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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게히나] 갈림길에서

별골짜기 2016. 4. 3. 10:51

노동요 Charlie Puth - One Call Away

 

카게히나

갈림길에서

 

 

 

 

만지작 만지작. 연락을 할까 말까. 만지작 만지작. 애꿎은 핸드폰 액정을 문지르는 손가락 사이로 긴장과 초조가 문대어졌다. 밥을 먹으면서도 힐끗. 점심시간 운동할 때도 힐끗. 강의를 듣는 와중에도 힐끗. 히나타의 시선의 방향을 일찍이 파악한 친구들이 기다리는 여자 연락이라도 있냐고 놀려오는 통에 황급히 아니라고 손을 내저으며 수습하길 십수 번째. 히나타는 본격 훈련이 시작되기 직전에야 핸드폰 전원버튼을 끄고 가방에 넣을 수 있었다. 나는 딱히 기다리는 연락도 없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고개를 끄덕이고 라커 문을 닫은 히나타는 그들 배구팀의 훈련이 한창 진행 중인 체육관으로 와다다 뛰어갔다.

 

, 하고 날아온 공을 퍽, 소리를 내며 네트 건너편에 꽂아버린 히나타에게 연습 경기 팀을 이루고 있는 동료들이 웃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건너편에서는 살살하라는 농담 섞인 투정이 둘려왔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배구만큼 그의 집중력을 높이는 종류는 없었지만 문제는 그의 생각 틈새를 파고드는 존재가 배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토스를 한 번 올려 받을 때마다 고등학교 때와 확연히 다르게 느껴지는 방향과 속도를 체감하고 생각하고 계산하고 적응해야하는 히나타로서는 눈앞이 아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세터를 떠올리는 순간마다 저도 모르게 과한 힘을 내고 있었다.

 

! 그의 손을 떠난 공이 상대의 블록에 막혀 셧아웃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히나타의 특기인 리바운드를 넣을 타이밍이었는데 대책 없이 힘을 주는 바람에 그대로 공이 떨어지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돈마이! 히나타는 열심히 뛰어오르고 열심히 스파이크를 쳤다. 심장이 입 밖으로 토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숨이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이 집중이 풀리지 않으면, 곧장 체육관을 벗어나 부실로 뛰어 들어가 라커를 열고 가방에서 꺼낸 핸드폰 전원을 켜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히나타는 상대편 세터가 투어택을 시도하려는 것을 읽어내고 빠르게 공을 받아내며 그가 아는 천재 세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카게야마라면 지금 타이밍보다 반 박자 빠르게 공을 네트 너머로 넣었을 텐데.

 

……! 또 생각해버렸잖아!

 

히나타는 흠칫하며 잠시 집중력을 잃었다. 흐트러진 시야가 똑바로 제자리를 찾는 순간, 히나타는 얼굴 정면으로 날아오는 공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코가 아니라 볼이었지만, 얼얼하게 느껴지는 볼을 입안으로 굴리며 맥없이 코트 위에 쓰러진 히나타는 결국 전화기에 대고 중얼거리고 싶은 말을 머릿속에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카게야마. 어떻게 됐어.

 

 

 

 

히나타는 도쿄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배구팀 추천을 받은 덕분이었다. 대학 기숙사에서 지내는 통에 집으로 돌아가는 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뿐이었지만, 지난 주말에는 이주 연속으로 미야기로 돌아가는 기록을 세웠다. 집이 너무 가고 싶었다는 건 아니고, 선배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라스노 배구부 모임 때문이었다.

 

일찍이 취업전선에 뛰어든 선배도, 대학을 다니고 있는 선배도 있었다. 갓 신입생이 된 히나타를 비롯해 동기들은 모두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두 도쿄에 소재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을 갔다는 사실에는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그들이 모두 같은 지역에 모이게 되었다는 사실은 퍽 재미있었던 듯 선배들이 폭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정작 당사자들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랬다. 중요한 건 지난 주말 모임 때의 일이었다. 학교 체육관을 빌려 연습경기를 몇 판 뛴 뒤 중요한 시합이 끝나고 나면 우카이가 늘 데려가던 술집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셨다. 3년 내내 우카이를 따라 드나들었던 히나타와 카게야마와 츠키시마와 야마구치와 야치는 어느새 얼굴이 익어버린 주인 할머니에게 너무 마시지 말라는 잔소리도 들었다. 여전히 유쾌하고 재밌는 선배들은 그동안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나 사건을 이야기로 풀어냈고, 종종 그들의 근황을 묻기도 했다. 특히 타나카와 니시노야는 키요코와 야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술기운까지 올라 텐션이 한층 업된 타나카와 니시노야의 입을 가차 없이 틀어막으며 스가와라가 웃었다. 다이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갓 신입생이 된 1학년조에게 물었다. 대학생활은 어때, 재밌어? 히나타는 대답했다. 생각보다 대단한 건 없던데요. 츠키시마가 비웃었다. 그야 넌 맨날 배구만 하니까 그렇지. 그래가지고서는 고등학교 때와 다를 게 없는 게 당연하다는 말에 발끈했다. 고등학교 때와 어떻게 똑같아?

