느라 차질을 빚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히나타가 매우 자연스럽게 1학년 매니저에게 할 일을 알려주었다. 오늘 경기를 관중석에서 참관한 시미즈도 히나타를 칭찬해줄 정도로 많은 발전이 있었다. 무엇보다 카게야마가 이제 더 이상 히나타가 만든 드링크에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가끔 히나타가 만든 도시락을 먹고 다음에도 싸오라는 말을 했던 것처럼.

 

시상식이 있기 전 잠시 체육관 밖으로 나가 있는 부원들과 합류하기 위해 히나타는 야치와 1학년 매니저에게 먼저 짐을 들려 보냈다. 저 멀리 굴러간 드링크병을 줍기 위해서였다. 하나 둘 셋……. 개수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확인해서야 히나타는 체육관을 나섰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헤치고 복도를 걷던 히나타의 앞이 가로막힌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품에 드링크병을 세 개를 안고 있던 히나타가 고개를 들었다. 유니폼도 교복도 아닌 사복을 입고 있는 무리였다.

 

엇 이게 누구야. 카라스노 매니저?”

?”

 

어디서 봤다고 아는 척이야. 히나타는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슬쩍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남학생들이 재빨리 뒤로 물러나 다시 길을 막아서는 바람에 또다시 마주보게 되었다.

 

관중석에서 계속 쳐다봤는데, 몰랐어요?”

별로요.”

아아- 그냥 가지 말고, 잠깐만.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히나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히나타와 남학생들 사이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히나타는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팔을 붙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있는데요.”

 

카게야마의 표정은 한눈에 봐도 좋지 못했다. 코트 위에서 상대에게 투어택을 읽혔을 때보다 더 기분 나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빛이 들어오는 각도상 어둡게 그늘진 얼굴이 매섭게 남학생들을 쏘아보았다.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반쯤 안긴 자세가 된 상태에서 그가 물었다.

 

뭐야.”

 

히나타를 향한 질문이었지만, 되려 찔린 남학생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남자친구 있는 줄 몰랐네!’ ‘그것도 제왕이라니.’ 듣기 싫은 단어가 섞여 있어 카게야마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그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히나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게야마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불쾌해하는 감정이 역력한 얼굴로 히나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히나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기분 나빠서.”

 

카게야마는 오히려 히나타를 더욱 꽉 끌어당기며 걸음을 옮겼다. 으악! 카게야마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주변 시선이 엄청났다. 차라리 길거리면 몰라도 여긴 체육관이었다. 더욱이 방금 전까지 카라스노를 이끌던 청소년 국가대표 카게야마 토비오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쪽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는 건 너무 잘 알았다. 히나타가 손가락으로 카게야마를 쿡쿡 찔렀지만 그는 꿈쩍도 안 했다. 오히려 보란듯이 히나타에게 가깝게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야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히나타가 손으로 카게야마 얼굴을 밀어버리며 소리쳤다. 카게야마가 태연하게 답했다.

 

그게 뭐? 넌 내 여자친구잖아.”

야 그래도 장소가 장손데!”

그럼 손 잡을래?”

 

……얘 왜 이래?? 입을 벌렸다가 다물길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던 히나타는 문득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가만 있자.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장소가 조금 달랐지만, 체육관 건물 밖에 있는 수돗가에서 잘못 탄 드링크병을 씻고 있었을 때. 혼자 매니저가 되어 처음으로 정신없이 부원들을 살폈던 인터하이 예선. 처음 보는 남학생이 다짜고짜 핸드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해 난감했던 순간. 그리고갑자기 나타나 히나타의 팔을 낚아채던 카게야마.

 

.”

 

히나타는 걸음을 멈췄다. 잠시 정신이 팔린 탓에 품에 안고 있던 드링크병이 우수수 떨어졌다. 카게야마도 걸음을 멈추고 히나타와 쭈그려앉아 드링크병을 주웠다. 드링크병을 하나 주워든 히나타는 칠칠맞다고 투덜거리며 나머지를 줍는 카게야마를 빤히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아까의 기세는 어디다 버렸는지 잠시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까 일년이야.”

뭐가?”

