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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히나] Turntable 3

별골짜기 2016. 3. 24. 22:02

카게히나

Turntable 3

센티넬버스

 

 

 

 

불러놓고 왜 아무 말도 안 해?”

 

한참 뒤 히나타가 툭 던졌다. 그렇지만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히나타는 여전히 카게야마에게 안겨 있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떼어내야 하는지 이대로 있어도 되는지 헷갈렸다. 하지만 맞닿은 온기가 좋아서 모르는 척 그대로 있었다. 솔직히 말할까도 했지만, 히나타의 머리카락이 카게야마의 삐져나오는 숨에 슬렁슬렁 흔들리는 모습에 정신을 빼앗겨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가깝다. 따뜻하다. 좋다. 일차원적인 생각을 하며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등에 올린 손을 쥐었다. . . . 잡히지 않는 주제에 소리가 너무 컸다.

 

심장소리 크다.”

 

아니나 다를까 히나타가 중얼거렸다. 카게야마는 동감했다. 심장소리에 묻혀 턴테이블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조그맣게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거잖아.”

그런가?”

그러는 너도 심장 뛰는 거 좀 크게 느껴지는데.”

 

카게야마가 등을 짚지 않은 손으로 히나타의 목울대를 짚었다. . . 카게야마와 비슷하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히나타는 목을 움츠렸다. 더 닿고 싶었지만 카게야마는 순순히 손을 거뒀다.

 

근데 갑자기 왜 끌어당겼어?”

그냥.”

 

카게야마의 말에 히나타가 슬쩍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그냥이라니 무책임하지 않아? 역시 파렴치한이 맞지 않나요, 뻔뻔야마군?”

뭐야?”

이유도 없이, 허락도 없이 이러는 거 보면 타고난 건가? 혹시 가이드들한테도 이래?”

? 안 이러는데?”

그래?”

 

히나타가 히죽 웃으며 다시 똑바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굳이 아픈 곳을 찌르는 모습이 얄미웠지만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품에서 떨어져나간 것이 더 아쉬웠다.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된 사이 빈 품을 대신해 공기가 밀려들었다.

 

히나타가 다시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치지직. 카게야마의 귀에서 익숙한 소음이 들렸다. 그는 그제야 귀에 착용하고 있던 무전 장비를 떠올려냈다. 히나타를 힐끗 쳐다본 카게야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히나타의 시선이 그를 따라 위를 향했다. 잠시 얼굴을 마주하며 카게야마가 응답했다.

 

.”

왜긴 왜야. 제왕에게 보고 드리려 연락드렸습니다만?’

 

비꼬는 어조에 살짝 인상을 찡그린 카게야마가 근처를 둘러보았다. 진상 조사팀을 포함해 낯선 이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츠키시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본부에서 너 찾아.’

지금?”

너 연락 안 되고 집에도 없다고 뒤집어진 것 같던데.’

그러냐.”

진상조사 결과도 나올 때 된 모양이야.’

알겠어.”

근데 지금 들리는 재즈소리는 뭐냐. 제왕한테 음악 듣는 취미도 있었어?’

들려?”

음질 엄청 나쁜 것까지. 아무튼 빨리 복귀해.’

 

카게야마가 대답하자마자 츠키시마는 뚝 연결을 끊어버렸다. 늘 느끼지만 역시 성깔이 이만저만 아닌 건 똑같은 주제에 제왕 제왕 불러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카게야마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뒤 다시 히나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며 히나타에게 말했다.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가봐.”

 

흔쾌히 날아오는 말은 응당 맞는 말이기도 했지만 카게야마는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그냥 가버리면 안 될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었다. 히나타의 눈빛이 시무룩하게 죽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한 곡이 모두 끝나기 전에, 히나타에게 말했다.

 

또 올게.”

 

히나타의 조금 커진 눈이 카게야마를 향했다. 카게야마는 그 시선을 겨우 외면하며 중얼거리듯 당부했다.

 

진상 조사 끝나간다고 하긴 하는데혹시 모르니까 계속 나오지 말고 있어.”

, 간다!!”

 

타닥. 카게야마가 빠르게 뒤를 돌았다. 히나타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과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줄다리기를 했지만, 결국 그는 앞만 보고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품안을 따뜻하게 덥히던 히나타의 체온이 얼굴 전체로 옮겨 붙은 것처럼 홧홧하게 불타는 것 같았다.

