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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게히나ts] 때로는 질투

별골짜기 2016. 5. 26. 20:07

카게히나ts(히나타ts)

때로는 질투

1학년 때 이야기

 

 

 

 

하늘의 기세가 흉흉했다. 낮게 가라앉은 구름이 회색빛이 되어 떠다녔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아 카게야마는 기분이 내심 좋아졌다. 딱히 날씨를 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 시간표에 체육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비가 오지 않은 화창한 날씨라면 운동장에 나가 별로 재미없는 종목을 연습한답시고 시간을 허비할 게 뻔했다. 하지만 비가 온다면 야외 체육 수업을 할 수 없으니 체육관으로 옮겨 수업하게 될 것이고, 평소 하던 종목을 연습할 수 없으니 자유시간이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카게야마는 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근래 멈추는 토스를 연습하고 있던 카게야마로서는 좋은 기회였다.

 

카게야마는 가만히 시간표를 떠올렸다. 체육은 오전에 있었다. 그때까지 비가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그의 자그마한 소망이 곧 이루어질 거라고 하늘이 말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햇빛 때문에 켜놔도 별로 티도 안 나는 교실과 복도의 형광등이 유독 밝게 느껴졌다. 아마 하늘이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저녁처럼 어두침침하기 때문일 것이다. 카게야마는 회색빛 하늘을 등지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실내화로 갈아 신기 위해 사물함을 여는데 뭔가가 후두둑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허리 숙여 줍기도 전에 귓가로 파고드는 쨍쨍한 목소리를 들었다.

 

카게야마!!”

 

그가 고개를 돌렸다. 하나로 묶은 주황빛의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보이고 그 다음은 날씨와 대조적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따뜻한 색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금방 온몸에 열이 퍼져버리는. 카게야마는 잠시 모든 행동을 멈췄다. 요 근래 들어 그는 몸 어딘가가 고장난 것처럼 제어할 수 없는 것이 불쑥불쑥 생겨나곤 했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로봇처럼 딱딱하고 어리숙해지는 기분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게야마는 그가 사물함을 열다가 떨어진 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허리를 숙였던 것도 잊은 채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히나타의 시선이 그의 발치에 가 있다는 사실을 꽤 늦게 알아차리고 나서야 잊고 있던 봉투 뭉치를 떠올려낼 수 있었다.

 

카게야마는 멍청해 보이겠지만 다시 허리를 숙여 주우려던 것을 다시 주우려 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히나타가 빨랐다. 카게야마는 어정쩡하게 숙인 허리로 고개만 꺾어 히나타를 보았다. 히나타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가 떨어뜨린 봉투들을 건네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곤 그와 한 번 시선을 마주쳤다. 카게야마가 손을 내밀었지만 히나타는 알 수 없는 얼굴로 봉투들을 돌려주다 말고 진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도 히나타 손에 들린 봉투들을 살필 수 있었다. 히나타에게만 신경이 쏠려 잊고 있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봉투들은 대체로 낯이 익은 종류였다.

 

. . 카게야마는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괜히 주먹을 쥐었다가 펴게 되었다. 이 기분은 뭐지. 괜히 뜨끔하고 초조해졌다. 히나타의 손에 들린 봉투들을 그냥 빼앗아버리고 싶었는데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내민 손을 위아래로 한 번 까딱였다. 유심히 봉투에 적힌 이름을 살피던 히나타는 순순히 카게야마에게 봉투를 돌려주었다. 카게야마가 봉투를 요리조리 뒤집어 확인하자 울긋불긋한 종이에 아니나 다를까 처음 보는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여자 이름들이었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데굴 굴러 히나타를 향했다. 히나타는 웃고 있었다.

 

이야, 카게야마 인기 많네?”

…….”

그거 다 여자애들이 보낸 거지?”

 

카게야마는 입을 계속 다물었다. 여자 이름이라는 건 딱 봐도 알 수 있었지만 어쩐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 다른 대답을 했다.

 

그냥 경기 열심히 하라는 편지일 뿐이야.”

 

일전에도 여러 번 받은 편지였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한결같은 내용이었다. 카게야마군 항상 응원하고 있어, 그러니까 힘내줘. 거기에 나는 몇 반의 누구라고 해, 오다가다 인사 했으면 좋겠어, 등등의 말이 덧붙여 있는 경우도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편지의 내용을 일일이 기억해서 그대로 따라줄 정도로 다감한 타입의 남자가 아니었다. 애초에 관심사가 아니면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편이다. 편지들도 그 범주 안에 속해 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앞에……

 

? 바로 앞에? 카게야마는 무심결에 한 생각에 놀라 히나타를 보았다. 히나타는 여전히 유심히 카게야마 손에 들린 편지를 보고 있었다. 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손에 든 편지를 대충 구겨 가방 안에 넣었다. 이렇게 가방으로 직행해 집 쓰레기통에 버리는 편지가 한가득이다. 하지만 히나타는 또 엉뚱한 소리를 했다.

 

카게야마가 뭐가 좋은 거지. 인상은 더럽고 말투도 험악한데. 게다가 배구밖에 모르는 단세포 바보에

…….”

역시 얼굴인 걸까나세상은 얼굴만으로 먹고 살 수 없는데 말이지.”

 

카게야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끄응 고민하는 히나타에게 손을 확 뻗었다. 히나타는 이크라고 중얼거리며 재빨리 몸을 뒤로 젖혀 그 손을 피했다.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지만 농담이었다고 황급히 변명한 히나타가 화제를 돌렸다.