작년 인터하이 예선 때도 이랬잖아.”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1학년 여름 합숙 이후 히나타에게 가진 감정을 서서히 자각하기 시작하고 완전히 깨달아버린 겨울을 지나 2학년이 된 동시에 망설이고 고민하던 봄에는 인터하이 예선이 있었다. 사라진 히나타를 찾아 체육관 밖까지 나와 두리번거리는 시야에 남학생에게 잡혀 쩔쩔매는 모습이 보이고. 제어할 수 없는 행동부터 튀어나가 남학생을 쫓아내버린 이후, 그는 은연중에 불안해하던 것이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히나타가 그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불쑥불쑥 하고 싶던 말을 카게야마는 그제야 입 밖으로 꺼냈었다.

 

그랬지만다음엔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카게야마가 히나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달래는 의미가 큰 중얼거림을 토해냈다. 지금이야 얼마 전 나름대로 준비한 확실한 예방책이 있으니 그리 초조하지는 않았지만, 히나타의 감정에 대한 아무런 확신이 없던 당시에는 무작정 낯선 남학생에게서 빼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로 그를 무시무시하게 덮쳤던 공포는 아직도 생생했다. 그 실체 없는 두려움은 아직도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는 종류라 이렇게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다음에는이라니?”

곧 알게 될 거야.”

그래? 아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카게야마.”

그럼?”

 

카게야마가 히나타의 주황색 눈동자를 보았다. 언제부터였지, 저 눈동자가 나만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너랑 나랑 사귄지 일년이나 됐다는 소리지! ! 다른 사람들 보면 기념으로 선물도 주고 그러던데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뭐 받고 싶은 거 있어?”

그것보다

?”

나 오늘 자전거 안 가져왔는데.”

 

카게야마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지난번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업어줘?”

네가 내 손가락에 밴드 붙여주면 좋겠고, 네가 나 머리 말려주면 좋겠고, 나한테 뽀뽀도 해주면 좋겠어. , 험악하게 말고 아주 다정하게!”

원하는 거 너무 많아, 멍청아.”

 

내년엔 더 늘어나는 거 아니야? 카게야마가 투덜거렸지만 히나타는 감탄만 했다. 일년이야, 일년. 시간 엄청 빨라. 그 사이 카게야마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다정한 게 뭔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하면 되겠지 뭐.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히나타의 볼을 잡아 끌어당겼다. 히나타의 눈이 커졌다. 카게야마가 곧바로 고개를 틀어 히나타의 입술에 닿아왔기 때문이다. 가볍게 닿아온 카게야마의 입술이 뜨거웠다. 눈 깜짝할 사이 살짝 떨어져나갔지만 여전히 온기가 붙어 있는 듯했다. 어버버거리는 히나타가 제대로 말도 못하고 얼굴이 붉어져 잠시 패닉상태에 빠져있을 때 카게야마가 손가락을 꼽았다. 밴드 붙이기. 머리 말리기. 업어주기. 뽀뽀해주기. 그 중에서,

 

이건 됐고.”

!”

? ?”

누가 지금 해달래?!!”

아니야?”

사람들 다 보고 있는데!”

 

패닉에서 겨우겨우 빠져나와 근처를 살피던 히나타가 고개를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복도에서 뽀뽀하는 두 사람을 보고 경악하는 건 둘째 치고, 그들의 경기를 관전하러 시간을 따로 빼서 온 스가와라와 다이치와 아사히가 뎅하니 굳어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옆에는 츠키시마가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히나타는 재빨리 쭈그려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으아아아! , 언제 오셨어요!”

히나타가 드링크병 떨어트렸을 때부터?”

 

, 다 본 거잖아! 히나타가 얼굴을 붉히며 카게야마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잘 됐다는 듯 등을 내밀었다.

 

, 뭐해?”

업히라고.”

지금?? 좀 이따 업힐래!”

자전거 없다며! 업히고 싶다는 말 아니었어?”

그러니까 이따가 집 갈 때 업어달라고!”

왜 하필 집 갈 땐데? 언제가 됐든 그게 중요해?”

여긴 체육관이잖아! 사람들 얼마나 많은데!”

뽀뽀도 했는데 못 업힐 건 뭐야?”

으아아악 조용히 해 멍청야마!!!”

하아? 조용히 할 건 너다 멍청아!!”

