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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카게히나] Turntable 2

별골짜기 2016. 3. 22. 19:36

카게히나

Turntable 2

센티넬버스

 

 

 

 

내가 대체 이걸 왜 하고 있어야 되는 거야? 카게야마는 투덜거렸다.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머물고 있는 반쯤 무너진 집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그의 손이 절반 정도 부서진 태양열 전지 각도를 맞추고 있었다. 이 집 절반이 폭삭 무너져 앉을 때 같이 부서져 기능을 완벽하게 하지 못한데다가 태양열을 제대로 흡수할 수 있을만한 각도도 아니라 그동안 고생 꽤나 했겠구나 싶었다. 히나타 같은 일반인은 이 지붕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것도 어렵고 더군다나 무게가 꽤 나가는 태양열 전지를 움직이는 것도 힘들겠지만 센티넬인 카게야마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어느덧 깜깜해진 밤하늘에는 달과 별밖에 떠 있지 않은 덕분에 그리 눈부시지도 않아 다행이었지만, 문제라면 아래에서 시끄럽게 소리치는 히나타였다.

 

너무 깔끔하게 돌리지 마!! 사람 사는 거 티 나잖아!”

이 정도는 돌려야 제대로 열을 받지 멍청아!”

자꾸 멍청이라고 하지 마! 나도 그 정돈 알거든?”

알면 조용히 해!”

 

히나타는 센티넬을 공짜로 부려먹는 주제에 바라는 것 원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각도를 좀 더 비틀어라, 그러나 사람 사는 것처럼 번듯하면 안 된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를 정도로 왔다리 갔다리 하는 말에, 카게야마는 훈련을 받으면서도 내본 적 없는 화를 원 없이 내고 있었다. 아마 다이치가 이 광경을 보면 스가와라에게 상담을 요청할지도 몰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다이치는 이 상황을 모를 테니 상관없다.

 

됐냐?”

 

마침내 일단은 히나타가 원하는 대로 세팅해준 뒤 지붕 꼭대기에서 훌쩍 뛰어내린 카게야마가 손바닥을 탁탁 털며 물었다. 히나타는 휘둥그레 떠진 눈으로 카게야마와 지붕 꼭대기를 번갈아 보았다. 3층집이라고 하기에는 2층집에 다락방 정도였지만, 그만한 거리를 가뿐히 뛰어다니는 카게야마의 능력에 놀란 듯했다.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능력을 목도하게 되면 먼저 두려워하던데 히나타의 경우는 놀라움이 먼저였다. 순수한 감탄까지 읽히는 눈동자를 보기가 어쩐지 쑥스러워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진짜 고마워! 역시 센티넬은 대단하구나!”

뭐라는 거야

 

카게야마는 어물쩍 중얼거렸다.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하기 몹시 어려웠다. 가이드가 도망간 걸 봤을 정도면 그가 반정부군을 어떻게 도륙냈는지 전부 지켜봤다는 소린데. 그 결과 처참한 꼴을 맞이하며 죽어간 이들을 방금 전까지 실컷 체험했으면서. 맘에도 없는 소리도 아닌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칭찬해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진짜 나랑 같은 센티넬 아니야? 카게야마가 한 번 의심을 해보며 머리를 긁었다.

 

그나저나 시간이 늦었다. 지금 본부로 돌아가나 날이 밝아 본부로 돌아가나 그게 그거 같았다. 어떻게 할까. 카게야마가 잠시 고민할 때 히나타가 귀신같이 방향을 정해주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자고 가는 건 어때?”

하지만……

 

이미 보고가 지체되었는데 더 지체되어도 되는 걸까. 실낱같은 망설임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 무슨 문제 있어?”

 

의아하게 물어오는 히나타의 질문에, 카게야마는 망설임의 끈을 슬며시 놓아버렸다. 본부에 급한 일이 있다면 아마 그를 찾으러 이 지역을 들쑤시고도 남았다. 그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숨겨진 군사용품를 찾아내 없애는 것. 늦어졌다고 잔소리를 들으면 어디에 있는지 찾다가 시간을 허비했다고 둘러대면 될 일이었다. 믿어줄지 믿어주지 않을지는 알 바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히나타가 카게야마의 팔을 붙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망설임을 스스럼없이 치워버릴 수 있는 건 이 온기 때문이 아닐까. 카게야마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히나타의 집안은 바깥과 다름없는 어둠이 스미고 있었다. 그나마 굴러가는 눈동자를 알 수 있는 것은, 희미한 빛을 내는 난로 앞이어서 가능했다. 히나타는 비상식량처럼 보이는 죽을 하나 더 카게야마에게 내어주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카게야마라고 할지라도,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히나타가 삶을 연명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거절하려 했지만 꽤 엄한 표정을 지어 그냥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늘 이렇게 어둡게 지내는 건가. 카게야마의 눈이 어두운 방안을 짚었다. 아까 이 다락방을 나설 땐 눈치 채지 못했지만, 필요한 거의 모든 살림이 이곳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카게야마가 처음 보는 낯선 잡동사니들도 많았다. 어떻게든 이 안에 전부를 구겨넣기라도 한 것처럼 한치의 틈도 없이 빼곡하게 들어찬 것들은 대부분 낡고 오래된 것들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뛰어난 시력이 방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무너진 잔해를 샅샅이 살폈다. 분명 전쟁통에 포탄이 이 집을 스쳐지나간 흔적이었다. 이 집과는 다르게 완전히 부서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옆집이 희생양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반절이 소실된 집에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몸을 숨기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카게야마의 어둠을 닮은 눈동자가 히나타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이곳이 좋은 거야?”