 

카게야마 너 나중에 유명한 선수 되면 팬들이 좋아하겠다.”

?”

 

그건 또 무슨 이상한 소리냐, 라고 물으려는데 히나타가 손가락으로 카게야마의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팬들이 준 편지 엄청 소중하게 가방에 넣잖아!”

하아? 소중하게? 내가?”

 

중학교 때 여학생들이 준 편지를 아무 생각 없이 교실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그게 소문이 나고 우르르 몰려온 그녀들과 그녀들의 친구들까지 더해 한참을 시달렸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카게야마의 행동은 무척 합당한 것이었지만 그게 그런 식으로 해석될 줄은 몰랐다. 누가 들으면 꼭 그 편지들이 소중해서 집에 보관하는 스타일이라고 오해하기 딱 좋지 않은가. 게다가 오해의 당사자는 다름 아닌 히나타다. 히나타가 함부로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고 다닐 스타일이 아니란 것은 지난 반년 동안 겪어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히나타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걱정 마,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해. 분명 츠키시마가 알면 제왕 사실 엄청 섬세한 남자였잖아~?’라고 비웃을 게 뻔하지만!!”

그런 거 아니라고!”

야마구치가 알면 츠키시마 옆에서 , 다시 봤어!’라고 맞장구 칠 게 뻔하지만!!”

조용히 못해?!!”

“3학년 선배들이 알면 몹시 감격스러워하면서 카게야마 많이 변했구나!’라고 눈물까지 글썽거릴지도 모르지만

젠장, 아니라고 몇 번 말해!!”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양쪽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학교에서, 처리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멍청아!!”

으악,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놔!”

 

히나타가 비명을 지르자 막 지나가던 학생들이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 중 카게야마와 히나타를 아는 (정확히는 둘 사이를 오인한 소문을 아는) 1학년 남학생이 있었던 것인지 휘파람을 불었다. “아침부터 뜨겁네~” 대충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 히나타는 휙 고개를 돌려 시끄럽다고 소리쳤다. 1학년 남학생은 낄낄 웃으며 사라졌고, 그 남학생의 활약(?)으로 두 사람 사이를 그렇고 그런 걸로 파악한 2, 3학년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잘 어울린다느니, 선생님들한테 안 들키게 조심하라느니, 좋을 때라느니 등등등.

 

그와 엇비슷하게 카게야마는 코끝에 닿은 향기를 맡았다. 전에 한 번 맡아본 적 있는 향기였다. 여름 합숙 때, 둘이 크게 다투고 처음으로 화해했던 순간, 히나타의 머리카락을 털다 보니 어쩌다 맡게 된 그 향이 좋아서 다시 확인해보기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히나타를 볼 때 잊을 만하면 그날의 기억이 생각나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화들짝 놀라 히나타를 놓고 고개를 돌렸다. 둘 다시에 민망한 기류가 흘렀다. 히나타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어 그는 애꿎은 사물함 문을 닫았다.

 

역시……

 

히나타가 중얼거렸다. 카게야마는 겨우 히나타를 마주보았다. 히나타는 진지하게 그를 보다가 말했다.

 

역시 창피한 거지?!”

뭐야!?”

으하하하 걱정 마, 나 혼자만 알고 있을게!”

히나타 멍청이가!!”

 

히나타는 메롱 한 번을 한 뒤 카게야마가 붙잡을 새도 없이 와다다 달려 그를 지나쳐버렸다. 어찌나 빠르게 달리는지 금방 계단 위로 사라졌다. 카게야마는 어깨에 멘 가방 지퍼 안에 구겨진 편지봉투들을 보다가 조금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단단히 오해를 사버린 것 같다. 쏴아아, 얼마 지나지 않아 카게야마의 등 뒤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그치지 않을 기세로 내리는 비로 인해 체육시간이 체육관 수업으로 대체되는 게 거의 확실시 되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별로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축 처지는 기분이었다.

 

왜지?

히나타한테 놀림 받아서 그런 건가? 아니, 그것보다는 묘하게 방향이 틀어진 기분인데.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기분이라 카게야마는 거칠게 발걸음을 옮겼다.

 

 

 

 

카게야마는 고대하던 체육시간이 되어서야 조금 기운을 차렸다. 그의 희망대로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있었다. 그 기세가 여전히 드세서 아마 학교 끝날 때까지 내리는 게 아닐까 생각됐다. 우산이야 아침에 엄마가 챙겨줘서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불현듯 히나타 생각을 했다. 오늘도 자전거를 타고 왔을 텐데 하굣길에도 비가 이렇게 내린다면 아마 버스를 타고 가겠지. 그 먼 거리를 혼자 걸어갈 수는 없으니 막차 전까지는 연습을 마무리하고 체육관을 나가야 할 것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옷을 훌렁훌렁 벗고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카게야마는 칠판을 보았다. 체육 선생의 전언을 반장이 적어 놓은 듯 체육관으로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모두가 카게야마처럼 배구를 할 요량은 아니겠지만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기뻐하는 건 비슷했다. 시끄럽게 떠들며 복도를 걸어가는 여학생들 뒤에서 천천히 체육관을 향하던 카게야마는 1반 교실 앞에 이르러 갑자기 튀어나온 익숙한 머리통에 심장이 바닥에 주저앉는 경험을 했다. 어찌나 빠르게 달려 나왔는지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위험하잖아 멍청아!!”