 

 

 

 

도착한 본부에서 카게야마는 곧바로 호출을 받았다. 연락이 되지 않아 뒤집어졌다는 츠키시마의 말은 과장은 있었을지언정 사실은 사실이었던 것인지 곧바로 행적부터 보고해야 했다. 그는 본부 구석에 처박혀 자고 있었다고 둘러댔다. 본부에 있던 것도 아니고 눈을 붙인 것도 아니지만 기분이 몽롱해지는 재즈를 듣고 왔으므로 다를 건 없다고 합리화했다. 상부 측에서는 카게야마의 보고가 탐탁치는 않은 듯했지만 믿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진상 조사 결과도 곧 전달되었다. 카게야마를 불러들인 자리에서 관계자들이 결과를 보고받은 덕분에 그도 어느 정도 주워들을 수 있었다. K-10구역에서 카게야마가 해치운 반정부군의 수와, 그들의 대다수는 신원이 정부에 등록되지 않았다는 것, 센티넬이나 가이드 없이 그들 모두가 평범한 일반인이었으며, 주황색 머리카락의 여자 가이드는 확실히 없었다는 것, 카게야마가 부순 것보다 사라진 군수물자의 수가 여전히 더 많다는 것까지. 한 마디로 카게야마는 가이드를 죽이지 않았다는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가이드가 어디에 있는지가 문제였다. 카게야마가 이름도 물어보지 않은 가이드는 아직까지 본부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가이드 관리부서 관계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이드가 단독으로 임무지를 이탈해 이렇게 오래토록 연락이 없던 경우가 없었다. 특히 임무 같은 경우는 목적이나 여건상 감시를 붙이거나 제대로 된 관리를 붙이기 어려워 정부의 관여가 취약해지는 지점이었다. 애초에 센티넬 한 명이 나가는 임무에 다른 일반인을 붙인다는 건 인력낭비이고 오히려 방해였다. 더욱이 훈련받은 S급 가이드가 겁을 집어먹고 도망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카게야마 때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애매한 상황. 카게야마는 그래도 이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당분간은 상부에서 멋대로 가이드를 붙여 임무에 내보내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훈련 받은 S급 가이드가 임무 중 도망쳤다. 본부를 떠들썩하게 달구고 있는 소문에 카게야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동안 떨친 악명과 더불어 그의 이름은 더더욱 바닥을 쳤을 게 뻔했다. 상부에서 억지로 임무를 보낸다고 해도 함께 가지 않겠다며 거절할 가능성도 컸다.

 

카게야마는 집에 돌아왔다. 상부에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센티넬들이 모여 살고 있는 주택 단지. 정부에서 인정받고 있는 만큼 그가 지급받은 집도 넓고 깨끗했지만 딱히 기뻐한 적은 없었다. 어차피 임무 때문에 나가 있는 날이 태반이었고 가이드도 없이 혼자 사는 그에게는 쓸데없이 큰 집이었다. 무엇보다 센티넬의 안전을 우려해 설치해놓은 방범용 카메라들이 너무 많았다. ‘센티넬안전이라는 건 참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으니 사실 감시나 다름없었다.

 

하루 동안 일이 너무 많았다. 그 수많은 일들 가운데서 가장 독보적인 건 히나타와 관련된 일들이었다. 만난 지 정말 얼마 안 됐는데 히나타는 익숙하게 카게야마의 생각 사이사이에 스며들었다. 밥을 먹으면 히나타가 데워준 죽이 생각났고, 소파에 누우면 낡은 모포 위에 함께 누웠던 것이 생각났고, 세탁기를 보면 히나타의 옷에서 나던 섬유유연제 냄새가 생각났다. 이게 참 낯설고 이상했다. 늘 무심하다는 말을 달고 살아온 그가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신경을 쓴다는 건 별난 일이었다.

 

진상 조사팀이 돌아왔으니 지금은 안전한 거겠지. 보고할 때 히니타와 관련된 별 말은 없었으니까. 음악은 어디까지 들었으려나. 가져다 준 식량은 잘 먹었나. 좀 더 가져갈걸 그랬나.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다락방에 누워서 잠들 준비를 하고 있으려나. 좁고 불편하긴 해도 이 소파보다 더 괜찮은 느낌이었는데. 난로 때문인지 몰라도 닿은 체온도 따뜻해서 좋았고.

 

. 카게야마는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다. 심장이 쿵쿵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재빨리 냉장고 문을 열어 찬물을 꺼내 마셨지만 열기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결국 난데없는 밤산책을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에 그나마 살 것 같았다. 환하게 불이 켜진 거리를 천천히 걷던 카게야마는 문득 눈에 익숙한 것을 발견하고 우뚝 멈췄다. 늘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지나치던 것 중 하나였다. 카게야마는 누군가의 집 담벼락 쪽에 쭈그려 앉았다. 이 집이 새로 태양열 전지를 간 것인지 덩그러니 내놓은 옛날 모델이 보였다. 히나타의 집에 있던 태양열 전지는 이것보다 더 오래된 모델이었는데.

 

! 깜짝이야!”

 

카게야마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쭈그려 앉아있던 터라 고개를 꽤 들어야 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카게야마가 자리에서 일어서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쿠로오씨.”

카게야마잖아? 거기서 뭐하고 있던 거야? 깜짝 놀랐다구.”