으음?”

넌 반정부군도 아니라며. 이런 폐허 같은 지역은 정부에서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반정부군의 표적이 되기 쉬워. 반정부군 눈에 띄면 그들과 함께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왜 굳이 여기서 지내는 거야?”

 

카게야마의 눈이 까무잡잡한 공기를 헤치고 책상 위의 안정제로 향했다. 그의 벨트에 달려있던 세 개의 주사기. 그리고 권총과 탄창 몇 개. 저걸로 충분한 건가. 카게야마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그가 몇 개의 탄창을 들고 다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항상 임무를 나가기 전 무의식적으로 쓸어 담았기 때문이었다. 카게야마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히나타에게는 식사를 내어줄 정도로 절실한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후회가 되었다. 탄창을 더 가져올걸 그랬나, 아까 적들 쓸어버릴 때 좀 덜 쓸걸 그랬나. 왜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길 떠나봤자 똑같거든.”

어디든?”

정부군이든 반정부군이든 사실 나는 상관없어.”

 

책상 위를 바라보던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히나타 쪽으로 움직였다. 그가 정부 소속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상기한 히나타가 얼른 손을 내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널 욕하는 건 아냐! 사실정부군이나 반정부군이나 싸우는 이유는 똑같잖아. 딱히 누구를 위한다는 사명 같은 게 아니라 자기네들 권력 다툼이잖아? 지금은 정부군쪽이 더 세지만

그러냐.”

 

카게야마가 짧게 응수했다. 심드렁한 그의 반응에 히나타는 오히려 놀란 듯했다.

 

화낼 줄 알았는데?”

? 내가 왜?”

그야 넌 정부 소속이니까.”

딱히 소속감은 없어. 눈 깜빡할 사이 센티넬이 되어 있었고 정신 차려보니 정부 관리를 받고 있을 뿐인데.”

그래?”

관리 받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본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나름 지내는 것뿐이야.”

오오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있어 보이는데?!”

뭐가?”

그렇잖아~ 정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움직인다!”

 

딱히 그런 것도 아닌데. 카게야마는 정정해주려고 했지만 히나타가 콧소리를 내며 웃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쭈그려 앉아 있던 히나타가 모포 위에 앉은 카게야마 쪽으로 난로를 민 뒤 그에게 성큼 다가왔다. 카게야마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그의 옆으로 폴짝 뛰어오른 히나타가 그를 억지로 밀어 눕게 한 뒤 찰싹 붙었다. 카게야마는 거의 막무가내나 다름없는 히나타의 행동에 답지 않게 당황했다.

 

, 뭐야?”

자고 간다며?”

그렇지만

뭐야, 설마 나보고 바닥에서 자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입 돌아간다고!”

그렇겠냐! 그게 아니라, 차라리 내가 바닥에서……

그럼 난로가 멀어지잖아!”

! 그런가?”

그러니까 그냥 자자고.”

그래.”

 

카게야마는 빠르게 수긍한 뒤 눈을 감았다. 밤이 깊어졌으니 잠드는 게 맞는데. 난롯불에 더해 옆에 따뜻하게 맞닿은 히나타의 체온에도 카게야마는 오히려 잠들기 어려운 기분이 되었다. 바짝 붙어 있는 히나타는 벌써 잠들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잠기운에 무뎌지지 않은 코끝에 처음 맡아보는 섬유 유연제 향기가 좋아서 카게야마는 한참을 숨을 크게 들이마신 것도 같았다.