 

, 소리를 내며 시선을 마주쳐온 얼굴을 보자마자 카게야마가 소리쳤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히나타의 팔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며시 놓았다. 히나타가 튀어나온 1반 교실 뒷문에서 기웃기웃거리는 여학생들이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복도에서 대화할 때면 뭐가 궁금한지 늘 반복되는 광경이라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으아악, 나도 깜짝 놀랐거든!!”

갑자기 튀어나온 게 누군데?”

. 안 부딪혔으니 됐잖아. 아무튼, 카게야마 체육관 가??”

너도?”

 

. 카게야마는 물어봐놓고선 뒤늦게 납득했다. 2학기가 되어 바뀐 시간표 덕분에 일주일에 한 번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체육 수업이 겹쳤다. 그게 오늘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각자 반에서 실기를 하느라 얼굴만 스쳐가듯 보는 게 전부였지만.

 

잘 됐네. 같이 가자.”

그러든지.”

 

카게야마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히나타도 카게야마 옆에 붙어 따라왔다. 수업이 끝나고 체육관에 부활동하러 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이렇게 체육복을 입고 있는 이상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은 반이었으면 뭐가 달라졌으려나. 카게야마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체육관에 도착했는데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되었다. 다름 아닌 츠키시마와 야마구치였다. 바로 전 시간이 체육이었는지 둘 역시 체육복이었다. 체육관 앞에서 딱 마주친 츠키시마가 카게야마와 히나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옆에서 야마구치도 새삼스러운 눈길로 둘을 보고 있었다. 조금 기분이 나빠진 카게야마가 뭐라고 하려고 하는 찰나, 츠키시마의 반 소속으로 보이는 여학생 몇 명이 체육관을 나서다 말고 멈춰 서서 그들을 보았다. ‘꺄아소리를 내며 한결같이 부끄러워하는 몇 명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방향은 각각 달랐다. 세 남학생에게 고루 나누어진 선망의 시선에 히나타가 재밌다는 듯 말했다.

 

너희 인기 많네?”

부럽냐? 초등학생.”

. 하나도 안 부럽거든!?? 그리고 초등학생이라고 그만 좀 해!”

초등학생 키 벗어나면 그만둔다고 말하지 않았어?”

나 좀 자랐어!!”

얼마나?”

1cm?”

 

한껏 비웃는 표정이 된 츠키시마가 히나타를 위아래로 관찰했다. 그 눈빛에 서려있는 게 별로 티도 안 난다는 뜻임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재봐 재봐! 히나타가 츠키시마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두 사람이 키를 재기 시작했다. 히나타는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수평으로 움직여 츠키시마의 어디쯤에 닿는지 살피는 듯했다. 그 손이 츠키시마의 가슴팍 부근에 닿을락 말락 하는 모습을 보니 카게야마는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오전 내내 저기압이었는데 더 낮아지는 기분이었다.

 

카게야마의 표정이 더욱 사나워진 걸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챈 츠키시마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푸훗 웃었다. 키를 비교하느라 츠키시마의 얼굴을 보지 못한 히나타는 그 비웃음이 자신을 향한 거라고 여겼는지 더욱 길길이 날뛰었다. 하다못해 츠키시마가 손으로 이마를 꾸욱 눌러서야 뒤로 물러난 히나타는 씩씩대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츠키시마의 눈길이 슬쩍 카게야마에게 옮겨가고, 카게야마는 그를 노려보며 히나타의 뒷덜미를 잡았다.

 

으앗?!”

수업 늦어.”

그렇다고 이렇게 끌고 갈 필요가- 으악!”

살살 다뤄주라고 제왕~”

 

히나타를 데리고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는데 등 뒤에서 츠키시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잡고 있던 히나타의 체육복 뒷덜미를 놓았다. 휙 뒤를 돌아 히나타가 카게야마와 마주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하게 히나타를 반 친구들 쪽으로 슬쩍 밀었다. 히나타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 뚜벅뚜벅 걸어간 카게야마는 자신의 반이 모여 있는 줄 맨 뒷자리로 빠졌다.

 

언제부터였지.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대하고 나면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질 때가 잦아졌다. 히나타에게 화가 나는 건 확실히 아니었다. 하지만 순간순간 끓어오는 정체모를 감정의 기복이 참기 버거울 때가 많아 카게야마는 히나타에게 쉽사리 짜증을 낸 적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도쿄 합숙 때의 일이었다. 네코마에 새로 들어왔다는 미들블로커 하이바 리에프와 단지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 그것도 별로 관심도 없이 중요하지도 않은 시답잖은 말뿐이었는데 괜히 억울해졌던 그 순간처럼.

 

머리로는 화 날 이유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가슴 한 켠에 고여 있던 어떤 감정이 기어코 폭발해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히나타를 울려버린 그 날처럼만은 하지 말자고 카게야마는 수없이 다짐하고 또 새겨두었다. 지금까지는 그게 꽤 성공적으로 지켜지고 있는데 불쑥블쑥 솟아나려고 하는 정체 모를 억울함이 지금 또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농구하자아아!!”

무슨 농구야? 너네끼리 해.”

우리끼리는 재미없단 말이야!”

너네랑 하면 내가 재미없다!”

 

한 체육관에 두 개의 반이 각각 자유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몇몇 학생들은 농구를, 몇몇 학생들은 피구를 하고 있었지만 그거야 남학생들 얘기고 여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은 체육관 바닥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수다를 꽃피우는 중이었다. 조곤조곤 무슨 이야기를 중요하게 하는지 간혹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히나타의 목소리는 그 사이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남학생들의 목소리와 섞여 들리고 있었다.