 

히나타는 마음만 먹으면 다른 점을 열 가지는 말할 수 있었다. 일단 그는 도쿄에 있고, 대학생이며,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기 때문에 기상시간이 늦춰졌고, 수업을 가끔 빼먹기도 하면서, 새로운 과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만두를 팔지 않는 편의점을 지나, 커다래진 부실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낯선 체육관 건물에서, 처음 보는 팀원들과 합을 맞추고, 무엇보다…… 카게야마가 없었다. 그와 함께 했던 코트 위에서의 순간순간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을 정도로 기억하는데 막상 안개처럼 잡히지는 않았다. 막연히 늘 함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든든한 파트너가 사라진 여파라고 하기엔 그와 보낸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히나타 주위를 떠다녔다.

 

쇼요, 대학생이라면 연애를 해봐야지! 니시노야가 크게 소리쳤다. 여전히 배구를 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는 코트에서 들었을 때처럼 여전히 당당하고 자신감 있었다. 히나타는 그렇다 치고 다른 녀석들, 너희도 좋은 소식 없냐? 소개팅 같은 것도 안 해? 타나카가 오이를 아삭아삭 씹으며 물었다. 고등학교 졸업이 가까워졌을 즈음 취업을 목표로 머리카락을 조금씩 기르기 시작한 타나카의 머리카락은 많이 자라 있었다. 변한 그의 모습이 처음에는 적응하기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순간은 영원하지 않고 새로운 순간들이 밀려들어 자리를 차지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히나타는 몇 번의 만남과 이별을 거치며 깨달았다.

 

소개팅이라면 할 예정인데요. 카게야마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뇌에서 소화되는 것과 동시에 히나타는 그 사실을 한 번 더 깨달았다. 눈이 크게 떠진 히나타는 물론이고 모든 이들이 뒤집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카게야마는 배구바보로 불릴 정도로 배구 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공부는 물론이고 여자까지 뒷전이던 그가 무슨 바람이 들었냔 말이다. 자신이 물어놓고서도 충격에 빠진 타나카와, 할말을 잃은 3학년조 선배들과 1학년조 사이에서, 유일하게 호탕하게 웃은 니시노야가 카게야마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야, 카게야마 드디어 너도 어른이 되었구나!

 

? 전 이미 성인입니다. 카게야마가 대답했다. 그제사 정신을 차린 타나카는 우와아아! 소리를 지르며 카게야마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떤 여자야, 예뻐? 사진 안 봐서 모르겠습니다. 나이는? 저랑 동갑이라던데요. 학생이야? . 어디 학교? 저랑 같은 학교입니다. 우오, 누가 소개시켜주는 거야? 배구팀 선배입니다. 널 뭘 보고? 저도 모릅니다. 갑자기 날짜 시간 알려주더니 나와달라고 했습니다. 언젠데? 내일이요. 뭐야! 바로 내일이 소개팅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단 말이야!?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소개팅 전날에는 심신을 정갈하게 다스려야 하는 법!

 

당사자보다 더 시끄럽게 떠들며 소개팅 필승법을 전수하는 타나카의 목소리가 술집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히나타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다소 멍했다. 손에 쥔 맥주잔이 온기에 물들어 미지근해질 때까지 쉽사리 놓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카게야마가 소개팅을 한다. 여자를 만난다. 선배가 주선한 거니 긍정적으로 만나보려고 할 것이다. 소개팅한 여자는 당연히 카게야마를 마음에 들어 할 거고, 카게야마는 그 여자와 좀 더 좋은 관계로 진전될 수도 있었다.

 

히나타는 얼떨떨했다. 아니, 뒤통수가 얼얼했다. 카게야마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연습시합에서 후두부에 맞은 서브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충격이 컸다. 카게야마는 왜 계속 배구만 할 거라는 착각스런 믿음을 가졌을까? 수많은 여학생들이 내민 고백을 정중하게 거절해와서? 새로운 포스터가 부실 벽에 붙어도 본척만척 옷만 갈아입고 나가곤 해서? 학교 제일 미녀인 키요코를 앞에 두고도 무덤덤했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 맞은편에 앉은 카게야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히나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놀라서인지 손에 쥐고 있던 맥주잔이 그릇에 부딪쳤다. 히나타가 든 맥주잔에 시선이 쏠리고, 니시노야는 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를 제의했다. , 그래! 짠 하자고! 카게야마의 소개팅 성공을 위하여! 모두가 잔을 들었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히나타는 억지로 얼굴 근육을 썼다. 맥주잔을 들어 올려 다른 이들의 잔과 맞부딪혀 쨍 소리를 내야 했지만 팔이 굳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히나타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른 이들이 건배를 할 때 잔을 입가에 갖다 댔다.