 

쿠로오도 카게야마처럼 손가락에 꼽는 센티넬 중 하나였다. 곧바로 눈치 채지는 못했지만 집이 으리으리하게 큰 것을 보니 쿠로오가 집주인이라면 수긍할 만 했다. 카게야마는 굳이 숨길 필요 없다고 생각해 손가락으로 태양열 전지를 가리키며 관찰 중이었다고 하자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던 쿠로오가 박장대소를 했다.

 

으하하, 의외네? 그런 거 좋아해? 공돌이 스타일로 보이진 않는데

지나가다가 보여서요.”

카게야마는 지나가다가 보이는 사소한 것도 신경 쓰는 타입?”

 

이야, 쿠로오가 한 번 더 탄성을 내뱉었다. 카게야마는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그건 아니고

아니고?”

아는 사람 태양열 전지를 손봐 준 적 있는데가는 길에 보이길래 생각나서 잠깐 보고 있었습니다.”

네가 직접 손 봐줬다고?? 특이하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타는 특이했다. 첫 만남부터. 그리고 순간순간마다, 지금까지도. 쿠로오는 호기심어린 표정을 짓다가 씨익 웃었다. 재밌는 건수를 발견했다는 듯 그가 팔짱을 끼고 전문가처럼 말했다.

 

태양열 전지가 신경 쓰이는 건가, 아니면 그 주인이 신경 쓰이는 건가? 어느 쪽?”

 

쿠로오의 질문에 카게야마는 눈을 슬쩍 크게 떴다. 생각하지 못한 맹점을 찔린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답을 해내기 위해 생각의 경로를 더듬었다. 밖에 나와서, 밤공기를 쐬며, 이곳을 지나가다가 버려진 듯한 태양열 전지를 발견했다. 센티넬을 공짜로 부려먹은 주제에 이것저것 요구하는 건 많았던 히나타. 히나타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웃기는 소리 말라고 아예 도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점차 심각해지는 것을 본 쿠로오는 이렇게까지 번개 같은 반응은 생각하지 못했는지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팔짱을 풀고 손을 내저으며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주인 쪽이 신경 쓰이는 것 같은데요.”

, ?”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짓는 쿠로오에게 카게야마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많아요. 왜 굳이 그래야 할지 모르겠는 점들이 많은데, 반면에 대단하다 싶은 점도 있고.”

어어?”

외로워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게 보기 싫기도 하고.”

그래?”

어려운 상대이다 보니 제 행동도 제어가 안 됩니다. 생각보다 한발 앞서서 멋대로 튀어나가기도 하고, 제가 하는 행동 자체도 이유를 알 수 없기도 하고……

혹시, 지금 보고 싶다거나?”

 

조심스럽게 묻는 쿠로오의 말에 카게야마가 흠칫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카게야마에게서는 대답이 없었지만 쿠로오는 알만 하다는 듯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 게 아닐까 싶은데. 그 사람은 그걸 알아? , 표정만 봐도 아닌 건 알겠네. ……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쿠로오가 카게야마를 한번 슬쩍 본 뒤 말했다.

 

그 사람한테 솔직하게 말해보는 건 어때? 아마 네 가이아니확실한 게 아니지그러니까, 아마 네가 좀 더 붙잡아두고 가까워지고 싶다면 표현하는 게 중요할 거야. 설득이라고 해야 하나……

 

……표현? 설득? 전자는 알겠는데 후자는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설득을 말하는 거지. 가까워지는 데에도 설득이 필요한가? 애초에 누군가와 가까워져본 경험이 거의 없는 카게야마로서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담근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아마 그 사람도 함께해줄 거야. 물론 쉽지는 않겠지…… 센티넬이라는 건 확실히 위험한 존재니까. 각오가 많이 필요하겠지만 절실하게 표현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함께? 각오? 절실? 고작 가까워지는 것에 너무 비장한 단어가 섞여 의아하긴 했지만 끼워 맞추면 이해할 수 있었다. 센티넬. 특히 카게야마 같이 가이드를 정하지 않아 불안정한 힘을 가진 센티넬과 평범한 일반인이 가까워지는 건 아무래도 부담이 될 것 같았다. 폭주의 기미가 왔을 때 운이 나쁘면 거기에 휩쓸릴 수 있으니까……

 

……. 휩쓸릴 수 있다. 카게야마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시무룩해진 것도 같았다. 곧 그는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제가 친절한 건 하루이틀이 아니랍니다.”

 

쿠로오가 인자하게 말했지만 이미 생각에 잠긴 카게야마에게서는 아무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한 쿠로오에게 가보겠다고 인사한 카게야마가 그를 지나쳐 사라졌다. 왠지 결연해진 분위기의 카게야마를 한참 바라보던 쿠로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가이드가 도망쳤다고 들었는데…… 맞는 가이드를 새로 찾기라도 한 건가?”

 

 

 

 

카게야마는 근신을 명령받은 것이 무색하게도 곧 새 임무에 투입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 임무라기보다는 아직 미완의 임무였지만. 카게야마는 다시 K-10구역으로 가게 되었다. 진상 조사 결과 반정부군이 가지고 있던 군수물자를 전부 없앤 게 아니었으므로 남은 것들을 마저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카게야마는 그가 맡았던 임무이니 당연히 그가 마무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으나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조금은 곤란했다.