 

너 중학교 때 농구도 했다며. 우리랑은 해본 적 없잖아?”

그건 친구 따라서 찔끔 해본 거라고 몇 번 말해?! 자꾸 시비 걸면 후회한다?”

 

……친구라. 카게야마는 벽에 튕기던 배구공을 잡고 잠시 멈췄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 있었다. ‘이즈미라고 했던가, 농구부를 했던 친구라고 들은 것 같았다. 한 번 얼굴을 본 적도 있었다. 식당 창문 너머로 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이상하게도 표정이 거무죽죽 변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디 아픈 건가 했다. 그 친구라면 히나타와 꽤 친했던 것 같고 요즘도 자주 연락을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속상한 일 있을 때마다 툭하면 이즈미한테 전화할 거야!’라고 외치고 달려가 버리는 히나타를 많이도 겪기도 했다.

 

푸핫! 무슨 후회??”

 

농구보다는 배구가 나은데.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공이 다시 한 번 손을 떠나 체육관 벽을 부딪치고 다시 튕겨져 들어왔다. 영 집중을 하지 못해서인지 방향이 조금 어긋나 튀었다. 그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히나타가 친구들이 많은 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워낙 성격이 활달해 여자건 남자건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친할 수 있는 친화력의 소유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에게와는 달리 히나타에게는 카게야마가 여러 친구들 중 하나에 불과할 거라는 사실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 나는 이토록 짜증이 나서.

, , . 벽을 맞고 되돌아온 공에 점점 더 힘이 실렸다. 이를 악물고 있는 턱에도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참아야 하는데. 처음 대화를 나눈 주제에 친근하게 대화하던 리에프와의 모습을 본 순간 참지 못했던 인내심의 끝을 반복해서는 안 되는데.

 

실수가 거듭되다가 결국엔 등 뒤로 아무도 받지 않는 공이 떨어졌던 그때처럼, 같은 실수를 또 다시 반복하는 건 원치 않았다. 이번에도 멋대로 화를 내고 울려버리면 히나타는 영영 그를 보지 않을지도 몰랐다. 늘 있을 것이라 당연히 여겼던 것이 사라졌을 때의 충격을 카게야마는 몹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무시, 또 무시를 마음에 새겼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뒤를 돌아 무슨 상황인지 보고 히나타가 곤란하다면 빼내고 싶었지만 오기로라도 버티는 중이었다. 이왕이면 두 사람의 대화에도 신경 쓰지 않으려고 공을 반복해서 튀겼지만 한 번 목소리가 콱 박히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손이 움직여 공을 받아내는 것처럼 그 목소리를 듣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카게야마가 참다못해 그냥 자리를 옮겨버릴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 두 사람이 신경 쓰이지 않는 곳. 그런 장소란 게 있을지나 의문이었지만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마지막으로 공을 받아들었다. 옮길 자리를 찾아 주욱 체육관 내부를 둘러보는 순간, 그의 체육복 옷자락을 잡는 손이 있어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이 실리고, 히나타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커져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카게야마에게 히나타가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혼자 공 튀기니까 재밌냐?”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늘 혼자 연습해온 게 당연한데 하마터면 아니라고 답할 뻔했다. 대신 그는 고개를 돌려 그제야 보고 싶었던 광경을 눈에 담았다. 히나타가 대화하던 자리에는 발을 움켜쥐고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는 남학생만이 남아 있었다. 아마 히나타의 작품일 것이다.

 

공 줘.”

? ?”

왜긴 왜야. 연습 안 해?”

 

히나타가 카게야마를 끌어당겼다. 카게야마는 당황하며 엉거주춤 체육관 구석에서 끌려나왔다. 히나타는 보다 못해 카게야마에게서 공을 빼앗은 뒤 말했다.

 

너 아직 멈추는 토스 더 연습해야 되잖아. 혼자 하긴 어려우니까 도와줄게.”

 

여름 합숙 이후로 성공률이 높아졌긴 하지만 팀 내 스파이커들의 타점이 각양각색이라 모두를 염두 하는 게 무척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성공률을 더 높이기 위해 틈날 때마다, 그것도 점심시간까지 쪼개며 도와주는 게 히나타였는데 체육 자유시간까지 도와주려고 할 줄은 몰랐다. 카게야마는 슬쩍 여학생들 무리를 보았다. 여학생들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렇게 친구들이 많은데.

 

나 도와줘도 되는 거냐?”

 

정확히는 나만 신경 써도 되는 거냔 의미였지만 히나타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푸하하 웃어버렸다.

 

카게야마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

뭐야?!”

기다려봐!”

 

히나타는 체육관 창고 쪽으로 들어갔다. 체육 선생들이 담배라도 피우러 간 것인지 자리를 비우고 있어 딱히 제지를 받지도 않고 꺼내온 것은 빈 물병들이었다. 배구부가 주로 쓰는 체육관이기도 해 카게야마가 따로 연습하며 쓰는 물병들이었다. 히나타는 빈 물병들을 일렬로 줄 세워 내려놓고 의자도 하나 가져와 그 위에 섰다. 네트까지 펼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연습할 여건이 마련되었다.

 

농땡이 피우지 말고 빨리 하시지.”

농땡이라고 했냐?”

. 빨리빨리!”

