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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히나] 두번째 사다리 3

별골짜기 2016. 12. 25. 19:01

카게히나

두번째 사다리 3

미완 / 시라토리자와 출신 카게야마

 

 

 

 

뭐지? 히나타는 버스에 올라타고 앞좌석에 앉으면서도 어리둥절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우카이 역시 한참을 침묵하다가 물었다.

 

너 카게야마 토비오랑 따로 만날 정도로 친했던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히나타는 머릿속으로 카게야마와의 만남을 되짚었다. 처음 만난 건 인터하이 예선 때 화장실에서였고. 그 다음이 봄고 예선 때 체육관 앞이었지. 그리고 그 다음은 인터하이 예선, 그 다음이 봄고 예선, 그 다음이 인터하이 예선, 마지막으로 봄고 예선.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국대회를 가기 위한 길목에서밖에 만난 적 없었다. 달리기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가버린 시라토리자와에서도 우시지마밖에 만나지 못했다.

졸업 이후에 인연이 있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청소년 국가대표 때부터 눈독 들이고 있던 해외 팀이 카게야마가 졸업하기를 기다렸다가 곧바로 채가고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건너건너 소식이 들려오긴 했지만 하나같이 악의가 가득한 내용들이었다. 그 내용의 진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정도가 카게야마와 히나타의 사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따로 만나자는 제안에, 번호까지 받아가다니?

 

우리팀에 대해 궁금하거나 확인할 게 있어서가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해봐도 배구와 관련된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 연습시합을 제안한 것도 카게야마였다. 카라스노 배구부는 그의 고등학교 시절 숱하게 만난 상대였으니 코치로서 더욱 철저하게 카라스노를 파악하려는 의지일 수도 있었다. , 정말 이 이유 때문인가 봐! 시험시간 5분을 씨름하다가 결국 정답을 알아낸 듯한 후련함을 느끼며 히나타가 혼자 납득할 때, 우카이가 중얼거렸다.

 

아닌 것 같은데

?”

네 친화력이라면 카게야마 토비오와 절친이라고 해도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코치님 코치님!!”

 

그때 뒷좌석에 앉아있던 학생들이 한목소리가 되어 히나타를 불렀다. 히나타가 앉은 자리에서 뒤를 돌자 붉게 상기된 얼굴의 학생들이 물었다.

 

시라토리자와 연습 경기 잡힌 거, 코치님이랑 카게야마 토비오 친해서 잡은 거라면서요!!”

얼마나 친해요? 막 핸드폰 번호도 아는 사이?”

지난번에도 로드워크하던 카게야마 토비오가 코치님한테 먼저 인사했잖아요!”

 

히나타는 골치가 아팠다. 그렇잖아도 카라스노에서 부원들을 소집해 이쪽으로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시달리던 그였다. 잊을만하면 카게야마 얘기를 꺼내는 학생들 때문에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옆에서 우카이가 말리기는커녕 한술 더 뜨며 카게야마를 상대했던 일화를 과장되게 말하는 바람에 도저히 카게야마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애초에 너 진짜 짜증나, 멍청아라고 경기 중에 들은 말이 어떻게 히나타에 대한 칭찬이 될 수 있는 거냔 말이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하거나, 아니면 딱 잘라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안 친하면 상관없었지만 히나타가 생각하기에 카게야마와의 사이는 애매했다. 그건 과거형을 써도 마찬가지였다. 친했나? 그렇다기에는 둘 다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궁금해 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안 친했나? 그렇다기에는 체육관에서 긴긴 대화를 나눈 적도 많았다.

진짜 애매하네. 생각해보니 또 그런 것 같아 히나타가 생각에 빠졌다. 연습시합을 카게야마가 잡은 건 맞는데 히나타가 카라스노에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지 몰랐다. 핸드폰 번호는 알게 된지 고작 30분도 안 됐고. 카게야마가 먼저 인사한 건 맞지만 딱히 반가워하는 얼굴도 아니었고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었다.

 

싸인 받아주시면 안 돼요?”

, 나도!”

저도요!!”

내 싸인이라면 열장씩이라도 해줄 수 있는데!”

…….”

…….”

