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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카게히나] Turntable 完

별골짜기 2016. 3. 30. 18:38

카게히나

Turntable 5

센티넬버스

 

 

 

 

카게야마가 눈을 뜬 것은 순식간이었다. 느릿하게 뜬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보이는 것은 천장. 익숙한 격자무늬의 흰 천장을 통해 이곳이 센티넬 전용 격리병동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듯한 환영이 일었다. 머리가 잠시 아팠다. 폭주 직전까지 정신이 내몰렸을 때 늘 있던 현상이었지만, 카게야마는 문득 몸에 통증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정제를 맞은 감각이 아니었다. 어디도 아프지 않은 상태로 깨어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기억이 한꺼번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M지역에 가이드를 인질로 붙잡고 있는 적군을 섬멸하는 임무. 카게야마는 지하 1층에서 적을 모두 쓸어버린 뒤 가이드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자멸을 각오하고 마구잡이로 쏘아댄 포탄에 지반이 흔들렸다. 가이드는 고사하고 히나타까지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무리해서 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지하 2층으로 내려가 적을 상대하기 시작할 즈음에는 시야가 하얗게 튀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언뜻 가이드의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몸은 너무나 당연하게 적을 아작 냈다.

 

위험하다. 빨간불이 켜지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붉어졌다. 쥐꼬리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이성이 가이드를 앞에 두고 숨을 골랐다. 늘 그렇듯 한 번의 충동질에 끊어질 얇디얇은 본능의 끈이었다. 끓는 피가 식지 않아 모든 근육이 타버릴 것만 같은 충동마저 느낄 때, 카게야마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외침에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폭주 직전의 상황이면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그가 폭주하지 않길 바라며 외치는 무전 통신의 바람에 응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상태의 카게야마에게 소리 나는 모든 것은 좋은 먹잇감밖에 되지 못했다. 하지만, 무모할 정도로 그에게 빠르게 달려온 상대의 양 어깨를 붙잡는 순간, 빨갛게 문질러졌던 시야가 하얗게 돌아오고, 무채색의 세계가 제 색채를 되찾았다. 더듬거리는 손에 감긴 볼과, 그를 빤히 마주보는 눈동자.

 

……히나타.”

 

카게야마가 중얼거렸다. 기억이 속삭이는 결론에 조금 믿을 수가 없었다. 믿기지 않는 건가? 얼떨떨한 건가? 흔들리는 눈동자가 주변을 살폈다. 그때 마침 차트를 뒤적이며 들어오던 스가와라가 카게야마가 깨어난 것을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스가와라가 카게야마의 이름을 크게 부른 탓인지 밖에 있던 다이치와 츠키시마와 타나카도 들어왔다. 스가와라가 서둘러 카게야마의 상태를 진찰하고, 카게야마는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어지럽게 섞여 단번에 입을 열지 못했다. 다행인 것인지 스가와라가 먼저 물어왔다.

 

카게야마. 너랑 맞는 가이드, 대체 언제 찾은 거야?”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 앉은 침대 근처를 둘러싼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상황이었다.

 

가이드, 였습니까?”

몰랐던 거야!?”

 

스가와라가 조금 충격 받은 얼굴로 소리쳤다. 카게야마는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타는 분명 폭주 직전인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안은 건지, 안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히나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 치솟던 충동이 다른 방향으로 꺾여 들어갔다. 빨갛게 부르트며 왜곡되던 시야가 정상적으로 자리를 잡고, 그 전 단계인 깜빡이는 하얀 시야가 한꺼풀 벗겨지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안정제보다 안정적이고 빨랐다.

 

왜 몰랐을까. 히나타와 처음 만났던 그날도 마찬가지였는데. 히나타가 안정제를 강제로 투여했기 때문에 헷갈렸던 걸까. 그렇지만 폭주가 진정되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스스럼없이 꺾여들어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 충동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번에도 카게야마는 히나타에게 입을 맞췄다. 더 깊이 더 진하게 그를 마시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분명 얼굴을 만지고 있는데도 부족하고 입을 완전히 틀어막아 혀를 삼키고 있는데도 모자라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폭주 직전에 이르렀던 파괴적인 본능이 완전히 가라앉을 즈음에야 카게야마는 쓰러졌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자리하는 마른 우물은 히나타를 더 원하고 있었지만 눈을 감는 게 빨랐다.

 

어떻게 가이드를 못 알아볼 수가 있어!?”

 

타나카가 소리쳤다. 츠키시마는 비웃으며 말했다.

 

제왕이라면 그럴 수 있죠.”

아니라고했었습니다.”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의 말에 그를 한 번 노려본 뒤 중얼거리듯 말했다. 카게야마의 말을 알아들은 이들이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그럼 역시, 병동에 처음으로 안 실려 왔던 그때가이드가 도망쳤다는 그때접촉한 게 그 사람이구나.”

 

카게야마는 당시 스가와라에게 접촉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던 듯했다. 안정제를 투여했다고만 보이지 않는 차트의 데이터 때문에 골머리를 싸맸던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히나타라는 존재는 그 자리에 있던 여자 가이드에 의해 들켜버린 모양이니 숨길 것도 없었다.

