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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히나] Turntable 1

별골짜기 2016. 3. 18. 19:46

카게히나

Turntable 1

센티넬버스

 

 

 

 

영원할 것만 같던 불길에 삼켜진 폐허. 잿더미만을 토해낸 도시의 하늘은 두꺼운 커튼 같은 먼지에 가려 좀처럼 제 색을 드러내지 못했다. 서서히 침전하는 재와 먼지 사이에서 모든 색을 가진 유일한 존재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거칠게 가슴을 들썩였다. 호흡을 깎아내고 자리를 차지한 먼지에도 괴로운 낯 없이 멍하기만 한 까만 눈동자가 아수라장이 된 지평을 견뎠다. 높았던 건물이 스러지고 비명이 아우성치던 자리에는 꺾여나간 수많은 것들이 삶의 반대를 좇아 사라져 있었다.

 

눈앞이 하얗게 번져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원래 무채색인 것처럼 물들어있는 세상은 시야의 깜빡이는 점멸이 한몫 거들었다. 귓가에서 불편하게 지직거리는 백색소음도 마찬가지였다. 무너져 엉망으로 부서진 회색 콘크리트, 새까맣게 그을어 검게 타버린 흔적, 하늘에서 쏟아지는 회색 먼지와 채도를 더한 재까지. 하얗고, 회하고, 검은 풍경에 본능이 앞지르기 시작했다. 다른 색. 다른 어떤 색이라도 좋았다. 아직 손에 들려 있는 단검의 자루에 으스러질 정도로 위험한 힘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무채색뿐인 이 풍광에서 색을 만들어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저 멀리 긴장된 공기를 뿜어내는 이의 모습이 눈에 잡혔다.

 

본부, 본부! 지원 요청!”

치지직- 지직- 치직카게야마. 카게야마 토비오. 응답하라.’

 

팽팽하게 조여드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자루가 부서졌다. 둥글기만 했던 조각이 어긋나고 깨져 날카로운 익숙한 고통으로 찔러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에게 달려들어 억지로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는 이의 행동도 역부족이었다.

 

접촉은. 아직인가?’

효과 없어요!”

 

상대가 카게야마의 목에 팔을 둘렀다. 억지로 매달리듯 발끝을 세워 그의 입술에 닿으려 했으나 강한 악력에 의해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섞인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비척비척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이의 눈에 어린 것은 공포, 불쾌감, 모욕감. 금방이라도 팔을 내지르고 목을 짓눌러 그 생기를 앗아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실낱같이 그를 제어하고 있는 한줄기 본능의 끈이었다. 애석하게도 그의 목줄과 이어져 있는 끈은 가느다란 실에 불과해 몸부림 한 번을 이기지 못하고 끊길 종류였다. 상대는 입술을 짓씹고 허리춤을 뒤졌다. 날카로운 무언가를, 평균 이상의 동체시력을 가진 카게야마가 읽지 못할 리 없었다.

 

으윽-! 이 미친!”

 

상대의 흉부를 압박하고 부서진 단검 자루의 조각을 높이 치켜세우는 순간, 찔린 허리에서부터 파도치듯 밀려들어오는 뜨거운 감각에 카게야마의 팔이 힘을 잃고 나동그라졌다. 열기가 미세혈관 하나하나를 타고 번지는 동안의 고통은 겪어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여전히 뇌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단어들이 소음을 동반하며 귓가에서 맴돌았다. 치직, 정신, 치지직, 차려, 지직. 숨을 헐떡이며 그를 밀어내는 보통의 힘에도 무력할 정도로 굽은 등이 덜컹거렸다. 목구멍을 거칠거칠하게 달라붙은 재와 먼지를 모두 뱉어낼 기세로 기침이 이어졌다. 헛구역질을 하며 구른 탓에, 이미 피로 젖어있던 질척한 옷에 재가 묻어 뒤엉켰다.

 

무채색이었던 세상이 점차 그 빛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라앉고 휘날리는 먼지의 장막 너머로 언뜻 파란 하늘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강제로 전원이 차단된 로봇처럼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싸늘한 고통은 그의 정신이 끊기는 순간까지도 여전했다.

 

 

 

 

나 참. 카게야마 녀석, 진짜 어디 이상 있는 거 아니에요?”

검사 해봤어. 정상이야.”

검사 잘못 한 건 아니……겠죠! 그렇죠, 물론 스가상의 검사에 오류가 있을 리 없죠!”

 

시끄러운 소리가 그의 머리를 두드렸다. 가라앉아 있던 정신이 낚싯줄에 걸린 고기처럼 천천히 부유했다. 허리에서부터 뜨거운 고통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떠오르는 단어들이 낯설게 배열되었다. 임무. 폐허. . 안정제. 주사. 고통. 느린 배속으로 켠 영화처럼 스쳐가는 기억에, 카게야마는 그저 상태가 최악만은 아니었구나 생각할 따름이었다. 안정제가 주는 고통에 정신을 잃기 직전, 임무에 동행한 가이드가 무어라 욕설을 내뱉은 것 같기도 했지만 제대로 주워 담지 못했다.

