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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카게히나] 두번째 사다리 1

별골짜기 2016. 7. 30. 13:17

카게히나

두번째 사다리 1

원작 날조 있음 / 3기 네타 / 미완 확률 多

 

 

 

 

. . 레프트!! ! 커버, 커버! 돈마이!

멀리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체육관 문이 열려있는 탓이었다. 히나타는 설레는 마음을 손 안에 꼭 쥐고 체육관 앞에 섰다. 안에서는 벌써 연습이라도 하고 있는 건지 여러 목소리들이 섞여 시끄러웠다. 소리만 듣고도 어떤 상황인지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빠르게 구르는 발과 바닥에 튕기는 공 소리가 그를 자극했다. 손바닥 안의 설렘이 뜨끈하게 데워져 심장을 덥혔다. 앳된 소년들의 목소리와 섞여 고함을 지르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게 되자 더는 가만히 서있을 수 없었다. 히나타는 재빨리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팔짱을 끼고 벽에 붙어서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던 우카이 코치, 아니 감독이 된 지 한참이 된 그가 체육관으로 쑥 들어온 히나타를 발견하고 눈에 띄게 반가워했다. 우카이는 목에 건 호루라기를 불어 연습을 중단시켰다. 공을 튀기며 연습혼을 불사지르던 학생들의 시선이 단박에 쏠리고, 우카이가 소리쳤다.

 

늦었잖아, 히나타!”

죄송함다!”

 

저도 모르게 학창시절 코치에게 혼나는 것마냥 기합이 바짝 든 히나타에게 우카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등을 퍽퍽 두드린 그가 히나타를 몰려든 학생들 앞에 똑바로 세웠다. 대부분이 히나타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쳐다보았지만, 그 중 몇몇은 입을 쩍 벌리고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히나타를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너희를 도와줄 새로운 코치다, 너희 직속 선배이기도 하다, 이 녀석이 카라스노를 전국대회에 올려놓기도 했었다 등등. 처음 눈도장을 찍는 자리라고 기를 살려주고 싶었던 건지 과하게 이어지는 칭찬에 히나타는 민망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히나타를 보자마자 알아본 몇몇 학생들이 TV에서 봤다며 신나게 열변을 토했다. 실업팀에 몸을 담그고 있었으니 알아봐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그 중에는 히나타 때문에 카라스노에 진학했다는 열성적인 팬도 있어 히나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카이가 넌 키가 커서 이 녀석처럼은 안 된다고 농담을 던지자 웃음이 터졌다. 그 나이대 특유의 뜨겁고 파릇한 기운에 전염되는 것 같았다. ‘TV에도 나온 적 있는 코치라는 사실이 소년들을 들뜨게 만든 걸까. 아까보다 더욱 시선이 똘망똘망해졌다.

 

옛날 생각나지?”

 

우카이가 알만 하다는 듯 물었다. 이 체육관에 쏟은 열정은 히나타에게 뒤지지 않아 처음 코치직을 제안 받았을 때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며 단칼에 거절했던 우카이 앞이었기에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침 자율시간이 끝나버려 후다닥 짐을 챙겨들고 체육관을 나서는 학생들은 미련이라도 남은 듯 히나타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히나타는 그들에게 친근히 손을 흔들어 배웅을 해준 뒤 체육관을 둘러보았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많은 보수작업을 거쳐서인지 천장은 엇비슷하게나마 옛날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카라스노 배구부를 함께 이끌었던 친구들 선배들과 몇 번 이곳에서 연습경기를 가지곤 했지만 코치로서 이곳을 다시 밟는다는 것은 확실히 색다른 기분을 안겨주었다. 부원들과 흘렸던 수많은 땀방울들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히나타는 괜히 코를 킁킁거렸다.

 

정식 인사는 이따 방과 후에 하도록 하고, 나는 일 보러 갈 거니까 너도 시간 맞춰서 다시 오든가 해.”

