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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게히나] 고백을 받았다 下

별골짜기 2016. 2. 24. 09:01

카게히나

고백을 받았다 下



도망친 게 아니라고 합리화를 했지만, 홀로 교실에 돌아온 카게야마는 비어있는 히나타의 자리를 보고 그대로 굳었다. 그 자리를 스쳐지나갈 때마다 부르고 멈춰 세우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히나타의 기나길고 오랜 침묵의 끝에 어떤 대답이 딸려 있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3학년들의 졸업을 앞둔 시기에 있던 연습에서 히나타는 연애와 배구 중 연애를 택했다. 그때 느꼈던 쓰라린 실망감이 똑같이 느껴졌다.

“저… 카게야마? 할 말이 있으면 하시지?”

수업이 끝나고 이루어지는 연습 내내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은 두 사람에 대해 잘 모르는 신입생들조차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카게야마가 교실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히나타가 돌아왔지만 그는 평소와 똑같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대답을 했는지 전혀 짚이지 않아 짜증이 났다.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짚은 카게야마는 대각선 뒤쪽에 앉은 히나타를 노려보았다. 답이 나오지 않는 영어 문제를 어떻게든 풀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점심시간이 끝나도, 쉬는 시간이 찾아와도, 체육관에 올 때도, 연습을 중간중간 쉴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알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들고 있던 공을 꽉 쥐며 말했다.

“고백. 뭐라고 대답했어?”

히나타의 눈이 커졌다. 카게야마가 굳이 목소리를 숨기려들지 않았던 탓인지 주변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오오옷! 히나타 선배, 고백 받으신 겁니까아!”
“당연히 사귀기로 하셨겠죠!!”

어느새 카게야마는 뒷전으로 밀려나 히나타는 한살 두살 어린 후배들에게 둘러싸였다. 그 광경을 함께 보고 있던 야치가 옆에 선 츠키시마에게 “히나타가 고백을 받았대!”라고 즐겁게 중얼거렸다. 츠키시마는 쓱 고개를 돌려 카게야마를 봤지만, 그는 그 시선의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공을 더욱 힘주어 잡을 뿐이었다.

“음 그게……”

히나타가 난처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대답 못 했어.”
“에엑!?”

그게 말이 됩니까!! 절규하는 후배들 사이로 히나타와 시선이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피하지 않았지만, 히나타는 다시 눈을 굴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머릿속이 잘 정리가 안 됐거든. 그래서 한참 대답을 못 했는데 나중에 다시 찾아올 테니 대답해달라고 하더라.”
“쯧. 이래서 안 되는 애들은 안 되는 거지.”

지켜보던 츠키시마가 한 마디 하자, 히나타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필사적인 자기변호에 들어갔다. 카게야마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들고 있는 공을 보았다. 내리깔린 눈꺼풀 새로 수많은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 대부분이 히나타였다. 울고 웃고 긴장한 수많은 얼굴의 히나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전국이든, 세계든 같은 무대에 있겠다고 했던 약속에 이르러 카게야마는 고요히 잠긴 눈을 들었다.

“멍청이, 리시브 준비해.”
“에? 카게야마 그러지 말고 스파이크로 해줘! 스파이크 스파이크 스파이크으~”
“3학년 넷 중에 리시브 실력 제일 허접인 게 넌 건 알지?”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는 히나타가 침통한 표정으로 네트 건너편에 섰다. 3학년이 된 지금 히나타의 리시브 실력은 일취월장했지만, 카게야마는 늘 그의 리시브를 지도했다. 그의 기준이 턱없이 높은 것도 있었지만 지금은 괜한 심술이 컸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날로 위력을 더해가는 점프 서브를 평소처럼 몇 차례고 받아내는 히나타를 보며 어쩌면 안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있잖아, 카게야마.”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 동행하는 야치가 일행에서 떨어져나가면 카게야마와 히나타가 남았다. 작년 즈음부터 두 사람은 이 동행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간혹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히나타의 자전거를 빼면 움직이는 건 두 사람밖에 없을 정도로 고요한 정취를 배경으로 걷다 보면, 카게야마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히나타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렸다. 자전거 운전대를 잡고 천천히 걷는 히나타의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가끔 그 광경을 볼 때면 심장이 울렁거릴 때가 있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흔들리지 못하게 일부러 이상한 핑계를 대고 그의 머리를 꽉 부여잡을 때도 많았다.

“연애라는 거, 아무래도 해보는 게 낫겠지?”

