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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카게히나] Turntable 4

별골짜기 2016. 3. 27. 10:39

카게히나

Turntable 4

센티넬버스

 

 

 

 

. . . 심장은 원래 입안에 있는 게 아닐까. 카게야마는 녹아버릴 것 같은 감각에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실없는 생각을 했다. . . . 그게 아니라면 심장이 뛰는 소리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들릴 리가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심장이 너무 크게 튀어서 목구멍을 두드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맞닿은 심장이 공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뜨거운 소리가 귓가에 번졌다. 확인을 하는 것처럼 카게야마의 손가락이 무심코 히나타의 턱 밑을 짚었다. 그의 뜨거운 손가락이 스치자 히나타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를 밀어내느라 급급했던 히나타의 손은 어느덧 카게야마의 옷깃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게 어쩐지 좋아서, 카게야마는 조금 더 오래 그를 붙잡은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이 지나 입술을 떼어낸 카게야마의 눈에 히나타의 눈동자가 들어찼다. 서로의 눈에 서로가 담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히나타의 손이 재빨리 거둬졌다. 카게야마도 히나타의 턱에서 손을 뗐다. . . . 심장의 거리가 멀어졌는데도 여전히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의 심장소리가 너무 큰 모양이었다. 히나타도 들었을지 궁금해졌다. 히나타는 영 카게야마를 보지 못하고 외면하고 있었다.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방금 전의 행동이 몹시도 충동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피가 세게 돌아 후끈해진 손끝을 쥐었다.

 

나는,”

 

까지 말해야 했는데 히나타의 손이 카게야마의 입을 막았다. 찰싹. 언젠가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히나타는 입술을 잘근 씹고 있었다. 한쪽 눈이 찡그려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 맘에 들지 않으면서도 오묘한 표정이라 카게야마는 조금 당황했다.

 

사과하지 마.”

?”

몰라. 그냥 기분 나빠.”

?”

그리고 너, 사람 동의도 없이 막막 들이대면 어떡해!?”

그거야하고 싶었으니까.”

 

히나타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카게야마는 말실수를 한 건가 하고 추측했다.

 

그냥? 또 본능 따라서? 파렴치한이네 이거!”

본능이라기보다는……

 

카게야마의 주저하는 모습에 히나타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신중해졌다.

 

본능이 아니면? 이유가 따로 있어?”

있긴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분명 싫어할 거라 말 안하는 것뿐이야.”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려 히나타를 외면했다. 감자싹을, 네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는 가지의 뿌리를 뽑고 싶다고 하면 분명 히나타는 왜 그렇게 폭력적이냐고 역시 센티넬은 못 견디겠다고 외칠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절대 센티넬의 본능을 따라 그렇게 결론내린 게 아니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히나타는 더 묻지 않고 주섬주섬 다시 감자들을 가리기 위해 잔해를 쌓기 시작했다.

 

다시 완벽하게 사려진 감자싹들을 확인하자 부실한 집은 어느새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근처에 아무도 없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히나타를 들여보낸 카게야마는 함께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전기 히터에서 나오는 어둡게 은은한 빛이 낡은 모포를 비췄다. 그 위에 나란히 앉아 카게야마가 새로 가져온 모포를 덮었다. 복실복실한 게 기분 좋아. 히나타가 말했다. 카게야마는 꼭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카게야마는 책상 위를 보았다. 안정제는 여전히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오늘 쓸 일이 없었던 안정제를 빼낸 뒤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한 바퀴 더 돌아보고 본부로 보고하러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냥 하루 더 눌러 붙어 있을까. 오늘 하루 내내 투자했다면 분명 금방 끝났을 임무였지만 삐딱한 생각도 해봤다.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따라 자리에 누웠다. 전기난로에서 비추는 빛만 희미하게 흩뿌려지는 사이 어두컴컴한 천장을 보였다. 시선을 조금 내리니 책상 옆 창문 밖에는 깜깜한 하늘이 보였다. 밖에서 본다면 이곳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이 집도 어둡겠지. 카게야마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감자 키우는 전구는 불 껐지?”

당연하지. 아까 껐는데?”

그럼 됐고.”

난 감자 뽑을 생각 없으니 그런 줄 알아라. , , 그리고 또 뽀뽀할 생각도 말고!”

 

히나타가 재빨리 입을 가리며 말했다. 손바닥에 부딪쳐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는 목소리를 들어서야 카게야마는 아까 히나타와 했던 키스를 떠올렸다. . 딱히 그걸 의도한 건 아닌데 히나타가 말하는 바람에 오히려 떠올라버렸다. 카게야마는 한 번 더 하고 싶다고는 생각했지만 일단은 부정했다.

 

안 했거든!??”

정말? 진짜지? 안 뽑을 거지?”