 

너무 미지근해서새로 따라야겠어요. 히나타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중얼거림을 덧붙이며 새로 맥주를 따랐다. 절반 정도밖에 차지 않았는데 맥주병이 동났다. 주인 할머니에게 새 병을 받아오는 동안 화제는 바뀌어 있었다. 히나타는 새 맥주를 따지 않고 가만히 입구를 쥐었다. 갓 냉장고에서 꺼낸 냉기가 히나타의 후끈거리는 손바닥을 식혀주었다. 이 냉기가 심장까지 흘러들어 마음도 식혀줬으면 했지만 아쉽게도 그러기에는 너무 뜨거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모임이 파한 것은 새벽 1시였다. 그들 모두 근처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무리 없이 돌아갈 수 있었지만 히나타는 언덕을 넘어가야 했다. 혼자 돌아갈 수 있겠냐고 물어 그렇다고 답했지만 선배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제 고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인데 걱정마시라고 웃자 그제서야 돌아갔다. 츠키시마와 야마구치는 가는 길에 야치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츠키시마가 내일 기차 시간 잊지 말라고 주의를 준 뒤 뒤를 돌았다. 불 꺼진 거리에는 카게야마와 히나타만이 남았다.

 

저벅저벅 걷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섞였다. 얼마 만에 만난 거지. 히나타는 몰래 손가락을 접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3개월 정도가 지났다. 고작 3개월 보지 못했을 뿐인데 둘 사이의 공기가 너무 무겁고 낯설었다. 전에는 무슨 대화를 했었지? 히나타는 기억을 더듬었다. 연습이 끝나고 자율적으로 남아 토스 및 스파이크 연습을 하고 경비 아저씨가 그만 가라고 할 때 체육관 정리를 한 뒤 깊어진 밤하늘 아래 나올 때면 훈련의 성과에 대해 떠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학교가 갈려버린 두 사람은 함께 연습하지 않는다.

 

요새 배구는 잘 해? 히나타가 무난한 질문을 던졌다. 카게야마는 그럭저럭. 이라고 대답했다. 또 침묵이 성큼 다가왔다. 저벅저벅. 신발 밑창에 부스러지는 흙이 익숙했지만 손은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옷자락을 쥐었다. 늘 그의 손에는 자전거 핸들이 잡혀 있었어서 빈손은 낯설고 불편했다. 힘이 들어간 손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자전거가 없어 어쩔 줄 몰랐다. 카게야마의 눈이 그를 향하는 것 같을 때마다 부자연스럽게 쥐어진 옷자락을 슬그머니 놓는 것이 반복되었다.

 

츠키시마랑 기차 타고 가기로 했나봐. 카게야마가 말했다.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타와 츠키시마는 공교롭게도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 츠키시마는 순전히 공부머리로 입학한 거라 과도 다르고 진로도 다를 테지만 히나타와 같은 기숙사방을 쓰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블로킹 연습 뛰어달라는 히나타의 부탁에 진절머리가 나 다음 학기에는 방을 따로 쓸 거라고 이를 갈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너는 언제 출발해? 내일 소개팅이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묻고 싶었지만 소개팅이라는 단어가 목에 걸려 힘겹게 빠져나왔다. 어색하지 않았을까 고개를 돌리는 히나타의 눈에 무표정한 카게야마의 옆모습이 보였다. 7. 히나타가 탈 기차는 920분이라 시간이 달랐다. 다행이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복잡한 마음으로 히나타는 저 멀리를 보았다. 어느새 익숙한 갈림길이 나타나 있었다.

 

여기서 카게야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잘 가라는 말을 하며 손을 들어보였다. 그가 잘 가라는 말을 하기까지는 1년 정도가 걸렸지만 손을 들기까지는 1년이 더 걸렸다. 히나타가 자리에 박힌 듯 서서 카게야마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는 스스로를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였다. 졸업을 하기까지 약 2개월이 남았을 때의 일이었다. 2개월 동안 히나타는 치열하게 고민했다. 주렁주렁 매달린 수많은 고민을 질질 끌고 이 갈림길까지 왔다. 말할까. 말까. 하루에 주어진 기회들 중 가장 구질구질한 기회였다. 히나타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기회이기도 했다. 갈림길.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길이 마련된 곳. 그렇지만 히나타는 뒤에 환히 길을 등지고도 번번이 말하지 못했다. 잘 가라. 딱딱하지만 성의 있는 말이 좋아서. 휙휙 성의 없지만 민망해하는 손짓이 좋아서. 영영 보지 못하게 될까봐. 히나타는 그날도 작아지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아무 말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물어보지 못했다. 마음을 전하지도 못했다. 후회는 자책과 합리로 갈라져 양쪽 귓가에서 히나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뭐가 되든 일단 말은 해봤어야지. 아냐, 잘했어, 분명 카게야마는 네 고백을 싫어했을 거야. 히나타는 양쪽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다. 걱정스러워하는 엄마와 나츠의 배웅을 받으며 히나타는 역에 도착했다. 퀭한 눈의 히나타를 본 츠키시마가 쯧쯧 혀를 찼다. 애도 아니고. 히나타는 그 말에 발끈하는 한편 야마구치를 살폈다. 야마구치는? 오후에 올라간대. 너랑 둘이 가는 거야? 나도 싫으니까 그 기분 나쁜 표정 치워.