!”

 

히나타가 아침에 인사를 하러 오게 되어 굳이 아침부터 출석도장을 찍은 우카이가 다시 사카노시타 상점을 돌보기 위해 사라졌다. 그러나 히나타는 곧바로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미야기, 그리고 카라스노. 히나타는 미처 정리되지 못한 배구공 하나를 주워 바닥에 튕겼다. 고등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간 것처럼 마음이 붕 떴다. 작은 거인을 동경해 경험도 없는 배구부에 다짜고짜 입부하고, 소규모였지만 좋은 팀원들을 만나 뚯 깊은 경기들을 치렀다. 물론 강호고교에 가로막혀 전국대회는 몇 번 가지 못했지만, 그가 입학하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카라스노의 날지 못하는 까마귀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를 깨끗하게 씻어내 버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 이후 학교에서 지원도 신경 쓰기 시작하고, 히나타가 졸업한 이후에도 카라스노는 꽤 선전했다. 전국대회에 진출한 카라스노를 응원하기 위해 친구들 선배들과 시간을 맞춰 직접 경기를 보러 간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코치가 되어 이 자리에 선 히나타는 벽에 대고 공을 한 번 튕긴 뒤 다짐했다. 또 한 번 이들을 날게 해주자.

히나타는 공을 내려놓은 뒤 체육관을 나섰다. 고등학교 때의 열정이라면 공을 몇 번이고 내려 꽂을 수 있었겠지만 그는 현실적인 부분에 10년 동안 수도 없이 부딪쳐왔다. 고질적인 무릎 통증을 생각하고 이따 오후에 있을 정식 훈련을 고려하면 지금 무리하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히나타는 잠시 허리를 굽혀 무릎을 매만졌다.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배는 필사적으로 점프하고 움직이고 달렸다. 공중전을 지배하기 위해 무리할 정도로 무릎을 써 경기를 이끌어온 히나타로서는 무릎부상으로 인한 은퇴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뛰고 있던 실업팀에서 은퇴를 한 건 작년. 은퇴를 결정한 히나타를 아쉬워할 만큼 신경을 써준 회사의 대우 덕분에 모아둔 돈은 꽤 있었다. 그 돈으로 투자를 하라고 꼬드기는 질 나쁜 제안이 들어왔지만 큰 욕심이 없는 히나타로서는 그 제안들을 거절했다. 히나타가 가진 욕심을 굳이 꼽자면, 다만 프로 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나버렸어도 배구를 계속 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중 우카이에게 연락이 왔다. 은퇴 후 거취를 고민하는 히나타에게 그는 코치 자리를 제안했다. 최근 몇 년간 카라스노는 배구부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새로 부임한 교장이 배구부에 더욱 신경을 쓰는 모양이라고 했다. 히나타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그는 곧바로 살던 집을 처분한 뒤 학교와 가까운 곳에 싸고 작은 집을 얻었다. 거기서 하루 종일 지내는 건 아니었다. 히나타는 엄마를 위해 식당을 하나 차렸다. 낮에는 식당 일을 보고 오후에는 카라스노로 와 코치 일을 병행할 계획이었다. 코치 일이 끝나면 차도 없는 그가 버스 끊긴 본가쪽으로 돌아가기 어렵고, 언덕을 넘어 자전거를 타기에는 무릎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 새로 집을 얻은 이유였다.

확실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히나타는 식당으로 향하던 길에 서점에 들렀다. 학창시절을 포함해 책이나 공부와 친하지 않은 그였지만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서점을 찾았다. 그는 익숙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동네 서점은 꽤 오랜만이라 그런지 잡지코너를 찾기 어려웠다. 원래 잡지코너가 있던 곳에는 수험서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어,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주인도 바뀌고 인테리어도 바꾼 탓에 한참 뒤에야 잡지 코너를 찾아낸 히나타는 월간배구를 집어 들었다. 이거 하나 사는데 대체 시간을 얼마나 허비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히나타는 서둘러 계산했다.