 

급속도로 사그라들어 침묵까지 파고든 정적과 자는 척 눈을 감아버리는 학생들의 모습에, “너네 너무하는 거 아니냐!”라고 소리치며 히나타가 주먹을 붕붕 흔들었다. 버스에 잠시나마 웃음이 스쳤다.

 

 

 

 

시라토리자와 에이스 봤지? 파워 엄청난 거.”

.”

아마 우리를 의식한 건지 몰라도 다른 스파이커들에게 비슷비슷하게 공을 올렸지만, 막상 대회에서는 에이스에게 공을 몰빵할 가능성이 크다.”

 

시라토리자와의 연습시합을 지켜보며 파악한 좋았던 점 부족한 점을 비롯해 상대팀 분석을 우카이가 내놓는 동안 히나타는 중간중간 의견을 보충하기도 하며 그를 거들었다. 우카이의 말처럼 시라토리자와는 대대로 에이스 중심의 배구였다. 모든 작전은 에이스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우시지마가 그 중심에 선 에이스 출신이어서인지 특색은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이전의 시라토리자와 감독이 유독 심했던 감이 있지만.

 

믈론 올해 에이스는 파워가 대단하긴 하지만 성격도 급하고 영리하지 못하다. 만약 다시 만난다면 그걸 잘 이용해봐야겠지.”

 

히나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연스럽게 카게야마까지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우카이는 소리 내서 손뼉을 친 뒤 말했다.

 

다들 고생했다. 내일 보자.”

감사함다!!!”

 

미팅까지 전부 마치니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 몇몇 학생들은 오늘 시라토리자와와의 시합에서 자극을 받았는지 따로 더 연습을 하고 가겠다는 말을 했다. 그 기분을 잘 알고 있는 히나타는 코치로서 그만 돌아가라고 해야 옳았지만, 선심 쓰듯 너무 늦게 들어가지 말라는 말만 남겼다. 어차피 이번 연습시합은 교체를 하도 많이 해서 크게 부담되지도 않았을 터였다. 버스에서 지쳐 곯아떨어진 녀석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랬다.

나도 저렇게 열심히 할 수 있을 때가 있었는데. 하나타는 아쉬운 눈으로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코트 위에서 제 발로 물러난 걸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억지로 끌려 나가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히나타는 무릎을 문지르며 밖으로 나왔다. 어둑어둑 까만 하늘에 달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히나타와 마찬가지로 체육관을 나서던 우카이가 카게야마 잘 만나라고 그의 어깨를 툭 두드린 뒤 길게 하품을 하며 사라졌다. 그래, 카게아마와 만나기로 했었다. 이 시간에 정말 나를 만날 셈일까?

시끄러운 벨소리가 들려 히나타는 깜짝 놀랐다. 자기 생각하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전화를 걸어온 카게야마의 전화를 받으며 히나타가 천천히 걸었다.

 

미팅 끝났어?”

.”

우리도 방금 끝났는데, 어디야?”

 

카게야마의 대답에, 그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히나타가 오늘같이 늦게 일이 끝나는 날 곧바로 들어가 잘 수 있게 마련한 작은 집 근처였다. 거긴 시라토리자와 근처가 아니라 카라스노 근처에 가까운데. 히나타가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그 근처 살아?”

.”

오옷 신기하다! 나도 그 근천데. 그러면

 

히나타가 지나다니다 본 작은 술집 이름을 댔다. 알아? 확인 차 묻는 질문에 카게야마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히나타는 잘됐다며, 그럼 거기 들어가서 먼저 주문해놓고 기다리라고 했다.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다고 답하는 카게야마와 통화를 마치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뭐야, 생각보다 괜찮잖아? 프로팀에서 뛸 때도 일과가 끝나면 자주 동료들과 한잔 어울렸던 그였다. 미야기로 내려온 후에는 또래도 없고 상점 보느라 바쁜 우카이를 불러낼 수도 없어 적적했는데, 근처에 카게야마가 산다니!