 

카게야마, 정말 괜찮겠어?”

 

카게야마에게 안정제를 챙겨주며 스가와라가 물었다. 카게야마는 허리춤에 주사기를 두 개 매달았다. 늘 있는 임무였고, 안정제를 타간 것은 지난번 임무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스가와라가 유독 걱정스러운 낯을 하는 것은 카게야마가 가이드 없이 임무의 마무리를 위해 떠나기 때문이었다. 카게야마에게서 도망친 가이드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가이드들은 그와의 임무를 더욱 꺼리게 되었다. 상부 측에서도 줄곧 그래온 것처럼 억지로 가이드를 붙이게 될 경우 비슷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 혼자만을 투입시키기로 했다.

 

카게야마는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의료계에 종사하는 스가와라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 어깨 너머의 다이치를 쳐다보았다. 다이치도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무전 장비 빼지 말고.”

.”

가이드 없이 임무라니괜찮으려나.”

반정부군은 일전에 쓸어버렸으니 괜찮을 거야.”

 

다이치가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센티넬로서, 그리고 그의 훈련을 지도한 선배로서 카게야마의 능력을 잘 알고 있기에 걱정이 더욱 컸다. 하지만 그는 곧 본연의 든든한 선배의 모습으로 돌아와 카게야마의 등을 두드렸다.

 

무기들 부수면서 쓸데없이 흥분하지 않으면 돼. 그럴 일도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카게야마 긴장 좀 하라고. 왜 실실 웃고 있어?”

 

스가와라의 말에 카게야마는 눈을 잠시 부릅떴다. 웃고 있었다고? 내가? 그는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졌다. 의외라는 표정의 두 사람을 보자 확실히 웃긴 한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는 머쓱한 기분에 얼른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손을 흔들어 배웅해준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스가와라의 사무실을 나선 카게야마는 손을 다시 들어 턱을 만졌다. 다른 사람들은 걱정해주는 상황인데 이상하게도 웃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 이유를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무기고로 향했다.

 

이번에는 무엇을 들고 갈까. 카게야마는 커다란 가방을 들었다. K-10구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반정부군을 몰살시키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서 넘어올 가능성도 있었다. 만에 하나 그들을 만나게 되어 최대한 덜 흥분하기 위해서는 단검보다는 역시 총 종류가 나았다. 근접전을 펼칠 경우 활동량이 더 많아지고 직접 피를 보는 경우가 많으니 최대한 원거리에서 해결을 보는 게 이로웠다. 무슨 총을 가져갈지 고민하는 카게야마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다른 몇 가지를 챙기고 있었다.

 

총을 고르고 탄창을 챙겨든 뒤 가방에 던져 넣으려던 카게야마는 문득 들고 있는 무게가 묵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의아하게 고개를 내리자 보이는 것은 붕대를 비롯한 응급의약품, 비상식량, 식수, 모포, 소음기, 옷가지들이었다.

 

…….”

 

그리고 낯설고 익숙하지 않게 당겨진 얼굴 근육. 카게야마는 설마 하며 스윽 고개를 돌렸다. 찬장의 유리에 비친 것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걸 동시에 깨달아서인지 웃는 것도 아니고 인상 쓰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얼굴이 되어버렸지만…… 카게야마는 거기서 깨달았다.

 

기분이 좋구나.

 

귀찮아서 생전 챙겨본 적 없는 것들이 가방에 꽉꽉 담겨 덜렁거리는데도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늘 감흥 없이 맡는 임무를 나가는 발걸음이 유독 가벼웠다. 잘 맞지도 않고 서로 불편하기만 한 가이드 없이 혼자 나가는 임무라서 그런 건가? K-10구역에 도착하자마자 저절로 향한 방향에, 반쯤 무너져 힘겹게 서 있는 집이 나타난 순간, 카게야마는 그 이유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푼 바람을 타고 곧장 뛰어올라 도착한 작은 다락방 창가에서, 그 창문 너머 보이는 쿨쿨 잠든 얼굴이,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번쩍 커지는 주황색 눈동자가 그 모든 이유라는 사실을, 카게야마는 깨달아버린 것이다.

 

스륵 열린 창문 틈으로 카게야마는 몸을 밀어 넣었다. 크로스로 맨 가방이 잠시 창문에 걸려 버둥거렸지만 조금 힘을 주니 싱겁게 딸려 들어왔다. 히나타는 아직 꿈을 꾸는 것으로 착각하는지 졸린 눈을 부볐다. 이른 아침부터 나온 임무이므로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다. 드륵 도로 닫아 넣은 창문 아래에서 카게야마는 히나타에게 다가왔다. 히나타가 누워 있다가 지금은 걸터앉아 있는 낡은 모포에 같이 주저앉은 그가 물었다.

 

이제 일어났냐?”