 

그때 저도 조금 이상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어 물어봤었는데곧바로 가이드가 아니라고 했었습니다. 그 말을 의심한 적 없었고

왜 아니라고 했지? 네가 이상하게 생각했을 정도면 그 사람도 당연히 알아차렸을 텐데.”

 

스가와라의 질문에 츠키시마, 타나카, 다이치가 차례대로 답을 내놓았다.

 

제왕이 싫어서?”

그쪽도 몰랐던 거 아닐까요?”

그럴만한 사정이 있던 거 아닐까.”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을 한 츠키시마가 한 번 비죽이 웃었다. 당장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멱살을 틀어쥐고 싶었지만 타나카나 다이치가 있는 한 그럴 수는 없었다. 카게야마가 이를 가는 사이 스가와라가 말했다.

 

카게야마를 싫어했다면 이번에 진정시켜주지는 않았겠지, 자기가 가이드인 걸 몰랐다면 안정제 투여도 안 하고 막무가내로 달려들었을 리가 없어.”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는 건 인질로 잡혀 있던 가이드가 전한 말입니까?”

. 맞다. . 그 가이드도 무사해. 지금 상부에 불려가서 얘기 중이야.”

그럼 히나타는요?”

너랑 맞는 가이드 이름이 히나타야?”

.”

네가 구한 가이드 말로는돌아갔다고 했어.”

 

어디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K-10구역. 정부군에도, 반정부군에도 속하지 않은 곳. 사랑하는 사람들이 흔적을 남긴 곳. 카게야마는 주먹을 쥐었다.

 

이런. 그 가이드도 너와 같이 있길 원하지 않는 건가?”

츠키시마.”

시끄러워.”

 

다이치와 카게야마가 동시에 그를 제지했다. 츠키시마는 모르는 척 병동을 둘러보았다. 스가와라가 곤란하게 웃은 뒤 카게야마에게 말했다. 나름 희망을 돋우기 위함이었다.

 

널 외면한 게 아니라, 어쩌면 모를 수도 있어. ‘등록이나 각인이라는 체계 말이야.”

맞아. 사실 가이드라고 해서 무조건 등록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정부 눈에 띈 이상 피해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아무래도 카게야마 너는 정부가 어떻게든 가이드 만들려고 애쓰고 있고당사자가 싫다고 해도 아마. 그렇겠네. 네 가이드아니, 아직은 아니지. 그 히나타라는 가이드 정부 때문에 좀 고달파지겠……!?”

 

스가와라가 어두워지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본 뒤 타나카의 발을 꾹 눌러 밟았다. 타나카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소리 없이 아파했다. 다이치가 말했다.

 

타나카 말도 일리는 있어. 그 가이드의 의사가 어떻든정부는 어떻게든 등록시키려고 할 거야. 그 전에 차라리 네가 설득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설득이요?”

 

카게야마는 눈을 똑바로 떴다. 문득 지난번 쿠로오의 집 앞에서 태양열 전지를 관찰하다가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 사람한테 솔직하게 말해보는 건 어때? 아마 네 가이아니확실한 게 아니지그러니까, 아마 네가 좀 더 붙잡아두고 가까워지고 싶다면 표현하는 게 중요할 거야. 설득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 아마 그 사람도 함께해줄 거야. 물론 쉽지는 않겠지…… 센티넬이라는 건 확실히 위험한 존재니까. 각오가 많이 필요하겠지만 절실하게 표현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쿠로오는 분명 설득이라는 단어를 썼었다. 절실이라는 단어도 함께. 히나타가 가이드인 것을 몰랐던 당시에는 왜 굳이 설득’ ‘절실이라는 비장한 감이 있는 단어를 썼는지 의아하기만 했는데, 지금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딱 들어맞는 적절한 조언이었던 것이다. 카게야마는 그 상대가 가이드라고 전혀 염두 하지 않고 말을 전했지만 쿠로오는 그의 말을 자연스럽게 가이드로 이해하고 얘기해준 것 같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츠키시마를 쳐다보았다. 쿠로오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 역시 카게야마에게 물어봤었다.

 

[‘내가 듣기로 네가 그렇게 누굴 보고 싶어 한다기에 가이든가 했지.’

쿠로오상 만났냐?’

정말인가 봐?’]

 

몰랐던 것이 정말 이상할 정도인 모양이었다. 시선을 한동안 마주치고 있던 츠키시마와 카게야마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츠키시마였다.

 

먼저 그 원인을 알아야하지 않나.”

…….”

왜 가이드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어렴풋이는 알 것 같았다. 히나타는 정부군도 반정부군도 싫다고 했었다. 가이드로 등록된다는 것은 그가 정부쪽의 사람이 된다는 것과도 같았다. 이미 정부쪽 센티넬인 카게야마와 마찬가지로. 둘 중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아 오랜 시간을 외롭게 살아온 히나타가 가이드라는 사실을 쉽게 드러낼 리 없었다.