카게야마의 눈이 더 어두워졌다. 히나타는 앞을 보고 걷고 있었지만 카게야마는 그럴 수 없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무언가를 고심하는 듯한 모습에서 그가 읽어낼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단지 그동안 연애와 배구에 대해 적게나마 이야기했던 단서들을 모아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다. ‘히나타가 고백을 받을 건가 보다.’ 라고.
언젠가 연애와 배구 중 무엇을 선택할 거냐는 질문에 고민하던 히나타의 모습이 떠올랐다. 카게야마에게는 히나타의 고민이 어느 때보다 충격적이었다. 너도 나와 같을 줄 알았는데.

“왜?”

카게야마는 물었다. 걸음을 멈춘 그를 따라 히나타도 멈췄다.

“그냥 나도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고, 마지막 학창시절이니까. 연애도 못 해보면 좀 억울하고……”
“배구가 있잖아.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히나타는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카게야마를 빗겨갔다. 근처 골목길에 돌담을 덧그리며 중얼거렸다.

“물론 나는 배구가 가장 좋아.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야! 좋으면 좋은 거, 끝 아니야?”
“배구가 제일 좋다니까? 그래도 연애는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배구가 좋으면 그만큼 열정을 쏟을 줄도 알아야지! 말만 좋다 좋다 하는 게 아니고!”
“카게야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히나타가 물었다.

“왜 화를 내?”
“…뭐?”
“내가 연애를 하겠다는 게 싫은 거야?”
“나는……”

카게야마는 다시 똑바로 쳐다봐오는 히나타의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네가, 나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어.”

히나타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너도 배구가 가장 소중하고, 연애 같이 시간 쓰이는 일에 몰두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 히나타의 눈이 다시 단단해졌다. 그건 평소와는 다른 종류였다. 경기장 안에서 짓곤 하던 단단한 눈동자와는 달랐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지금의 단단한 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네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달라. 그런식으로 너랑 똑같이 생각하지 마.”

히나타가 몸을 틀어 다시 걷던 길을 걸었다. 카게야마는 둔통이 느껴지는 것 같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느리게 그를 따라 걸었다. 어려운 해석 문제를 앞둔 것처럼 머리가 과부하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달라.’ ‘너와는 달라.’ 그게 꼭 그 여학생과 사귀겠다는 것처럼 해석되어 카게야마는 그가 차라리 틀렸으면 했다. 원래 해석은 젬병이니까.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하지만 만약, 그게 맞다면? 카게야마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진정된 듯했던 소용돌이가 거세게 물결치기 시작했다. 둘이 헤어지는 갈림길에서 히나타는 평소와 다름없는 인사를 건넸다. 불안이 더 커졌다.

“잘 가, 카게야마.”

미련 없이 돌아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카게야마는 충동적으로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막 자전거에 올라타려던 히나타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지만 마땅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네가 멀어지는 것 같았어. 그게 싫었어.
카게야마는 뒷덜미를 잡아챈 손을 놓고 히나타의 양 볼을 잡았다. 공을 만질 때마다 퍼지던 열기와 비슷한 감각이 느껴졌다. 경기를 하는 것보다 더 뜨겁게 뛰는 심장소리가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히나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조심스레 겹쳐보았을 때, 카게야마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회전하던 소용돌이가 안전하기만 하던 벽 안을 집어삼키고, 부수고, 망가트리고, 결국 모든 것을 재정립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 지금, 뭐한 거야?”
“나도 몰라.”

히나타의 표정이 조금 구겨졌다.

“네가 바, 방금 나한테 키스했잖아…! 연애보다는 배구가 좋다며. 근데 이건 왜 했어??”
“나는……”

다시 과부하가 찾아든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도, 입을 달싹일 수도 없었다. 히나타가 화가 난 건 알지만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것 하나 생각하고 파헤치는 것만으로도 카게야마는 너무도 벅찼다.

“나… 나는 이만 갈게.”

히나타가 자전거에 재빨리 올라탔다. 카게야마가 잡을 새도 없이 사라지는 뒷모습이 너무 빨라 그의 심장이 쿠웅 내려앉았다.

‘지금, 뭐한 거야?’
‘왜 했어?’

집으로 돌아오며 카게야마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두 개의 질문에 그는 답해주지 못했다. 정말 몰랐으니까. 배구를 제외한 모든 일에 카게야마는 서툴렀다. 그렇기 때문에 오해도 곧잘 받는 그에게 부모님은 더 나아지는 걸 요구한 적 없었다. 다만 늘 솔직하게 말하라고만 했다.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곧잘 해냈다. 특히 카라스노에 입학해 배구를 하게 된 이후로. 이곳에서는 누구도 그의 말을 왜곡해 듣지 않았고, 그를 이해 못하지도 않았다.

“키스라는 건, 왜 하는 거지?”
“……허어?”