 

히나타와 츠키시마는 예매한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창가에 앉은 히나타가 창밖을 보았다. 처음 미야기를 떠나 도쿄로 갈 때. 실감이 나지 않아 하염없이 창밖만 보았을 때. 오후 느지막이 출발한다는 카게야마가 언뜻 눈에 보였을 때. 샅샅이 다시 살펴봐도 보이지 않아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들 때쯤. 출발하기 시작한 기차 유리에 이마를 기대고 다짐했었다. 이 마음 전부 미야기에 놓고 가야지. 하지만 도쿄로 와서도 바리바리 싸들고 온 짐 곳곳에 숨어 있던 마음을 발견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냥 말하지 그래? 츠키시마가 어디서 구한 건지 목베개를 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게 뭐냐고 깔깔거리며 놀릴 타이밍을 놓친 히나타가 대답했다. 할 수 있으면 진작 했겠지. 속으로 덧붙였다. 갈림길을 벗어난 카게야마가 한번이라도 뒤를 돌았다면 말했을지도 몰라.

 

그날 이후 히나타는 핸드폰을 쥐고 노려보았다. 카게야마의 번호는 저장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졸업 이후, 아니, 그의 마음을 깨달은 이후 제대로 연락해본 적은 없었다. 이제 와서 소개팅은 어땠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히나타는 후회했다.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지, 고백도 안 했는데 등진 길로 뒷걸음질 치는 것을 후회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히나타, 괜찮아?”

 

한순간에 스쳐지나간 이 상황의 모든 원인을 떠올리며 멍하니 체육관 천장을 보는 히나타에게 팀원들이 몰려들었다. 그에게 본의 아니게 스파이크를 꽂아버린 선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히나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볼이 얼얼하긴 했지만 입안이 터지지는 않았다. 혀로 입안을 쓸며 히나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잠깐 정신이 없었습니다! 히나타가 괜찮다는 사실을 깨달은 선배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습은 다시 시작되었다.

 

팀원들이 힐끗 쳐다보는 것 같아 히나타는 과하게 밝은 표정을 내세웠다. 좀 더 높이 뛰고, 좀 더 집중하려 애썼다. 요 며칠 들어 무슨 일 있냐는 말만 벌써 몇 십 번을 들었기에 더 이상의 걱정은 끼치고 싶지 않았다. 히나타는 한 세트의 연습시합이 끝나고 코트 밖으로 나올 때까지 미친 듯이 몸을 움직였다. 평소보다 더 땀이 나 수건으로 아무렇게나 얼굴을 문질렀다. 얼굴을 수건으로 꾹 누르고 있자니 불과 몇 개월 전 처음으로 감정을 자각했을 때가 떠올랐다.

 

카게야마의 등을 보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쿵쾅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집에 돌아와, 의자에 걸려있는 카게야마의 수건을 발견했을 때. 히나타의 집에 들렀다가 놓고 갔던, 어쩐지 돌려주고 싶지 않아 걸어만 놓았던 수건을 집어 들고 얼굴을 묻었을 때.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는 몰라도 히나타는 엉엉 울어버렸다. 자꾸 눈앞에 카게야마의 등이 아른거려서. 점점 커져가는 키와는 달리 점점 멀어져가는 등이 확실해서. 점처럼 작아진 얼굴이 지금껏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게 벌써 이 감정의 끝을 알려주는 것 같아서. 어떤 이유에서도 히나타는 슬프고 서러웠었다.

 

히나타.”

!”

 

히나타는 그를 부르는 선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개져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선배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듯해 다행이었다.

 

요새 안 좋은 일 있어?”

아니요. 괜찮은데요!”

 

팔을 붕붕 벌리고 수건이 손에서 흔들렸다. 선배는 탐탁찮은 표정으로 히나타를 보다가, 의자 위에 올려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히나타에게 다가왔다. 핸드폰. 잠시 카게야마 생각에 젖어있던 히나타는 선배가 뜬금없이 보여주는 사진에 깜짝 놀랐다.

 

. 선배 여자친구예요?”

? 아니야. 그냥 친군데 얘가 얼마 전에 남자친구랑 헤어졌거든. 꼭 너랑 비슷한 얼굴이라서, 어때, 얘 한 번 만나볼래?”

?!”

 

히나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다가 뒤로 넘어질 뻔했다. 선배는 뭘 그렇게 놀라냐며 웃었고, 히나타는 핸드폰 액정에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쭉 펴진 갈색 머리카락이 귀 밑까지 내려오는 냉미녀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소개팅이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에 히나타는 눈을 밑으로 깔았다.

 

죄송해요, 저 못 받을 것 같아요.”

에엑, ? 맘에 안 들어? 얘 좀 무섭게 생겼어도 성격 좋아! 너랑 잘 맞을 걸?”