 

히나타가 반쯤 몸을 일으켜 카게야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히나타의 얼굴을 코앞에 마주하자 또 심장이 뛰다 못해 아주 죽을 맛이었다. 카게야마는 울그락불그락해진 얼굴로 히나타의 얼굴을 밀어버렸다.

 

으악!”

또 키스하기 싫으면 닥치고 잠이나 자!”

.”

 

히나타가 입을 다시 가리고 꿍얼거린 뒤 똑바로 누웠다. 카게야마는 어둠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던 히나타의 얼굴이 허공에 둥둥 뜨는 것 같아 얼른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히나타가 완벽히 잠들었음을 알리는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지만 카게야마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고, 닿은 체온이 유독 뜨거운 것 같고, 심장소리는 계속 크게 느껴지고. 머리만 대면 잠들 줄 알았던 과거가 거짓말인 것 같았다. 그는 어떻게든 잠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을 충실히 910마리 정도 셌을 때여서야 카게야마는 끼무룩 잠이 들었다.

 

 

 

 

늘 그렇듯 꼭두새벽에 일어난 카게야마가 다시 잠들까, 아니면 그냥 누워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임무를 마무리하러 갈까 고민하다가 어영부영 히나타가 일어날 때까지 시간을 보내게 된 이후. 주섬주섬 씻고 나온 히나타와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일찍 일어나는 히나타와 나란히 집 밖으로 나온 카게야마는 자연스러워 보이는 발걸음에 궁금해졌다. 처음 가거나 즉흥적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디 가냐고 물어봐도 히나타는 따라오면 안다며 발걸음을 옮겼다.

 

히나타가 향하는 곳은 K-10구역의 북서부 쪽인 것 같았는데 어제 임무를 위해 돌아다닐 때도 오지 않은 곳이었다. 다른 곳보다 훨씬 많이 파괴된 잔해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거의 가로막히다시피 길을 꽉 메우고 있는 회색 콘크리트 조각들 사이로 용케 발을 디디며 헤쳐나갔다. 틈틈이 카게야마는 겸사겸사 임무도 충실히 해냈다. 이쪽에도 반정부군의 손길이 미쳤던 것인지 총탄이 담긴 박스가 발견되었다. 이런 위험한 지역을 어떻게 스스럼없이 다니는 것인지 카게야마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혼자 다니는 거냐?”

그렇지. 혼자 사니까.”

반정부군이 있는데도?”

반정부군은 최근에 여기로 몰려든 거라 별로 신경 안 썼는데. 있다고 해도 이거 있어서 괜찮아.”

 

박스 통째로 불을 붙이고 온 카게야마가 묻자 히나타는 아무렇지 않게 손에 든 안정제를 흔들며 말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걸로 되는 거냐.”

오히려 여기 지나갈 때마다 가끔 반정부군이 흘리고 간 안정제 발견하거나 식량 줍는 운수 좋은 때도 있어.”

그래도 너무 위험하잖아.”

 

히나타가 크게 웃으며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당연히 나 혼자일 때는 이런 큰 길로 안 다닌다구? 센티넬인 너랑 있으니까 여기로 온 거지 다른 때는 몰래 돌아서 가느라 바빠.”

그렇다면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말이 네 덕분이야!’라는 뜻인 것 같아서 머리를 긁적였다. 괜히 쑥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키득 웃는 히나타의 웃음소리를 듣지 않으려 그는 히나타에게 빨리 앞장서라고 재촉했다. 히나타는 알겠다고 투덜거리며 다시 앞서나갔다. 카게야마는 그 뒤를 따라 가며 느릿하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그가 처리해야 할 남은 군수물자가 몇 개인지 짐작하기 위해서였다. 분명 탱크가 어딘가에 한 대 더 있을 텐데,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총탄은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박스 단위로 어림잡으면 대강 다 처리한 것 같기도 하고, ……

 

이리 와.”

 

히나타가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카게야마를 끌어당겼다. 카게야마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히나타의 손이 옷깃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고 순순히 끌려가주었다. 히나타와 함께 거의 무너진 담벼락에 몸을 숨긴 카게야마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 너머를 살폈다. 눈에 익숙한 지형과 조그만 건물. 한때 이곳 K-10구역을 관리했을 주민센터였다. 카게야마는 임무를 나오기 전 확인한 서류를 떠올렸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거의 폐허나 다름없는 건물. 폭격에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존재 의미를 잃어버려 방치된 곳이었다.

 

설마 저기 볼일이 있다는 거야?”

.”