 

 

 

 

1년 동안 받은 훈련 기간 동안 카게야마는 혹독한 고통을 견디고 극복했다. 센티넬이라면 이른바 훈장이라고 하는 흉터들이 자욱하게 남아 있는 법이었지만, 카게야마는 남은 흉터가 하나도 없었다. 혹자는 그런 카게야마를 부러워하기도 했고, 다른 혹자는 깔보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카게야마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 내리는 판단미스였다. 흉터가 없다고 그가 훈련에서 낙제한 하급 센티넬이 아니듯이, 그때 있었던 모든 경험들이 없던 것처럼 완벽하게 지워진 건 아니었다. 이젠 습관으로 굳어져버린 새벽 다섯 시 기상이 그 중 하나였다. 임무가 있어도, 임무가 없어도, 이른 시간에 잠들어도, 늦은 시간에 잠들어도 카게야마는 늘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카게야마는 어두컴컴한 방 안을 돌아보았다. 옆에는 여전히 따끈한 체온을 가진 히나타가 붙어 있었다. 이젠 정말 본부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에 히나타가 깨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의도를 스스로가 깨닫는 순간 카게야마는 흠칫했다. 가이드들에게도 해본 적 없는 배려를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 반대라고 하기에는 순순히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에 우뚝 선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메모라도 남길까. 조금 고민했지만 딱히 적을 수 있는 종이가 보이지 않았다. 서랍을 마음대로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카게야마는 창문을 살짝 열고 그 위에 발을 걸쳤다. 아래로 뛰어내리기 전, 다시 조용히 닫은 창문 너머로 히나타의 잠든 얼굴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간다는 인사를 하지 못해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를 가볍게 벗어났다.

 

카게야마!!!”

 

본부로 돌아오자마자 카게야마는 로비에서 다이치를 만났다. 다이치의 고동색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똑바로 향하며 가까워졌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카게야마를 마주한 그의 표정이 조금 뜻 모르게 변했다. 웃음기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의아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이치가 손가락으로 카게야마의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새로 산 옷이 좀사이즈가 작은 것 같네.”

.”

 

카게야마는 자신이 좀 끼는 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카게야마는 그냥 침묵했다. 다이치는 타나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농담을 던진 뒤 말했다.

 

이번 임무는 안 실려 오고 끝냈나보네? 가이드랑 잘 맞은 거야?”

 

카게야마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가이드 안 왔습니까?”

어엉?”

이번에 붙여준 가이드. 어제 저 폭주하기 직전에 도망쳤는데요.”

……뭐어어어???”

 

다이치의 눈이 크게 떠지는 동시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카게야마는 곧바로 상부의 호출을 받았다. 가이드 관리부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하되 히나타와 관련된 부분은 싹 들어냈다. 숨어 지내고 있는 처지라는 것은 어제 확실히 확인했으므로 이 일에 끌어들이는 게 좋지 않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었다. 대신 카게야마는 가이드가 도망치는 모습을 언뜻 본 것 같다고 바꿔 진술했다. 왜 곧바로 본부로 돌아오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안정제의 고통 때문에 오래토록 앓았다고 대답했다. 함께 자리에 있던 스가와라가 얼마 전 투여했던 안정제가 워낙 독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카게야마를 옹호해주었다.

 

가이드는 겁에 질려 맡은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도망쳤고, 그 때문에 받을 처분이 두려워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정말로 살아있다는 전제 하에. 상부에서는 카게야마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K-10 구역에 진상 조사팀을 보내기로 했다. 혹시 카게야마가 가이드를 죽이고 거짓 진술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그랬다면 그랬다고 솔직하게 말할 위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확실하게 해두겠다는 의도였다.

 

진상 조사가 끝날 때까지 카게야마는 근신처분을 받았다. 맡았던 임무는 잠시 미뤄졌다. 근신이라고 해봤자 임무가 없는 휴가에 불과해 오히려 안 주느니만 못한 처분이었다. 스가와라와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온 카게야마는 앞에 서 있던 다이치와 츠키시마를 발견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다이치와는 달리 츠키시마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일하게 뜻이 통하는 부분은 진짜 안 맞는다일 뿐인 상대가 여기까지 행차한 건 그를 곯려먹기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뚱한 표정의 카게야마에게 다이치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

카게야마는 문제없을 것 같아…… 일단은.”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아냐아냐, 네가 지난번에 맞은 안정제 진짜 독한 거였잖아? 사실을 말한 것뿐인걸.”

제왕에게 반란 일으킨 그 가이드?”

 

저거 언급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는지. 다이치는 카게야마가 소란이라도 피울까 싶어 재빨리 말했다.

 

“S급 가이드라고 해도 거의 처음 나가는 임무였다잖아. 츠키시마 넌 뭐 들은 거 없어? 가이드들끼리 연락 없나?”