 

느리게 눈을 뜨자 익숙한 배경이 보였다. 본부에 있는 격리 병동이었다. 침대를 둘러싼 얼굴들도 익숙했다. 그러나 이들이 환자로서가 아니라 면회를 목적으로 온 방문객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애초에 센티넬 전용 격리 병동을 이용하는 것은 카게야마뿐이었다. 그가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허리가 아직도 아팠다. 그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달력을 향했다. 바뀐 날짜를 보니 꼬박 한나절은 누워 있던 모양이었다. 그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가이드에게 단단히 미움을 사버린 모양이었다. 격리 병동의 책임자 스가와라도 그것부터 지적했다.

 

카게야마이번 가이드도 꽝인 거야?”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행동으로도 답은 충분히 됐다. 스가와라는 걱정 섞인 한숨을 내쉬며 차트를 뒤적였다. 스가와라 옆에 서 있던 타나카가 혀를 차며 물었다.

 

대체 가이드 대접을 어떻게 했길래 제일 센 안정제를 투여해?”

? 제일 센 거였습니까?”

그래! 완전히 눈 돌아가고 폭주 직전인 센티넬한테 투여하는 제일 센 안정제!”

특별히한 게 없는데.”

그게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스가와라가 차트 덮개를 내려 덮으며 말했다.

 

네가 이 격리 병동에 온 횟수가 벌써 스무 번이 넘어. 임무 중 가이드가 없던 것도 아니야. 오히려 상부에서는 너한테 차고 넘치게 붙여주잖아. 그런데 매번 폭주 위기로 실려 오는 게 말이나 되냐고.”

 

카게야마는 센티넬이었다. 그것도 그냥 센티넬이 아니라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력한 힘을 지닌 센티넬 중 하나였다. 센티넬로 각성한지 아직 2년이 되지 않았고, 그 중 1년은 훈련 기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이드가 정해지고 힘이 안정되었을 때의 크기나 위력은 지금보다 더할 수 있었다. 카게야마가 센티넬로 각성하던 순간의 엄청난 힘을 목도한 정부는 별다른 검사나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S급에 준하는 관리에 들어갈 정도였다. 불안정한 힘을 알면서도 중요하고 위험한 임무에 투입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한 과정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카게야마의 혹시 모를 폭주를 제어하기 위해 상부에서는 그의 임무에 가이드를 필수적으로 동행하게 했다. 모두 S급의 훌륭한 가이드들이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한 번도 그들에게서 안정을 찾은 적 없었다. 센티넬은 폭주가 가까워지면 본능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가이드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카게야마의 가이드를 향한 본성은 너무나 옅었다. 가이드를 취하는 대신 오히려 그들을 죽일 뻔한 일이 잦았다. 카게야마와 임무에 동행하는 가이드들은 살아남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이드들은 그들 존재로서 카게야마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약물을 투여함으로서 안정시키는 역할이나 다름없었다. 상부에서는 카게야마에게 조바심을 내며 몸이 달아 있는 상황이라 가이드들이 억지로 동행하게 되기는 했지만, 이미 가이드들 사이에서는 악명을 떨치고 있는 그를 달가워하는 이는 없었다.

 

이번에 함께 임무에 동행한 가이드도 S급에다가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었지만 카게야마 앞에서는 평범한 보통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가이드라는 간당간당한 속성에 겨우 목숨줄을 부지한 것이 많이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아직도 후끈거리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카게야마가 느리게 미간을 찡그렸다. 타나카는 희한한 것을 보는 눈으로 카게야마를 보았다.

 

진짜 아무것도 안 느껴져? 막 눈앞이 하얘졌다가 빨개졌다가 시시각각으로 변할 때, 그러니까 폭주 직전에, 정말 가이드도 눈에 안 뵌단 말이야?”

 

일단은 눈앞이 하얘지는 단계까지 밖에 가지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센티넬로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한 타나카는 스가와라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스가와라도 난감한 눈을 할 뿐이었다. 차트에서는 더 이상 얻어낼 것이 없는 그로서는 아직 학술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그의 가설을 이야기해줄 수밖에 없었다.

 

카게야마 같은 경우는 좀 특이한 경우 같은데…… 오히려 가진 힘이 너무 과해서 그런 걸수도 있어. 가이드가 폭주 직전까지 올라온 힘을 진정시키고 눌러야 하는데 카게야마가 가진 힘이 너무 커서 웬만한 가이드의 힘으로는 안 되는 거지.”

오우좀 재수 없는데요.”

 

타나카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카게야마를 보았다. 카게야마는 하얀 이불 위에 얌전히 놓인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에 꽂힌 주사바늘은 익숙했다. 훈련을 받을 때부터 찔리고 긁혀 수많은 흉터가 남아 있을 법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매끈한 손목이었다. 흉터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회복 능력은 의사들 사이에서 그를 괴물이라고 불리게 했다.

 

괜찮아, 카게야마?”