 

히나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잘못됐냐는 눈빛이었다. 카게야마는 눈가를 찡그렸다. 반정부군이 저기에 뭘 설치해두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카게야마가 그 이유를 물으려 하자, 히나타가 손가락으로 빈 주민센터 건물을 가리켰다. 카게야마의 시선이 따라갔다. 히나타가 정확히 건물의 어느 부근을 가리키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카게야마는 찬찬히 건물 근처를 관찰했다. 예리하게 날카로운 눈이 주민센터의 창문, , 근처 바닥을 훑다가 발견한 것은 둘둘 말아져 끈으로 묶인 종이뭉치였다. 저걸 말하는 건가? 의아해하는 그의 등을 히나타가 살짝 밀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에게 고개를 돌려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가라고?”

 

끄덕끄덕. 카게야마는 별로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히나타의 눈빛을 어길 수가 없어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처에 누구 있을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들키지 않고 갔다 와.”

센티넬을 뭘로 보는 거야.”

 

카게야마는 손가락을 들어 히나타에게 확인시키듯 끈으로 묶인 뭉치를 가리켰다. 저걸 가져오는 게 맞냐는 물음에 히나타는 그렇다고 답했다. 일단 목표물은 확실히 체크했으니 그 다음은 쉬웠다. 근처에 느껴지는 기척도 없었고, 저기 지뢰라도 있지 않은 이상 그냥 다녀오면 끝인 일이었다. ‘최대한 들키지 않게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이건 그가 해온 임무 중 가장 손쉬운 임무였다. 카게야마는 쭈그려 앉은 자세에서 팔을 꺾어 스트레칭을 한 뒤 순식간에 무너진 담벼락을 건너뛰어 사라졌다. 히나타가 어안이벙벙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 사이, 카게야마는 이미 손에 목표물을 획득하고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히나타가 뭉치를 얼떨떨하게 받았다. 그런데 아직 할말이나 할일이 남았다는 듯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 험악해진 얼굴로, 살짝 허리를 숙였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생각을 알지 못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데 그러지 못하게 팔이 잡혀버렸다. 카게야마는 어두운 얼굴로 불만스럽게 말했다.

 

가져왔어.”

. 알아.”

가져왔어, 최대한 안 들키고.”

, 감사합니다?”

 

카게야마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가 듣길 바라던 대답이 아니었다. 그 말이 나올 때까지 계속 쳐다보고 있으리라 다짐한 카게야마가 입매를 울퉁불퉁하게 찌그러뜨리자, 히나타가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단해? 잘했어? 최고야?”

…….”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 광경을 생생하게 감상한 히나타가 숨죽여 웃었다. 혹시 근처에 누가 있기라도 할까봐 어깨를 떨며 참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불만스럽게 히나타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웃어?”

푸훕, 아니저얼대 널 비웃는 건 아니고! , 푸흡그냥새삼스러워 보인다고나 할까……

뭐가 새삼스러운데?”

네 표정엄청 솔직하잖아!”

 

카게야마는 이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어본 적 있었다. 츠키시마였던가……. ‘제왕은 싫어하는 게 눈에 딱 보인다니까.’ 라고 했었지. 츠키시마 때와는 달리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웃음거리가 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가 퉁명스레 말했다.

 

웃지 마, 멍청아.”

 

하지만 히나타는 웃음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 칭찬 좋아해? 최고라는 표현 좋아하는구나? 생긴 건 칭찬 들어도 완전 쿨하게 그 정도는 당연한 거다.’ 라고 말하게 생겼으면서 표정에 너무 훤히 드러난다고! 아니야? 근데 아까는 왜 칭찬 기다렸어? 혹시 나한테 칭찬 듣고 싶은 걸까나~

 

종알종알 쏟아지는 히나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억울했다. 가져다 달래서 가져다준 건데!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놀리기나 하고 멍청이가! 카게야마는 울컥해 히나타의 양어깨를 잡았다. 히나타의 웃음소리가 고장 난 것처럼 뚝 끊겼다. 카게야마는 히나타와 마주보았다. 노려보는 시선을 그대로 받고 있는 히나타는 카게야마가 화난 거라고 생각했는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니 나는 너 화나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냥 재밌어서!”

 

화가 났던 건 아니지만 횡설수설 걱정하는 히나타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좀 풀렸다. 그가 당한만큼 심술궂게 굴고 싶은 생각이 들어 표정을 일부러 풀지 않고 있자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손에 들린 정체불명의 종이뭉치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카게야마는 데구르르 굴러가는 히나타의 눈동자를 보았다. 화났으면 어떻게 풀어줘야 하지, 많이 화난 건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귀여워. 결국 카게야마는 웃고 말았다. 히나타에게는 그저 무서운 미소로만 비춰졌지만 카게야마는 진심이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히나타의 입술에 한 번 뽀뽀했다.

 

!?!?”

 

히나타가 놀라 부릅뜬 눈으로 카게야마를 피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손등을 들어 입술을 가린 히나타의 눈이 한순간 많은 외침을 쏟아냈다. 갑자기 이거 뭐야? 너 나한테 또 뽀뽀한 거야? 너 왜 뽀뽀해? 내가 해도 된다고 말 안 했잖아! 그리고 그 수많은 질문이 압축되어,

 

이 나쁜 자식!”