 

츠키시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이치의 말처럼 그는 가이드였지만 주변인들과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카게야마와 사이가 나쁜 것은 가이드들 사이에서 떠도는 험담 때문이 아니라 진짜로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센티넬과 각인하기 전, 아직 짝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카게야마와 임무에 투입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원래도 좋지 않았지만 거기서 더 나빠진 계기가 그 임무였다. 카게야마는 폭주 직전이 되어도 츠키시마는 안중에도 없었고,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에게 일찌감치 센티넬로서의 임무를 포기하고 안정제를 투입하는 길을 택했다. 츠키시마는 격리 병동에서 깨어난 카게야마에게 임무 수행 방식을 독단적이라고 표현하며 제왕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래도 뒤에서 씹는 것보단 낫지.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에게 발끈하는 한편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마 같이 임무를 나갔던 가이드들 중에서 다시 얼굴을 마주치는 건 츠키시마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같이 임무 나간 센티넬이 제왕인 이상 도망쳤다고 해도 처분이 관대할 텐데요……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그럼, 독재자?”

둘 다 그만해.”

 

다이치가 두 사람을 중재했다. 카게야마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츠키시마를 노려보았다. 츠키시마는 뭐 잘못됐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태평한 얼굴이라 카게야마의 성질에 부채질을 했다.

 

아무튼가이드를 찾는 건 가이드 관리부가 알아서 하겠지. 카게야마는 근신처분 받았으니 잘 쉬고.”

, 그런데 안정제 세 개 다 투여한 거야?”

 

스가와라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에게 부탁해 안정제를 세 개 가져갔던 카게야마의 허리춤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둘만의 비밀로 남겨두고 싶었다. 어감이 간지럽긴 하지만, 다른 이들이 알게 되면 히나타가 곤란해 할 것 같았다.

 

하나 투여했는데…… 나머지 두 개는 싸우다가 떨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잘 관리해야지~”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인 카게야마의 모습에 스가와라는 당황하며 그를 일으켰다. 츠키시마가 칠칠맞다고 비웃는 바람에 훈훈한 분위기가 깨졌진 것을 빼고 아무래도 좋았다. 스가와라는 아무래도 불안하다며 카게야마에게 검사를 해봐야겠다고 했다. 임무가 끝나고 실려 오지 않은 게 처음이었지만 안정제로 해결을 봤다는 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스가와라가 하도 완강히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카게야마는 순순히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김에 옷도 갈아입고. 다이치가 넌지시 던진 말에 츠키시마가 더는 참지 못하고 풉 비웃는 소리를 냈다. 카게야마는 확실히 작은 옷을 내려다보며 분하지만 수긍해야 했다.

 

 

 

 

옷을 갈아입고 카게야마는 세탁기에 옷을 집어넣으려다가 멈칫거렸다. 손에 들린 히나타의 옷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 때문이었다. 본부에서 쓰는 냄새와는 달라 신경이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히나타가 무엇을 쓰는지도 몰랐고. 카게야마는 세탁실에서 빠져나와 다시 스가와라를 찾아갔다. 지금쯤이면 검사 결과가 나왔을 테니 상담을 좀 하고 세탁된 옷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면 됐다. 카게야마의 걸음이 빨라졌다.

 

사무실에 앉아 차트를 노려보고 있는 스가와라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 보였다. 카게야마는 조금 긴장했다.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가이드와 관련된 언급은 반드시 나올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젠 그에게서 도망친 가이드까지 나온 이상 차라리 혼자 임무를 해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스가와라의 소견도 그와 비슷하게 나오기를 고대했다.

 

좀 이상하네.”

뭐가요?”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신기하다고 할까……

 

스가와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바짝 깎은 손톱이 차트 위를 톡톡 두드렸다.

 

수치가흐음

이상합니까?”

아니, 그 반대야.”

반대라니요?”

카게야마, 혹시폭주 전에 가이드와 접촉했어?”

아니요. 전혀. 그 전에 도망갔어요.”

 

스가와라가 다시 긴 숨을 뱉었다. 그의 손톱이 다시 차트를 두드렸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자주 나오는 습관과도 같은 거라 카게야마는 그 비슷한 거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일단 다른 케이스랑 비교를 좀 해봐야겠지만

평소와 다른가요?”

좀 많이.”

 

스가와라가 잠시 고민하더니 짧게 설명했다.

 

지금까지 나온 수치에는 네가 안정제를 이용해 억지로 폭주를 멈췄을 거라는 결론이 나와. 실제로 그러기도 했고. 그런데 이번은으음안정제를 쓴 게 맞긴 한데.”

……?”

정말 가이드와의 접촉이 없었어? 다른 누구라도?”

 

카게야마는 불현듯 히나타를 떠올렸다. 히나타와 접촉을 한 것 같긴 했지만 그는 가이드가 아니라고 대답했었다. 게다가 여기서 히나타의 이야기를 꺼내면 아까 호출당해 읊었던 진술을 번복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스가와라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당사자의 동의 없이 히나타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일단은 필사적으로 히나타의 존재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

. 시간이 좀 지나서 안정제 성분이 많이 빠졌을 수도 있고.”