 

그 다음에 해결방법을 찾아야지. 네가 정말 그 가이드를 원한다면 설득을 하든 무릎을 끓든 어떤 노력을 보이면 그쪽이 각오를 해주지 않겠어?”

츠키시마 말이 맞아. 그 편이 네 가이드에게도 좋을 테고……

 

스가와라가 맞장구쳤다. 설득. 노력. 카게야마는 이해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츠키시마를 보았다. 츠키시마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춘 그가 말했다.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허어? 명령인가?”

 

진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에게 츠키시마가 비웃었다. 짧은 말로는 도저히 들어먹어주지 않는 거 안다. 카게야마가 이를 아득 갈며 소리쳤다.

 

부탁합니다!!! 짜샤!!!!”

 

 

 

 

카게야마는 바쁘게 움직였다.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츠키시마에게 부탁한 일이 제대로 해결될 때까지 모든 준비를 맞추는 게 목표였다. 쓸데없이 서류를 제출하는 게 너무 많았다. 게다가 그는 상부의 호출을 받아 시달리는 일이 너무 많았다. 너랑 맞는 가이드 지금은 어디에 있냐, 빨리 데려와서 각인해야 하지 않냐, 그는 가뜩이나 초조한데 성가시게 만들기까지 한 주범을, 본부 복도에서 떡하니 마주쳤다.

 

주황색 머리카락과 주황색 눈동자. 여전히 이름도 모르겠고 이름을 알 생각도 없는 가이드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상부의 호출에 시달렸던 것인지 초췌해져 있었다. 그녀가 도망친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무서워서. 가이드들 사이에 퍼진 카게야마의 악명은 생각보다 더한 모양이었다. 꼼짝없이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안정제를 놓을 자신이 없다고 했다. 폭주 직전의 그는 가이드에게까지 흉폭하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으므로 이해 못할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도망쳐준 덕분에 히나타와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가이드는 카게야마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딱히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그녀를 지나쳤다. 빨리 하던 걸 마무리 지어야지. 카게야마가 마음이 급해 빠르게 복도 구석을 돌 때였다. 하도 호출당하는 바람에 그냥 계속 장착하고 있던 무전 장비에서 그를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또 호출인가. 카게야마의 인상이 미미하게 찌푸려졌을 때, 그의 예상을 깨는 내용이 흘러들어왔다.

 

카게야마 토비오.’

.”

네 가이드, K-10구역에 있는 거 맞아?’

?”

 

가이드 관리부장의 목소리에는 당황이 어려 있었다. 앞뒤 잘라먹은 갑작스러운 말에 상황파악이 어려워 눈가를 더 찌푸리는 와중 그의 발길을 본능적으로 돌리게 만드는 것은 그의 말에 섞인 ‘K-10구역이라는 말이었다. K-10구역. 히나타가 있는 곳. 네 가이드라고 했다. 카게야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알려드린 적 없는데요.”

그건……

당분간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부탁드렸는데. 아닙니까?”

그랬지만, 그건 도저히 안전상 그럴 수가…… ,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 가이드가 있어야 하는 곳을 확인해 보니 사라지고 없던데, 혹시 네가 다른 지역으로 빼돌린 건가?’

찾아봤다고요? 없단 말입니까?”

우리가 가봤을 때 침입이라도 당한 것처럼 들쑤셔져 있어서네가 다른 빼돌린 게 아니라면 혹시 급하게 그곳을 떠난 거라던가

 

카게야마의 걸음이 일순 멈췄다. 부릅뜬 눈이 허공의 한 지점을 짚었다. 머릿속이 순간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그의 걸음에 서서히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마침 잘 만났다. 네가 부탁한…… 제왕?”

 

카게야마의 눈이 고정된 방향은 본부 너머 아득한 K-10구역이었다. 그는 츠키시마가 부르는 것도 듣지 않은 채 내달리기 시작했다.

 

통 대답이 없는 카게야마에게 겁이라도 집어먹은 건지 가이드 관리부장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느라 말이 많아졌다. 도망쳤던 가이드가 네 가이드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다더라, 네 가이드를 어떻게 하려고 한 건 아니다, 그저 안전상 위치라도 파악해두어야 하기 때문에 조사했다, 그런데 알려준 장소로 가도 네 가이드를 찾을 수 없었다, 도망친 거라기에는 센티넬인 네가 있지 않냐, 도망친 게 아니라면 다른 지역에서 넘어온 반정부군의 소행일 수도 있다…….