 

이라는 다소 과격한 단어로 튀어나왔을 때,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손을 잡고 재빨리 끌어당겼다.

 

치한야마!! 나 아직 말 시작도 안 했어! 어디가!”

근처에 누가 있는 것 같아서.”

 

히나타가 입을 합 다물었다. 표정은 좋지 못했고, 커다란 목소리가 아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중얼중얼 온갖 나쁜 말이 튀어나오는 중이었지만 카게야마는 순간 머리를 굴려 나온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일반인에게는 약간 빠르지 않나 싶을 정도로 속도를 올려도 히나타가 용케 그의 손을 놓지 않고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고 느껴지는 기척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카게야마는 끝까지 숨기리라 다짐했다.

 

바다처럼 깔린 콘크리트 잔해가 물결치는 부근에 이르러 카게야마는 속도를 늦췄다. 히나타는 겹겹이 쌓여 울퉁불퉁 어긋난 잔해 사이를 걷다가 삐끗하지 않으려 집중하느라 잠시 말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잡힌 오른손이 아닌 왼손에 여전히 종이뭉치를 들고 있는 히나타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게 뭔지 아직 못 물어봤다. 히나타의 책꽂이에 꽂혀 있던 것들과 비슷한 재질인 것 같기도 하고.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조용해진 틈을 타 물었다.

 

근데 그건 뭐야?”

몰라, 이 멍청야마야.”

뭐야?”

누가 맘대로 뽀뽀하래?”

그건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긴? 하고 싶어서 했어, 그냥 했어, 본능이 아니곤 설명 못하지? 뻔뻔야마같으니라고.”

귀여워서 했는데.”

뭐어?”

네가 귀여워보여서 그랬어.”

 

맞잡은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갔었다면 착각일까?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흘낏 쳐다보았다. 히나타의 얼굴은 햇빛을 오래 받아서인지 조금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진짜 불공평하네.”

뭐가?”

있어, 그런 게.”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치열할 정도로 열심히 콘크리트 바닥을 넘어서자마자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손을 놓았다. 떨어진 손이 아쉽다고 생각하며 바지에 문지르는데 히나타가 종이뭉치에 묶여있던 끈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기며 그것을 펼쳐들었다. 카게야마는 그제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뭐더라…… 저 종이 이름이……

 

이거 신문이야.”

신문.”

 

맞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요새도 종이로 된 신문이 발행되는 줄은 몰랐다. 전부 전자화 된지 오래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천천히 설명을 해주었다. K지역은 원래 발전이 더딘 곳이라 오래된 턴테이블처럼 구식 유물이 많았다고. 이쪽은 종이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 덕분에 매일 신문이 배달되어 온다고 했다. K-10의 주민센터는 이미 사람이 없어진지 오래지만 히나타가 그쪽으로 배달을 신청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배달부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의심 없이 꼬박꼬박 신문이 배달되어 온다고 했다.

 

히나타는 신문을 읽으며 간혹 투덜거렸다. 이 자식은 왜 이런대. 저 자식은 왜 이래. 이 법은 왜 이렇게 어려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래서 누가 나쁘다는 건데?

 

히나타 너.”

 

카게야마가 중얼거렸다. 신문을 펼쳐 잘 접고 기사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던 히나타가 고개를 들었다.

 

정부군도 반정부군도 싫다고 했으면서 이렇게까지 신문을 찾아 읽는 이유가 뭐야?”

 

카게야마의 질문에 히나타가 눈가를 찡그렸다. 히나타는 보고 있던 신문을 잠시 접었다.

 

둘 다 싫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지내야 돼?”

그건 아니지만……

 

카게야마는 솔직하게 물었다.

 

네가 신문을 본다는 건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는 게 아닌가 해서.”

…….”

난 좋아하지 않는 일에 신경 쓰지도 않고 굳이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않아. 반대로 말하면 좋아하는 일에는 신경 쓰고 머리 터질 정도로 생각한다는 뜻이야.”

 

히나타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신경 쓰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게야마의 방식으로 생각하면 그건 히나타가 어느 정도 세상을 좋아한다는 얘기가 됐다. 이런 저런 일이 일어나는 세상. 그 어느 편에도 섞이기 싫어 혼자 살고 있는 히나타의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점이라고 생각했다.

 

넌 아니야?”

 

히나타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급속도로 진지해진 히나타의 태도에 놀라긴 했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혼자 있는 걸 택했다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니야.”

 

히나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곤란한 눈으로 카게야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감자를 키우는 거나 굳이 신문을 구독해서 보는 거, 그리고…… 네가 찾아와도 안 쫓아내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야.”