 

카게야마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히나타에게 소리쳤다. 히나타도 지지 않고 왁왁거리며 싸웠다. 불과 방금 전까지 복도에서 대범하게 뽀뽀를 한 사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하하카게아마랑 히나타 사이는 역시 언제 봐도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어스가와라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이치와 아사히도 그 말에 마음 깊이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스노는 상을 받았다. 전국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란다는 뻔한 격려가 이어졌다. 그렇지만 몇 번을 비슷하게 반복해 듣는 말일지라도 그것이 전국행 티켓을 담보로 하는 한 싫을 리가 없었다. 경기에 직접 뛰지 않은 히나타마저 두근두근거리는데 몇 번의 경기를 뛰어 이 자리까지 올라온 남학생들은 더욱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처음 입학하자마자 전국대회에 진출하게 된 신입생들은 기쁨과 걱정이 뒤섞여 눈을 빛내고 있었다.

 

결국 히나타는 체육관에서 버스까지 업혀 가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무겁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가 선배들에게 혼이 났다. 특히 니시노야와 타나카는 격분했다. 히나타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솔로인 자신들이 슬퍼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발끈하려던 히나타보다 더 카게야마를 상대해준 건 사실이었다. 카게야마는 무겁다는 말이 왜 안 되는지, 니시노야와 타나카는 왜 분노하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잠자코 듣긴 했다.

 

버스에서는 늘 그렇듯 카게야마와 앉았다. 1학년 매니저는 다른 신입생과, 야치는 오랜만에 시미즈와 나란히 앉아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츠키시마는 주장의 권한으로 그들을 떨어뜨려놓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옛 3학년 선배들이 이랬거나 저랬거나 흐뭇하게 두 사람을 보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대신 츠키시마는 스가와라와 다이치와 아사히에게 이런저런 조언과 충고를 듣는 것을 택했다.

 

그 상황을 잘 모르는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동시에 하품을 했다. 졸리냐는 카게야마의 질문에 히나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을 뻗어 히나타의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 아무렇지 않게 서로 머리를 기댄 두 사람은 금방 잠에 곯아떨어졌다. 너무 자연스러운 모습에 잠시 스가와라와 다이치와 아사히와 츠키시마와 대화가 끊기고 니시노야와 타나카는 부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애꿎은 손수건을 물어뜯었다.

 

히나타는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자전거를 가져가지 않기도 했거니와, 빨리 돌아와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뛰어들자마자 동생 나츠가 히나타를 반겼다. ‘누나!’ 라고 달려드는 나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준 히나타가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저녁 준비를 하는 건지 부엌에서 물소리가 났다. 히나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집으로 빨리 돌아온 이유를 찾았다.

 

엄마, 월간 배구 안 왔어요?”

? 식탁 위에 있어.”

 

히나타가 소리 높여 외친 질문에 엄마의 여상한 대답이 들렸다. 히나타는 재빨리 부엌으로 들어가 식탁 위에 있는 월간배구를 집어들었다. 빨리 봐야지. 히나타가 신나게 뒤를 도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엄마한테 할 말 없어?”

? 없는데요??”

으흠. 알았어.”

 

살짝 토라진 듯한 엄마의 뒷모습에 히나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룰루랄라 방으로 들어간 히나타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무작정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보는 사람도 없으니 치마를 신경 쓸 필요도 없어 곧바로 월간배구를 쭈르륵 훑었다. 어디 보자……

 

[월간배구 신예 특집 - 세터 카게야마 토비오]

 

. 2페이지나 꽉꽉 채워져 있잖아? 히나타는 부러워 죽을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뿌듯해 해당 지면의 페이지로 넘어갔다. 처음 보이는 건 카게야마가 멋지게 점프 서브를 꽂아 넣는 사진이었다. 토스를 올리는 사진(엉겁결에 촬영을 도와준 츠키시마도 곁다리로 찍혀 나왔다)도 있었고 잠시 배구공을 바닥에 튕기는 사진도 있었다. 사진을 제대로 못 찍는 고질병이 있어 정면에서 카메라를 본 컷은 없었지만 대부분 그럴듯하게 잘 나와 히나타는 또 속이 복잡해졌다. 이거 보고 또 인기 엄청 많아지면 어떡하지……. 심란해진 마음으로 히나타는 인터뷰를 한글자 한글자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V : 안녕하세요, 카게야마군. 이번에 배구 청소년 국가대표로 선발된 것 축하드립니다.