히나타가 크게 도울 일은 없었다. 혼자 타지에 나가 살면서 웬만한 요리는 문제없이 해먹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늘었지만 역시 몇 십 년의 내공은 이길 수 없었는지 엄마는 오히려 히나타가 돕는 것을 썩 내키지 않아 했다. 일손이 부족할 정도로 손님이 꽉꽉 들어차는 건 아니라서, 히나타는 간간이 손님이 오면 주문을 받거나 서빙을 하는 일만 했다. 그나마도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할 게 없었다. 히나타는 이때를 노려 사온 잡지를 펼쳐들었다.

이 잡지는 히나타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구독해오던 것이었다. 주요 리그 일정이나 경기 리뷰, 일본 배구 국가대표 이야기, 유명 배구선수들의 인터뷰나 유망한 고교 배구선수 등에 대해 소개하는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히나타도 실업리그에서 한창 활약할 때 이 잡지에서 인터뷰를 따간 적이 있었다. 키 때문에 국가대표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나름 리그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인터뷰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왔던 키 얘기만 기억났다. 기자마다 넌덜머리나도록 하는 얘기라 지겨웠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던 고충이 있었다.

그래도 히나타가 키와 관련된 얘기에 학을 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팬들이 인터뷰가 뜰 때마다 꼬박꼬박 키가 작아도 날 수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보내온 덕분에 끝까지 기분 좋게 은퇴를 할 수 있었다. 은퇴 소식이 알려지자 우르르 쏟아지던 편지들은 히나타의 새로운 보물 1호로 등극한 지 오래다.

잠시 편지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잡지를 넘기던 손가락이 멈췄다. 익숙한 얼굴이 잡지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군청빛이 도는 까만색 머리카락에 그 비슷한 색의 눈동자를 가진 잘생긴 남자가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하지만 그 잘생긴 얼굴로 웃음기는 제로에, 험악한 얼굴을 하며 어두운 기운을 마구마구 뿜어낸다는 건 이 바닥에 있다 보면 다들 자연히 알게 되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엄청난 승부욕과 코트에의 집착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그를 뒷받침하는 불세출의 재능으로 승승장구해 국가대표 마크까지 달았다.

카게야마 토비오. 배구를 한다면 모두 한번쯤 이름을 들어본 녀석. 히나타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연이 있었지만, 그것도 죄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카라스노가 전국대회를 가기 위해 반드시 꺾어야 했던 시라토리자와의 천재 세터. 재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좋아 이쪽이 상대하고 공략하느라 번번이 고생하기도 했다. 하필이면 히니타와 동갑이라 카게야마와는 3년 내내 지역 대회에서 마주쳤었다.

그땐 그랬지. 이런저런 추억을 생각하며 기사의 타이틀을 읽던 히나타는 잠시 숨을 멈췄다. 배구랑 결혼할 작정인 게 분명하다는 소리까지 들었던 그 카게야마 토비오가,

[카게아마 토비오, 은퇴 선언]

히나타는 어리둥절했다. 카게야마만큼 코트 위에 집착하는 이는 지금껏 만나보지 못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경기를 뛰고 싶다고 열망해왔던 그조차 이 녀석 진짜다라고 압도당한 순간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끈기와 집념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아직 30도 안 된 나이에 은퇴라니? 히나타의 경우는 무릎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더는 뛰기 어렵다는 선고를 받은 쪽이었지만 카게야마가 그 정도의 부상을 당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전에 크게 어깨를 다쳤지만 성공적으로 재활에 성공해 예전의 기량을 되찾았고, 심지어 국대 마크를 단 건 그 부상 이후였다. 그런데 은퇴? 카게야마 토비오가?