 

그때 병동으로 다이치가 들어섰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갓 센티넬로 발현해 들어왔을 때 훈련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다이치였다. 당시 힘을 올바르게 쓰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물론 가이드가 없는 이상 폭주의 선을 늘 간당간당하게 걸치고 있는 카게야마로서는 이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다이치는 이상적인 센티넬이었다. 스가와라라는 가이드를 두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스가와라의 손이 다이치의 어깨에 가볍게 얹히고, 다이치가 근심스럽게 말했다.

 

이번 가이드도 안 맞았나보네.”

그런 것 같습니다.”

걱정 마. 곧 찾을 수 있을 거야.”

 

카게야마는 회의적이었지만, 그와 같은 케이스는 매우 드물었으므로 다른 보통의 경우와 같기를 모두가 바랐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타나카가 물었다.

 

다른 S급 가이드 얼마나 남았죠? A급은 감당 안 될 것 같고

글쎄

 

스가와라가 곤란하게 말끝을 흐렸다. 카게야마는 대충 수를 알고 있었다. 애초에 가이드는 센티넬에 비해 부족한 존재였다. 폭주 시 가이드가 없으면 죽는 센티넬에 비해 가이드는 센티넬이 없어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가이드는 가진 힘에 비해 위험하고 힘든 임무에 투입되곤 했으므로 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신고를 하지 않은 가이드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최근 한 유전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센티넬과 가이드의 발현 비율이 11이라고 했지만 실제 등록된 비율은 32에 가까웠다. 높은 등급의 센티넬은 무조건 가이드를 가진다고 봐야 했지만 낮은 등급의 센티넬일수록 가이드를 갖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카게야마를 복에 겨운 놈이라고 수군거리는 무리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카게야마가 싫어서 가이드와 안 맞는 것도 아니고. 끈질기게 기다리면 좋은 소식 있을 거야.”

 

다이치가 걱정을 덜기 위해 유독 힘주어 말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가이드가 없어도 별로 상관없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언제까지 가이드들과 수많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안정제를 다발로 들고 다니는 게 나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격리 병동에서 꼬박 하루를 더 있어야 했다. 허리의 통증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얼마나 독하게 밀어 넣었는지 카게야마가 아닌 다른 센티넬이었다면 이틀은 병동에 있어야 할 정도였다. 가이드들에게 미움 받아온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 카게야마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다음 임무 때는 스스로 안정제를 준비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카게야마가 그 다짐을 실천으로 옮기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곧 상부에서 내린 새로운 임무에 투입되었다. K-10구역에 은밀히 숨겨져 있을 군수용품들을 찾아내 없애는 것이었다. 상부에서는 카게야마에게 새로운 가이드를 붙여주었다. 주황색 짧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카게야마가 가이드에게 박하다는 소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점이 되려 거슬렸다. 지금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해도 폭주의 기미가 보이면 일그러진 얼굴을 하며 사납게 안정제를 투여할 것이다. 카게야마는 그녀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임무 이후로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테니까.

 

K-10 구역은 수도와 꽤 거리가 있는 지역이었다. 거기다 십 년 전에 있던 전쟁의 여파로 복구되지 못한 폐허에 가까웠다. 반정부 일당들이 자리잡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기도 했다. 게다가 K구역 자체가 전쟁 이전에도 많이 발달되지 못한 낙후된 지역에 가까웠다. 반정부 일당들이 점거할 때까지 정부의 관리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과 이쪽의 차이는 센티넬이 있느냐 없느냐. 딱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간단한 사실이었지만, 그 간단한 사실이 격차를 벌리는 가장 큰 전력이었다. 다른 보통의 인간보다 뛰어난 오감, 그리고 월등한 신체능력. 거기에 카게야마 특유의 괴물 같은 회복능력은 반정부 일당 모두가 덤벼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 타닥. 목적지에 도착한 카게야마는 근처를 둘러보았다. 도시가 무너져 남은 폐허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군데군데 건물이 무너져 잔해가 남아있는 것은 같았지만, 무차별적인 폭격에서 살아남은 집도 여럿 있는 것 같았다. 주요 거점도 아닌 낙후된 지역이라는 사실이 포탄의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저벅저벅 더 깊숙한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에서 가이드가 천천히 따라붙었다. 팽팽한 긴장이 공기의 고삐를 쥐었다. S급 가이드라고는 해도 이런 큰 임무 경험이 없으니 잘 보살피라는 상부의 요청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귀찮다고 생각하며 카게야마가 뒤를 돌았다. 가이드의 주황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 왜요?”

……아닙니다.”

 

막상 임무에 나오자 웃지 않는 눈동자가 보였다. 무서운 괴물을 보는 듯한 눈빛. 공기를 잡아끄는 긴장은 아무래도 임무에 대한 긴장이 아닌 듯했다. 카게야마는 손을 들어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안정제가 담긴 주사기가 잘 매달려 있었다. 이번에는 가이드가 아닌 제 손으로 적절한 단계의 안정제를 투여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가 한걸음 앞으로 나설 때였다.