 

카게야마는 그 말을 모두 귀담아들을 수 없었다. 새로운 정보가 흘러들어와 자리잡기에는 이미 허용 한계에 인접해 있었다. 히나타. 히나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카게야마는 귀에 달아놓았던 무전 장비를 떼어내 바닥에 던져버렸다. 땀을 뻘뻘 흘릴 기세로 떠들던 가이드 관리부장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K-10구역. 히나타의 집. 카게야마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걸음이 날듯이 정원 구석을 향했다. 흐트러지고 무너져 뒤섞인 잔해. 인디언 텐트처럼 만들어 세워놓았던 공간이 순식간에 짓밟혀 있었다. 갓 돋아난 싹이 꺾여 깔린 상태로 삐죽 삐져나온 광경을 눈에 담은 카게야마는 곧바로 몸을 돌려 히나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1층에도, 2층에도, 그리고 다락방에서도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 다락방에 올라선 카게야마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렇게나 되쑤셔넣어진 책꽂이가 지저분하게 내용물을 안고 있었다. 헝클어진 모포가 바닥 한가운데 떨어져 있었고, 옷장 문과 서랍장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내용물은 모두 그대로다. 만약 히나타가, 정말 싫어서 떠났다면 이 모든 것들을 두고 갔을 리 없었다. 이건 모두 히나타가 지켜야 할 것들이었으니까. 감자싹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카게야마는 허리를 숙였다. 책상 아래 떨어진 주사기가 보였다. 안정제. 주워들어져 확인하자 사용한 흔적이 있었다. 이 주사기는 익숙했다. 카게야마가 가져와 히나타에게 준 거였다. 히나타는 이 안정제를 침입자를 대하는데 쓰곤 했다. 히나타의 집에…… 침입자가 있었다.

 

도망친 게 아니라면 다른 지역에서 넘어온 반정부군의 소행일 수도 있어……

그래서 지금 넌 어디에 있는 걸까.

카게야마는 바닥을 다시 살폈다. 방 한가운데 펼쳐진 모포에 부자연스럽게 불룩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다. 그는 그 끝자락을 잡아 들어올렸다. 그러자 아무렇게나 접힌 종이뭉치가 있었다.

 

신문. 카게야마는 재빨리 그것을 들어올렸다. 끈을 풀어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자 신문이었다. 적어도 히나타가 오늘 아침 신문을 가져올 때까지는 여기 있었다. 하지만 신문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카게야마가 재빨리 책꽂이로 다가가 종이뭉치들을 빼냈다. 그의 예상대로 그건 전부 신문들이었다. 최근 날짜도 있었다. 히나타는 신문을 본 다음에는 전부 이 책꽂이에 꽂았다. 하지만 오늘 날짜의 신문은 그러지 않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모포로 덮여있기까지 했다. ,

 

히나타는 돌아오자마자 침입자와 마주한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히나타는 적어도 몸을 숨기는 일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했다. 태양열 전지 각도까지 신경 쓸 정도로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다. 활동 반경도 최소화하는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카게야마는 곧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달았다. 히나타가 유일하게 위험천만한 도박을 거는 일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손에 든 신문을 내리깔았다. 거기서, 거기서 들킨 거라면. 카게야마가 애초에 K-10구역에 온 이유도 최근 반정부군이 군사용품을 숨기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들어와서였다. 이곳에 있는 이들을 모두 닥치는 대로 없앴다고는 해도 반정부군은 여기 있던 자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카게야마에 의해 파괴된 것을 알아도 직접 확인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히나타를 발견하고, 따라온 거라면…….

 

카게야마는 신문을 내려놓고 곧장 창문을 열었다. 풀쩍 뛰어내린 그가 기억을 되살려 히나타가 신문을 받으러 가던 주민센터로 가는 길을 걸었다. 히나타가 작정해서 인기척을 냈을 리가 없으니 운이 나빴다고 봐야 했다. 예를 들어 동선이 겹쳤을 경우. 그의 가정이 맞다면, 그의 가설이 맞다면, 이 근처였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인기척을 찾으려 애썼다.

 

작정하고 집중하자 언뜻 스치기만 했던 작은 소리들이 광풍처럼 불어 닥쳤다. 훈련받아 거의 소리가 날 일 없는 그의 발소리마저 가깝게 들렸다. 주민센터로 점점 가까워지는 그때, 그의 청각을 신경질적으로 긁는 애매한 소리가 들렸다. 끼익. 무언가를 여닫는 소리였다. 카게야마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드륵. 무언가를 넣는 소리. 느리지만 분명 차곡차곡 모이는 그것은 탱크소리였다. 문득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K-10구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탱크의 수. 그리고 그가 파괴한 수. 딱 한대가 모자랐었다. 남은 하나를 찾기도 전에 그는 M지역에 투입되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달려갔다.

 

!!! 탱크가 포탄을 쏘는 것도 소용없었다. 포탄이 닿은 자리는 애꿎은 콘크리트 조각들이 산산조각 부서져 사방으로 튀었다. 흙먼지가 허공을 뒤덮는 것보다도 카게야마가 더 빨랐다. 탱크의 포신이 느리게 돌아갔다. 다음 발포를 위한 고작 5초의 시간도 그를 상대로는 너무 느렸다. 카게야마의 손이 주저 없이 포신을 쥐고 발로 탱크의 몸체를 찼다. 포탑이 기묘하게 비틀어졌다. 안에서 아우성치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카게야마는 그대로 탱크를 뒤집었다. 문을 열고 나온 첫 번째를 인정사정없이 발로 찼다. 으득, 어딘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두 번째로 기어 나온 이의 멱살을 틀어잡고 안을 살폈다. 아직 안에 한 명이 더 있었다. 카게야마는 세 번째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두 번째의 목숨을 앗았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세 번째의 목을 감싼 뒤 물었다.