전혀 몰랐던 사실이지만 뭐 어떠냐 싶었다. 아무리 애매한 사이라고 해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친해지면 장땡이다. 카게야마쪽 이유는 종잡을 수 없어도 히나타쪽의 이유가 확실하니 상관없었다. 게다가 만약 얼굴 보기 싫다고 해도 지역예선에서는 꼭 마주쳐야 할 인물인데 확실히 친해져서 나쁠 것도 없고,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계기를 가지게 된 거였다.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와 술도 마셔봤다! 그럼 친한 거야! 그럼 그렇고말고.

카게야마와 친해져야 할 이유를 하나둘 적립하며 그가 말한 술집 앞에 이르러 히나타는 고개를 기웃기웃거렸다. 탁 트인 테이블들이 많은데 굳이 구석에 있는 테이블을 골라 앉은 카게야마가 보였다. 카게야마에 대해 완벽히 아는 건 아니지만 그 선택이 그답다고 여겨져 히나타는 허허 웃었다. 곧 문을 드륵 소리를 내며 열고 들어간 히나타를 카게야마가 쳐다봐왔다. 히나타가 카게야마 맞은편 의자를 끌어 앉으며 물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간략하게 대답한 카게야마는 아무 말도 없었다. 히나타는 잠시 당황했다. 술이 들어가기 전에는 어색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치자 머쓱해졌다. 기본적으로 그는 어색한 공기에 익숙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오히려 분위기를 느슨하게 풀기 위해 주도하면 주도했지, 상대가 먼저 말을 걸길 기다리는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카게야마가 살가운 성격도 아닐 테고 히나타는 이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꼈다.

그런데, 어떻게?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10년 만에 재회하고 고작 세 번째 만남이다. 그것도 첫 번째는 길바닥에서 만나 5분도 대화하지 못했다. 두 번째는 경기가 목적이었던 터라 친목보다는 상대의 전력에 집중했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공유하고 있는 거라곤 낡디 낡은 10년 전의 기억뿐이었다. 그마저도 카게야마에게는 하찮게 느껴질지 모르는. 카게야마가 그의 번호를 물어보고 이렇게 따로 만난 게 놀라울 정도니 분명 그랬다. 그때 종업원이 미리 카게야마가 주문한 맥주와 안주를 가져다주었다.

 

미팅은 잘 했어?”

. 너희는?”

우리도 무사히 끝났지. . 무슨 내용 나왔는지는 말 못해준다.”

 

히나타가 재빨리 팔로 엑스자를 그리며 몸을 뒤로 젖혔다.

 

나 술도 세. 물어볼 생각 하지 마.”

별로 그럴 생각 없는데.”

 

카게야마의 찌푸린 얼굴에 히나타는 씩 웃었다. 그럼 다행이고. 그리곤 손을 들어 맥주병을 들었다. 시원한 감각이 손바닥 전체로 펴지고, 그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카게야마의 맥주잔에 따라주었다. 찰랑찰랑 노란 맥주가 흰 거품을 뒤집어쓰고 아슬아슬하게 차올랐다. 히나타는 맥주병을 카게야마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병을 받은 카게야마에게 자신 몫의 맥주잔을 내밀자 그제야 천천히 맥주를 따라주었다. 거품이 살짝 넘칠 뻔했지만 히나타가 기겁하며 맥주 거품을 후르륵 삼켰다. 카게야마가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맥주 좋아해?”

취하지 않는 선에서는. 넌 안 좋아해?”

딱히. 시즌 중에는 거의 마신 적 없어.”

시즌 중이라고 해도 중요한 경기 끝난 다음에는 동료들이랑 가볍게 마실 수 있는 거 아냐?”

? 별로.”

 

으음. 히나타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카게야마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카게야마는 자기관리가 철저한 걸로 유명했지. 해외리그까지 나간 몸이니 당연히 그렇겠지만은,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었다. 천재인데다가 엄청난 노력파에, 늘 경기 전을 살피면 손톱을 다듬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울리지 않게 손수건도 가지고 다니는 것 같았고. 아마 카게야마는 음주뿐만이 아니라 흡연도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흡연 안 하는 건 히나타도 마찬가지였지만. 히나타가 말했다.

 

그래도 일본 가끔 돌아올 때도 있었잖아? 쉬기도 할 겸 겸사겸사 들어오기도 했을 거고, 국대 소집 때문에 들어오기도 했을 거 아냐?”