……

 

히나타는 곤란하게 선배를 쳐다보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나가면 오히려 예의가 아니……

뭐어어어! 진짜야? 진짜 좋아하는 사람 있어!? 누구야?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선배가 하도 목소리를 크게 내서인지 근처에서 쉬고 있던 다른 동기들과 선배들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느새 친구 소개는 뒷전으로 밀어 넣고 히나타가 좋아한다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꼬치꼬치 캐내려 하는 짓궂은 팀원들에게 한참 시달리다가 히나타는 연습이 재개되어서야 해방될 수 있었다. 전혀 그런 내색이 없었기 때문에 놀랐다며, 진전은 있느냐, 어디 사냐, 왜 좋냐 등등을 물어보는 선배들은 히나타가 전에 없이 곤란해 하는 모습에 더 재미를 붙인 듯했다.

 

연습시합이 재개되었어도 이번 세트가 끝나자마자 또 득달같이 달라붙어 물어볼 것이라는 눈들을 하고 있기에 히나타는 세트가 끝나자마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소리친 뒤 줄행랑을 쳤다. 화장실이 아닌 부실로 들어와 헉헉 숨을 고른 히나타는 고개를 들어 라커를 보았다. 손을 들어 문을 열고 가방을 꺼냈다.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켠 히나타는 밖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얼른 그대로 가방에 넣고 라커를 닫았다.

 

말 안 할 거니까 자꾸 물어보지 마세요!! 부실에서 나가자마자 붙잡은 선배들에게서 겨우겨우 빠져나가 최후의 방법인 감독님과 코치님께 고발하기를 시전하기 위해 체육관 쪽으로 달려가는 히나타는, 라커 안 그의 가방에서 짧게 벨소리를 울렸다가 급속도로 사그라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늦은 시간 연습이 끝나자마자 부실로 들어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옷을 갈아입느라 녹초가 된 히나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옆에서 왜 말 안 하냐, 일화 몇 개라도 얘기해봐라, 팀원들이 보채고 채근하는 통에 너덜너덜해진 히나타는 뒤늦게 옷을 확인했다. 너무 급하게 갈아입느라 옷을 뒤집어 입거나 거꾸로 돌려 입었는지 생각할 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다만 평소보다 신경을 써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학교 내 편의점에 들러 먹을 거라도 사서 들어가야 하나 싶었다. 편의점에는 만두가 없지. 씁쓸한 기억을 입안에서 곱씹으며 히나타는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츠키시마가 방에 있을지 몰라 먹을 것을 좀 넉넉하게 샀다. 히나타는 품에 먹을 것을 품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츠키시마가 없는 방은 깜깜했다. 가방을 벗고 불을 끄고 히나타는 주린 배를 움켜쥐다가 일단 씻기부터 하기로 했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들고 샤워장으로 가 샤워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츠키시마는 아직도 방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 녀석, 연락도 없이……. 라고 생각하던 히나타는 문득 핸드폰 확인을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히나타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츠키시마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츠키시마가 보면 학을 뗄 일이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좀 앉으면 어때서. 히나타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한통 메일 한통이 와 있었다. 메일은 츠키시마의 것이었다. [오늘 도서관에서 밤 샌다] 히나타는 맥이 빠졌다. 저 먹을 것들은 츠키시마 몫까지 고려해 사온 거였는데. 히나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도서관에 먹을 거 배달이라도 해줘볼까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히나타의 눈이 통화목록을 훑었다. 맨 위에 남은 부재중 흔적은 믿을 수 없는 이의 것이었다. 히나타는 그 이름을 눌러 번호를 확인했다. 혹시 잘못 저장한 게 아닐까. 몇백번을 봐 기억력이 젬병인 머리로도 외우게 된 번호가 일치했다. 카게야마의 번호였다.

 

쿵 내려앉은 심장이 저 먼 발치에서 빠르게 박동했다. 카게야마가 그에게 전화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한창 연습하던 중이었다. 원래 연습 때 핸드폰을 꺼놓는 습관이 있어 중간에 빠져나와 핸드폰을 켜지 않았다면 남지 않았을 흔적이었다. 히나타는 금방이라도 ?’냐고 묻고 싶었다. 용건이 있는 건가? 잘못 건 건가? 벨소리가 얼마나 울렸는지 알 수 없어 히나타는 가슴이 불안하기만 했다. 그의 떨리는 눈이 핸드폰에서 떠나지 못했다.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왜 전화했냐고 물으면서, 자연스럽게 소개팅 결과를 물을 수 있지 않을까? 히나타는 핸드폰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메일을 열었다.

 

[전화했냐?]

 

보낼까 말까. 익숙한 망설임이 수백 번 머릿속을 망치질하고 히나타는 결국 메일을 전송했다. 카게야마는 아직 훈련 중일지도 몰랐다. 히나타는 답장에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츠키시마의 침대 위에 핸드폰을 던졌다. 그러나, 순간 울리는 벨소리에 히나타는 화들짝 놀랐다. 쿵쿵쿵거리는 심장이 상대를 예감했다.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손을 뻗어 핸드폰을 들자 카게야마의 이름이 보였다. 히나타는 통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카게야마? 웬일이야 연락을 다하고!”

훈련끝났어?’