히나타는 재빨리 기사를 읽었다. 은퇴 선언을 한 카게야마와의 간단한 인터뷰 기사였다. 거의 대형 사건이었지만 히나타가 소식을 못 들은 것도 납득이 갔다. 은퇴 직전에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은퇴 이후에는 식당을 차리느라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바빠 우카이를 제외하고는 배구 쪽 사람들과 통 연락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국내 리그의 팀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건가요?]

해외 리그에서 뛰고 있던 카게야마가 재계약을 맺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국내 리그 팀들이 앞 다투어 그를 영입하려 애썼다는 얘기는 히나타도 들었다. 히나타가 속한 팀도 카게야마를 원했지만 하위권 팀인 그들이 노리기에는 너무 거물이라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나 있었는지 몰랐다. 히나타는 은퇴를 앞두고 정리할 것이 많아 바쁜 시기였기 때문에 팀 돌아가는 사정에는 무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궁금해졌지만 카게야마는 인터뷰상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자세한 내막은 밝히지 않았다. 그저 고질적으로 앓아온 어깨의 고통이 심해진데다가, 개인적인 일이 겹쳐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말뿐이었다.

 

대단하네

 

히나타가 중얼거렸다. 이유야 어떻든 카게야마의 은퇴는 배구계에 큰 이슈였다. 한낱 실업팀의 미들블로커였던 히나타와는 차원이 다른 관심이 쏟아질 터였다.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또 그의 대체자는 누가 될 것인지. 입맛이 썼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화장실에서 만났던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히나타는 막 들어서는 손님을 반갑게 맞았다. 잡지는 그대로 빈 테이블 위에 덮였다.

 

 

 

 

우카이는 히나타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처음 보는 카라스노의 고문과의 첫 만남이었다. 배구부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써주었던 타케다 선생은 몇 년 전 다른 학교로 전출이 되어 나가고 없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배구부에서의 기억이 인상 깊게 남은 것인지 가끔 카라스노 배구부가 모일 때 함께 자리하곤 했다. 우카이는 지금도 가끔 그때가 그립다는 타케다에게 지금 있는 학교에서나 잘하라고 등을 툭툭 두드렸지만 그가 카라스노를 떠날 때 가장 아쉬워한 사람이기도 했다.

새로운 카라스노의 고문은 히나타를 퍽 반갑게 맞았다. 그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지만 알고 보니 더 어렸다. 선생이 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때 부활동으로 배구를 했기 때문에 룰에 빠삭하고 열정적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신입이라 할일이 많아 배구부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던 중 다행이라며 고문이 눈물을 글썽였다. 히나타는 얼떨결에 고문과 악수를 했다. 그는 배구부 학생들과도 격 없이 지내는지 큰소리로 불러 모았다. 이미 아침에 한 번 인사를 나누었지만 히나타는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카라스노 여자매니저의 전통은 대대로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매니저인 2학년 여학생이 히나타에게 부원 명단을 가져다주었다. 우카이는 새로 온 코치에게 실력을 보여주라며 팀을 두개로 나누어 연습게임을 진행했다. 히나타는 명단과 이름을 히나하나 대조해가면서 우카이의 설명을 들었다.

카라스노 배구부는 팀을 두개로 나누어도 참여하지 못하고 벤치에서 교체를 기다리는 부원들이 많이 남을 만큼 인원이 많아졌다. 히나타가 입부할 때는 1학년이 4명밖에 없었는데, 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올려서인지 그 다음 해에는 6, 마지막 해에는 9명이 들어왔었다. 입부 희망자는 꾸준히 유지되어 강호고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인원이 불어났다. 현재 인원은 열일곱. 아직 1학년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면 더 놀라운 일이다.