.”

그때마다 뭐했는데? 그때도 술은 입에도 안 댔다, 뭐 그런 건 아니지? 너 주량은 알아?”

 

주량 측정 안 될 정도로 술을 안 마셔버릇 했다면 히나타는 진지하게 카게야마의 손에서 맥주잔을 빼앗을 용의로 충만했다. 하지만

 

일본 들어와도 술은 안 마셔서 몰라. 마실 사람도 없었고.”

 

히나타는 순간 자신이 몹시 나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 난 나쁜 녀석이야! 맥주잔을 뺏긴 뭘 뺏어! 오히려 들려줘야 되잖아! 맥주의 즐거움을 모르는 카게야마가 불쌍해!

마음이 아파진 히나타는 카게야마에게 맥주잔을 내밀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멀뚱히 그걸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젠장, 건배도 모르는 거야? 히나타가 팔을 뻗어 맥주잔을 쥔 카게야마의 손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쨍 소리가 나도록 서로의 잔을 부딪쳤다.

 

건배!”

건배.”

 

카게야마가 손에 든 맥주잔을 조금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삐죽삐죽 올라가는 것 같았다. 마치 처음 성인이 되어 술을 경험하는 듯한 날것의 반응에, 히나타가 중얼거렸다. 우리 자주 마시자.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카게야마가 묵묵히 맥주를 홀짝이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젠 현역 선수도 아니라 관리에 대한 압박감이 없어서 순순히 마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세간에 떠도는 소문들과는 온도차가 있는 모습이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에 대한 소문 중 한 가지를 떠올려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자기 잘난 거 알아서 다른 사람들하고 술자리도 절대 안 가진다더라. 원래 동료들한테도 철벽치는 걸로 유명한데 오죽하겠어.’

자기 잘난걸 알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관리가 철저해서일거라고 역시 당시에 두둔했어야 옳았나. 잘 알지도 못한다면서 어떻게 확신하냐고 자동적으로 따라올 말에 답할 수가 없어 망설였던 게 조금 후회가 되었다. 어색하게나마 건배도 외쳤는데. 빼지도 않고 저렇게 후룩후룩 잘만 마시는데. 안주도 저렇게 맛있게 먹는데. 10년 만에 본, 그것도 타교의 라이벌 선수와 마주보고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할 수만 있다면 사진을 찍어 뿌려버리고 싶었다.

 

그럼 일본 들어와서는 뭐했어?”

 

히나타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카게야마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부모님 찾아뵙고. 시라토리자와에서 학생들 봐달라고 부탁 오면 찾아가고. 가끔 오이카와상이 불러서 나가고. 짐 새로 챙길 거 있으면 챙기고. 체육관 가서 연습하고.

워어그게 전부야? 너 진짜 재미없게 살았네.”

뭐야?”

 

카게야마가 스윽 노려보자 히나타는 움찔 하면서도 할 말은 했다.

 

그렇잖아! 넌 그래도 일본에서 어쩌면 제일 유명한 배구선순데. 시즌 끝나고 들린 거면 휴가나 다름없으니까 좀뭐라고 해야 하나

?”

네 스스로를 위한 그런여러 가지를 해도 되지 않았을까 해서.”

날 위한 건 배구야.”

 

너무 공감이 가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히나타는 그의 귀까지 들렸던 카게야마의 소문을 염두하고 던진 말이었지만 카게야마는 별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축복인지 불행인지 눈치도 있는 편은 아니라 그런진 모르지만 소문에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고. 히나타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중얼거렸다.

 

. 그렇지. 배구만큼 중요한 게 없지

너도 그래?”

당연하지!”

그래서 카라스노 코치로 내려온 거고?”

그렇지?”

 

히나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히나타가 카라스노 코치로 온 것처럼 카게야마도 시라토리자와의 코치로 왔다. 그 자세한 내막이나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배구와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카게야마의 선택이라고 봤다. 줄곧 잘 알아왔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등학교 모습을 떠올리면 그랬기에 히나타는 무심코 말했다.

 

사실 네가 이렇게 빨리 은퇴할 줄은 몰랐어. 어깨 때문에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사람들이 그러던데. 정말이야?”