아침 연습 내내 말이 없던 카게야마는 교실로 돌아가려는 츠키시마의 앞을 가로막고 앞뒤를 잘라먹은 채 다짜고짜 물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이 된 츠키시마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대답했다.

“누구랑 하기라도 했나, 제왕님?”
“장난 아니야.”
“당연한 거 아니야? 장난으로 했다면 그것만큼 독재자의 면모가 아니고 뭐겠어?”

얄밉게 속을 긁는 츠키시마의 말에도 카게야마는 고개만 조금 숙인 채 별달리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츠키시마의 결론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의 진지한 태도를 본 츠키시마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말했다.

“좋아하니까 하겠지. 기본 상식이 이 정도로 부족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나는 배구가 가장 좋아. 연애 같은 건 할 생각 없……”
“눈치 하나 더럽게 없다 싶더니 이 정도일 줄이야.”

츠키시마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기적인 독재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방향을 제대로 잡아.”
“그게 무슨……”
“지금까지 네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천천히 되짚어보라고. 그 이상은 네 몫이야.”

퍽 귀찮다는 표정이 된 츠키시마는 목에 걸고 있던 헤드폰으로 귀를 가린 뒤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우두커니 선 카게야마는 고개 숙여 바닥을 보다가 수업종이 울려서야 교실로 올라갔다.
뒷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의 시선이 저절로 히나타의 뒤통수로 향했다. 교실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빈 자리, 그리고 열리는 뒷문소리에 그가 들어온 것을 알 것임에도 뒤돌아보지 않는 작은 머리통. 카게야마는 일부러 그의 옆자리를 지나가곤 했다. 왜 이렇게 늦었냐, 화장실 다녀왔냐, 오늘 아침 연습 좋았다, 시시콜콜한 일로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일과의 한 부분처럼 느껴졌다. 빈 자리를 채워 앉고 교과서를 꺼내들 때까지 그를 부르지 않는 히나타가 무척 낯설 정도로.
하루 종일 수업시간을 뺀 나머지를 붙어 다니곤 하던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쉬는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각자 책상 위에 엎드려있기만 했다. 지나가던 반 친구들이 히나타에게 다가가 넌지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그들에게는 물론 카게야마에게도 아무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지? 히나타와 함께 다니게 되고 이젠 그러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가 되었으니 꽤 오래전이었을 것이다. 혼자 먹는 점심이 어색하고, 곁에 아무도 오지 않는 쉬는시간이 서먹하고, 하루 종일 불리던 이름이 불리지 않는 것이 이런 기분일 줄은 몰랐다. 히나타는 그의 파트너이자, 에이스이자, 스파이커였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배구라는 종목 안에 묶인 단어들이었다. 카게야마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히나타와 함께하는 배구는 일생을 통틀어 가장 짜릿한 만족감을 줬으니까. 그리고 세계의 정상을 오르기까지 계속 느낄 테니까.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뒤를 돌았다. 책상 앞에 앉아 노트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하던 히나타와 눈이 마주쳤다. 데이기라도 한 듯 폴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히나타의 눈이 한 순간 커졌던 것을 보았다. 어제 남은 달밤 아래의 잔상과 같은 모습이었다. 소용돌이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 뜨겁게 피가 용솟음치던 순간. 배구를 하지 않았음에도 피어난 열기가 그의 이성을 앗았다. 겹친 입술은 따뜻했고 말랑했다. 오롯이 그가 지닌 열정처럼 뜨거운 볼이 양 손 안에 있었다. 그게 꼭 공을 만질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서, 그는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히나타군-”

그를 부르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와 히나타 둘 다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의 눈에도 익은 여학생이 히나타를 불러냈다. 나중에 다시 찾아온다고 했었다. 그때 대답을 해달라고. 카게야마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히나타를 가지 못하게 막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히나타를 불렀다.

“히나타.”
“왜?”

‘왜 했어?’
집에 가는 길, 이상한 표정을 지었던 히나타가 다시 나타나 있었다. 나는 네 파트너니까. 나는 네 세터니까. 나는 널 위한 토스를 올리니까. 너무나 빈약한 이유들이 따닥 따닥 못 박혔다. 히나타가 입을 다물고 다시 교실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사라졌을 때여서야, 카게야마는 유리벽처럼 세워두었던 경계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안전한 세계를 집어삼키고 바꿔버리다못해 넘실거리는 소용돌이가 흐르고 흘러 심장까지 집어삼키는 순간, 목 끝까지 차오른 울렁거림이 말했다.
좋아하니까.
히나타 쇼요를, 좋아하니까.
카게야마는 그 속삭임에 굴복하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부서진 유리에 면역 없는 마음이 사정없이 찔렸다.