? . 지금 기숙사야.”

그래.’

 

카게야마가 잠시 말이 없어졌다. 히나타는 핸드폰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리의 소음 같은.

 

밖이야?”

.’

연습 끝났나봐?”

.’

뭐야. 혼나기라도 했냐? 목소리 왜 그래.”

히나타.’

.”

나 지금 너희 학교 앞인데.’

……어어!?!??”

 

히나타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갓 넘어가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학교가 같은 도쿄에 있다고 해도 거리는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그런데 언제? ? 히나타는 벗어놓았던 져지를 대충 챙겨 입으며 다급하게 기숙사방을 나섰다. 어딘데? 내가 어떻게 아냐 멍청아. 근처에 뭐 보이는데? 교문 안에 들어왔는데 조각상 보여. . 거기서 기다려.

 

카게야마는 다행히 남자기숙사 쪽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히나타는 전화를 끊고 최대한 빨리 걸어 카게야마가 있을 구석진 조각상 앞을 찾았다. 개교 몇주년 기념으로 세웠다더라 하는 사소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히나타의 걸음이 서서히 멎어 들어갔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차분하고 까만 머리카락. 길쭉한 키와 단단한 덩치. 크로스로 맨 스포츠백. 조각상을 뚫어져라 관찰하는 뒷모습에 히나타는 기시감을 느꼈다. 갈림길도 아닌데 금방이라도 뒤를 돌아 자리를 벗어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등진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흐려지는 표정을 바로잡으며 히나타가 비웃었다.

 

너네 학교는 그런 거 없냐?”

 

카게야마가 고개를 돌려 히나타를 확인한 뒤 완전히 돌았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본 얼굴은 그대로였다. 기뻐 보이지도 슬퍼 보이지도 않는 무표정함.

 

없을 리가 있냐, 멍청아.”

멍청이는 너지! 여긴 언제 온 거야? 출발할 때 전화를 하던가, 더 늦게 봤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히나타는 카게야마를 잡아당겼다. 가까운 벤치에 앉아 그는 둘 사이에 봉투를 놓았다. 카게야마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히나타는 그 안에서 삼각김밥을 하나 꺼내며 말했다.

 

나 방금 연습 끝났거든. 너도 먹을래?”

 

카게야마가 삼각김밥을 하나 꺼냈다. 신중한 손길을 보며 히나타가 키득 웃었다.

 

원래 츠키시마 몫으로 샀는데 오늘 도서관에서 공부한다더라.”

 

카게야마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물어줄 생각은 없다.”

나 그렇게 안 쪼잔하거든?”

그랬던가.”

먹지 말든가.”

 

히나타의 말에 카게야마가 냉큼 삼각김밥을 입안에 넣었다. 늘 오니기리와 우유 요구르트를 달고 살았던 게 생각나 히나타는 팩요구르트를 하나 꺼내 빨대를 꽂아 카게야마에게 내밀었다. 카게야마가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요구르트.”

. 아아아, 나 요새 그거에 꽂혔어! , 너도 그거 먹었던가?”

 

카게야마 네 생각이 나 무심코 집곤 한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대답 없이 히나타에게서 팩요구르트를 건네받았다. 히나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쩐 일이야? 안 하던 전화에, 우리 학교까지.”

전화는……

 

카게야마가 요구르트를 한 모금 삼키고 히나타에게 물었다.

 

오늘 핸드폰 왜 켜놨냐?”

? 그게

 

당연히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너 생각나서 핸드폰 켰다가 네 얘기 하라는 팀원들한테 쫓기다가 급하게 도로 끄지도 못하고 정신 없었다는 얘기를 당사자 앞에서 하기엔 뻔뻔하지 못했다. 대신 히나타는 당당하려 애쓰며 되물었다.

 

가끔 까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네가 멍청이라는 거다.”

핸드폰 한 번 안 껐다고 멍청이라니?!”

일관성을 가지라고 좀!!”

왜 화를 내!? 나 나름 일관성 있어!”

근데 왜 오늘은 핸드폰 켜놨는데!!”

까먹었다니까!”

그러니까 일관성이 없다는 거라고!”

네가 그걸 어떻게 확신해!? 내가 어제 꺼놨는지 안 꺼놨는지도 모르면서!”

왜 몰라? 어제도 그제도 연습마다 맨날 꺼놓잖아 멍청아!”

그건 그렇지ㅁ…… ?”

 

히나타가 눈을 크게 떴다. 카게야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그가 홧김에 한 말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돌려버렸다. 젠장. 뭐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히나타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신경을 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일관성이 없다고 화를 냈다. 어제 핸드폰을 꺼놨다는 것도, 그 전날 꺼놓은 것도 알고 있다.

 

방금 그 말 잊어. 잊어 멍청아!”

 

요구르트도 내팽개친 채 양 어깨를 꽉 잡고 흔드는 카게야마의 얼굴이 멀리 있는 가로등을 감안하더라도 붉었다. 히나타는 깨달았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매일 전화를 했다.

 

?”

?”