 

어딨어?”

무슨, 무슨 말을 하는지아아악!”

어딨는지 말해.”

, 흐윽, 가이드를 말하는 거라면!”

 

카게야마가 힘을 더 주자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세 번째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근처에 있는 2층짜리 낡은 건물이었다. 카게야마는 미련 없이 그의 목을 꺾었다.

 

젠장, 너무 빨라!!”

탄창 더 가져와!! 총도!”

무립니다!!”

 

최전방에서 빈 총의 방아쇠를 딸깍이던 이들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카게야마의 손이 무자비하게 휘둘러졌다. 그의 뒤를 노리고 달려든 적은 팔꿈치 한 번에 나가떨어졌다. 쏟아지는 총탄을 빙글 몸을 돌려 피한 카게야마가 그대로 적군을 발로 차 쓰러뜨린 뒤 허공으로 날아간 권총을 잡아채 곧바로 조준 없이 쏘았다. . . . 무전으로 상황을 알리려던 세 명이 거의 동시에 눈을 감았다. 카게야마의 움직임이 더욱 다급해졌다.

 

무전을 막긴 했지만 총성과 고함으로 상황을 위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씹었다. 수많은 적들이 내려 해도 쉽지 않았던 상처가 그제서야 났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피맛이 코끝에 풍겨오는 타인의 피보다 더 강했다. 순식간에 1층의 상황을 정리한 카게야마는 날듯이 뛰어올라 2층에 올라왔다. 그가 2층에 발을 디딘 순간 기다렸다는 듯 총탄이 와다다 쏟아졌다. 카게야마가 빠르게 몸을 움직여 피하면서도 안을 살폈다.

 

수많은 책상이 놓인 구석에서,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히나타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겨눠져 있는 총까지.

 

휘몰아치는 격정 같은 분노에 휩싸인 것도 거의 동시였다. 카게야마는 짧은 순간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붙박이처럼 선 그가, 1층에서 탈취한 권총으로 히나타의 머리에 총을 겨눈 적을 쐈다. ! 커다래진 눈의 적이 자신의 죽음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카게야마의 총구가 다른 방향으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 . . . ! 총을 든 모든 이들이 한순간에 전멸해 바닥으로 쓰러지는 순간, 카게야마는 그를 향해 돌진해오는 단검을 확인하고 몸을 피했다. 하지만 총을 든 이들을 지나치게 우선한 탓인지 완벽히 피하지 못하고 따끔한 고통과 함께 어깨가 베였다. 카게야마는 단검을 휘두른 적의 배를 발로 차버린 뒤 굴하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어차피 이만한 고통은 고되었던 훈련 때와 비할 것도 아니었다.

 

카게야마!!!”

 

허억. 허억. 카게야마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히나타를 보았다. 머리에 겨눈 총이 없어진 이후 자유로워진 히나타는 그에게 달려드는 적을 한 명 쓰러뜨린 뒤 곧바로 달려왔다. 카게야마는 그를 꽉 껴안아온 히나타를 안았다. K-10구역과 M지역에서 타격이 컸는지 이 조그만 건물을 점거한 반정부군의 수는 많지 않았다. 모두가 쓰러져 난장판이 된 바닥 가운데 선 카게야마는 정말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많았더라면 이판사판이라고 여긴 적들이 일제히 히나타를 노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도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폭주 직전의 상황까지 내몰리기라도 했다면, 히나타를 제대로 마주하기도 전에, 그의 마음을 털어놓기도 전에 정신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손을 들어 히나타를 더듬었다.

 

, 다친 덴, 다친 데는……

난 없어. 다친 건 너지!”

 

히나타가 카게야마의 팔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가 말했다.

 

빨리 우리집 가자. 치료해야지, 피 나잖아!”

 

그 얼굴이 좋아서, 어물어물 글썽이는 눈동자가 좋아서, 종알종알 떠드는 시끄러운 목소리가 좋아서,

 

카게야마, ……!”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머리를 꽉 안았다.

 

 

 

 

이렇게 피가 나는데 빨리 가자니까!! 멍청야마, 뻔뻔야마, 바보야마, 미련한 거야 뭐야!”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거든?”

허세부리냐!!”

 

히나타는 대충 씻고 나서 자리에 앉은 카게야마에게 잔소리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말을 허세로 이미 도장 쾅쾅 찍은 듯했다. 그가 어깨에 난 상처에 조금 힘을 줘서 붕대를 감는 통에 .’ 하고 옅은 신음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애석하게도 진짠데. 훈련 때 입은 상처는 더했다. 무서운 회복력 때문에 흉터 하나 남지 않아 증명해줄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그게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훨씬 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줬을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미안.”

 

그때 히나타가 사과했다.