K : . 감사합니다.

V : 바로 직전에 있던 춘계 고교 대회에서의 활약이 우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카게야마군이 몸담고 있는 카라스노는 최근 들어 전국대회에 많이 출전하고 있어요.

K : . (V : 카게야마군이 팀을 잘 이끌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 아니요. 저는 주장이 아닌데요.

 

히나타는 탄식을 내뱉었다. 카게야마는 질문마다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고 인터뷰어는 그걸 잘 포장해서 적당한 대답이 나오길 유도했다. 예를 들어 자기는 주장이 아니라 팀을 이끌지 않았다는 카게야마의 말을 코트 위의 사령관이라는 세터로서로 완벽하게 탈바꿈시켜 팀을 향한 그의 헌신을 부각시켰다. 그야말로 엄청난 스킬이 아닐 수 없었다.

 

지면을 2페이지나 소비하다보니 사진이 차지하는 부분을 제외하고서라도 꽤 질문이 많았다. 배구를 언제부터 했는지, 배구를 하며 가장 어려웠던 게 무엇인지,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무엇인지 등 틀에 박힌 뻔한 질문도 많았지만 좋아하는 음식이 뭔가요를 비롯해 소소한 질문도 많았다. 히나타는 이미 전부 아는 얘기였지만 인터뷰 당시의 카게야마 표정과 태도를 떠올리니 좀 재밌었다. 이렇게 대답해도 되나 긴가민가하면서도 째깍째깍 대답했겠지. 그런데 히나타는 순간 한 부분에서 시선이 멈췄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 보였기 때문이다.

 

V : 고등학생이고 3학년이면 졸업이 머지않았네요. 학교생활을 하면서 배구 말고 따로 몰두하는 게 있나요?

K : . 종목 같은 건 아닌데요(V : 괜찮아요.) 그래요? XXX XX.

V : ? (당황) 사람이었어요? , 이거 나가도 되겠어요? 카게야마군 아직 어리고학생이고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고, 이 인터뷰 잡지에 영원히 박제되는 건데.

K : ? 그러면 오히려 더 좋지 않나요?

V : 왜 더 좋은 거죠?

K : 확실히 해둘 수 있잖아요.

V : (너털웃음) 하하. 그래요. 다시 물을게요. 배구 말고 따로 몰두하는 게 있나요?

K : 히나타 쇼요라고 제 여자친구요. (카게야마군은 인터뷰 중 처음으로 웃었다)

 

… … …?!

히나타는 충격에 빠져 나머지 인터뷰를 읽지 못했다. 잠깐, 잠까아안!! 이거진짜야?! 나한테 누가 장난치는 거 아니야? 가짜로 만들어서 붙여놓은 거 아니지? 손톱으로 지면을 긁었지만 깨끗했다. 지우개를 가져와 숨겨진 부분이 있나 확인도 했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히나타는 침착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카게야마가 인터뷰에서 대놓고 내 이름을 말했고, 그게 그대로 잡지에 실렸고, 월간배구는 배구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 보는 엄청 유명한 잡지이고,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 히나타는 고개를 돌렸다. 문을 슬쩍 열고 고개를 들이민 히나타의 엄마가 침대 위 월간배구 잡지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씻고 내려와. 밥 먹어.”

.”

 

씨익 웃는 모습을 보고 히나타는 확신했다. 봤어! 엄마도 봤어!! 어쩐지 잡지가 식탁 위에 있었어! 어쩐지 뭐 할 말 없냐고 물어봤었어!

 

띠링. 띠링.

 

핸드폰이 울리며 메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히나타는 불안한 시선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선배들과 친구들에게 온 메일이 넘쳐났다.

 

[켄마 : 쇼요, 월간배구에 이름 떴던데. 사이 좋아 보여.]

[야치 : 히나타!!! 카게야마가 히나타 인터뷰에서 언급한 거 봤어? 애들 다 난리야!!]

[츠키시마 : 제왕이 공식 인정한 여자친구 되십니까?]

[타나카 : 히나타! 카게야마 녀석이 공개 고백한 거 읽었냐!]

[스가와라 : 다이치와 아사히랑 대화중인데 왠지 눈물이 나네. 우린 흐뭇할 따름이야.]