 

피융, 피융-

타다다당, 타다다당!

 

카게야마는 바람을 가르고 날아오는 총탄의 소리를 듣는 것과 동시에 빠르게 뒤를 돌아 가이드를 낚아챘다. 둘을 노리는 것이 명백한 총탄들이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카게야마의 움직임에 맞춰 쏘아지는 것들이 애꿎은 바닥에 떨어져 먼지구름으로 길을 만들어냈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입장하자마자 쏟아지는 환영인사에 카게야마는 미간을 좁혔다. 애초에 그가 대놓고 들어오기는 했지만 신원확인을 하는 친절함도 보이질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가 센티넬인 사실이 알려져 있는 것 같았다. 훈련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임무를 수행한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 빠르다고 생각한 그가 가이드를 돌아보았다. 가이드는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훈련 받았습니까?”

 

가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숨을 깊이 들이 마시다가 길게 내뱉었다. 우수수 쏟아지던 총탄이 멎어들자 떠올랐던 먼지구름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먼지 너머가 카게야마의 시야에는 몹시도 잘 잡혔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몸을 숨기고 긴장한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감쪽같이 사라진 것으로 보고된 군수용품들이었다. 총과 총탄은 애교에, 포탄까지 있었다. 아마 건물 너머 어딘가에는 탱크도 있을 것이다. 피가 본능적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잘 피하세요.”

 

어깨를 돌려 팔목을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카게야마가 말했다. 그의 뒤에 숨어있던 가이드는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잘 피하세요. 당신 사정은 봐주지 않으니까. 긴장인지 겁인지 알 수 없는 걸음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카게야마는 권총을 꺼내 한 바퀴 돌렸다. 온갖 종류의 무기들 앞에 혈혈단신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걸 들고 있는 것이 센티넬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 권총을 똑바로 고쳐 잡은 카게야마가 빠른 속도로 총을 쏘았다. 상대를 겨누는 속도부터 달랐다. . . . .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겨누고, 쏘고, 명중하는 일련의 과정이 네 번이나 이어질 동안 눈 한 번 깜빡한 것이 전부인 적들이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다다닥, 바닥에 꽂히는 탄알들은 카게야마를 맞추지 못했다. 속수무책으로 도망칠 새도 없이 잡힌 한 명의 목을 꺾어 무릎으로 갈비뼈를 아작 내는 동안, 카게야마는 이들이 힘들게 구했을 무기들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 !

 

발길질 한 번에 나뒹군 탱크가 뒤집혔다. 그 안에서 황급히 빠져나오려는 적의 머리통을 하나하나 붙잡아 아작 냈다. 그의 발아래에 붉은 피가 흘러들어 묻었다. 하지만 이미 시뻘겋게 젖은 옷가지와 신발에 새로운 것이 묻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뒤에서 날아오는 총탄을 너무나 쉽게 피하며 카게야마는 탱크 안 마지막 적을 으스러트린 뒤 그 방향을 보았다. 아직 적이 남아 있었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전신에 퍼진 흥분으로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세하게 남아있는 정신이 경고를 울렸다. 안정제. 안정제를 투여해. 하지만 눈앞에 떼지어 몸을 숨긴 채 효과도 없는 총만 쏘고 있는 적의 눈동자에 서린 공포를 읽어낸 순간 그는 주체할 수 없어졌다. 그의 가학을 부채질하는 충동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일렁였다.

 

치지직, 치직- 귓가에서 떠드는 목소리는 고장난 녹음기 같았다. 항상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앵무새 같기도 했다. 카게야마의 손이 귀에 장착한 목소리를 떼어냈다. 시야가 하얗게 번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깜빡 깜빡. 잘못 끼운 형광등처럼 반복되는 시야에 정신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철컥. . 철컥. 이성이 반쯤 날아간 본능만으로 그의 손이 권총의 탄창을 바꿔 끼웠다. 더 이상 도망칠 곳 없는 적들의 오들오들 떨리는 움직임이 공기로서 팔뚝에 닿았다. 뜨끈하게 닿아온 피의 온기가 더해져 그의 정신이 더욱 뜨겁게 달구어졌다. 카게야마의 억센 손아귀에 누군가는 목이, 누군가는 심장이, 누군가는 머리가 잡혔다. 이명처럼 남겨진 비명이 사라지자 쥐 죽은 듯한 고요가 남았다.