 

신문 때문에 나갔었는데…… 아무래도 그때 눈에 띈 것 같아. 미행당하고 있었나보더라고. 다락방 올라오자마자 뒤에서 덮치는데 한명이면 몰라도 여러 명은 어려웠어. 정신은 하나도 없고, 나보고 가이드냐면서 여기서 왜 지내고 있냐고, 정부 무슨 꿍꿍이냐고, 막무가내로 끌고 가서는 아는 대로 불라고 꼬치꼬치 캐묻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들어보니까 나를 다른 가이드랑 착각한 것 같더라고.”

 

카게야마는 곧바로 이해했다. 반정부군은 M지역에서 가이드를 데리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그가 구해낸 가이드도 주황색 머리카락에 주황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나야말로. 미안.”

 

카게야마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히나타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잠시 착각했어. 널 설득하는 것도 준비하고 노력하는 것도 결국엔 널 위한 거였는데. 곧바로 널 찾아올걸 그랬어. 네가 가이드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그 순간.”

 

두 사람이 지금껏 밀어두었던 주제가 떠올랐다. 카게야마는 굳이 이 상황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설득하기 위해 준비한 노력은 조금 아까웠지만 어차피 중요한 건 히나타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하고 곧은 까만색 눈동자가 히나타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나랑 살자, 히나타.”

 

침묵이 흘렀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시선을 피했다. 대신 그의 어깨에 난 상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 말이야, 사실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 내가 네 가이드구나 하는 거. 근데 네가 물어봤을 땐 아니라고 했지. 왜 그랬는줄 알아?”

…….”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의미 없는 싸움에 엄마와 동생을 잃었어. 그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게야마가 예상한 이유였다. 하지만 히나타의 이유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카게야마의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어서 그랬어. 나만 아니었다면 엄마와 동생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고, 다른 지역으로 몸을 피신해서 잘 살고 있을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그게 안 됐던 던……

…….”

정부군과 반정부군이 대치하던 외곽 끄트머리에서, 내가 가이드로 각성해버렸기 때문이야.”

 

그는 조금 놀랐다. 가이드의 각성. 적어도 센티넬은 알아차렸을.

 

정부쪽에 있던 센티넬이 그걸 알아차리고, 반정부군도 알게 되고,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 셋을 뒤쫓았어. 그러다가 결국 엄마 동생은 죽고 나만 살아남은 거야. 간신히 사람들 따돌리고, 바닥에 처박히면서 나는 내가 가이드인 걸 죽도록 후회하고 원망했어.”

 

카게야마의 눈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짚어내는 히나타를 보았다. 그의 고개가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뿌리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나는 자책감. 자책감이 드리워내는 그림자. 카게야마의 손이 쥐었다가 펴졌다.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라는 것을, 떨쳐내기도 어려운 종류라는 것을 이해했다.

 

너를 만나고 네가 나와 연결된 센티넬이라는 걸 알고 네가 나를 찾아올 때마다 기뻤어. 네 말대로 나는 외로웠으니까. 동시에 너와 있을 때마다 선명해지는 가이드로서의 본능이 싫었어. 너한테 내가 가이드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서 계속 이렇게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좀 이기적으로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폭주 직전에 몰린 너를 보니까, 나는…… 도저히 내 본능을 무시할 수 없더라고.”

 

히나타가 고개를 들었다. 카게야마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그렇다고 널 가이딩한 걸 후회한다는 말은 아냐. 그냥

히나타.”

 

카게야마가 손을 들어 히나타의 볼을 어루만졌다.

 

좀 더 일찍 말하는 게 좋았을까.”

 

미움을 받든 말든 말해버릴걸 그랬나.

 

턴테이블이 돌아갈 때도 감자싹이 피어날 때도 외로워했을 네가 떠올라서, 네가 외로워야 할 모든 이유를 부숴버리고 싶었는데.”

 

이유를 물을 때마다 그냥이라는 편한 이유로 넘어가버렸지만 실은 네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랬는데.

 

내가 센티넬인 이상 뭐든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

강요 안 해. 내 가이드가 되건 되지 않건 상관없어. 네가 나랑 살든 안 살든 받아들일 거다. 대신계속 찾아오게는 해줘.”

 

카게야마의 손가락이 서툴게 히나타의 볼을 쓸었다. 본능을 어기고 싶어 했을 히나타를 이해했다. 그러고 싶다면 받아들일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널 혼자 두게 만들지 마.”

 

히나타는 외로움이 어울리지 않았다. 반짝이며 웃는 모습이 어울렸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녀석이어도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에게만은 원 없이 보여주었으면 했다. 혼자 삼키지 말고, 외롭지만은 않았으면 했다. 카게야마의 담담한 말에 아무 대꾸 없던 히나타는 입술을 꾸욱 닫았다가 말했다.

 

멍청야마. 그래서 같이 살자는 거냐 말자는 거야?”

?”

내가 그만한 각오도 안 하고 너한테 달려들었겠냐!”

 

의아해하던 카게야마의 눈이 곧 그의 말뜻을 파악하고 커졌다. 카게야마의 다른쪽 손도 올라와 히나타의 양볼을 잡았다.