…… 그런데 너……

 

여긴 왜 왔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나 히나타나 둘 다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말했다.

 

임무 마무리하러 왔어.”

.”

 

히나타의 놀랐던 얼굴이 수그러들었다. 급속도로 지는 낙엽을 보는 기분에, 카게야마는 무심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약속했잖아. 또 오겠다고.”

 

히나타가 입을 벙긋였다. 말하기를 기다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곧 히나타가 씩 웃으며 말했다.

 

무슨 임무길래 여기까지 들르는 여유가 있어?”

남은 군수물자 정리.”

, 그럼 바쁜 거 아냐?”

별로.”

안 바빠?”

안 바빠. 만약 바쁘다고 해도 여기 들를 시간은 있어.”

 

카게야마가 메고 있던 가방을 풀었다. 그러나 히나타에게서 아무 말도 없어 의아하게 쳐다보니 그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가방을 열어 그가 쓸 몫의 총과 탄창만을 챙긴 뒤 남은 것을 히나타에게 억지로 안겨주었다. 얼떨결에 무거운 가방을 다리 위에 올려놓게 된 히나타가 비명을 질렀다. 갸악, 이게 다 뭐야! 곧 가방의 정체를 알아차린 히나타가 또 비명을 질렀다. 그악, 이 많은 걸 또 가져왔어!

 

? 많으면 좋은 거 아니냐?”

고맙긴 하지만……!”

 

히나타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는 주섬주섬 말을 이었다.

 

물론 네가나를 생각해서 가져가주는 건 고맙지만이렇게 좋은 것들에 익숙해지면좀 곤란하달까……

? ?”

그야…… 네가 언제 올지 모르는 거고, 아예 안 오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

 

히나타는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카게야마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툭 던져 말했다.

 

계속 올 건데?”

?!”

계속 오려고 했는데. 안 되냐?”

안 되는 건 아니지만아니, 그보다, 뭐 그렇게 쉽게 말해? 생각 좀 해보고 말해!!”

 

히나타가 버럭 소리치자 카게야마가 곧장 대답했다.

 

이게 왜 생각이 필요한 대답인데!?”

그건앞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고! 괜히 그 말 듣고 내가

 

히나타는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그리곤 다시 성질을 부리듯 소리쳤다.

 

멋대로 결정하지 마, 여긴 맘대로 드나드는 놀이공원이 아니라 엄연히 내 집이거든!!”

그래서, 오지 말라고?”

그건……

 

히나타가 오지 말라고 하면 좀 서운할 것 같았다. 사실 이 아니라 많이’.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돌아보았다. 히나타는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고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카게야마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대답에 시간이 필요할 정도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문득, 히나타가 자신과는 달리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조언을 떠올렸다.

 

[‘그 사람한테 솔직하게 말해보는 건 어때? 아마 네 가이아니확실한 게 아니지그러니까, 아마 네가 좀 더 붙잡아두고 가까워지고 싶다면 표현하는 게 중요할 거야. 설득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카게야마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도전해보기로 했다.

 

. 너랑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지금까지 알아온 사람들이랑 다르게 신경 쓰여. 이렇게까지 누구 신경 써본 적 없는데 여기 오기까지 계속 네 생각만 했어. 넌 뭐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아 맞아, 걱정이었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히나타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카게야마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사실 곧바로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보고 싶은 거였어.”

너 그게, ,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거라던데.”

“‘거라던데는 또 뭐야.”

 

히나타가 인상을 잠시 찌푸렸다. 그리곤 우물쭈물 중얼거렸다.

 

내 말은…… 그러니까넌 센티넬이잖아. 센티넬은 본능적으로…… 어음그게넌 일단은 센티넬이니까 어쩌면…… 본능적으로…… 나를…….”

 

어물거리며 영 말을 잇지 못하는 히나타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말을 떠올려냈다. ‘센티넬이라는 건 확실히 위험한 존재니까.’ 그래서 더 절실하게 표현해야 된다는 조언도 있었다. 확실히 히나타는 평범한 일반인이니까, 카게야마가 가까워지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히나타를 위해서면 이러지 않는 게 더 나을 수 있었다. 괜히 엮여서 폭주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러기 싫다는 점에 있었다. 처음부터 모르는 사이였다면 몰라도 히나타와 모르는 사이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지난번 쿠로오의 말을 듣고 잠시 침울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더 솔직하게, 절실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센티넬이 위험한 건 나도 알아. 너도 내가 임무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봤으니까 알겠지만특히 나는 가이드를 정하지 못해서 더 불안정하고네가 꺼리는 것도 이해한다.”

? 지금 무슨 얘기

사실 폭주 안 하겠다는 약속은 못 지킬 것 같지만, 네 옆에 있을 때는 가급적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볼게. 이걸론 안 되겠냐?”

 

카게야마가 말을 마쳤지만 히나타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그래서? 결론이 뭐야?”

너랑, 가까워지고 싶다!”

, 가까워진다는 게 뭐 어떤 식으로 가까워진다는 건데?!”