 

카게야마의 숨이 거칠게 헐떡였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피가 너무 세게 돌고 있는 탓이었다. 얼마나 빨라졌는지 머를 심장의 펌프질이 그 속도를 더해갔다. 울렁이는 시야에 모든 것이 왜곡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야를 깜빡이며 방해하는 하얀색을 밀어내고 붉은색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꺼지기 직전의 바람 앞 촛불처럼 남은 이성이 떠올렸다. 폭주의 전조. 폭주를 위한 단계에 100이 있다면 지금은 90 정도였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목 안 깊은 것에서부터 빠져나왔다. 갈증이 났다. 피를 더 봐야 충족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애초에 카게야마는 그 방법밖에 알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주변을 훑었다. 갈증이 나고 허기가 졌지만 살아있는 것은 그 혼자뿐이었다. 이성을 잃은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먹잇감을 찾았다. 폭주 직전 배는 날카롭고 예민해진 시야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산 자를 찾았다. 그리고 그때, 카게야마의 눈에 몸을 웅크리고 숨은 주황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 그의 정신이 탄성을 내질렀다.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게 맞는 일이었다. 그의 가이드. 무엇이든 누구든 상관없었다. 카게야마의 번뜩이는 눈초리가 닿은 순간 상대가 몸을 숨겼지만 쓸모없는 짓이었다. 카게야마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일그러지고 기괴하게 비틀린 시야에서 유일하게 주황색만을 구분할 수 있었다.

 

반쯤 무너진 집. 그리고 정원이었을 마른 땅바닥 구석에 서서 이쪽을 보는 하얀 얼굴. 그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꿀렁꿀렁 충동이 일기 시작해 카게야마는 멈칫했다. ? 아니다. 그것과는…… 무언가 다른……. 한걸음 더 다가간 카게야마의 시야에서 붉은기가 거둬졌다. 왜곡렌즈가 한꺼풀 벗겨진 시야는 하얬다가 원래대로 돌아오길 반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둔탁하게 터지는 심장의 고동.

 

. .

 

본능대로 손이 올라갔다. 가까이 마주선 주황색 머리카락의 어깨에 손을 올린 순간 전기가 관통한 듯한 충격이 일었다.

 

. .

 

하얗게 스며든 시야가 서서히 벗겨지기 시작했다. 아주 깊은 어딘가에서부터 비어 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이어지는 갈증. 허기. 카게야마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상대의 입술을 물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상대의 입술에 닿고, 벌어진 틈을 파고드는 순간, 거의 동시에 옆구리에서 따가운 고통이 느껴졌다.

 

화악, 어느 정도 돌아오기 시작한 이성이 떠올렸다. 안정제. 시야가 제 색을 찾기 전부터 뚜렷하게 남아 있는 주황색 눈동자가 그를 또렷이 보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중심을 잃어 바닥으로 쓰러지는 직전, 카게야마는 상대의 뒤로 펼쳐진 파란 하늘을 보았다. 태양이다. 카게야마가 중얼거렸다.

 

 

 

 

카게야마는 옆구리에서부터 느껴지는 따가움에 서서히 눈을 떴다. 빠져나오는 신음이 미약했다. 어느덧 원래대로 돌아온 시야에는 처음 보는 광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몸 곳곳을 살폈다. 센티넬이 기절해버린 상황만큼 위험한 건 없었다. 만약 정신을 잃은 그의 신병이 반정부군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했다면 상황이 성할 리가 없었다. 낙후된 지역에 몸을 숨기고 몰려들었으니 센티넬을 얻는다고 해도 제대로 어찌 해볼 수는 없었겠지만, 훈련을 받으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 있었기 때문에 저절로 행동이 앞서나갔다.

 

다행히 어딘가 연결되어 있거나, 다친 곳은 없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낡은 모포 위에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조금 더럽고 긁힌 자국도 꽤 많았지만 나름 깔끔했다. 책상과 책꽂이가 창문 바로 앞에 있었다. 창문 밖은 해가 지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 누군가는 어디를 간 것인지 찾아볼 수 없었다. 시큰거리는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장 최근에 억지로 투여된 안정제보다는 강도가 약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머리가 지잉 울리는 것을 가까스로 견뎌내며 카게야마는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잠깐, 안정제?

 

카게야마는 손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원래 있었어야 할 안정제가 없었다. 처음으로 눈이 붉게 충혈되고 시야가 하얗게 깜빡이기 시작할 즈음 안정제를 투여해야 한다는 이성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실제로 투여하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는 그대로 적을 쓸어버렸고, 완전히 시야가 빨갛게 되어버리고, 주황머리를 만나서……

 

가이드.

 

카게야마는 잊고 있던 단어를 떠올렸다. 가이드 없이 혼자 센티넬 전용 격리 병동으로 실려 가는 일이 잦아 금방 떠올리지 못했다. 이름 모를 그 주황색 머리카락 가이드를 마지막으로 본 기억이 나는데…… 분명 그 가이드를 쫓아가 죽이려고 했었고……? 엉망이 된 비디오테이프처럼 기억이 들쭉날쭉이었다. 카게야마는 그가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선명한 주황빛 눈동자를 봤던 것을 가까스로 기억해냈다. 그 뒤에 펼쳐진 파란 하늘 또한. 카게야마는 조금 의문스러워졌다. 분명 그는 시야가 기묘하게 왜곡되기까지 하는 단계에 이르렀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어떻게 그렇게 빨리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안정제의 효과라고 하기에는 너무 빨랐다. 게다가 지금 느껴지는 고통으로 보아 가장 센 안정제도 아닌데 폭주 직전의 그가 쉽게 안정되었을 리도 없었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은 본부로 돌아가서 해도 충분했다. 본부와 연락할 수단이 없는 현재로서는 일단 여기가 어딘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가이드가 그에게 안정제를 주사한 뒤 여기까지 데려온 건가 추측해보기도 했지만 그럴 바에는 차라리 본부로 데려갔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무너진 한쪽 벽면 옆으로 계단이 나 있었다. 심지어 최소 2층이기까지 하다니. 삐그덕 소리를 내며 계단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많이 낡은 계단 같았다. 좁은 사다리 같은 계단을 보아하니 카게야마가 있던 곳은 다락방 정도 되는 듯했다.