왜 전화했어? 맨날 연습 때 전화한 거야?”

 

카게야마가 입술을 잘근 물으며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의 손이 히나타의 어깨에서 화들짝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왔는지 몰랐다. 거의 반년만큼의 용기를 샅샅이 끌어 모은 히나타는 물었다.

 

멍청이, 무슨, 이것, ,”

? 왜 전화했는데?”

 

카게야마가 손을 빼내려는 것 같기도 하고 잡혀있는 것 같기도 했다. 히나타는 그의 손을 더욱 꽉 붙들었다. 아직, 아직 그의 등 뒤에는 도망칠 수 있는 길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그만두고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다. 늘 그랬듯이. 하지만…… 늘 보던 등이 아닌 붉어진 카게야마의 얼굴이 그 길을 등지게 만들었다. 히나타는 말했다.

 

지금 확실히 말해줘, 카게야마.”

…….”

제대로 말 안하면 몰라.”

 

손을 빼내려는 듯 빼지 않으려는 듯 애매한 태도의 카게야마가 움직임을 멈췄다. 카게야마가 외면하며 돌렸던 고개를 다시 히나타에게 향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카게야마의 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히나타 너

말해줘.”

……

 

카게야마가 어금니를 한 번 세게 물더니 말했다.

 

듣고 후회하지 마.”

 

히나타는 솔직히 겁이 났다. 바라는 대답이 아닐 경우 이제는 정말 도망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가 무서워하던 대답이 나올 것 같아서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네가 보고 싶어서걸었어.”

 

하지만 은연중에 바라던 대답과 함께 카게야마가 오히려 히나타의 손을 꽉 붙들어 잡았을 때는, 바닥에 떨어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연습할 때마다 네 생각이 났어. 내 옆에 있는 건 다른 스파이커들인데나름 최고라고 불리는 사람들인데, 코트 위에서 네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네가 생각나서 전화했어.”

…….”

연습 때마다 전화 꺼놓는 거 알아. 그래서 오히려 매일매일 걸 수 있었어. 이런저런 핑계 머리 아프게 생각 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 지껄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카게야마가 히나타를 노려보았다. 무시무시하게 험악해진 얼굴이 무섭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네가 전화를 안 꺼놓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버렸잖아!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멍청아!? 전원 꺼져있다고 나와야하는데 갑자기 통화연결음 나와서 내가, 내가 얼마나!”

 

……젠장! 카게야마가 히나타를 덥썩 껴안았다. 쿵 쿵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소리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들렸다.

 

뭐라고 변명해야 될지 생각은 안 나지, 무작정 택시 타고 오는데도 머리는 하얗게 비지, 제길, 히나타 멍청이! 멍청이!!”

 

히나타는 맞닿은 목과 가슴에서 전해져오는 카게야마의 커다란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기분이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히나타가 더듬더듬 물었다.

 

나는전혀 몰랐소개팅도 하고나는

소개팅은 선배가 부탁해서 나간 거야.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거절했는데 얼굴만 비추고 나와 달래서 나갔어. 소개팅이고 뭐고 너랑 같이 올라가고 싶었는데츠키시마 녀석하고 간다고 해서제길, 츠키시마 그 자식이랑 같이 사니까 좋냐 멍청아!”

싫은 건 아니지만저기 있잖아 카게야마

시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마!”

 

카게야마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순간에 밀린 히나타가 뒤돌아서는 카게야마에게 소리쳤다.

 

어디가?? 내 말 왜 안 들어?!”

안 들을 거다!!”

왜 싫은데?!!”

싫다면 싫은 줄 알아! 난 간다!”

 

카게야마가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등이 한순간 작아졌다. 그의 등이 작아지고 멀어지는 것을 하염없이 선채로 보아야 했던 몇 십 일간의 기억이 겹쳐졌다. 그가 갈림길까지 질질 끌어온 망설임과 고민을, 그제서야 벗어던지며 히나타는 쏟아냈다.

 

내가 너 좋아한다는 말 그렇게 듣기 싫냐!!”

 

카게야마가 우뚝 발걸음을 멈춰 섰다.

 

나 너 좋아해. 좋아해 카게야마!”

 

히나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게야마에게 다가갔다. 카게야마의 걸음은 거짓말처럼 멈춰져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고개가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빨개진 귀를 보았다. , 힘이 들어간 카게야마의 주먹을 보았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 와서야 알 수 있는 사실이 보여 히나타의 마음이 다시금 크게 요동쳤다. 다시 가깝게 커진 등을 코앞에 두고 히나타는 마지막 용기를 끌어내 카게야마를 껴안았다.

 

히나타.”

 

카게야마가 히나타가 껴안은 팔을 풀어내곤 뒤를 돌았다.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카게야마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정말정말이야? , 그러니까 네가

 

카게야마와 눈을 마주친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차 말했다. . 맞아. 카게야마의 눈이 커졌다. 새카만 눈동자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어떠한 색이 엷게 스미는 광경은 기묘한 장관이었다. 곧 카게야마의 손이 히나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숨이 막히도록 꽉 히나타를 껴안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나도. 나도 너 좋아해.”