 

히나타가 험악하게 굳힌 카게야마에게 또 욕을 들을새라 얼른 공을 카게야마의 머리 위로 보냈다. 카게야마는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순순히 빈 물병이 세워진 방향으로 멈추는 토스를 보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첫 번째 시도는 간발의 차이로 실패를 해 히나타는 아쉬워했다.

 

이번에 성공 못 하면 나한테 누나라고 부르기.”

멋대로 정하기냐!?”

내가 도와주는데 내 맘이지!”

시끄러워! 성공할 거다!”

 

곧 카게야마의 승부욕이 타오르기 시작하며 심장이 잘게 떨었다. 경기 전 익숙한 두근거림과는 약간 종류가 다른 거였지만 카게야마는 그러려니 했다. 그를 도망칠까 생각하게 만들었던 초조함도 가신 지 오래였다. 도저히 집중할 수 없어 자세가 흐트러지고 엉망이었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의 폼은 배구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완벽 그 자체였다. 그보다 더욱 완벽하게 호선을 그리던 공이 힘을 잃고 빈 물병 위에 폴짝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카게야마가 주먹을 쥐었다.

 

악 아쉬워!!”

 

히나타가 소리쳤다. 별로 아쉽지 않은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카게야마는 공을 다시 주워들고 병을 다시 세운 뒤 히나타에게 공을 건넸다.

 

백년은 일러.”

허어? 백년까지 걸릴 건 뭐야?”

말 그대로.”

아아~ 백년 지나면 된다는 거네, 그럼?”

!? 아니, 백만년.”

뭐야 갑자기 왜 늘어나는데?!”

백년 넘게 살 수도 있으니까.”

그게 늘리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왜 말 바꿔!”

내 맘이다 멍청아!”

그럼 난 백일로 할래! 아니 백초!!”

그게 왜 그렇게 돼?!”

너도 늘렸다 줄였다 하는데 나는 왜 안 돼?! 누나라고 불러 빨리!”

내가 할까보냐!”

못할 건 뭐야! 백년 뒤엔 한다며!”

백만 년 뒤다!”

백만 년 뒤도 하는데 백초 뒤에 못할 건 뭐냐고!”

! 젠장, 백만 년 뒤에도 안 해!”

백초 지났어, 빨리 해!!”

닥쳐! 공이나 던져!!”

말하기 전엔 못해!!”

 

어느새 연습에서 서로의 자존심을 건 대결로 번져버린 둘의 다툼은 이미 여럿에겐 익숙했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얘깃거리를 찾던 여학생들의 눈에 두 사람이 좋은 눈요깃거리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히나타랑 카게야마 아직도 안 사귄대? 둘이 서로 좋아하는 거 맞는 것 같지 않아? 나 그 3반의 카게야마가 웃는 거 처음 봤어. 히나타랑 있을 때만 웃는 건가? , 로맨틱해! 근데 왜 고백 안 하는 거야? 히나타가 먼저 고백하지 않을까?

 

물론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알지 못하는 대화였다.

 

 

 

 

수업 내내 카게야마는 히나타와 배구연습을 했다. 체육이 4교시라 점심시간까지 내리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며 체육선생들은 감탄했다. 각자가 맡고 있는 동아리에는 왜 카게야마같은 근성을 가진 녀석이 없냐고 한탄하는 소리도 들렸다. 배구 천재, 노력하는 천재 등으로 카게야마는 이미 체육 선생들에게 유명 인사였다. 정작 당사자는 배구 외의 종목에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카게야마는 히나타와 체육관 계단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체육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져 내리는 빗소리와 섞였다. 비가 올 때마다 나는 특유의 흙냄새도 맡아졌다. 태풍 때처럼은 아니지만 바람도 많이 불어 퍽 쌀쌀했다. 카게야마는 무의식적으로 히나타가 입은 체육복을 보았다. 한여름은 지났다고 해도 동복을 입기는 일러 반팔에 반바지였다. 안 추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종류의 생각이 들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운동 직후 긴팔을 입어야 하는 건 그가 자연스럽게 체득한 상식이다. 카게야마가 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참이었다.

 

비가 많이 오네.”

 

집 갈 일이 걱정되는 듯 히나타가 중얼거렸다. 카게야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은 일찍 가.”

그러려고 했는데…… , 카게야마군 혹시 걱정해주는 건가요~”

도시락이나 먹어.”

 

카게야마가 히나타의 머리를 꾸욱 눌렀다. 히나타는 아야야라고 한 번 아파한 뒤 입술을 삐죽이고 투덜거렸다. 카게야마 넌 너무 폭력적이야. 섬세하지가 못하다구. 카게야마는 그 말이 어이가 없었다. 폭력적이고 섬세하지 못한 건 자기도 마찬가지면서. 맞아준 팔과 등이 몇 번인지 셀 수도 없는데다가 분위기 못 읽고 선배들한테 혼나는 건 똑같으면서 자긴 아닌 척 한다. 만약 히나타가 남자였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짤랑짤랑 흔들겠지만 여자라서 그럴 수도 없다. , 카게야마가 혀를 차며 오니기리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때였다.

 

아 맞다!! 몇 시지??”

 

히나타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연습을 하도 해서인지 어느새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슬슬 마무리하고 들어가야지. 카게야마는 그렇게만 생각했지만 히나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맞다아!!”

뭐야?”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보자고 한 애 있었는데!!”

 

히나타가 허둥지둥 빈 도시락통을 정리했다. 카게야마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히나타에게 건네자 그것도 다시 넣어 대충 천을 묶고 도시락통을 들었다. 꽤 급해 보이는 모습에 카게야마가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어디 가는데?”