학생들의 실력도 꽤 좋았다. 히나타는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의 그가 이 사이에 섞여 있었다면 과연 레귤러로 뛸 수 있었을지 상상해보았다. 지금보다도 한참 작은 단신의 미들블로커라. 코치 입장이 되어보니 지금 생각해도 참 파격적인 기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부원의 수가 적은 것도 한몫 했지만 히나타의 능력에 대한 우카이의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점에 대해 히나타는 늘 감사하고 있었다. 우카이가 그를 써먹지 않았다면 실업팀에서 뛰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코치가 되어서 생각하니까 신기하네요.”

뭐가?”

코치아니 감독님이 저 써주신 거요.”

그러냐.”

 

우카이가 피식 웃었다. 부정하지는 않았다. 신체적인 조건, 특히 키가 좌우하는 배구에서 160cm짜리를 레귤러로, 그것도 미들블로커로 내세우는 건 확실히 도박이었다.

 

넌 승리를 미친 듯이 갈구하는 악바리였으니까. 그것도 타고난 움직임이 있는. 우리는 어차피 도전자에 있는 입장이었고, 잃을 게 없었으니 이것저것 다 시도해본 거지.”

 

힘겹게 네코마와의 연을 다시 이은 것을 계기로 수많은 합숙을 지내며 히나타는 엄청난 성장을 했다. 1학년 때는 누구 말 그대로 점프력만 좋은 허접이었지만, 수많은 연습과 실전으로 서서히 공중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같은 미들블로커였던 츠키시마만큼은 아니었지만 타고난 점프력으로 블로킹도 아주 못하는 수준은 아니게 되었다. 무엇보다 키가 더 자라줘서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첫해 인터하이 예선 때 네 눈빛을 잊지 못해. 거기서 확신했지. 넌 곧 죽어도 배구를 할 녀석이라는 거.”

그렇슴다.”

 

히나타가 웃었다. 우카이가 덧붙였다.

 

애들 중에 배구선수로 진로를 잡은 녀석도 있으니까 실업리그 부동의 레귤러였던 네가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와줘서 고맙다.”

저야말로 불러주셔서 얼마나 다행인데요. 막상 은퇴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막막했는데.”

 

그때 히나타의 눈에 막 토스를 보내는 부리팀의 세터가 띄었다. 몹시 깔끔한 세트업 자세에, 자유자재로 뻗어나가는 공, 그리고 불안정한 리시브를 어떤 자세에서라도 잇는 토스. 히나타는 크게 뜬 눈으로 우카이를 보았다.

 

, 감독! 저 세터2학년이죠?”

.”

 

우카이가 웃으며 말했다.

 

어때, 잘하지?”

엄청 잘하는데요! 아까 리시브 실수한 공 커버하는 동시에 토스 보내는 게 꼭

 

히나타는 잘 생각나지 않아 눈을 찡그렸다. 그때 우카이가 말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와 닮았지.”

.”

 

맞다. 히나타는 저 엄청난 실력을 어디서 봤는지 깨달았다. 카게야마 토비오. 전국구급의 천재 세터. 히나타는 그가 카라스노 시절 만났던 시라토리자와와의 경기에서 목도한 충격을 아직 잊지 못했다. 세터보다는 에이스에 관심이 많았던 그조차 카게야마의 플레이를 보고 저건 범재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정도니까. 제대로 붙어본 건 1학년 중반 지나 있던 봄고 예선 때부터였지만, 그때 깨달은 건 진짜 장난 아닌 녀석이라는 사실.

카게야마를 본 건 고작해야 대회가 열리는 체육관으로 범위를 한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공식 웜업 때 보여준 토스자세가 하도 인상 깊어 기억하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몸 담고 있는 해외 리그까지는 챙겨볼 여유가 없었고, 국대 경기를 중계해줄 때도 세터보다는 스파이커를 주로 잡아주니 못 본 동안 잊을 만도 했지만 이렇게 새록새록 기억나는 걸 보면 확실히 대단하긴 했다.

 

롤모델이 카게야마 토비오라니 닮을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아아.”