 

호기롭게 외치긴 했지만, 이어지는 히나타의 공격에 카게야마는 맥을 못 추렸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머뭇거리는 카게야마에게 히나타가 갑자기 손을 잡아왔다.

 

이런 거?”

 

카게야마는 뛸 듯이 놀란 것과는 별개로, 불길이라도 닿은 듯 손이 화악 뜨거워져 눈을 크게 떴다.

 

아니면, 지난번에 네가 막무가내로 한 그, 그거 같은 거?”

 

히나타와 아주 맨 처음 만났을 때, 그때……. 카게야마가 물었다.

 

해도 돼?”

, 맘대로 하게 둘 것 같냐?!”

 

히나타가 크게 발끈했다. 카게야마는 입을 비죽였다. 히나타가 잠시 카게야마를 돌아본 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네가 허락 없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생각해볼게.”

? 반드시?”

그래!”

?”

왜긴 왜야! 넌 센티넬이고, 나는본능같은 거라면 싫어.”

 

본능? 갑자기 튀어나온 단어에 앞뒤 맥락을 살피는 카게야마에게, 히나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어쨌든! 카게야마 너 임무 안 가냐!”

천천히 해도 돼.”

 

가이드가 없이 홀로 나온 임무라 기한은 충분히 늘릴 수 있는 재량이 있었다. 상부에서 뭐라고 하면 폭주할까봐 쉬엄쉬엄 처리했다고 하면 될 거라고 다이치가 귀띔했었다. 이왕 합법적으로 K-10구역에 온 거, 다이치의 말을 잘 이용해볼 생각이었다.

 

순 뺀질이 아냐. 뺀질야마!”

뭐야?”

난 아침이나 먹어야겠다.”

나도 줘.”

싫은데?”

그럼 내가 가져온 거 하나 먹을래.”

싫은데?”

…….”

나 주는 거 아니었어? 주인은 나다.”

 

웃으며 룰루랄라 가방 안을 들쑤시는 히나타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카게야마는, 그가 내려가는 뒤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어스름풋했던 하늘은 이제 완전히 해가 떠올라 반짝반짝 빛나며 뿌연 창문 너머로 햇볕을 비췄다.

 

진짜 여기서 아침 먹게?”

.”

네 가이드는 어쩌고?”

 

히나타가 몸을 휘휘 돌리며 창문 밖을 살폈다. 혹시나 가이드가 밖에서 방황하는 게 아닐지 찾아보기 위해서였지만 이어지는 카게야마의 대답에 행동을 멈췄다.

 

가이드 없는데.”

?”

나 혼자 나왔어.”

그게 가능해?”

 

일반적으로 임무라는 건 센티넬과 가이드로 묶인 21조가 원칙이었다. 특히 반정부군과 관련된 위험한 임무에서는 폭주의 위험이 높아 철저하게 지켜지는 원칙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상황이 좀 그래.”

그래도 그렇지, 가이드도 없다는 센티넬이 혼자 돌아다녀?”

붙어 있어도 딱히 큰 차이는 없어.”

 

히나타는 카게야마가 가져온 비상식량 두개를 스토브 위에서 데우다가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맞는 가이드가 없거든.”

폭주 직전에는 아무리 안 맞는 가이드라도 잡아서 누를 수 있지 않아?”

나는 그게 안 돼. 오히려 죽이려고 들면 몰라도.”

단 한 번도?”

가이드 쪽에서 몇 번 시도는 했어도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던데. 맨날 정신 차려보면 병동에 실려와 있곤 했으니까.”

 

히나타가 카게야마 앞에 비상식량 하나를 내려놓았다. 카게야마는 포장지에 딸려있는 일회용 숟가락을 떼어내며 말을 이었다.

 

너도 보지 않았어? 가이드가 도망갈 정도야.”

그래서 안정제를 그렇게나……

내 손으로 투여하는 건 거의 실패하지만.”

 

생각 없이 중얼거리던 카게야마는 순간 아차 싶었다. 센티넬의 본능을 꺼려하는 눈치의 히나타에게 점수를 깎일만한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너랑 있을 때는 더 노력할 거라고 말하려 히나타를 쳐다보는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히나타가 오묘한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게야마가 읽어내기에는 매우 복잡한 것들이 여럿 섞인 표정이라 쉬이 알아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히나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써먹은 가이드가 한 명도 없었다고.”

. 내가 말했잖아. 본부 가이드들 나 싫어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한 숟가락 우물거리는데 히나타가 말했다.

 

그러면, 이따가 나가는 임무 별로 안 위험한 거지? 폭주할 위험도 적고.”

아마?”

그럼 나도 같이 가자.”

? 괜찮겠어?”

 

나야 좋지만. 카게야마의 물음에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그래도 히나타는 어쩐지 아까보다 한결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았다.