…….”

이번엔 잘 넘어간 것 같지만. 언제까지나 안정제에 의존할 수는 없어. 알지?”

 

카게야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가와라의 시선이 차트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카게야마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 발견된 특이점을 제외하고는 이상이 없어 스가와라도 순순히 그를 보내주었다.

 

스가와라의 사무실을 나선 카게야마는 다시 세탁실로 걸어가며 히나타를 떠올렸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지금쯤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은데. 카게야마는 K-10구역에서 한참은 떨어진 본부에 와 있으니 어리둥절해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늘 혼자 지내온 게 익숙해 보였으니 그가 없어도 그러려니 할까? 아니면 조금은 서운해 할까?

 

흠칫. 카게야마는 걸음을 멈췄다. 사소한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게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는 아까보다 조금 더 속력을 붙여 걸었다. 세탁실에 도착해 마른 옷가지를 꺼냈다. 탁탁 털어 확인한 옷은 확실히 이걸 어떻게 입었나 싶을 정도로 작아 보였다. 옷을 서툴게 접고 카게야마는 세탁실을 나섰다.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괜히 근질근질거리는 부분을 제대로 찾지 못해 애꿎은 재채기만 팡팡 뿜는 마음을 느끼고 카게야마가 인상을 찌푸릴 때쯤, 머릿속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단어에 그는 복도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진상 조사. K-10구역. 정부 사람들. 히나타.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여러 모습의 히나타가 빼곡하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폐허 같은 집 안을 방치하며 다락방에서 지내던 히나타. 태양열 전지조차 사람 사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제대로 활용도 못하던 히나타. 늦은 밤 불 꺼진 다락방에서 희미한 전기 난로불빛에 의지해 생활하는 것 같던 히나타. 책상 위에 안정제와 권총과 탄창을 올려놓았던 히나타.

 

카게야마는 입술을 잘근 씹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임무를 나가기 전 반드시 들리는 창고에 들렀다. 갖가지 무기들이 전시장처럼 진열된 가운에서 그는 위치 추적 방지용 소형 무전기를 들어 꼈다. 그리고 어제 들었던 권총의 이름을 기억해낸 뒤 그에 맞는 탄창 몇 개를 챙겼다. 고개를 돌려 비상식량 몇 개도 집어 들었다. 창고를 더 샅샅이 살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여유롭지 않을 것 같았다. 진상 조사팀이 출발한지는 이마 30분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출발해야 했다. 그가 츠키시마에게 무전했다.

 

츠키시마.”

제왕? 왜 이걸로 연락하지? 너 근신이잖아.’

누가 나 찾으면 여기로 연락해.”

? 어디 가는데?’

있어.”

너 상부에 보고도 안 하고 무단으로…… 어이, 제왕!!’

 

카게야마는 무전을 끊어버린 뒤 가방을 가볍게 들춰 멨다. 딱히 거리낄 건 없었다.

 

 

 

 

하루도 되지 않아 다시 돌아온 K-10 구역은 답지 않게 시끄러웠다. 진상 조사팀이 카게야마와 반정부군의 격전지를 들쑤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이들의 수는 대여섯 명 정도 되었다. 그 중 카게야마는 주황색 머리카락을 찾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안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카게야마는 몸을 돌렸다.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점을 지나치는 길이 빠르긴 했지만 들킬 수는 없었다. 그는 일단 대외적으로 근신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그걸 감수하고 왜 이곳에 왔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달리 말할 핑계가 없었다.

 

카게야마도 간신히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들 무리를 살폈으니 저쪽은 당연히 카게야마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최대한 돌고 돌아 딱 하루 지냈는데도 익숙해진 집 앞에 도착했다. 반쯤 무너진 집. 햇빛을 어느 정도 잘 받고 있는 지붕. 있으나마나한 무너진 담과 정원이었을 마른 땅. 카게야마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를 향해 달려드는 재빠른 움직임을 감지하고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헛손질을 한 상대가 휘청거리는 틈을 타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상대의 허리를 낚아챈 뒤 벽으로 밀었다. ! 본능적으로 그의 팔목이 상대의 목을 짓눌렀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줬다면 분명 호흡곤란을 넘어 질식사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직전, 카게야마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재빨리 힘을 뺐다.

 

켈록, 켈록켈록

무슨, , 괜찮?”