 

계단이 무너질 것 같아 카게야마는 그냥 훌쩍 뛰어내렸다. 웬만히 높은 곳이 아닌 이상 이 정도 높이는 문제없었다. 회복이 덜 되어 쟁그랑 울리는 머리가 문제긴 했지만 말이다. 카게야마는 먼지와 잔해가 퀘퀘하게 쌓여 제대로 청소하기도 어려운 바닥을 살폈다. 다락방과 비슷하게 한쪽이 무너져 있었지만, 이쪽은 청소를 한지 오래된 것처럼 더러웠다. 그리고 그때 아래층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모를 정도로 선명한 감각이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소리 나는 1층 구석에는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레토르트 죽을 덥히고 있었다.

 

주황머리? 소년? 카게야마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를 눈치 챈 소년이 뒤를 돌아 카게야마를 보더니 눈이 커졌다. 카게야마는 저 눈동자를 알고 있었다.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눈이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심장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덜커덩. 갑자기 나타난 돌부리에 걸린 전차처럼 일순간 흔들린 심장을 자각했다.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네? 반나절은 더 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네가, 나를 데려왔어?”

…… 다락방으로 옮긴 걸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카게야마는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분명 그는 가이드를 쫓아 달렸고, 잡았고, 안정제가 투여되었는데…… 마지막으로 본 눈동자는 소년의 것이라니.

 

죽 괜찮지? 먹을 거 없으니까 싫어도 그냥 먹어. 5분만 있으면 충분히 익을 거야. 원래 3분이면 익겠지만 여기 태양열 전지 상태가 별로 좋지 못해서.”

 

종알종알 떠드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카게야마는 가까워지는 소년을 보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생각날 듯 말 듯 하면서 떠오르지 않았다. 인상을 찡그리며 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둥그렇게 뜬 주황색 눈동자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의 기억이 천천히 되감기기 시작했다. 시야에서 붉은기가 거둬진지는 오래였다. 한꺼풀 벗겨진 시야는 하얬다가 원래대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갈증이 일어 목이 탔다.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얗게 스며든 시야가 서서히 벗겨지고, 비어 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동시에 이어지는 갈증. 허기. 카게야마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소년의 입술을 삼키려 했다.

 

찰싹. 카게야마는 정신을 차렸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소년의 손에 의해 막혀 있었다. 그의 허리는 어느새 기억을 따라 반쯤 굽혀 있었고, 양 손은 소년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크게 뜨고 소년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충격 없이 덤덤한 눈. 그건 확실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그 눈동자가 맞았다. 카게야마는 허리를 조금 폈다. 그러나 여전히 숙인 고개로 물었다.

 

…… 어제아니, 오늘아니 지난번에 나랑……

오늘이야.”

그래, 오늘아까나랑 그, 그거 했어?”

 

그가 발견하고, 뒤쫓은 건 가이드가 아니었던 건가? 안정제를 투여한 사람도? 카게야마는 어쩐지 초조한 기분이 되어 소년을 보았다. 그보다 어려보이는 듯 앳된 얼굴이 곤란함을 담아 찌푸려지더니 그의 말을 정정했다.

 

정확히는 미수. 이 파렴치한아.”

, 파렴치?”

사람 죽일 듯이 달려와 놓고서는 맘대로 입술 부비려고 했잖아. 그럼 파렴치한이지 뭐.”

그건……!”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어느 정도 사실이라 반박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괜히 그럴 이유가 없어 억울했다. 폭주 직전, 거의 눈 돌아가기 직전의 상황에서 본능을 넘어 상대에게 반한 것도 아니고…… 그게 아니라면 딱 한 가지 밖에 없는데……

 

너 가이드야?”

아니.”

 

0.5초 만에 딱 잘라 아니라고 대답하는데 되물을 수도 없었다. 카게야마 역시 지금껏 가이드를 향한 본능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으므로 이번에도 아닐 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다른 센티넬들과 비교해 정상이라고는 못할 타입이라 쉽게 수긍한 것도 있었다.

 

곧 다 데워진 죽을 소년이 내밀었다. 흙먼지구덩이인 주방에서 그나마 깨끗한 자리를 골라 앉은 카게야마가 죽을 뜯었다. 겉에 달린 일회용 숟가락으로 죽을 뜬 그가 습관적으로 냄새를 맡았다. 독이 들어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눈앞의 소년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건 종교를 가진 이들이 식사 전 기도를 올리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하지만 소년은 그게 조금 불쾌했는지 조금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반정부군 아닌데.”