외로워서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리면 되잖아?”

그러고 싶지 않아.”

외롭다며?”

난 정부나 반정부군이나 둘 다 싫다니까?!”

따지자면 나는 정부쪽이야! 근데 내가 찾아오는 건 안 내쫓는 거라며! 외로우니까!”

넌 달라!!”

뭐가 다른데!!”

넌 내, 아니, 너는 센티넬이잖아!”

그래! 정부 소속 센티넬!”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그럼 뭐가 중요한데 멍청아!!”

 

카게야마가 버럭 소리치자 히나타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히나타는 곧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돌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히나타의 손이 카게야마의 바짓단을 잡아당겼다. 옆에 앉으라는 뜻 같아 카게야마가 쭈그려 앉았다. 히나타는 돌조각의 뾰족한 부분으로 흙바닥에 동그라미 두개를 무성의하게 그렸다.

 

이것 봐. 이건 너고, 이건 나야.”

…….”

그리고 너랑 나는 일단 만나버렸으니까이렇게 끈이 연결되어 있어. 엄청 두꺼운 끈이!”

 

카게야마가 허리춤과 히나타를 번갈아 보았다. 진짜 끈을 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히나타가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냐 비비법(비유법)? 인가, 그렇다고 쳐.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네가 강에 빠져버린 거야!”

 

히나타가 카게야마 동그라미 위를 마구 덧칠해 선을 그렸다.

 

사람 멋대로 죽이지 마.”

죽이는 게 아니라! 그래, 너는 수영을 하고 있다고 해줄게 그럼.”

수영복은 입고 있는 거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어쨌든 네가 강 위에 둥둥 떠 있는데, 문제는 내가 수영을 할 줄 몰라! 별로 배우고 싶은 생각도 없고!”

?”

강이 싫으니까!”

물 공포증이냐.”

그렇다고 쳐. 그런데 너랑 나는 이렇게 끈으로 연결되어 있잖아? 그러니까 강은 싫어도 너는 계속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거지. 이해 돼?”

……?”

 

히나타는 나름 머리를 굴려 열변을 토한 것 같았지만 카게야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히나타가 머리를 부여잡고 어떻게 하면 더 잘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할 때였다.

 

왜 꼭 수영을 해야 되는데?”

?

수영을 못하면 튜브 타고 둥둥 떠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 히나타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카게야마가 말을 이었다.

 

내가 수영하는 게 부러워서 쳐다만 보는 거면 튜브타고 있으라고.”

부러워서가 아니라!”

 

히나타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선 한참 그림을 노려보던 히나타가 다시 말했다.

 

단세포 바보. 아무튼 그런 줄 알아.”

뭐가 그런 줄 알아.’. 납득 못했거든?”

시끄러워 뻔뻔야마!!”

 

카게야마가 발끈하려 할 때였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귀에 습관적으로 찼던 무전 장비에서 신호가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뻗어 히나타의 입을 막은 뒤 통신을 연결했다.

 

.”

나야, 제왕.’

…….”

 

왜 하필이면 또 츠키시마 녀석이냐. 카게야마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츠키시마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제왕의 공손한 대답이라니, 순간 소름 돋았어.’

시끄러워. 용건이나 말해.”

어쩐 일이겠어? 임무 끝나고도 남았을 텐데 어딜 갔는지 안 돌아오니까 난리지.’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돌아보았다. 히나타 때문에 임무를 일부러 느리게 수행하고 있는 건 맞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그가 귀찮은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며 답했다.

 

가이드 없이 임무 나왔잖아. 폭주 안 하려고 일부러 천천히 하고 있어.”

가이드를 찾으러 간 게 아니라?’

?”

 

알 수 없는 말에 카게야마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가이드는 아니지만 누군가를 찾아온 건 맞기에 본능적으로 나온 그의 살벌한 목소리에 츠키시마가 말했다.

 

어이구 무서워라. 내가 듣기로 네가 그렇게 누굴 보고 싶어 한다기에 가이든가 했지.’

쿠로오상 만났냐?”

정말인가 봐?’

 

쿠로오가 츠키시마와 친한 걸 잊고 있었다. (츠키시마 본인은 부정하겠지만.) 카게야마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쓸데없는 얘긴 집어치워. 난 임무 천천히 하고 갈 거니까……

카게야마 토비오.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난 이번에 받은 임무도 아직

도망친 가이드를 발견했어. 아무래도 본부로 돌아오는 길에 반정부군의 손에 잡힌 것 같아.’

 

카게야마의 눈이 커졌다.

 

그들이 가이드를 돌려보내는 대가로 미사일을 요구했고. 하지만 넌 알고 있지?’

응해줄 리가 없지.”

잘 아네. 그래서, 그들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로 네가 가줘야겠어.’