점심시간에 잠깐 할 말 있다고 보자고 한 남자애가 있는데 잊고 있었어.”

누구?”

나도 얼굴만 알아. 4반이랬나? 나 먼저 간다!”

 

도시락통을 신속하게 챙겨들고 쌩하니 자리를 벗어난 히나타의 뒷모습을 카게야마는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얼딸떨함이 사라지자 히나타가 남긴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누굴 만나? 다른 남자애? 얼굴만 아는 4? 무슨 얘기를 하는데 따로 시간까지 내서 만나? 뭐 얼마나 중요한 얘기를 하길래?

 

어이, 제왕. 비켜.”

 

카게야마가 앉아있는 체육관 계단 등 뒤로 츠키시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다소 멍청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순히 움직여 자리를 비켜주는 카게야마에게 되레 놀란 츠키시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함정이라도 파놓은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했지만, 그 기분 나쁜 불신에도 카게야마는 아무 말도 없이 비가 내리는 허공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점심 잘못 먹었냐?”

 

결국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결론을 내린 츠키시마가 묻자 카게야마는 휙 고개를 돌렸다. 더러워 보이는 인상으로 꽉 다물고 있던 입이 열린 건 그 순간이었다.

 

어이, .”

……?”

4반이라고 했지.”

그렇다만? 제왕께서 하찮은 서민을 왜 궁금해 하시는지 여쭤도 되겠는지요?”

제왕이라고 하지 말랬을 텐데.”

어이쿠, 한낱 서민이 우둔해서 그만 또 잊어버렸네.”

 

카게야마는 한껏 비꼰 츠키시마의 음성보다도 히나타 쪽이 훨씬 신경 쓰였다. 그래서 그는 깊은 고민을 단시간에 마치고 츠키시마에게 묻는 것을 택했다.

 

히나타가 방금

초등학생?”

너네반 어떤 남자애가 불러서 나갔다는데.”

 

츠키시마의 눈이 일순 놀라운 빛을 띠더니 곧 그 감정이 눈꺼풀 너머로 완전히 숨겨졌다. 그 미미한 변화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카게야마는 퍽 재밌다는 말투의 츠키시마에게 미간을 좁혔다.

 

것 참 신기하네. 신경이라도 쓰이는 거야? 혹시 누군지 아냐고 나한테 물어보게?”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그저 사나운 눈초리로 츠키시마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 눈초리에 이미 익숙해진 지 몇 달은 된 츠키시마는 꿈쩍도 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글쎄~ 요즘 들어 나랑 야마구치한테 우리 배구부 1학년 매니저에 대해 관심 있다면서 캐묻고 다니는 녀석이 있긴 했지.”

그래서말했냐?”

말했으면 어쩌게? 어차피 제왕은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

 

츠키시마의 말이 맞았다. 왜 쓸데없이 히나타에 대한 정보를 흘렸는지, 왜 관심을 가지게 내버려두었는지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들끓는 이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카게야마는 애써 억누르고 있던 초조함이 다시 서서히 예열되고 있음을 느꼈다. 쥐꼬리만한 인내심으로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괜히 화풀이라도 할 것 같아 츠키시마에게서 휙 뒤를 돌았다. 당장 히나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밖은 비가 오니 계단 쪽을 잘 살펴보는 게 좋을 거야.”

 

뚜벅뚜벅 걷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이 더욱 빠르게 작아졌다.

 

알고 저러는 거야, 모르고 저러는 거야.”

 

츠키시마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혀를 찼다. 그는 팔짱을 끼고 한 기억을 떠올렸다. 히나타에게 관심이 있다며 이것저것 물어보던 같은 반 남학생과의 대화였다. “너희 배구부 1학년 매니저 어때? 무슨 스타일 좋아해? 남자친구 없지? 평소에도 귀여워?” 그때 그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별로 안 귀여워, 남자친구는 없는데, 끝까지 코트 위에 남아 있을 애 좋아할 거야, 이왕이면 살인서브 능력과 천재성 가득한 토스 능력을 탑재하는 게 좋겠네-”였던가.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츠키시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편, 츠키시마의 말을 충실히 따라 카게야마는 일부러 학교 구석진 계단을 향했다. 특히 카게야마가 서 있는 서쪽 계단의 맨 위층은 잘 쓰이지 않는 허름한 교실이 있는 쪽이라 이렇게 음침한 비 오는 날이면 더욱 인적이 드문 곳이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1층에서 보이지 않는 계단 꼭대기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하나씩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을 밟아 올라갈수록 불안감과 긴장감이 뒤섞여 어느 게 우선인지를 구분할 수 없어졌다.

 

관심이 있다. 불러낸다. 그 단어의 조합이 뜻하는 바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가 중학교 내내 시달리던 경험을 통해 모르고 싶어도 이미 알고 있는 종류가 아니던가. ‘?’ 라는 질문보다도 히나타는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가 더욱 신경 쓰였다. 거절이면 그가 이렇게 불안할 필요도 없지만 만약 그 남자애의 관심을 흔쾌히 받아들인다면? 그 둘이 연애라도 하게 되는 건가? 어울리지도 않는 연애를? 그 멍청한 녀석이? 다른 사람이랑?