알아.”

? 어떻게 알았어?”

반정부군이면 내가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으니까.”

그거 알면서 냄새는 왜 맡아?”

습관이야.”

 

묵묵히 숟가락을 들어 죽을 떠먹는 카게야마에게 대답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눈을 들자 소년은 물끄러미 카게야마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소년에게 물었다.

 

반정부군 아닌데 여긴 왜 있어?”

알 필요 없어.”

 

카게야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소년은 그런 카게야마가 조금 무서웠는지 자리를 대놓고 물러나 앉았다. 그 모습을 보니 행방이 묘연해진 가이드가 떠올랐다. 반정부군 쓸어버리다가 실수로 죽여 버렸나. 눈썹도 조금 찌그러졌다. 정말 가이드가 싸움통에 휩쓸려 죽은 거라면 일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상부에서 그걸 감안하고 가이드를 붙였다지만 책임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카게야마는 일단 나가서 죽은 시체들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해 숟가락질에 속도를 붙였다.

 

너 이름이 뭐야? . 센티넬은 이름 함부로 알려주고 그러면 안 되나?”

카게야마 토비오.”

에엑, 내가 들어도 되는 거야?”

별로 상관없어.”

오호.”

너는?”

? 내 이름은 비밀……

 

카게야마가 서늘한 눈으로 히나타를 노려보았다. 닥치고 말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협박에, 소년은 재빨리 말꼬리를 붙였다.

 

……이 아니지. 그럼. 뭐 대단하다고! 내 이름은 히나타 쇼요야.”

 

어쩐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다 먹었어?”

.”

 

싹싹 비운 죽 봉지를 내려다보며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했다. 가이드가 어떻게 됐건 히나타는 일단 쓰러진 카게야마를 데려와 쉬게 해준 사람이었다. 그것도 2층이 아닌 다락방까지 끌고 갔으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테다. 임무 중이 아니었다면 곧바로 사례를 할 수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임무 중의 그는 땡전 한 푼 없는 거지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곤란한 표정으로 옷을 뒤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본 히나타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내 옷인데.”

“!?”

 

어쩐지 좀 작은 감이 있었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한바탕 전투를 마친 뒤의 복장이 이렇게 깨끗할 리도 없었다. 허리춤에 있을 안정제도 당연히 없는 게 당연했다. 카게야마가 입고 있었을 바지 벨트에 달려 있었을 테니까.

 

내가 너 다락방으로 옮기느라 좀 고생했거든? 대신 안정제랑 권총이랑 탄창은 두고 가라.”

그것만으로도 돼?”

 

카게야마가 슬쩍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히나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의아하기만 했다. 권총과 탄창은 일반인들이 구하기 어려운 거라 그렇다고 쳐도, 안정제는 왜? 카게야마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너 센티넬이야?”

아니.”

근데 안정제가 왜 필요해?”

권총 받는 거랑 비슷한 이유라고나 할까.”

 

카게야마는 그가 있는 1층을 둘러보았다. 2층과 다락방에서도 느낀 거지만 이 집은 반절이 폭삭 무너져 있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잔해는 무너진 절반치의 건물 벽이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롭게 서 있는 이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테니 숨어 살기에는 제격인 것 같긴 했다. 히나타가 숨어 살고 있다는 사실은 확신하기 어려웠지만, 1층과 2층이 엉망인 상태로 내버려두고 다락방만이 제대로 사람 사는 곳처럼 갖춰졌던 것을 떠올리면 아마 그럴 가능성이 컸다.

 

카게야마는 가까운 현관 밖으로 성큼 나섰다. 뒤에서 히나타는 주변의 동태를 살피며 살그머니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전에는 정원이었을 것 같은 마른 땅이 보였다. 낯이 익다고 생각한 카게야마가 무너진 벽을 훌쩍 넘었다. 조금 멀리 발길 닿는 대로 걷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그가 막 적군을 쓸어버린 장소였다. 먼 곳에서 보아도 얼룩덜룩하게 묻은 피가 선명했다. 시간이 꽤 지난 탓에 갈색으로 변해 있었지만, 누구든 피를 흘린 자리라고 의심치 않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체들이 있는 이상. 다만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하늘에 노을이 막바지로 위태롭게 번지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카게야마는 그가 날뛰느라 더욱 아수라장이 된 틈바구니로 몸을 밀어 넣었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이들을 상대로 흉포하게 놀았던 흔적을 다시 눈에 담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다. 목이 꺾이고 머리가 터지고 가슴이 도려진 이들의 얼굴을 확인하면서도 그는 무덤덤했다.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이라도 해도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처리해서 다행이다라는 것뿐. 카게야마는 코끝에 비리게 남은 피냄새들을 헤치며 시체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했다. 잠시 잊고 있던 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해가 완전히 진 이후에도 기계적으로 반복했을 터였다.