 

카게야마는 왼쪽 오른쪽 차례로 목을 꺾었다. 츠키시마가 말을 전달해올 정도면 이미 상부에서 얘기가 끝났다는 소리다.

 

그런데 왜 하필 나야? 난 지금 가이드도 없는데.”

넌 가이드 있으나 없으나 소용없잖아. 어정쩡한 센티넬 보냈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것보다는 불안정한 너라도 보내서 깨끗하게 쓸어버리는 게 낫다는 거겠지.’

폭주를 해도?”

한 번 한다고 해도 안 죽잖아.’

 

재수 없는 자식. 카게야마는 이를 갈았다. 다행이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가이드들의 울분 섞인 안정제 투여 덕분에 폭주까지는 가본 적 없는 카게야마였다. 그런데 이번은 정말 폭주까지 가버릴지도 모른다. 반정부군의 손에 잡혀있는 가이드에게 기적적으로 효과를 보지 않는 한. 한 번 폭주가 대수냐 싶기도 했지만 역시 본능적으로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쿠로오상, 보쿠토상, 우시와카상 다 바빠. 그나마 너밖에 없어.’

징그러운 소리. 장소 불러.”

 

오만상을 썼을 게 분명한 츠키시마가 정확한 그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근처의 M지역이었다. 지금 상부에서 시간을 끌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처리하라고 츠키시마가 덧붙였다. 대답을 하자마자 뚝 끊긴 통신에 카게야마는 투덜거렸다. 그리고 계속 그를 쳐다보고 있었던 히나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신문을 읽는 것 같더니 어느새 완전히 꼬깃꼬깃 접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쉽다.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간만에 제일 편하고 제일 괜찮은 임무였는데. 츠키시마에게 거짓으로 보고도 한 이상 느긋하게 하루 더 미룰지 게으름 피우려던 그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임무라니. 그것도 폭주 가능성이 거의 90%에 육박하는 임무. 폭주를 하면 기본 1주일이나 2주일은 병동 신세를 져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그동안은 여길 찾아올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폭주가 무서워 안 갈 수도 없고. 카게야마는 히나타에게 상황을 설명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히나타가 더 빨랐다.

 

, 다른 임무 가?”

 

대화 내용으로 대충 정황을 파악한 듯했다. 카게야마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이번 임무도 못 끝냈잖아?”

이게 더 급하대.”

무슨 임문데?”

반정부군 소굴 들어가서 가이드 빼오기.”

가이드??!”

네가 본 도망쳤다는 가이드. 거기 있나본데.”

혼자 가? 위험한 거 아니야?”

그야 그렇겠지. 폭주는 거의 확정이니까.”

 

히나타의 눈이 흔들렸다. 아까보다 한결 작아진 목소리로 히나타가 말했다.

 

폭주라면.”

그래서 나, 몇 주 못 올 수도 있어. 혹시 안 온다고 외, 외로워하지 말고!”

바보야, 그게 문제냐!!”

? 그럼 뭐가 문젠데!?”

정부는 가이드도 없는 센티넬을 왜 보낸다는데!?”

갈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어중이떠중이는 안 돼.”

넌 아니고?”

아니지.”

 

히나타는 어쩐지 억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뭐야?”

됐어. 출발은 언제 해?”

당장 가야돼. 나 안정제 좀 줘. 혹시 모르니까 내가 제어할 수 있으면 찔러야지.”

 

카게야마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안정제는 히나타에게 고이 보관되어 있었으므로 그걸 달라고 한 행동이었지만, 히나타가 내민 것은 자신의 손이었다.

 

……?”

앞장 서.”

?”

같이 가줄게.”

 

카게야마의 눈이 커졌다. 그러다가 곧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위험해.”

안 위험해.”

위험하다면 그렇게 알아들어 좀 멍청아! 지난번에 못 봤어? 내가 어떻게 쓸어버리는지?”

 

히나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나는 그때 널널 죽이려고 쫓아갔었다고. 폭주 직전의 나는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살아있는 거면 전부 죽여 없애니까, 너 분명히 다치거나 위험해질 거다. 도와주겠다는 건 고맙지만……

그래서 나 다쳤어? 안 다쳤거든! 안정제 찔러서 기절시켜준 게 누구더라!?”

 

히나타가 카게야마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난 안 위험해. 신경 쓰이게도 안 하고 잘 숨어 있을게. 같이 가.”

그게 그렇게 쉬운 말이 아닌,”

가이드도 없이 어떻게 하려고!! 폭주할 가능성 엄청나다며!!”

한 번 한다고 안 죽어!”

그 한 번이 몇 번 될 줄 알고!”

운 좋으면 그 잡혀있는 가이드가 어떻게 해줄 거니까 걱정 말라고!”

그건 더 싫다!!!”

 

빽 소리친 히나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게 물들었다. 카게야마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물었다.