 

 

 

 

혹시 몰라서 말하는 거지만, 내가 폭주할 기미를 보일 때가 있어. 내 기준으로 말하면 너는 못 알아들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 기준으로 말하자면……

눈 빨갛게 충혈되고 흐리멍텅하고 이름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도 제대로 안할 때라며. 너 그거 벌써 다섯 번째다!”

 

히나타는 잔소리가 퍽 귀찮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게야마는 기억을 되살려 그가 몇 번째 당부를 하고 있는지를 손가락을 접어가며 셌다.

 

네 번이다, 멍청아!”

네 번이나 다섯 번이나 지겨운 건 똑같아!!”

지겹게 듣지 마! 네 목숨이 달린 일이야!”

알았다고! 폭주 직전일 것 같으면 여기 이 안정제로 널 찌르면 되는 거 아니야!”

나한테 안 휩쓸리게 숨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그건 기본이고!”

 

아웅다웅 다투며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K-10구역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는 히나타의 도움이 컸다. 여기서 어찌나 오래 지냈던 것인지 눈에 띄는 이상한 점이 있으면 곧바로 카게야마에게 알려주었고, 카게야마는 이상하다는 지점으로 다가가 군수물자가 있는지를 확인한 뒤 다시 돌아왔다.

 

히나타가 지내는 곳과 비슷하게 거의 무너져가는 어느 한 가정집의 현관이 부서져 있다는 사실을 듣고 들어가자 박스에 담겨진 수많은 총기들이 있어 아드득 아드득 밟아 아작을 냈다. 분명 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쓰러져 있다고 해 살피자 땅을 판 흔적이 있어 파헤쳤다. 그 안에는 온갖 탄들이 묻혀 있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강제로 한꺼번에 폭파시켰다. 그밖에도 탱크 두 대, 포탄 몇 개, 총기 및 수류탄더미가 발견되었다. 반정부군이 어찌나 많이 빼돌려놓았는지 수가 어마어마했다. 카게야마는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빼돌린 것으로 추정되는 온갖 무기들의 개수와, 진상 조사팀에서 보고한 카게야마의 당시 처리 개수, 그리고 오늘 파괴한 개수까지.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곁눈질했다. 꽤 오래 돌아다닌 것 같은데 체력이 아직 남아도는 듯 쌩쌩해보였다. 해가 슬슬 지기 시작하는데도 얼굴은 지친 기색 없이 반짝반짝 빛났다. 어쩌면 히나타는 가만히 집구석에 숨죽여서 지내는 것보다는 바깥을 돌아다니며 활동적으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하지는 않을까. 카게야마가 생각할 때였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뻗은 손이 곧바로 히나타를 끌어당겼다. 잘 걸어가다가 엉겁결에 카게야마의 가슴에 머리를 박은 히나타가 고개를 들었다. 카게야마의 신중해진 얼굴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카게야마는 날 선 눈빛으로 주변을 응시했다.

 

분명 그와 히나타가 아닌 다른 이의 기척이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조금 더 집중했다. ? 숨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이들의 위치를 파악한 순간, 카게야마가 몸을 움직였다. 한순간 폭발적으로 낸 속도에 맞추지 못한 적이 카게야마의 손아귀에 잡히는 것과 동시에 뼈가 부러졌다. 1초 남짓한 그 짧은 시간 안에 겨우겨우 상황을 파악하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다른 한 명에게는 망설임 없이 총을 쏘았다. ! 총성이 울리고 적의 몸뚱이가 맥없이 풀썩 쓰러졌다.

 

카게야마는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다른 적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참이 지나 근처에 남아있는 건 히나타 뿐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나서야 그는 몸을 돌려 천천히 히나타 쪽으로 걸어갔다. 히나타는 가만히 카게야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폭주의 기미가 보이는지 살피는 듯한 집요한 눈빛이었다.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아 카게야마는 또 한 번 놀라며 손을 들었다.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히나타가 그 손을 덥썩 잡아올 줄은 몰랐기에 카게야마의 심장이 순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크게 솟아났다.

 

“?! 지금, ,

뭐가?”

 

히나타가 카게야마의 손을 한 번 감쌌다. 뜨겁게 감기는 온도가 당황스러웠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히나타의 손이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빼기는 또 싫었다.

 

잡으면 안 된다며!”

내가 언제??”

허락받으라며!”

…… , 이건 내가 잡는 거라 상관없어!”

! 그런 건가!”

 

확실히 카게야마가 허락을 받아야 된다고 했지, 히나타가 허락을 구하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어차피 히나타가 먼저 물어봤다고 하더라도 카게야마가 냉큼 오케이 사인을 던졌겠지만 말이다. 카게야마는 뭐 어떻겠냐는 생각을 했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이 맞잡은 손 틈에서 피어나는 열기가 좋다는 생각이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 아팟!”

미안.”

 

카게야마는 더 꽉 잡고 싶은 것을 겨우겨우 눌러 참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히나타의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히나타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더 멀리 나갈 걸 그랬다고 조금 후회하며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보았다. 사실 오늘 하루 안에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는 임무였지만 역시 히나타와 있는 게 좋았기 때문인지 카게야마는 결국 임무를 내일까지 이어서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 맞다.”