[오이카와 : 토비오쨩이 치비쨩한테 공개 프로포즈 했다며?]

[리에프 : 우와ㅋㅋㅋ 히나타 잡지에 이름 실렸어! 부럽다! (사진)]

[쿠로오 : 치비쨩 남친군 패기 대단해ㅋㅋ]

[야마구치 : 시마다씨가 너희 둘 사귀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했어. 기분 나쁘다면 미안!]

 

그밖에도 신입생들과 2학년들의 쇄도하는 메일에 히나타는 곧바로 카게야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그가 전화를 받았다.

 

.’

멍청야마! 인터뷰에서 내 얘기 하면 어떡해!!”

봤어?’

보기만 했냐, 메일 때문에 죽겠어!”

 

대수롭지 않은 카게야마의 태도에 히나타가 소리치자 그가 전화 너머로 피식 웃었다. 히나타는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웃어?? 웃어?? 이 상황에??

 

잘된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다음부터는 아까 같은 일 없을 거 아니야.’

?”

 

히나타는 눈을 크게 떴다. 비슷한 뉘앙스로 아까 체육관 복도에서 들은 것 같은데다음엔그럴 일 없다는 말이었던가! 카게야마의 말뜻을 그제야 이해한 히나타가 소리쳤다.

 

학교 사람들만 알게 된 게 아니라 엄마까지 알게 됐다고!”

잘됐네.’

뭐가 잘돼! 엄만 나 너랑 연애하는 거 몰랐단 말이야! 이거 전국 서점에 다 퍼질 텐데 어떡해??”

그래서 뭐가 문젠데?’

그야,”

내가책임지면 되잖아.’

 

히나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뭘 져? 책임을 진다고??

 

무슨 책임??”

 

히나타의 얼굴이 빨개졌다. 어쩐지 전화 너머의 카게야마도 그럴 것 같았다.

 

올해든 내년이든 내후년이든 계속 너는 나랑 같이 있을 거잖아. 그러니까내가 어차피 책임 지니까

…….”

, 아무튼!! 어차피 평생 같이 있을 거!! 뭐가 문젠데 멍청아!!’

, 몰라! 끊어!! 나 밥 먹어야 돼!!”

하아? , 이 멍청이가!’

 

으아아아…….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말을 더 들을 수 없어 황급히 전화를 끊어버린 뒤 침대 위에 철푸덕 엎어졌다.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 위로 푹 뒤집어 쓴 히나타가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으악, 어떡해, 으아아. 놀랍긴 한데 싫지는 않고 좋은 것 같기도 한데 부끄러워 미칠 것 같고. 한참을 몸부림치던 히나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옷장 옆 거울에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잔뜩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에게 메일을 보내놓은 뒤 옷을 챙겨 씻으러 들어갔다. 밥 먹기 전까지는 일단 얼굴을 원래대로 돌려놔야 했다.

 

[이따가 다시 전화해 멍청야마!!]

 

그리고 히나타가 미처 읽지 못한 나머지 인터뷰.

 

V :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말해줄 수 있어요?

K : 그냥 다 좋은데요. (한참을 침묵하다가) 저를 변하게 만들어줬어요.

V : 긍정적인 방향으로?

K : . 그렇지만저는아직 변해야 할 게 많아서앞으로도 같이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약속이 지켜질 때까지.

 

히나타의 핸드폰이 지잉 울렸다.

 

[?? 시에?]

 

짓궂은 2학년들이 카게야마의 인터뷰 부분을 잘라 체육관 문에 떡하니 게시해놓은 일이나, 공식적으로 카게야마가 여자친구를 언급해버리는 바람에 곁다리로 사진 찍힌 츠키시마에게 인기가 쏠려 성가시게 되어버린 일, 카게야마를 부모님에게 보여주기 위해 집에 데리고 오게 되는 일이나, 반대로 카게야마의 부모님을 뵈러 가게 되는 일, ‘누나 언제 결혼해?’라고 해맑게 웃는 나츠에게 놀라 마시던 물을 뿜어버릴 뻔한 일은 좀 더 나중의 일들이었다.

 

 

 

 

 

사람들 많을 땐 히나타가 부끄러워하고 사람들 없을 땐 카게야마가 부끄러워했으면 좋겠다ㅋㅋ

흑흑 ts 자급자족(눈물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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