 

 

 

방과 후 연습 때도 카게야마와 히나타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었다. 히나타는 그 사실만 빼면 이전과 다름없이 후배들과 이런저런 농담을 나누거나 함께 연습을 하는 둥 바쁘게 체육관을 누비고 있었지만 카게야마는 구석에 주저앉아 손톱을 다듬기만 했다.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기분 나쁠 정도로 정확한 토스’를 한 번 때려보고 싶은 신입생들이 목을 잔뜩 빼고 카게야마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끊임없이 히나타를 쫓기만 할 뿐이었다.

“…설마 제왕님, 아직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츠키시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땀을 닦아내며 카게야마에게 물었다.

“에, 츳키. 카게야마한테 뭐 알려준 거 있어?”
“뭐… 아주 기초적인 기본 상식.”

야마구치가 호기심을 담아 카게야마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예쓰! 호타루, 토스 많이 좋아졌는걸? 방금 그거 나한테 딱이야 딱.”
“헤헤, 정말요?”

카게야마의 눈이 사납게 히나타쪽을 향했다. 한 학년 어린 후배 세터에게 잔뜩 칭찬을 곁들이는 모습을 본 그가 손톱 정리를 중단하고 일어섰다.

“모르진 않나 보네.”

츠키시마가 툭 던져 중얼거린 뒤 부원들을 불러 모았다. 토스 및 스파이크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카게야마와 2학년 세터쪽으로 나뉘어 진행되는 연습이었다. 카게야마쪽에는 히나타를 비롯해 유독 눈을 빛내는 열정적인 신입생들이 몰려 있었다. 히나타는 은근슬쩍 2학년 세터 쪽으로 가려 했지만 츠키시마가 그를 밀어버리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고, 맨 뒤로 밀려나기까지 했다.

“우와아!”

공이 그냥 자석처럼 달라붙는 것 같은데? 카게야마의 토스를 처음 체험한 신입생들이 방방 뛰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게야마는 히나타와의 첫 속공을 떠올렸다. 상기된 얼굴. 짜릿한 감각. 하나하나 부원들에게 토스를 올려주고 나니 어느덧 히나타만이 남았다. 눈이 마주쳤다. 배구 코트 위의 히나타의 눈빛은 읽을 수 있었다. 제로템포. 지금 당장. 히나타가 달리기 시작하자 우카이 코치는 혀를 차며 아까보다 조금 빠르게 카게야마에게 공을 던져주었다. 카게야마의 멈추는 공이 포물선을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에 빈 공간으로 공이 꽂혀 들어갔다.
카게야마에게 배구는 특별하다. 상대를 막론하고 그에게 맞는 토스를 올려 보낸다는 세터로서의 성취감은 물론이고, 이 위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 계속 경기를 뛰는 순간순간들이 특별했다.
그러나 히나타와 함께하는 배구는 더욱 특별했다. 바람이 일기 전에는, 단지 그저 처음으로 생긴 잘 맞는 파트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제왕, 독재자를 탈피하고 함께 성장해나갈 수 있는 동료를 찾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들이 실은 틀렸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방향을 제대로 잡으라는, 츠키시마의 뜻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도 이제야 이해했다.

“큿!”

그게 아니라면 아닌 척 흥분으로 발개진 눈가를 어루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리도 없었고, 흥분으로 부들부들 떠는 저 몸을 껴안고 싶다고 생각할 리도 없었고, 한 번 닿아보았던 입술에 다시 닿아보고 싶단 생각을 할 리도 없었으니까. 한 번 벽이 깨진 이상 수습하는 건 대단히 어려웠다.

“내일 뵙겠슴다!”

후배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고 카게야마와 히나타와 야치는 함께 귀가했다. 야치는 이들과 함께한 오랜 경력으로 카게야마와 히나타 사이에 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든 분위기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비협조적인 카게야마에 의해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별다른 소득 없이 버스정류장에 버스를 타면서도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던 야치를 배웅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다시 늘 걷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길을 지나며 들은 이야기가 꽤 많았다. 특히 히나타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그 중에서도 여동생 나츠에 대한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얹도록 들었다. 카게야마는 그 여동생이 추위를 잘 탄다는 사소한 말까지 늘어놓던 히나타가 지금은 아무 말도 없다는 것이 적응되기 어려웠다. 히나타는 언제까지 화를 낼까. 누군가를 달래본 적이 없었다. 속을 가늠해볼 시도도 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배구를 제외한 모든 일에 서툴렀다. 그래서 그는 솔직하기라도 하기로 했다.