 

카게야마 토비오를 동경하지 않는 어린 세터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사실 막상 프로의 길에 들어서 이것저것 주워 듣다 보면 그의 평판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친해지려 다가가는 사람들을 내친다더라, 자기밖에 모르는 고약한 성미를 가지고 있다더라, 달려드는 여자들 안 밀어내고 떠나는 여자들 안 붙잡는다더라, 가끔 연습 때 성질 나쁜 토스가 튀어나온다더라. 같은 지역 출신인 히나타에게 진위여부를 묻는 질문이 몇 번 오긴 했지만 그는 카게야마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변명해줄 수는 없었다. 그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는데라는 말밖에.

 

내일은 신입생 모집 마지막 날이죠?”

. 내일 부활동 때 또 연습경기 시켜봐야지.”

모레는 주말인데, 연습 합니까?”

당연한 거 아냐?”

 

학생들보다 더 의욕에 찬 표정을 하는 히나타를 보며 우카이가 피식 웃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히나타의 무릎으로 향했다. 긴 트레이닝복 바지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무릎에는 아마 붕대가 둘러져 있을 것이다. 처음으로 3년을 지도한 학생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히나타를 불렀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그의 무릎이 망가져갔듯 많은 것이 변했다. 단 하나, 히나타의 배구에 대한 열정만은 여전해 우카이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삐익, 우카이가 잠시 경기를 중단시키고 벤치멤버와 코트 위의 몇을 교체했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뛰는 모습을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히나타는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플레이 스타일을 최대한 머릿속에 채워 넣었다.

 

 

 

 

1학년은 10명이 들어왔다. 원래 목요일까지 7명이 들어오려고 했지만 모집기간 마지막 날 3명이 더 입부했다. 3명은 마지막까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히나타가 카라스노 코치로 합류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입부 신청서를 내러 왔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열렬한 반응이 있을 줄은 몰랐다. 히나타의 팬들은 늘 조용히 응원의 편지만 써서 보내왔기 때문에 카라스노 배구부처럼 대놓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면 마음이 눈 녹듯 흐물흐물해져서 큰일이었다. 원래 칭찬에 약한 타입이다 보니 더 그랬다.

코치가 기강을 못 세우면 안 된다고, 엄하게 해야 할 때는 엄하게 굴라고 우카이가 거듭 당부를 해 훈련 때 그것만은 지키려 갖은 애를 썼다. 어차피 훈련에 들어가면 진지한 건 다들 마찬가지였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현역으로 뛰다 온 히나타가 학생들보다 체력이 좋으면 좋았지 딸릴 일은 없었다.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 한 직접 시범을 보여주며 알려주는 동안의 히나타는 적어도 섬뜩하기까지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어 저절로 학생들을 긴장시켰다.

연습시합 결과를 살피니 꽤 쓸 만한 인재들이 많이 들어온 것 같았다. 10명이 합류해 27명이 된 카라스노 배구부는 중학교 졸업예정자들에게 추천입학도 제안할 정도로 많이 커져 있었다. 여기서 부원이 더 많아진다면 어쩌면 실력으로 뽑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인원이 많아진 만큼 히나타와 우카이도 바빠졌다. 히나타는 그가 이틀 동안 지켜본 부원들의 실력에 대해 우카이에게 의견을 내놓았고, 우카이는 히나타와 상의해 여러 조합의 레귤러 멤버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새로운 배구부 고문은 열정이 넘쳤다. 카라스노는 더 이상 외면 받는 팀도 아니었다. 어디든 금방 연습시합을 잡을 수 있을 터였다.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인터하이 예선이 머지않았다.