 

히나타가 걸음을 멈췄다. 보여줄 게 있어. 히나타가 카게야마를 끌어당겼다. 집 안이 아니라 그 밖이었다. 정원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마당이라고 해야 느낌이 비슷한 흙바닥 구석. 카게야마는 익숙한 기시감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 자리를 알고 있었다. 폭주 직전의 상황에서 쫓던 가이드…… 아니, 히나타. 히나타가 도망쳐버린 집. 그리고 정원 구석. 바로 이 지점이었던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

 

여기 뭐가 있는 줄 알아?”

 

히나타가 무너진 담의 잔해와, 지붕에서 떨어져 건물 벽에 비스듬히 세워진 콘크리트를 보았다. 이들은 언뜻 보면 폐허의 흔적 같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찌그러진 인디언 텐트처럼 무언가를 가리고 있었다. 그 사이 아무렇게나 포개진 잔해들을 하나하나 덜어내며 히나타가 종알거렸다.

 

이거 만드느라 진짜 고생 많이 했어. 누구든 보고 그냥 평범한 잔해로 취급하고 스쳐 지나가야 했으니까. 어때, 감쪽같지?”

 

카게야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히나타가 잔해들을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내려놓았다. 다시 쌓을 때를 대비한 것 같았다. 그가 절반 이상의 잔해를 들어내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보니 서서히 동굴 같은 구멍이 생겼다.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 옆에 주저앉았다. 손바닥 여섯 개를 붙여놓은 크기의 마른 땅덩어리 위로 푸르뎅뎅한 이파리가 몇 개 올라와 있었다. 몇 개는 길쭉한 줄기가 생기기도 했다. 카게야마의 눈이 땅을 짚느라 왔다갔다했다. 달랑달랑 흔들리는 전구 빛 덕분에 이 안은 깜깜하지 않았다.

 

귀엽지. 내가 기르는 애들이야.”

……뭔데?”

생감자. 엄청 어렵게 구했어.”

이거 기르는 거 들키면…… 사람이 살고 있는 것도 들킬 텐데.”

그래서 밤에는 불을 꺼놔. 빛이 새어나가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잘 자라더라고.”

 

카게야마는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줄기와 잎사귀를 보았다. 낮에만 볼 수 있는 전구 빛에 의지해서 꾸역꾸역 살아남는 감자 싹이 가슴에 콱 박혔다.

 

내가 지켜줘야 해.”

 

히나타가 감자를 흐뭇하게 보며 중얼거렸다. 그게 속삭이는 것처럼 들려 카게야마는 힘겹게 귀를 기울여야 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바람과 섞여 어느새 사라질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있잖아, 여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야. 내가 가장 행복했던 추억이 남아있는 곳. 혼자 남게 된 건 슬프지만…… 여긴 내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이야. 이 녀석들을 지키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의 흔적을 지키는 게 내가 할 일이니까.”

 

. 알았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히나타의 얼굴에 드리워지곤 했던 그림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히나타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뿌리가 이곳에 박혀있기 때문이었다.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자란 그가 할 수 있는 건 가지를 펴는 것뿐이었다. 어둠이 들어서도 불을 켤 수 없는 이 동굴 같은 집에서 꾸역꾸역. 그렇게 만들어져 드리워진 그림자는 히나타의 흉터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흔적. 히나타가 만들어낸 그림자.

 

히나타의 흉터 진 얼굴이 가슴에 콱 박혔다. 그걸 깨닫자마자 충동이 일었다.

 

그리고 이 귀여운 녀석들이 있어서 나도-”

 

그래서 손을 뻗었다. 히나타의 얼굴을 돌려 마주보게 했다. 커다래진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담았다. 카게야마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입술에 부딪쳐 들어갔다. 히나타의 숨을 삼키고 그의 혀를 감았다. 서툴었지만 부드럽게 하고 싶어 카게야마는 안간힘을 썼다. 히나타의 손이 그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센티넬을 이길 수는 없었다. 혀를 섞고 얽어도 계속 두드리고 싶어 끈질기게 입안을 유영하다가 한참 뒤에야 히나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허억, , 너 갑자기!”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히나타의 얼굴은 붉었다. 카게야마는 그의 얼굴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뽑아버리고 싶어.”

 

그리고 그 흉터를 지워버리고 싶은데.

 

……??! , 절대 안 돼!”

 

히나타의 고개가 애달프게 감자 싹을 향했다. 괜히 보여줬다는 후회가 역력한 얼굴을 다시 끌어당겨 눈을 마주쳤다.

 

한 번 더 한다.”

? , !”

 

숨이 다시금 맞닿았다. 히나타의 어깨가 떨렸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조금 더 깊이 숙였다. 그의 등 뒤로 히나타의 색을 닮은 노을이 졌다. 카게야마의 손바닥이 히나타의 머리를 받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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