 

카게야마는 너무 놀라 뻣뻣하게 굳었다. 그를 향해 달려든 건 히나타였다. 하마터면 히나타를 다치게 할 뻔했다. 카게야마는 목을 부여잡고 콜록거리는 히나타를 보며 어쩔 줄 몰랐다. , 물을 줄까? 카게야마는 가방을 열었다. 식수를 히나타에게 내밀자 히나타가 순순히 병을 따고 마셨다. 물을 좀 마시고 한참이 있어서야 히나타의 기침이 멎었다.

 

진짜 엄청나다.”

, 뭐가?”

반응속도. 문 바로 옆에서 대기타고 있었는데 열자마자 그걸 어떻게 알고 피했대?”

 

그야 카게야마는 센티넬이었으니까. 센티넬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우수한 실력이었으니 당연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기에는 어쩐지 근지러워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문제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멍청아! 너 위험했다고!”

 

위협을 받으면 받기 전에 돌려준다. 그것이 센티넬로서의 본능이었고, 훈련받고 학습된 철칙이기도 했다. 그런 센티넬에게 다짜고짜 달려드는 건 자살하고 싶다는 소리밖에 안 됐다.

 

네가 너무 특출나다는 생각은 안 들어!?”

그러니까 왜 나한테 달려드냐고!”

그야 침입자인줄 알았으니까 그렇지! 너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말도 없이 가버린 게 아침인데 또 올 줄 내가 알았겠냐!”

. 미안.”

 

카게야마가 빠르게 사과했다. 히나타는 잠시 어안이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새벽에 깨우기 좀 그래서 그냥 본부로 돌아갔어.”

몇 시에 일어났길래 그랬어?”

새벽 5.”

그래, , 고맙다.”

 

새벽 5시면 안 깨우고 갈만 하지. 나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반성하게 되네……. 중얼거리는 히나타를 카게야마는 유심히 살폈다. 방금 전 그 때문에 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빼면 어디 다친 흔적도 없었고 표정을 보아하니 이곳이 아직 발각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히나타의 손에 들린 주사기. 낯이 익었다. 그가 어제 히나타에게 주고 간 안정제였다.

 

근데 총이 아니라 왜 안정제를 들고 있어?”

그건……

 

히나타가 안정제를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근처에 사람들 있잖아. 총소리 나면 분명 여기로 올 거라고.”

소음기가

 

없겠구나.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히나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센티넬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센티넬이 복용하는 안정제는 엄청 독해서 일반인이 맞으면 바로 즉사야. 침입자가 센티넬이면 최소 기절, 일반인이면 바로 즉사인데 당연히 이걸 쓰지.”

그러냐. 일반인한테도 써봤나보네.”

당연하지.”

 

히나타가 말하다가 잠시 흠칫했다. 큼큼 헛기침을 한 그가 변명처럼 말했다.

 

가끔 반정부군이 돌아다닐 때가 있어서……

누가 뭐랬냐.”

 

카게야마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무도 살지 않는 척박한 폐허에서 정부군 반정부군에도 속하지 않은 채 홀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 많을 터였다. 센티넬로서 이런저런 거 신경 쓰는 게 더 웃긴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히나타가 물을 한 모금 더 마시며 물었다.

 

그런데 카게야마는 여기 무슨 일이야?”

 

카게야마는 흠칫했다. 히나타가 혹시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을 들키진 않았을까 해서 오긴 했는데…… 잘 숨어 있는 것을 보니까 다행이긴 한데…… 그걸 입밖으로 꺼내는 건 어쩐지 부끄럽고……. 카게야마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히나타가 바닥을 쳐다보았다. 그가 들고 있는 이 병이 나온 가방 부근이었다. 히나타는 재빨리 가방 앞으로 달려가 쭈그려 앉았다. 카게야마가 아차 싶어 히나타 옆으로 다가왔지만, 이미 안을 헤집어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와, 이거 너희가 먹는 비상식량이야? 많이 갖고 다니네? 탄창이 왜 이렇게 많이…… 물도 더 있잖아? ?? 이거 내 옷!”

 

히나타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자신이 사용하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아닌 다른 냄새가 날 뿐만 아니라, 한 번도 입지 않았던 것처럼 뽀송뽀송 잘 말려진 상태를 보고 히나타가 슬며시 웃었다. 고개를 돌려 카게야마를 쳐다보는 히나타의 입가에는 손이 올라가 있었다. 그 모습이 츠키시마가 매일 그를 비웃으며 하던 행동과 비슷해 순간적으로 울컥할 뻔했다. 하지만 히나타가 던져오는 확신에 찬 질문이 근거 있는 거라 제대로 대꾸할 수 없었다.

 

어라, 카게야마군 이거 혹시 날 위해서 가져온 건가~?”

…….”

? 왜 아무 말도 못하지? 진짜? 정말이야?”