 

방금 그 말……

아 안들려 안들려어어어! 나는 안 들린다 안 들린다아아아! 빨리 앞장서 멍청야마!! 급하다며!! 안정제 받고 싶으면 빨리 가!!”

 

카게야마는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는 채 그를 막무가내로 끌어당기는 히나타의 아무렇게나 뻗친 주황색 머리카락을 보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위아래도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 꼭 심장을 간질거리는 것 같아서, 카게야마는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 그의 이상하게 웃는 표정을 발견한 히나타가 그의 손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웃음을 참은 것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카게야마와 히나타가 향한 M지역은 바닷가 근처에 있는 조그만 도시였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주민의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해 으로 규정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런데 반정부군이 이곳에 있었을 줄이야. 카게야마는 막 도착한 M지역의 풍광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띄엄띄엄 낮은 집들이 있었다. 포장된 도로이긴 했지만 1차선밖에 되지 않는 좁고 기다란 도로가 바닷가를 걸치고 깔려 있었다. 고만고만하게 낮은 집 사이에서 유일하게 규모 있고 말끔한 건물이 M지역의 주민센터였다. 그리고 반정부군은 저 센터를 점거해 가이드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가까운 집을 살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사람 사는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정작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간혹 그물을 수선하거나 망을 새로 만들던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모두 급하게 자리를 뜬 것처럼 사람들만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반정부군이 이곳의 주민들을 모두 잡아들여 죽였거나, 혹은, 그들이 원래 반정부군이었다거나. 일상에서 잘만 생활하다가 본분으로 돌아가 반정부군에 합류하는 경우는 많았다. 살해된 흔적도 없으니 카게야마는 후자에 가까울 것이라 추측했다.

 

히나타는 그 경우는 아예 생각하지도 못한 듯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집집마다 살폈지만 카게야마는 굳이 설명해주지 않았다. 히나타는 생각보다 허둥대지 않고 카게야마를 잘 따라다녔는데, 혼자 살게 된 이후에도 몇 번 K지역 밖을 나온 적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놀랐다. 여건상 자급자족할 수도 없었을 테니 그게 당연한 건데 말이다. 카게야마는 무의식적으로 이왕 익숙한 거 그냥 나랑 같이 살면 많이 좋을 텐데.’라고 말하려다가 흠칫했다. 막상 상상하니 꽤 괜찮은 생각 같았지만 타이밍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아 조금 뒤로 미뤘다.

 

잠시 생각을 접어둔 카게야마는 센터 근처에 이르러 히나타에게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초반부는 몸을 숨기고만 있는다면 큰 문제는 없다, 그렇지만 슬슬 더욱 격하고 잔인하게 상대를 처리하는 순간이 오게 될 거다, 행동이 이상해지는 낌새가 보일 때쯤 눈이 붉게 변하면 안정제를 투여해라, , 상황이 정리되지 못하고 가이드도 구해내지 못했을 때라면 아무것도 할 생각 말고 도망가라. 카게야마는 지금이라도 히나타를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의 의지가 너무 확고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주민센터 안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인기척을 느끼고 심호흡을 했다. 그의 발걸음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 단단하게 잠가놓았던 주민센터의 문이 사정없이 찢기듯 열렸다. 철벽같이 용접해놓았던 문을 부수고 들어간 카게야마의 모습에 1층을 지키고 있던 이들의 비명이 들렸다. 센티넬이다! 조준! ! 무기! 시장바닥보다 시끄럽게 섞인 목소리들이 교차했다. 카게야마를 맞추기 위해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들었다. 평균이상의 특출한 동체시력을 가진 카게야마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장애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들은 알지 못했다. 카게야마의 팔이 낯선 적의 목을 한 번 휘감았다. 매끄럽게, 그러나 어긋나는 소리를 내며 적이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의 팔꿈치에 찍힌 적이 갈비뼈를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1층에 있는 적들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적들이 다급하게 쏘아댄 총은 오히려 그들의 동지를 맞췄다.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동지를 보고 잠시 패닉에 빠진 자들은 때를 놓치지 않는 기민한 움직임에 곧 희생양이 되어 쓰러졌다. 무자비한 카게야마에게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상처 한줄기라도 그으려 발악하는 적들이 몰려들었다. 총을 버리고 육탄공세를 펼치는 이들은 그들의 바람과 열정과는 달리 아무런 상처도 내지 못하고 바닥으로 처박혔다. ! 한 명의 허리를 밟아 아작 내고 있는 사이 단검을 가지고 달려든 적은 순식간에 팔목이 꺾였다. 꺾였다기보다는 부러졌다고 해야 맞았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길게 뽑아내는 그의 심장이 순식간에 꿰뚫렸다.