 

얼굴 확인하는 거야?”

 

그의 존재를 새삼스레 자각하자마자 그게 너무 크게 확 와 닿아서 카게야마는 흠칫했다. 히나타는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최대한 시야를 가리려는 듯 양 손을 둥글게 말아 망원경을 쓴 것처럼 눈에 가져다대고 있었다. 무심코 그게 귀엽다고 생각해버린 카게야마는 재빨리 고개를 털어낸 뒤 말했다.

 

찾아야지.”

?”

가이드.”

어떻게 생겼는데?”

주황색 머리카락. 주황색 눈동자. 여자.”

그 여자라면 한참 전에 도망쳤는데?”

 

막 허리를 숙여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시체를 확인하던 카게야마가 천천히 히나타를 돌아보았다.

 

가이드? 알아? 봤어? 확실해?”

주황색 머리카락에 주황색 눈동자 가진 여자라며. 본부 어쩌고 무전하더니 사라졌었는데.”

 

카게야마는 맥이 탁 풀렸다. 히나타의 말이 맞다면 굳이 여기서 시체들의 낯짝을 살펴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도망쳤다니. 사라졌다니. 카게야마는 기가 막혀 혀를 찼다.

 

언제쯤인지 기억 나?”

흐음네가 탱크 뒤집을 때였던가

 

거의 끝마무리 때쯤이었다. 폭주의 전조가 있진 않았을 땐데 거기서 겁을 집어먹고 도망갔다면 진짜 엄청난 새가슴이었다. 카게야마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너 그걸 다 보고 있었어? 휩쓸리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멍청아!”

멍청이?”

맞잖아. 임무 중인 센티넬 레이더에 걸리면 끝장나는 거 몰라?”

알긴 아는데네 말 좀 재수 없다.”

사실인데 뭐?”

 

히나타가 입을 뜨악 벌리고 카게야마에게서 한걸음 멀어졌다.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흘겨보았다. 얼굴 표정 하나하나가 다 솔직했다. 무서우면 무섭다, 싫으면 싫다, 재수 없으면 재수 없다. 같은 주황색 머리카락, 같은 주황색 눈동자를 했으면서도 싫으면서 친절한 척 겁먹었으면서 아닌 척했던 누군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차라리 카게야마에게는 전자의 경우가 더 나았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손을 둥글게 말아 쥐고 눈가에 가져다댄 히나타의 모습을 보았다. 호흡을 보아하니 냄새를 맡지 않기 위해 입으로만 숨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행동을 서슴없이 굴면서도 히나타는 당당했다. 카게야마는 널브러진 시체들을 눈으로 쭉 한 번 본 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숫자와 일치하는지를 살폈다. 그가 폭주 직전까지 가면서 쓸어버린 장소이니 그럴 가능성은 애초부터 낮았지만, 운 좋게 살아남은 이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야 그는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다.

 

카게야마가 받은 임무는 K-10 구역으로 가 은밀히 숨겨져 있을 군수용품을 찾아내는 것. 가이드가 도망쳤다면 본부로 갔을 것이다. 본부로 도망간 것이 아니라면 평생 도망자가 될 것을 각오했을 터였다. 지금으로서는 가이드가 어느 선택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카게야마 정도의 센티넬이 강제로 안정제를 투여 받고 정신을 잃고 있을 동안 이곳의 수습이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는 건 가이드가 본부가 아닌 곳으로 도망쳤거나 변고가 생겼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카게야마는 본부로 돌아가는 것과 계속해서 임무를 속행하는 것을 두고 고민했다. 지금으로서는 본부로 돌아가 상황을 보고하는 게 나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K-10구역에 아직 남아있을 군수용품들이었다. 그것을 이용할 반정부군은 바로 오늘 카게야마가 쓸어버렸다고는 해도 이곳에 숨어있던 이들이 반정부군의 전부는 아니었다. 군수용품에 대한 정보가 어디까지 뻗어있느냐가 문제였다. 그래도 임무에 차질이 빚어졌으니 돌아가는 게 낫겠지. 카게야마가 히나타를 돌아봤을 때였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듯했던 무거운 얼굴이 순간 반짝 빛을 담아 카게야마는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 좋은 생각이 났어!”

 

카게야마가 할 말을 잃고 있었을 때 히나타가 빠르게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았다. 순간 온기가 확 돌고 후끈후끈해지는 낯선 기분에 인상을 썼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 히나타가 그를 이끌고 재빨리 이 장소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잠깐! 어디 가는 거야?”

가이드 찾으려고 여기 온 거 아니었어?”

맞는데.”

기이드 도망간 걸로 확인 됐으니까 여기 볼 일은 끝난 거 아니야?”

일단은……

그럼 나 좀 도와주고 가!!”

 

히나타가 훽 뒤를 돌아 카게야마를 마주하며 말했다. 해가 완전히 져버려 깜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주친 눈동자는 낮에 걸린 햇빛처럼 반짝반짝 빛나서, 카게야마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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