사람들이 그래?”

 

카게야마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뭔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라 히나타가 덧붙였다.

 

, 그것도 있지만 뭐랄까

 

히나타는 고등학교 공식전에서 만났던 카게야마를 떠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고등학교 때 너는 코트 위에 대한 집념이 엄청 대단해보였어. 나도 한 집착 한다고 생각했는데, 위기감을 느낄 정도였거든. 그런데 부상 통증으로 은퇴한다니까 신기했어. 아파도 참고 했어야 한다,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랬을 것 같다 이거지.”

 

히나타의 말에 카게야마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가 맥주를 한 잔 마시며 물었다.

 

고등학교 때를 다 기억해?”

너야 뭐 인상 깊게 남기도 했고. 너도 나 기억하잖아?”

 

카게야마가 히나타를 힐끗 본 뒤 말했다.

 

점프만 잘하는 허접이었던가.”

. 적어도 반성하는 얼굴로 말해야 되는 거 아니야?”

? 반성이 왜 필요한데?”

 

이 자식 진심이야! 히나타는 몹시 억울해졌다. 자신이 카게야마에게 은퇴한 이유를 묻고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을 정도였다. 히나타는 말이 나온 김에 과거에 억울했던 점을 와다다 쏟아냈다.

 

너 그말 라이벌한테 완전 실례였던 거 알지?”

라이벌이니까 더 연습하라고 해준 말인데.”

그러니까 그게 실례라고!”

? 기본기 없고 기술도 없고 리시브도 못하고 블록도 제때 못 만드는 점프만 잘하는 허접이라고 말했어야 하는 건가?”

 

기본기 없고 기술도 없고 리시브도 못하고 블록도 제때 못 만드는은 대체 왜 들어가는 건데? 수식어야? 나름 라이벌 배려한답시고 앞만 뭉텅뭉텅 잘라서 점프만 잘하는 허접이라고 말했다는 거냐! 직설적인 건 알고 있었지만 10년이 지나 다시 체험하니 장난 아니게 열 받는다. 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이었다. 수많은 리그경기와 시즌을 거치면서도 히나타는 늘 열정적이었지만, 확실히 가장 행복하게 배구를 했다고 꼽을 수 있는 고등학교 시절을 공유할 상대가 생겼다는 것, 무엇보다 그 상대가 고등학교 시절 가파른 발전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던 잿더미를 헤집는 일이었다.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아 조금 건드리면 다시 활활 불길을 치솟게 만들 불씨를.

 

네가 그때 날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둘 다 졸업할 때쯤엔 내가 네 투어택도 막아서 너 진짜 짜증나, 멍청아.’라는 말도 했던 거 기억 안 나?”

그랬나.”

 

히나타는 억울해져 일단 말하긴 했지만 조금 찔리고 스스로가 민망해졌다. 시라토리자와로 가는 버스 안에서 우카이가 학생들에게 띄워주듯 풀어준 일화 때문에 민망했던 기억은 고이 접어버리고 히나타가 오히려 당사자에게 주장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 얘기를 듣는 건 어차피 두 사람밖에 없고 그래도 이유야 어쨌든 투어택 막은 다음 저렇게 말한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네가 해외 있었어서 모르나본데 나 현역 때 경기 보면 너도 놀랐을걸? 너희 감독도 그랬었어.”

 

카게야마는 대답 없이 히나타를 빤히 보았다. 믿지 못하는 건가 싶어 그가 말했다.

 

못 믿으면 보여줘? 나 아직 은퇴한지 반년도 안 됐다?”

 

히나타가 자신의 점프력이 얼마나 더 발전했는지, 상대방이 얼마나 귀찮아했는지, 키 때문에 국대는 못 갔지만 리그에서는 나름 얼마나 알아줬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을 때, 카게야마가 새우튀김 하나를 입에 넣으며 툭 던졌다.

 

보여줘 그럼.”

내가 못 보여줄 줄 알고?? 지금 당장이라도 갈 수 있다!”

지금은 안 돼. 술 들어갔잖아.”