 

 

 

 

근데 카게야마나 배고파.”

밥도 안 먹고 다니냐, 멍청아.”

훈련 끝난지 얼마 안 됐다니까.”

 

카게야마는 들은척 만척 히나타를 이끌고 다시 벤치로 돌아왔다. 근처에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방금 두 사람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생각하니 뒤늦게 조금 민망해졌다. 히나타는 아까처럼 카게야마와 나란히 앉았다.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던 까만색 봉지가 카게야마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가고 두 사람이 바짝 붙어앉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히나타가 감정을 제대로 자각하기 전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확실히 얼떨떨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실감이 확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건 혹시 꿈이 아닐까. 자고 일어나서 눈을 떠보면 체육관 천장이 보일지도 몰라. 한쪽 볼이 얼얼해져서는.. 히나타는 무심결에 말했다.

 

신기하다. 나는 네가 날 좋아할 줄 몰랐어 진짜로.”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카게야마는 나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히나타가 주먹밥을 먹는 것도 잊으며 물었다. 고등학교 때는 확실히 아닐 테니 졸업 이후인 걸까.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는데 카게야마는 대수롭지 않게 주먹밥을 우물거리며 답했다.

 

너보단 빠를걸.”

내가 먼저일 것 같은데?”

넌 언제부터 나 좋아했는데?”

정확히는 몰라. 깨달은 건 좀 최근이지만. 솔직히 그걸 정확히 어떻게 아ㄴ……

1학년 때부터.”

뭐어어???”

 

히나타의 격한 반응의 의미를 깨우친 카게야마가 씩 웃었다. 내가 이겼다. 승리의 미소치고는 밤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히나타는 충격이 너무 커 무섭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1학년?? 내가 겨우 깨달은 게 3학년 끝나갈 무렵인데, 1학년!??

 

정확히는 1학년 끝나고 2학년 올라갈 즈음에.”

 

그것도 빨라! 히나타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 난 전혀 몰랐어!”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멍청이.”

뭐야, 티내긴 했어?”

글쎄. 넌 날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별로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도 네가 다른 녀석이 올려주는 토스로 스파이크 연습하는 건 짜증나서 일부러 데려왔고. 너희집에 너랑만 단둘이 있으면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서 참다참다 도망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일부러 느리게 걷고. 또 갈림길에서는……

 

히나타는 갈림길에서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늘 무심한 얼굴로 잘 가라.’라고 내뱉던 입. 무성의하게 들어 올리던 손. 그러나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던 등.

 

너랑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뒤돌아서 널 보고 싶은 거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줄 알아?”

 

히나타가 성급하게 카게야마의 감정을 짐작하고 재단할 수밖에 없었던 등.

 

참았는데?”

 

카게야마는 느릿하게 대꾸했다.

 

뒤를 돌았는데 등 뒤에 아무도 없는 상황은 이미 한 번 겪어 봤지만……

 

카게야마는 잠시 말을 멈췄지만 히나타는 곧바로 이해했다. 카게야마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은 키타가와 제일중 시절의 마지막 결승전이 겹쳐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등 뒤에 없다면 그땐 정말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아서. 그래서 뒤는 안 돌아봤어. 보나마나 넌 곧바로 집으로 가버렸을 테니까 차라리 안 보는 게왜 웃어?? 아니, 히나타너 울어? ! , 멍청아!”

 

히나타는 웃었다. 눈으로는 울면서 웃었다. 이상하고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와 마찬가지로 겁이 났던 거란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히나타처럼 카게야마도 거절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한 거였다. 눈 딱 감고 한번이라도 멀어지는 너를 불러볼걸. 그러면 카게야마는 이렇게 말할지도 몰랐다. 등 뒤를 한번이라도 돌아볼걸.

 

결국엔 이렇게 마주보게 될 것을 너와 나는 왜 쓸데없는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고 괜히 눈치 보고 서로의 마음을 오해로 지레짐작하고 무서워하고 망설이고……

 

카게야마!! 오랜만에 토스 올려줘!”

? 나야 좋지만 스파이크 치고 싶어서 우는 거냐?”

하핫. 그런가??”

멍청이, 울지 마. 실컷 치게 해줄 테니까!”

 

벤치에서 먼저 일어난 카게야마는 가방에서 공을 꺼내다가 잠시 흠칫하곤 물었다.

 

그런데너희팀 세터는토스 잘 올려주냐? 나보다도 더허어!?”

 

카게야마는 말을 하다 말고 뻣뻣하게 굳었다. 벤치에서 일어난 히나타가 그의 얼굴을 카게야마의 품에 묻었기 때문이다. 카게야마의 손이 어색하게나마 히나타의 등을 감쌌다.

 

우리팀 세터도 잘 올려주지만, 나는 카게야마 네 토스가 제일 좋아.”

 

처음 깨닫게 된 감정이 무섭고 서글퍼 울었던 그 어느 날처럼, 카게야마의 옷자락을 수건삼아 눈물을 닦아내며, 그러나 히나타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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