 

주민센터의 1층은 순식간에 피비린내만이 진동하게 되었다. 널브러진 이들의 가운데 서서 카게야마는 숨을 거세게 몰아쉬었다. 주민센터는 천장이 높을 뿐 1층뿐이다. 그 어디에서도 가이드는 찾을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아직 시야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지상이 아니면 지하다. 지하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걷는 그의 발자국이 축축했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하지만 1층만큼 수많은 이들이 몸을 숨기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계단 밑으로 풀쩍 뛰어내릴 때였다.

 

!

기다렸다는 듯 포탄이 날아왔다. 그가 착지할 때를 노린 듯 정확한 방향으로 날아왔지만 카게야마는 몸을 들어 피했다. 하지만 포탄이 박힌 벽의 잔해는 피할 수 없어 순식간에 튀긴 조각들에 스친 상처가 났다. 약간 배어나오는 피를 한 번 슥 내려다본 카게야마는 이들의 대범함을 칭찬해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여기 어딘가에 히나타가 몸을 숨기고 있을 텐데. 카게야마의 눈빛이 사납게 일렁였다. 아까보다도 더욱 빠른 속도로 카게야마는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 ! ! 부딪치고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에 덧붙여 끔찍한 비명이 섞였다. 히나타는 1층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까는 대포라도 쓴 것인지 순간 벽과 천장이 흔들려 그대로 무너지는 줄 알았다. 언제쯤 내려가야 할까. 가이드는 어디에 있는 걸까. 히나타는 신문을 구독하러 몰래 들어간 K-10구역의 주민센터를 떠올렸다. 지상 1층과 지하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교전이 잦은 시기에 관공서가 높이 건물을 짓는 건 여길 공격하라는 뜻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M지역의 주민센터도 마찬가지일까. 지상 1층밖에 없으니 지하 1, 2층까지 있을까. 히나타는 귀를 기울였다.

 

지하 1층에서 나던 비명 소리가 잠잠해졌다. 가이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역시 지하 2층까지 있을까? 히나타는 천천히 카게야마의 발자국처럼 보이는 것을 따라 지하1층으로 내려갔다. 소음이 다시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를 향해 내뿜어지는 것이 분명한 총성과 탄성. 그를 향해 쏟아지는 것이 분명한 저주와 악다구니. 이곳에 숨어들어 있는 반정부군은 너무 많았다. 지금쯤 슬슬 폭주의 전조가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비명의 종류가 달라졌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가이드의 것으로 추측되는 높은 목소리는 분명 공포를 지니고 있었다. 반정부군이면 몰라도. 가이드마저.

 

가이드들은 나 싫어해.’

붙어 있어도 딱히 큰 차이는 없어. 맞는 가이드가 없거든.’

너도 보지 않았어? 가이드가 도망갈 정도야.’

 

! ! 더욱 격해진 소리가 들렸다. 가이드는 거의 울고 있었다. 히나타는 지하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점점 선명해지는 소리. 닿을 듯 가까워지는 호흡. . . 폭발적으로 뛰는 심장. 히나타의 눈에 부서진 벽들과 그 잔해 속에 덜덜 몸을 떨고 있는 가이드가 보였다. 그리고 몇 남지 않은 적을 해치우고 있는 카게야마 또한. 카게야마의 몸짓은 눈으로 읽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그만큼 그의 눈 역시 붉었다.

 

. . . 그와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카게야마가 가이드를 앞에 두고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그의 주위로 물결치는 살의를 히나타도 느낄 수 있었다. 가이드는 공포로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가이드를 곧바로 죽이지 않는 이유는 한줄기 희미한 본성. 언제든 끊겨도 이상할 것 없는 연약한 끈. 하지만, 그에게만은 다른 것을 알고 있다. 히나타는 꼭 쥐었던 손을 폈다가 다시 쥐었다. 그가 손에 쥔 것은 짧은 결심이었다. 허리춤에는 안정제가 세 개나 달려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끈을 따라 달렸다.

 

카게야마!!!”

 

폭주 직전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가이드에게서 히나타로 옮겨왔다. 눈을 마주친 순간 히나타는 처음부터 무섭도록 몰아붙여왔던 커다란 심장의 고동을 느꼈다. 히나타의 소리인지 카게야마의 소리인지 감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섞여드는 감각이었다. 그건 아마, 카게야마만이 유일하게 공유할 수 있는 느낌일 것이다.

 

어지럽게 섞인 두 고동이 맞닿은 순간, 히나타는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팔을 아프게 휘어잡았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지고, 카게야마의 손이 히나타의 양 볼을 더듬고, 그의 입술이 급하게 히나타를 찾아들었다.

 

강이든, 뭍이든, 카게야마 너라면.

 

거칠고 갈급하게 혀를 얽어오는 순간에도 히나타는 카게야마를 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아무리 부정해봤어도 결국 이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자 그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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