우카이는 곧장 주말연습을 공지했다. 처음 카라스노를 맡은 이후로 그는 차차 할아버지의 이름을 위협할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으로 유명해졌다. 평소에는 덜하지만 합숙 때는 가차 없었다. 애초에 그 소문을 듣고도 배구부를 선택한 만큼 큰 불만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히나타처럼 기뻐하는 얼굴도 보였다. 이제 진짜 본격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히나타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카이의 첫 주말연습은 간단한 웜업 후 달리기로 시작했다. 히나타도 해본 적 있듯 21조로 언덕을 찍고 돌아오는 훈련이었다. 하지만 부원이 총 27명이라 21조로 하면 한명이 남게 되어 히나타가 같이 뛰어주기로 했다. 우카이는 히나타의 무릎을 염려해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이 정도의 달리기는 거뜬하리라 생각했다. 히나타와 함께 달리는 학생은 카게야마의 플레이를 닮은 유망주 세터였다. 그는 히나타와 발을 맞춘다는 사실이 퍽 기뻤는지 들떠 보였다. 민망해진 히나타가 조금 속도를 높이자 세터도 속도를 올렸다.

앞서나간 부원들이 도착해서 쉬고 있어야 하는 지점. 세터와 함께 언덕에 올라선 히나타는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에 잠시 당황했다. 히나타가 한명을 데려왔으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건 26명인데 그중 절반이 썰물이라도 빠진 듯 텅 비어 있었다. 히나타의 표정 변화에 찔끔한 3학년 한 명이 이실직고를 했다. 애들이 너무 흥분해서 언덕을 넘어갔어요. 흥분도 흥분 나름이라고 말하려던 히나타는 입을 다물었다. 고등학교 때 혼자 신나서 비슷한 사고를 쳤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돋아났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첫 주말연습이니 열의에 가득 찬 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라 히나타는 혀를 차며 몸을 틀었다. 어디 가냐는 말에 애들 잡으러!”라고 대답한 그가 천천히 언덕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히나타와 같이 발맞춰 올라온 세터나 다른 몇몇도 슬그머니 따라붙었지만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히나타는 몰라도 이들은 팔팔한 고등학생이었다. ‘적당히를 모르면 선을 조금 넘을 수밖에 없었다. 이따 우카이의 어떤 훈련이 펼쳐질지 모르는 1학년이 주를 이루고 있어 안타깝기도 했다. 너희 후회할 텐데.

아무튼 언덕을 하나 넘으니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시절 앞뒤 안 재고 달리다가 정신 차리고 보면 서 있던 곳이었다. 체력을 주체 못한 스스로에게 매번 후회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이 거리도 변하긴 했구나. 휘휘 주변을 둘러보았다. 편의점이 있던 자리는 다른 건물이 들어섰고 도로는 더 넓어졌다. 편의점은 못 보던 건물로 옮겨간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 저 멀리 거리를 기웃기웃거리는 카라스노 학생들이 보여 히나타가 다가갔다.

 

이 녀석들!”

 

히나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학생 열 명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아무리 신나도 그렇지 여기까지 오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죄송함다!”

경쟁하다가 그만!”

 

그 기분 잘 알지. 그렇지만 엄할 때는 엄해야 하는 법. 히나타는 얼굴을 굳히고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마지막 훈련이면 무리하게 이쪽으로 넘어와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상태잖아. 이따 어떤 힘든 훈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고 벌써부터 힘을 빼면 안 되지.”

 

반성한다고 해도 나중에 지켜지지 않는 거 안다. 히나타도 그래서 매번 선배들이 붙들어 가곤 했으니까. 차라리 달리기를 훈련의 마지막으로 집어넣는 편이 어떨까. 우카이에게 건의해야겠다고 생각한 히나타가 반성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돌아가기 위해 뒤를 돌 때였다.

 

!!”

어억!”

 

학생들이 걸음을 쉽사리 옮기지 못하고 멈춰 섰다. 부릅뜬 눈과 급하게 들이마신 숨이 몸을 긴장으로 딱딱하게 만들었다. 히나타의 시선이 의아하게 학생들이 향한 곳을 닿았다. 그리고 히나타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다.”