 

그 말히나타 너

, 대답해줄 테니까말해!”

히나타

 

카게야마가 잠시 숨을 멈추고 히나타에게 말했다.

 

나랑나랑 살자.”

 

히나타의 양손이 카게야마의 볼에 닿았다. 긴장이 역력하도록 꽉 다문 입이 보였다. 그렇지만 올곧은 시선은 여전했다. 짧은 시간 홀려버린 상대. 왜 인정하지 못했을까? 강 위의 그와 이어진 끈은 눈이 아니라 허리춤에 묶여 있었는데. 무시하고 외면할 수 있는 걸 굳이 바라보고 지켜보기까지 하면서 왜 부정했을까. 히나타는 강가로 다가가 종이배를 띄웠다. 카게야마에게 흘러갈 수 있는. 강물에 젖어 물에 닿게 되어도 그가 구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 그러자.”

 

카게야마의 얼굴에 환희가 돌았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히나타.”

.”

키스해도 돼?”

그걸 물어보고 해?”

허락 받고 하라 했잖아?”

. 그랬지.”

 

히나타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카게야마가 히나타에게 고개를 가까이 숙였다.

 

 

 

카게야마는 곧바로 정부에 연락해 히나타의 집에 있는 모든 짐을 싸그리 옮겼다. 그리고 곧장 본부로 돌아와 등록을 요청했다. 카게야마는 무조건 등록할 필요 없다고, 정부 소속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히나타는 고개를 저었다. 엉뚱한 사람한테 널 맡길 것 같아? 카게야마는 그 말에 크게 감동했지만 아닌 척 표정관리를 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복도를 지나가다가 마주친 가이드 하나는 카게야마의 무섭게 웃는 표정을 보곤 겁에 집어먹어 줄행랑을 쳤다. 옆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본 히나타는 가이드에게 미움 받는다는 말이 정말이었다며 소리 내 웃었다.

 

가이드 관리부장과 히나타가 조촐한 면담을 하고 있는 사이 소식을 들은 다이치와 스가와라와 타나카와 츠키시마가 카게야마를 찾아왔다. 가이드 관리부장의 사무실 앞에서 문짝을 뜯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카게야마를 보고 다들 잘됐다며 웃었다. 츠키시마가 그가 부탁했던 것을 건네며 뭐라뭐라 시비를 건 것 같았지만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너무도 신경 쓰여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츠키시마의 도발을 한귀로 흘려듣는 카게야마의 모습과, 그의 뜨거운 시선이 향하는 곳을 읽은 타나카가 어깨를 두드려왔다. 짜식. 다 컸어. 다이치와 스가와라는 어쩐지 꼭 붙어 서서 감동받았다는 듯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면담을 마치고 나온 히나타 너머로 가이드 관리부장을 서늘하게 노려본 카게야마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물어보려 했지만, 카게야마와 같이 히나타를 기다리던 네 사람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네가 히나타야? 반가워. 손을 내밀어 흔쾌히 악수를 청하는 스가와라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소개하는 다이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카게야마 저 목석같은 게 어디가 좋냐고 물어보는 타나카, 그리고 실망한 목소리를 숨기지 않으며 뭐야. 초등학생이잖아.”라고 말해 히나타의 분노를 단번에 사버린 츠키시마까지. 이게 그가 원하던 모습이긴 했지만 카게야마는 그들과 너무 금방 친해지는 히나타가 마땅치만은 않아 뚱해져 있었다. 어째 몇 년 동안 숨어 지내셨다던 분은 이쪽이 아니라 제왕 같은데? 츠키시마가 그를 놀리고, 카게야마는 한참 뒤에야 히나타를 데리고 본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기가 네가 사는 집이야? 엄청 크네.”

 

히나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카게야마는 들어오자마자 히나타의 집에서 실려 온 짐들 중 빠진 것이 없는지 살폈다. 모든 가구들을 비롯해 그 안에 든 것들까지 완벽하게 옮겨진 듯해 다행이었다. 카게야마는 짐을 하나씩 들고 방과 거실에 무작위로 들여놓았다. 남는 게 빈공간이라 그런지 아무데나 대충 세워놔도 될 것 같았다. 그 사이 집 안 곳곳을 살펴보던 히나타가 소리쳤다.

 

침대가 하나잖아! 나 어디서 자!”

 

히나타의 말에 카게야마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 나랑 잘 건데 침대가 더 필요해?”

 

카게야마가 덧붙였다.

 

침대 큰 걸로 바꿔서 넓어.”

 

침대 하나 바꾸고 집 구조를 좀 바꿔달라는 요청 한 번 했다고 처리하고 넘겼던 수많은 서류들을 떠올리며 카게야마는 진저리를 쳤다. 혹시 히나타가 침대를 하나 더 놔달라고 하면 그걸 핑계로 입막음을 할 생각이었다.

 

, 그래! 엄청 크고 좋네!”