 

카게야마는 잠시 숨을 멈추고 걸음을 멈췄다.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손이 보였다. 싫다. 히나타가 다른 남학생과 잘 돼서 연애라도 하는 광경을 떠올리니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렇게 되기라도 하면 억울하고 분해서 어쩔 줄 모를 것 같았다. 나는 왜 불안한 건데? 왜 미친듯이 불쾌하고 짜증이 나는 건데? 왜 진득하게 가만있질 못하고 여기까지 온 건데? , , .

 

카게야마가 퍼뜩 정신을 차린 건 히나타의 목소리가 비처럼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나는 어몰랐네. 미안.”

 

이런 이유로 불러낸 것일 줄은 전혀 몰랐다는 듯 당황한 목소리가 조그맣게 끝맺었다. 두근두근. 카게야마가 고백한 것도 그가 거절당한 것도 아닌데 심장이 뛰었다. 파문처럼 퍼지는 안도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그러니까아직별로 누굴 만나고픈 생각이 없다고나 할까

히나타

미안해. 이런 이유로 보자는 거였으면 거절했을 거야. 정말 미안.”

혹시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

그렇구나. 알겠어. 좋게 거절해줘서 고마워.”

 

,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카게야마는 화들짝 놀랐다. 그 남학생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안심할 게 아니었다. 어째서 안심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안일한 감정은 곧바로 비수가 되어 꽂혀버렸다. 카게야마는 곧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가까운 화장실로 들어간 카게야마는 세면대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몇십 분도 안 되는 사이 헬쑥하고 창백하게 질린 표정이 보였다.

 

히나타는 왜 침묵했던 것일까? 침묵의 자리 대신 나왔어야 하는 말은 뭐였을까? , 아니, 둘 중 어느 대답이었을까? 만약에 있다면 그건 누군데? 카게야마의 얼굴 위로 먹구름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험 때보다도 더한 의문들이 쉼 없이 떠올랐다. 시험은 찍기라도 할 수 있지 이건 그것도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그 어느 때보다도 험악하게 구겨진 얼굴로 성큼성큼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행선지는 자판기 앞이었다. 시원한 뭐라도 마셔 이 차오르는 분기를 식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그는 꽤 필사적으로 되었다.

 

 

 

 

비가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바람에 히나타는 조금 일찍 체육관을 나섰다. 히나타의 동네로 가는 버스는 비가 오기라도 하면 평소보다 꽤 일찍 끊기는 편이라 어쩔 수 없었다. 덩달아 카게야마도 히나타를 따라 일찍 연습을 접고 나왔다. 히나타를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줘야 한다는 2학년 선배들의 강력한 주장이 있어서였다. 원래 그러려고 했지만 카게야마는 등 떠밀어 나온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끝까지 그를 비웃는 듯한 츠키시마와 야마구치에게 살벌한 시선을 보낸 카게야마는 우산을 펴든 히나타에게 충동적으로 말했다.

 

나 우산 없어.”

에엑, 안 가져왔어?”

 

가방에 우산이 들어있었지만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타는 키득 웃으며 말했다.

 

칠칠야마.”

우산이나 제대로 들어.”

당연히 우산 얻어 쓰는 사람이 들어야지!”

 

젠장. 나는 뭐 때문에 우산이 없다고 거짓말을…….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손에서 우산을 빼앗아 들었다. 두 사람이 쓰기에는 다소 비좁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빈 운동장을 잘박거리며 빠져나와 콘크리트로 된 언덕길을 내려가면서도 카게야마는 히나타에게 신경이 쓰여 자꾸만 향하려는 시선을 거두느라 애를 먹었다. 결국 오늘 연습 내내 애꿎게 노려보기만 할 분 제대로 말을 붙이지 못했다. 너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그게 누구냐고 물을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네가 알아서 뭐하게?’라는 질문이 날아든다면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점심시간 이후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느라 수업에도, 연습에도 하나도 집중하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오히려 히나타에게만 집중하게 되어 그는 곤혹스러울 지경이었다. 히나타 어깨에 빗물이라도 튀는 건 아닌지, 히나타 발을 실수로라도 밟는 건 아닌지, 히나타가 발목까지 신은 흰 양말에 흙탕물이라도 튀기는 건 아닌지, 분명 거들떠도 보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들을 전부 신경 쓰고 있었다. 섬세하질 못하다고? 카게야마의 꽉 찬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그런 소리는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젠장. 제길. 제기랄.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오른쪽 어깨가 조금 젖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히나타의 어깨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한 뼘 정도 일정 거리를 두고 있던 두 사람이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히나타가 눈을 크게 뜨고 카게야마를 올려다보았다. 아침에도 맡은 샴푸냄새가 났다. 무심코 그 눈과 시선이 마주친 카게야마는 데이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쾅 쾅 쾅 천둥번개는 치지도 않고 있는데 우악스럽게 심장이 격침당하는 환청이 들렸다.

 

히나타는 다시 앞을 아무렇지 않게 보는 듯했지만 카게야마는 이 상황을 참기 매우 어려웠다. 히나타의 젖은 어깨를 감싼 팔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헛숨을 삼키기도 했다. 몸이 이상 현상을 보이는 것 같아 지금이라도 우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다른 우산으로 갈아탈까 백 번 고민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둘 사이에 이상할 정도로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카게야마의 필사적인 노력이 깃든 결과에 가까웠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울컥 무언가를 쏟아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단지 그 단어들을 무심코 뱉어버리면 큰일이 날 것 같다는 감밖에 없어 필사적으로 눌러 참은 것이다. 그래서 들이마신 숨을 마음껏 뱉지도 못했다.

