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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보쿠아카] 안개 너머 당신

별골짜기 2016. 6. 19. 00:04
 

보쿠아카

안개 너머 당신

보쿠아카 전력 60(주제:담배)

 

 

 

 

자욱한 연기 너머로 닿아오는 시선이 어딘지 익숙했다. 옅은 회색 구름으로 매캐하게 뭉개진 얼굴선이 아지랑이처럼 너울거렸다. 그것은 세상과 스스로를 차단하는 형체 없는 벽이기도 했고 얼굴을 숨기는 가면과도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발치에 떨어져 천천히 끝까지 타들어가고 있는 수많은 담배꽁초는 울타리였다. 넘어오지 마시오. 특히 그 안에 혼자 있다면 더더욱. 그는 그 사실을 매우 오래전에 알게 된 바 있었다.

 

아카아시는 순간 속이 울렁거림을 느껴 잠시 명치 끝을 꾹 눌렀다. 필시 과음한 탓이다. 낯선 나라의 어디인지도 모르는 골목 안의 모든 것들은 너무도 시끄러웠다. 건물 안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웃음소리와 한시도 귀를 쉬게 내버려두지 않는 산발적이고 연속적인 정체 모를 음악 소리를 피해 도망쳐 나왔지만 그나마 찾은 고요한 장소에는 이미 주인이 있었다. 잠시 머리를 찡하게 울리는 기억에 눈을 힘주어 감은 그는 뒤를 돌아 이 좁은 건물 사이를 빠져나가려 했다. 반쯤 접혀있는 눈꺼풀 아래 숨어 있던 노란빛의 눈동자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아카아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더 깨질 듯이 아파졌다. 무겁게 감았던 눈을 뜨자 어느덧 선명해진 노란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놀라움이다. 왜 여기 있느냐는 질문이 입으로, 혹은 눈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지만 뜨겁게 온몸을 채운 취기 탓에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이름을 부른 데에 대한 응답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손을 모아 매만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릴없이. 습관처럼.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그럴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었지만 상대는 이름을 불러놓고 왜 아무 말도 없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대답을 기다리는 건지도 모른다.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제가 대답할 정신이 없어서 대답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 대답은 할 수 있나. 대답할 정신이 없어서 대답할 수 없다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이 의미 없이 헛돌았다. 머리가 더 아파져 대답을 그냥 포기했다. 놀랄 만큼 고요해진 머릿속이 유독 조용한 이 건물 사이의 틈을 닮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놀랐어?’]

 

기억이 뒤집어낸 말이 머릿속의 침묵을 깼다. 아카아시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피식 웃는 얼굴이 낯설었다. 같은 학교, 같은 공간, 같은 부에서 수없이 부딪쳐온 얼굴이었지만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봤었다.

 

[‘감독님한테는 비밀로 해줘, 아카아시.’]

 

손가락에 걸쳐 있는 것이 공이 아니라 담배라는 사실이 낯설어서, 둘 사이를 떠다니는 연기가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부유하는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게 담뱃재를 터는 그가 이미 성큼 멀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아카아시는 잠시 숨이 콱 막힌 것처럼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역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뒤를 돌아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의 팔에 감기는 뜨거운 손바닥만 아니었다면 머리를 아프고 어지럽게 만드는 이 연기의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아카아시. 잠깐만.”

돌아가 봐야합니다.”

 

혼자 온 게 아니니까요. 뒷말은 굳이 하지 않고 삼켰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구태여 설명하는 것보다 잡힌 팔을 빼내고 싶었다. 뜨끈하게 퍼진 취기로 인해 분명 그의 팔이 더 뜨거울 텐데 멀쩡해 보이는 주제에 감긴 쪽이 더한 것처럼 느껴졌다.

 

힘을 주어 뿌리치려 했지만 오히려 가깝게 끌려간 건 아카아시였다. 급하게 들이마시는 숨에 연기가 섞여들었다. 저는 연기 마시기 싫습니다. 조그맣게 중얼거렸지만 그는 담배를 비벼 불을 끄지는 않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그는 제멋대로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 이유 없는 줄다리기에 그의 마음은 얼마나 풍파를 맞았던가.

 

다 피울 때까지만 있어줘.”

 

손에 든 담배꽁초는 이미 반절이나 타들어가고 있었다. 결국은, 언제나 그랬듯 아카아시는 그 말을 들어주고야 만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저도요. 아카아시는 고개를 주억였다. 낯선 이국에서 익숙한 이를 만나는 건 기쁘면서도 싫었다. 익숙한 곳에서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지만 낯선 곳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내면을, 민낯을 내어 보이는 건 원체 익숙하지 않다.

 

가만히 고개를 내려 바닥을 보았다. 뿌연 시야가 납득될 만큼 담배꽁초가 몇 개 뿌려져 있었다. 개중에는 아직 불이 붙어 끝이 빨간 것도 몇 개 있었다.

 

[‘앗 이것들은, 내가 다 피운 건 아니고, 그러니까……’]

[‘알겠어. 대신……’]

 

담배 몇 개피와 바꾼 첫키스는 축축하고 담배 맛이 났다. 물감이 섞이는 것처럼 그가 쳐놓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순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때 이른 오판이었다. 넘실거리는 건 오직 희미하게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연기뿐, 동화에 등장하는 요정들이 뿌리는 반짝반짝한 별빛도 귓가에 들린다던 종소리도 없었다.

 

여전하네, 아카아시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노란빛 눈동자가 아카아시의 얼굴과 발치에 떨어진 담배꽁초들을 번갈아 짚었다. 그의 신발이 슥슥 담배꽁초를 아무렇게나 밀었다. 내쉬어지는 숨이 하얬다. 그 연기가 다시 안개처럼 공중에 스며들면 얇은 장막이 드리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결국에는 넘을 수 없는 유리창 같은 벽. 진하게 입을 맞췄어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기복 심한 선배로 돌아왔던 그때처럼.

 

알고 있지?”

 

하지만 아카아시는 이번에도 맥없이 그 문에 손을 올린다. 아카아시가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그가 나온 것인지는 모른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모르는 척 외면하며 울타리 안으로 사라져버리는 허망한 허상을 쫓게 될지도 모른다.

 

나도 여전한 거.”

 

번쩍거리는 휘황찬란한 간판이 발하는 빛이 파도처럼 연기 속으로 밀려들었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했지만 더욱 붉은 건 손가락 끝에서 타들어가는 담배꽁초였다. 술기운 때문인지 둘러싼 연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멍한 시야에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희미하게 가리고 있던 연기가 걷힌 민낯이다.

 

다 피울 때까지만 있어줘.

그 담배가 전부 타들어가 결국 불이 꺼지면 여전한저와 당신은 어떻게 될까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는 건 술기운 때문이다. 머릿속이 제대로 생각할 수 없는 것도, 가까워지는 그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것도 전부 술기운 때문이다. 아카아시는 부딪쳐 들어오는 그의 혀를 피하지 않았다. 예전보다 부드럽고 능숙하게 입안을 휘젓는 혀는 뜨거웠다.

 

그러나 그와의 키스는 여전히 축축하고 담배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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