 

다행히 히나타는 부끄러워하기만 할 뿐 딴청을 피웠다. 카게야마는 흐뭇하게 짐을 옮기다가 문득 행동을 멈췄다. 슬금슬금 카게야마의 눈치를 보던 히나타도 어느새 시선을 고정했다. 낡고 오래된 턴테이블이었다. 카게야마는 망설이다가 현관 신발장 쪽으로 갔다. 아까 히나타가 가이드 관리부장과 면담을 하는 사이 츠키시마에게 건네받고 얼른 집으로 보낸 거였다. 카게야마가 집어 들고 오는 것을 확인한 히나타의 눈이 커졌다. 히나타는 아직 들여놓지 못한 책꽂이를 뒤져 그것과 똑같은 것을 찾아냈다. 히나타가 든 빛바랜 표지의 LP. 카게야마가 든 똑같은 표지의 LP. 카게야마는 머뭇머뭇 말했다.

 

……선물.”

, 이거 어디서 났어? 오래돼서 구하기 어려운 걸로 알고 있는데

아까 만난 재수 없는 녀석이 구해다줬어. 음악에 대해서는 나보단 잘 아니까 부탁했지.”

츠키시마?”

.”

 

히나타가 LP판을 내려다보았다. 카게야마는 계속 말했다.

 

그건 네 어머니가 남긴 거잖아. 음질이 나빠져서 얼마 못 듣는다며.”

그랬지……

아까우니까, 그건 계속 보관하고내가 준 걸로 생각날 때마다 듣고 싶을 때마다 맘대로 들어. 네 어머니가 남긴 것과 내가 준 거, 비교도 어렵고 완벽하게 대체하기도 어렵겠지만 그래도 음악은 같으니까……

어떡하지.”

 

히나타가 카게야마의 말을 잘랐다.

 

나 이거 듣고 싶은데아까워서 못 듣겠어. 카게야마 네가 준 거 너무 좋아서 듣기 아까운데좀 참아볼까?”

 

히나타의 말에 카게야마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뭉클하는 것이 솟아났다. 얼마 남지 않아 참고참고 또 견뎌가며 LP판을 아껴들었던 히나타. 그리고 카게야마가 준 LP판을 듣고 싶어도 참아보겠다는 히나타.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손에서 그가 선물한 LP판을 빼앗아 턴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렇게 하는 거였던가. 턴테이블이 돌아가고 바늘이 굴러가면 히나타의 집에서 듣던 것보다 훨씬 선명한 여가수의 목소리가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히나타의 눈이 깜빡이며 돌아가는 턴테이블을 보았다.

 

앞으로는혼자 참지도 말고 쓸데없이 견디면서 힘 빼지 마. 몇 번이고 똑같은 걸로 구해볼 테니까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웃는 모습이 보여 말을 멈췄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거실 한 구석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소파가 보였다. .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거실 정면에 나있는 커다란 창가 구석을 가리고 있던 소파를 발로 밀어 치웠다. . 히나타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카게야마는 그가 가장 많은 서류를 할애해야 했던 결과물 앞에 히나타를 억지로 앉혔다.

 

뭔지 알겠어?”

감자싹.”

 

히나타의 정원 구석에서 가려져 자라고 있던 감자싹들. 반정부군에 의해 무너진 잔해에 깔려버렸지만, 히나타의 짐을 정리하고 온 정부 사람들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성한 애들은 최대한 살려달라고 했어.”

 

히나타의 손가락이 감자싹을 어루만졌다. 온갖 서류를 제출해 거실 구석을 새로 파내고 만든 인공밭은 온도조절 걱정도 없었고 햇빛도 잘 들었다.

 

키울 거지?”

. 지켜야지.”

 

히나타가 카게야마를 돌아보았다.

 

고마워.”

 

좋은데 안 좋은 척 하는 건 역시 어려웠다.

 

고마우면계속 나랑 있어. 여기든 저기든 다른 어디든.”

그래.”

 

카게야마가 픽 웃었다. 둘 사이에 음악이 흘렀다. 전보다 훨씬 가깝고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 카게야마의 양손이 히나타의 어깨에 닿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카게야마의 그림자가 히나타의 얼굴을 덮었다. 뿌리를 뽑는 것도, 그림자를 지우는 것도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히나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영원히 밀어내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자책감이 만들어낸 그림자만은 아닐 것이다. 히나타의 옆에 그가 단단하게 뿌리박혀 서 있는 한.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이젠 햇빛을 제대로 받고 자라날 감자싹이 살포시 흔들렸다.

 

 

 

 

You can say that you're leading me on

But it's just what I want you to do

Don't you notice how hopless I'm lost

That's why I'm following you

Ella Fitzgerald - Misty

 

 

 

원래 4편 정도로 잡고 썼는데 한편이 오버되었군요... 두사람이 우연히 만나고 끌리고 카게히나가 결국 센티넬 가이드로 짝이 되는 과정을 쓸데없이 길게 쓴 것 같아 민망하지만 쓰고 싶은걸 써서 여한은 없습니다. 데헷.

챙겨봐주신 분들이 계셔서 기뻤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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