 

우산 없어도 되겠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야 히나타가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시간이 이토록 빨리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류장에 도착했다는 사실마저 잊을 정도로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니! 진짜 죽을맛이었다. 속절없이 끌려 다니는 기분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그저 필사적이기만 했던 그 오랜 시간이 지나치게 짧게 느껴져 아쉬울 정도로 말이다.

 

.”

 

이 짧은 단어 하나를 내뱉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리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거 쓰고 가든가.”

 

히나타가 우산을 내밀었지만 카게야마는 받지 않았다.

 

됐어. 너 버스 내려서도 걸어야 되잖아.”

그렇지만

시끄러워. 버스나 타.”

 

히나타는 왠지 꾸물거리더니 저 멀리 다가오는 버스를 발견하고 황급히 가방을 뒤졌다. 카게야마가 의아해 할 때, 버스가 멈추기 직전 히나타가 막무가내로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순간 정말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어떤 봉투 하나를 쥐어주었다. 거의 억지로 들려주다시피 한 그것을 멍청하게 내려다보는 사이 버스에 올라타며 히나타가 강조에 강조를 덧붙여 소리쳤다.

 

멍청야마! 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거 진짜 아무 의미 없거든! 너 팬 많잖아! 나는 배구부 매니저이기도 하고, 괜히 지고 싶지는 않으니까아니 굳이 너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러니까아이씨, 아무튼 혼자만 봐!”

 

히나타가 횡설수설 혼자 할 말만 잔뜩 늘어놓은 뒤 버스로 쑥 들어가 버렸다. 앞문이 닫히고, 이쪽을 전혀 보지 않는 히나타가 빈자리를 찾아 앉고,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도 카게야마는 멍청하게 서서 손에 든 편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카게야마는 분홍색 편지봉투에 적힌 히나타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보았다. 천천히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끄집어내는 손이 느릿했다. [멍청야마.] 분명 히나타가 쓴 것 같은 글씨와 내용이 눈에 담기자마자 빠르게 눈꺼풀이 깜빡거렸다.

 

[멍청야마. 혹시 오해를 할까봐 밝혀두지만 정말 정말 아무 의미 없이 보내보는 편지야. 너 오늘 아침에 보니까 사물함에 편지 두고 가는 여자애들 많더라? 물론 내가 그 여자애들처럼 네 엄청난 팬이라는 건 아니고! 오해 하지 마! 그냥 나는 매니저니까! 팬들한테 밀리면 안 될 뿐이니까!]

 

고작 편지일 뿐인데. 히나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는데. 다른 여자애들처럼 예쁜 글씨체도 아닌데. 한 쪽 밖에 안 되는 종이에 지저분하게 고쳐 쓴 흔적도 많은데.

 

[편지지가 쓸데없이 분홍색이긴 한데 절대 절대 오해 하지마!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편지지가 아니라서 그래! 급하게 쓰는 거라서, 친구들이 이 색밖에 안 가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알았지? 그러니까 쓸데없이 오해하지 마. 어쨌든 막상 쓰려니까 무슨 내용을 써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간 받은 편지들과는 달리 히나타가 준 편지에서는 생생하게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멈추는 토스 성공률 높이려고 요새 엄청 연습하는 거 알아. 코치님한테 들었는데 그거 엄청 어려운 거라며? 그나마 너라서 단기간에 연습해 볼 수 있는 거라고 그러던데. 90퍼센트 이상 성공할 수 있도록 지금처럼 열심히 도와줄게. 이렇게 적긴 민망하지만그래도 너 배구 좀 하니까!]

 

그가 받아본 그 어떤 칭찬들보다 기쁘게 만들 줄 알았고,

 

[그리고쓸 말이 없네지금 수업시간인데 걸리면 혼나겠지. 대충 마무리해야겠다. 선배들이 너 요새 많이 변했다고 하는데 다행이고약속대로 다음 대회에서도 코트 위에 끝까지 남아줬으면 좋겠고아무쪼록 열심히 했으면 해.]

 

그가 받아본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담백한 당부가 그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카게야마는 편지를 쥐고 고개만 들어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았다.

쿵쾅쿵쾅. 그의 단잠을 깨우는 반 친구들의 쉬는시간 술래잡기보다도 더욱 시끄러운 소리가 그의 가슴팍에서 요동쳤다.

쿵쾅쿵쾅. 경기 전 가벼운 흥분과 긴장으로 떨릴 때마다 스트레칭을 하면 효과가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

 

낭패에 젖은 얼굴로 그는 어느 순간 깨달아버렸다. 허무할 정도로 단번에 모든 의문이 풀어졌다. 한 번 생각을 꿰어 맞추고 나니 배구처럼 너무 쉬운 답이었다. 그가 왜 다른 사람들과 있는 히나타를 자꾸만 신경 쓰게 되는지. 왜 히나타가 다른 남학생과 연애라도 하게 될까봐 불안했던 건지. 왜 히나타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덜컥 충격을 받아버렸는지. 이건 객관식도, 주관식 문제가 아니라 너무나도 뚜렷하고 간략한 답이 존재하는 단답식이었다.

 

젠장.”

 

나 히나타 좋아하는구나.’라는 문장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문제였다는 사실을,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비 내리는 그 날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썸(http://byeoljari.tistory.com/19) 이후입니다.

ts로 검색어 타고 들어오시는 분이 많아 기뻐서 질렀습니다...

쌍방짝사랑 쌍방질투 하는 카게히나ts 같이 파주세요...(영원한 캐붕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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