 

학생들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저 멀리서부터 꽤 빠른 속도로 로드워크 중인 이의 얼굴은 히나타가 보기에도 카게야마가 맞았다. 불과 며칠 전 집지 인터뷰 기사로도 접한 얼굴이니 확실했다. 상대가 굳이 얼굴을 숨기려들지 않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꼿꼿한 자세로 뛰고 있어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남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카게야마도 멀리서 그를 주시하는 무리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히나타는 빤히 쳐다보는 게 실례가 된다는 걸 알고 있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를 기억하기는 할까? 히나타야 배구하는 선수로서 카게야마를 워낙 모르는 사람이 없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얼굴을 맞댄 건 고등학교 3학년 봄고 예선이 끝이었다. 그 이후로 10년이 흐르는 동안 카게야마는 해외리그로 나갔고 국가대표가 되어 세계를 누볐다. 그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히나타를 당연히 잊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냥 모르는 척 하자. 씁쓸해지는 입안을 혀로 축이며 히나타가 학생들에게 돌아가자고 다시 말하려 할 때, 그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움직였다. 히나타 쪽이었다. 히나타는 , 어라?’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스쳐지나갈 줄 알았던 카게야마가 어느새 로드워크를 멈추고 히나타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너무 몰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한 히나타가 어버버거릴 때, 카게야마가 빤히 히나타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오랜만이다.”

? ?? . 오랜만이다

 

뭐야, 나 기억하고 있는 거야??! 히나타가 당황했다. 학생들의 놀란 시선이 히나타에게 닿았다. 우리 코치님이 카게야마 토비오와 아는 사이!! 그들의 눈이 점점 더 반짝이는 것 같다는 부담을 느끼며 히나타가 말했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근처 살았던가?”

. 너는 뭐해.”

 

카개야마가 고개를 돌려 히나타와 학생들을 보았다. 학생들의 과도하게 충성심어린 눈을 보자니 히나타는 후환이 두려워졌다. 저기, 나 카게야마랑 그렇게까지 안 친한데.

 

나는최근에 카라스노 코치 맡게 돼서연습하다가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네.”

 

어떤 연습이면 여기까지 오냐고 카게야마가 묻는 것 같았으나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었다. 숨 막히는 어색함에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잠시 생각에 빠진 듯했던 카게야마가 말했다.

 

그래. 또 보자.”

? 잘 가.”

 

카게야마가 다시 로드워크를 하는 듯 멀리 떠나버렸다. 히나타는 카게야마가 사라지자마자 와악 소리를 내며 달려든 학생들의 질문공세를 받아야 했다. 두 사람 아는 사이냐, 많이 친하냐, 어떻게 알게 됐냐, 혹시 전화번호 아냐. 아는 사이는 맞지만 그냥 지역 예선때 본 게 전부고 친하지도 않고 전화번호도 몰랐다. 학생들의 기대를 깨서 미안하지만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정말 그냥 아는사이였다. 그나마도 카게아마가 히나타를 기억하는 것이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10년 전에 만난 상대를 기억하는 것도 놀랍지만, 히나타가 들은 소문도 있어서 더 그랬다. 사람을 싫어한다더라, 잘난 척 한다더라. 물론 그 말을 믿은 건 아니었지만 뿌리 깊게 박히듯 들어온 말이 한순간 뒤집어져 당황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우리 코치님이 카게야마 토비오와도 아는 사이였다니! 라는 자부심이 깃든 눈이라 히나타는 이유 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카라스노로 돌아와야 했다. 처음부터 무리했다며 우카이에게 혼나는 학생들을 지켜보면서도 히나타의 머릿속에서는 카게아마와의 떨떠름한 만남만이 반복되었다.

 

배구부 고문 선생이 시라토리자와의 연습경기가 잡혔다고 알려오기 5시간 전이었다.

 

 

 

 

https://twitter.com/byeoljari/status/714814535589191680

두 사람이 고등학교 때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서 쓰기 시작했지만...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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