 

히나타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가방 한 번, 다시 카게야마 한 번.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시선을 맞추길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고집스럽게 버텼다. 그의 시선은 애꿎은 무너진 벽의 잔해를 노려보기만 했다. 시선에 물리적인 힘이 있다면 뚫리고도 남았을 정도였다. 히나타는 결국 카게야마와 시선 맞추기를 포기했지만 히죽 웃었다. 아무리 외면해도 그 소리까지 듣지 않을 수는 없어서 카게야마가 움찔했다. 히나타는 가방을 소중히 챙기며 말했다.

 

고마워. 사실 너도 예상했기 때문에 도와준 거겠지만…… 여기서 제대로 인간답게 사는 건 어렵거든. 덕분에 당분간은 걱정 없겠어!”

 

그제야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돌아보았다. 정말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웃는 얼굴을 보니 카게야마는 불쑥 충동적인 말이 튀어나갔다.

 

계속 이렇게 지내도 상관없어?”

뭐가?”

혼자 안 외로워?”

…… 뭐 늘 이렇게 지내서…….”

 

상관없다는 뜻처럼 들렸지만, 카게야마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한순간 히나타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그림자가 졌기 때문이다. 카게야마가 햇빛을 가려서 만든 그림자가 아니었다. 히나타의 얼굴을 반쯤 덮은 그림자는 오랫동안 길어지고 넓어진 흉터였다. 히나타는 왜 이곳에서 머무르는 걸까. 카게야마는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흡사 목이 말라오는 갈증과도 같이 쌓이다 쌓여 견딜 수 없게 된 순간 인정하는 종류이기도 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옷깃을 잡고 창가로 데려갔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근처에 사람이 있는지 알려달라는 당돌한 요구가 날아와 기가 찼다. 내가 군사용 레이더냐. 투덜거리면서도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살폈다. 진상 조사팀이 한창 일하고 있는 곳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그의 시야에 잡히는 것이 없으니 일단은 안심해도 좋았다. 진상 조사팀에는 카게야마만큼의 실력자가 없으니 알아차려도 카게야마가 더 빨리 알아차릴 터였다.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다는 카게야마의 말에 히나타는 안도하더니 다시 잡고 있던 옷깃을 끌어당겼다.

 

따라와 봐!”

 

카게야마가 서있던 자리에서 순순히 히나타에게 끌려가자 어느새 다락방에 도착해 있었다. 일어나자나자 몸만 빠져나온 것인지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모포를 빼고는 여길 나설 때와 별반 달라진 점이 없었다. 히나타는 곧장 책상으로 다가가 책꽂이 앞에 섰다. 책꽂이에는 크기가 뒤죽박죽인 여러 가지 책과 누렇게 변한 정체모를 종이뭉치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히나타는 네모나고 넙적한 얇은 판 하나를 끄집어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신기한 것을 보여주듯 짠 내민 판을 보면서도 어리둥절했다. 카게야마의 멀뚱멀뚱 뜬 눈을 보자 히나타는 김이 팍 샌다는 듯 투덜거렸다.

 

놀라지도 않냐?”

그게 뭔데?”

. 넌 모르려나? LP판이라고 알아?”

 

카게야마는 LP판이라고 하기에 새로 나온 무기 만드는 소재라도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히나타가 여자 얼굴이 그려진 표지에서 동그랗고 얇은 원판을 꺼내드는 것을 보고 조금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건넨 원판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까만색 표면이 우둘투둘했다. 흠이 나있는데 기스인가? 처음 봐서 그런지 신기했다. 얼굴보다 더 큰 동그란 LP판이 무엇에 쓰는 건지 궁금했다.

 

카게야마가 집중해서 LP판을 살피는 동안 히나타는 한 서랍장 앞에 섰다. 책상과 옷장 사이에 놓인 서랍장 위에는 카게야마가 처음 보는 골동품이 놓여 있었다. 보기에 무척 오래되어 보이는 그것은 동그랗고 납작하게 파인 자리가 눈에 띄는 이상한 것이었다. 그 옆에 기다란 막대가 눕혀져 있는 건 안테나라도 되는 건가 싶었다. 히나타가 서랍장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고 안에 든 기계들과 단자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카게야마를 돌아본 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LP판을 건네받았다. 히나타는 LP판을 망설임 없이 그것에 넣었다. 정확히는 동그랗고 납작하게 파인 자리에 올린 것에 가까웠다.

 

홈과 꼭 맞는 크기의 원판이 느릿느릿 돌기 시작했다. 카게야마의 눈이 커지고, 히나타는 안테나인 줄 알았던 막대를 움직여 빙글빙글 도는 LP판 위에 올려놓았다. 안테나도, 막대도 아닌 것의 끄트머리에는 바늘이 달려 있어 그것이 LP판의 홈을 살살 굴러가기 시작하자 소리가 났다. 느릿한 재즈풍의 피아노 반주가 저 먼 어디쯤에 있는 것처럼 선율을 연주했다.