“히나타.”
“…….”
“넌 배구만큼 나한테 특별해.”
“그러냐……”

덤덤하게 대답하던 히나타가 뚝 걸음을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어 카게야마를 올려 봤다.

“나는 지금까지 배구가 제일 좋았어. 연애는 필요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런데 생각해봤어. 내가 왜 그랬을까. 배구도 특별하지만 너도 특별해. 배구가 너였어.”
“……내가 배구라서 좋다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배구에는 너도 포함되는 거잖아! 배구가 특별하고 너도 특별하니까, 그 둘이 합쳐져서 너랑 하는 배구는 더 특별한 거였어. 그러니까, 너랑 해서 더 특별해진 배구 때문에 나는…… 배구만 좋아하는 걸로 착각했던 거라고. 알아들어?”
“저, 정말? 진심이야? 그러니까…… 네가 날 좋아하는 게…… 여자 남자 사귀듯이…… 그런 좋아하는 거라고?”
“그래.”

그, 그렇구나! 히나타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히나타의 양 볼을 쥐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리고 어제는…… 미… 미안.”

익숙하지 않은 사과를 건네며 카게야마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히나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깨달은 건…… 오늘이라서. 어제는 내가 경…경향(경황)이 없었어. 네 여자친구한테는 너 좋아하는 티 안 낼 거니까 걱정하지 마. 사실 네가 고백 받으러 가는 것도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었어서 어렵겠지만 어쨌든 노력은 해볼게. 토스도 꼬박꼬박 잘 올려줄 테니까……”
“잠깐. 여자친구?”
“너한테 고백한 그 애.”

잠시 히나타가 말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더 인내하지 못하고 히나타를 보았다. 순간 눈이 커졌다. 히나타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히나타가 옷깃을 쥔 손이 희게 질려 있었다.

“……아니야.”
“뭐가.”
“고백 받아준 거… 아니라고. 거절했어!”

이번엔 카게야마의 눈이 커졌다. 히나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겨울도 아닌데 창백하게 질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 추운 바람도 불지 않는데 떨리던 목소리. 참 뜬금없게도 카게야마는 그 순간 깨달았다. 언젠가 체육관에서 그를 불러낸 여학생은 추운 게 아니었다.

“왜냐면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히나타가 고개를 들어 카게야마를 보았다. 일렁거리는 눈동자였다. 단단하게 벽을 세운 눈이 아니었다. 코트 밖이 아님에도 이렇게 쉽게 읽히는 히나타의 감정은 처음이었다. 착각이 아니라, 이건 고백이었다. 추위에 떠는 줄 알았던 그 여학생처럼, 그를 향해 마음을 담은 고백을 하는 거였다.

“나, 나는…… 난.”

카게야마는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히나타도 그를 좋아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우왕좌왕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을 눈치 챈 히나타가 버럭 소리쳤다.

“아, 그리고 너! 오늘 깨달았다고 했으면서 뭐 이렇게 빨라? 불공평하잖아!”
“…뭐가?”

멍청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는 카게야마에게, 히나타가 말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애가 남자라서 얼마나 겁이 났는데! 하필 그것도 배구 단세포 바보라서 얼마나 절망했는데…! 혹시 티 나는 거 아닌가 카게야마 네가 고백 받을 때마다 표정 관리 안 돼 죽을 맛이었지, 포기해야지 포기해야지 하는데 그것도 안 되지……”
“남자인 게 문제가 돼?”

의아하게 물음표를 붙이는 카게야마에게 히나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배구 단세포 바보…? 날 포기해…?”

금방 험악해진 카게야마의 표정에 히나타는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위협적으로 히나타의 머리를 잡으려 다가오던 손이 어느 순간 허공에 멈췄다. 히나타가 의아해 할 때 카게야마가 물었다.

“나 잠깐 시험 좀.”
“뭐, 뭐뭣…!”

파드득거리는 히나타의 양볼을, 카게야마는 꾸욱 쥐었다.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피가 빠르게 돌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공을 쥘 때와 비슷한 온도면서도 다른 느낌. 히나타가 배구와 비슷한 특별함이면서도 다른 이유.
카게야마는 한 손을 떼고 남은 한 손으로 히나타의 턱을 쥐었다.

“해, 해도 돼…?”

카게야마가 물었다. 모양 빠지게 말을 더듬어 버렸지만. 히나타는 양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얼굴을 쥐었다. 둘 사이의 간격이 손가락 한마디의 간격을 남겼다.

“응.”

그 중간 어디쯤에서 만난 입술이 겹쳐졌다. 이게 연애라면 평생 히나타와 하고 싶다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 <(히나타에게) 고백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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