 

신기하지?”

음악이었어?”

. 엄마가 남긴 유품이야.”

 

카게야마는 히나타에게 고개를 돌렸다. 히나타는 웃고 있었다.

 

턴테이블이라고 들어봤어?”

턴테이블?”

최근에는 디지털화 된 파일로 많이 듣잖아. 그 예전에는 CD플레이어인가 그걸로 많이 들었고. 그런데 그것보다 더 예전엔 이걸로 들었대.”

 

CD보다 훨씬 더 이전의 것. 낡고 오래되어 보이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사실 나도 어렸을 때 대충 들은 거라 잘 몰라. 그래도 좋지 않아?”

 

카게야마는 원래 음악을 즐겨 듣는 타입이 아니었다. 임무하느라 바쁜 센티넬이 음악을 들을 정신적인 여유가 어디에 있겠냐만은, 센티넬로 각성하기 전인 중학생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그와 사이가 몹시 나쁜 츠키시마가 매일 헤드폰을 들고 다니며 음악을 듣던 것이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은 탓인지 음악이라는 건 카게야마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편이었다.

 

음악 좋아해?”

좋아하는 편인가잘 모르겠어. LP판은 저거 딱 하나 있거든. 들으면 옛날 생각나고 좋긴 해.”

 

빛바랜 얼굴의 여자가 그려진 LP판 표지를 책상 위에 덮어놓으며 히나타가 모포 위에 풀썩 앉았다. 카게야마는 그 표지를 한참 노려보다가 히나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히나타는 계속 말했다.

 

턴테이블이랑 LP판은 엄마가 애지중지 아꼈던 거였어. 엄마의 엄마가 가지고 있던 거라는데, 엄마의 엄마도 누군가한테 물려받은 건지도 모르지. 엄마는 가끔 이거 들으면서 엄마의 엄마 얘길 했었어.”

 

아무렇지도 않게 죽은 어머니를 말하고 있었지만, 카게야마는 이 이야기가 히나타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주제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었다. 싫은 티를 내지 않는 건지, 그럴 필요가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의 얼굴에 서린 그림자는 읽어낼 수 있었다. 어쩌면 옛일을 떠올리는 향수일 수도 있었고.

 

카게야마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치직치직 잡음이 섞인 무거운 재즈 선율이 두 사람 사이에 가라앉았다. 들어낼 수 있을지 회의적일 정도로 묵직한 거리감. 몽롱한 음색 속에 파묻혀 볼 수 없게 될 것만 같은 히나타. 히나타는 그저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전부인데, 옆에 있는 게 맞는데 어쩐지 그렇게 느껴져 카게야마가 무심코 물었다.

 

자주 들어?”

정말정말 할 게 없거나 정말정말 심심할 때 한 번씩. 많이 들을 순 없거든.”

?”

“LP판은 들으면 들을수록 음질이 나빠진다더라고. 지금 한 50번 안 되게 들었는데도 음질이 안 좋아. 바늘을 갈아주는 게 좋다고 하긴 하는데 구할 수도 없으니까 몇 번 안 남았다고 봐야지. 그래도 네가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특별히 들려주는 거야.”

 

고작 50번도 되지 않는 횟수. 그나마도 히나타에게 얼마 남지 않았을 횟수. 카게야마는 서랍장을 여는 히나타를 상상했다. 홀로 지내오던 긴긴 시간 동안 몇 번이고 서랍장을 열고 닫으며 들을까 말까 고민하는 히나타를. 한 번 돌아갈 때마다 우르르 쏟아지는 추억을 되새기는 대가로 얼마나 많은 외로움을 바쳐야 했을지. 횟수가 한 번씩 줄 때마다 스스로를 얼마나 다그치고 외롭지 않다 채찍질 했을지. 정말 할 게 없고 정말 심심해 외로운 순간들을 지금까지 몇 바퀴의 턴테이블에 꾹꾹 눌러 담았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히나타.”

.”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무덤덤한 눈동자였다. 그림자에 뒤덮여서도 무디기만 한 눈동자를 보며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히나타를 끌어당겼다. 그제야 놀라움을 담고 커다래진 눈이 보였다. 속수무책으로 끌려온 히나타의 머리가 카게야마의 품에 파묻혔다. . . . 심장이 시끄럽게 울려대는걸 히나타에게 들키고 놀림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만약 그런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히나타가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마음대로 행동한 대가라면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히나타는 아무 말도 없고 아무 행동도 없었다. 카게야마는 용기를 내 그의 등을 가만히 짚었다.

 

 

 

 

Ella Fitzgerald - Mi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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