 

그러네. 히나타는 금방이라도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려다가 그만두었다. 히나타는 잔에 담긴 맥주를 끝까지 마신 뒤 다시 새로 따랐다. 카게야마도 후다닥 남은 맥주를 마시고 히나타에게 내밀었다. 왠지 흐뭇해진 히나타가 카게야마의 빈 잔에도 맥주를 따라주었다. 여기 맥주 한 병 더 주세요. 히나타가 말한 뒤 빈병을 내려놓았다. 그때 카게야마가 말했다.

 

카라스노 주말연습 해?”

일요일은 쉬지. 인터하이 앞두고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번주 일요일은?”

쉴걸.”

 

아마 그럴 거야. 히나타가 고개를 끄덕끄덕 위아래로 흔들었다. 카게야마는 새로 따라준 맥주를 마시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곤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맥주잔을 들이댔다. 히나타가 곧바로 카게야마의 행동을 알아차렸다. 건배 하자는 거지? 그가 키득 웃으며 재빨리 잔을 부딪쳤다. , 맑은 소리가 울렸다. 카게야마의 기분 좋아 보이는 눈이 잠시 흔들리는 거품을 향했다가 다시 히나타에게 닿았다.

 

그럼 이번주 일요일에

 

카게야마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히나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별로 새삼스럽지 않은 어투로 카게야마가 말을 이었다.

 

한 번 보여주든가.”

…….”

아아! 내 실력! 그래, 당연하지!! 그렇잖아도 일요일에 그대로 엄마 식당일 도와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잘됐다! 몇 시에 볼까?”

두시쯤.”

좋아! 점심 먹고 느긋하게 나오기로 하자. 근처 체육관 어때? 일요일은 아마 어린이 배구 클럽 운영 안할 거다.”

그러든가.”

 

카게야마는 무덤덤하게 답했지만 히나타의 눈에는 그가 어쩐지 기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히나타는 그를 놀릴 수 없었다. 카게야마와 마찬가지로 히나타도 기뻤기 때문이다. 학교 체육관에서는 더 이상 그가 연습할 자리가 없었다. 그와 함께 연습해줄 동료도 더 이상 없었다. 우카이마저 그와의 추억을 온전히 기억하지는 못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밀려들어오고 수많은 이들이 밀려나갔기 때문이었다. 연습도 쉬는 일요일에는 혼자라도 체육관에 가 연습을 해야 하나 싶었던 히나타로서는 카게야마가 함께 한다는 사실이 제법 기뻤다.

고등학교 때는 안타깝기도 했고, 공감하기도 했고, 압도적인 실력에 열 받아 미친 듯이 경쟁의식을 불태우기도 했고, 그렇지만 내심 대단하다고 인정도 했던 상대와 이렇게 10년이 지나 또 다시 라이벌이 되었고 또 따로 연락을 주고받다가 술까지 마시게 된 게 예삿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곡차곡 10년이라는 시간에 쌓여 묻어졌던 기억과 감정을 반쯤 들추다 만 히나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너 해외에 있을 때 외국어는 어떻게 했어? 너 외국어 잘 해?”

아니 못해. 통역 붙었는데.”

그래도 자그마치 몇 년거의 10년을 있었는데?”

잘 모른다고 했잖아.”

, 카게야마 역시 공부 못하는구나. 시라토리자와는 어떻게 들어갔대? 추천이라 성적은 상관없나?”

시끄러워, 멍청아.”

 

멍청이라. 오랜만에 들어보는 또 하나의 이름이다. 히나타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찔리면 찔린다고 말해.”

맥주나 빨리 마셔. 난 비웠으니까.”

그렇게 잘 마시면서 그동안 어떻게 참았냐!?”

배구생각.”

 

히나타가 피식 웃으며 카게야마에게 맥주를 따랐다.

 

그래, 먹고 죽자!”

? 맥주 마시는 걸론 안 죽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많이 마시면 죽을 수도 있거든?”

?? 너 술 잘 마신다더니 많이 마시면 죽는 거냐?”

…….”

…….”

마시기나 해.”

?”

 

히나타는 종업원이 가져다준 새 맥주로 다시 잔을 채운 뒤 쨍 소리를 내며 카게야마와 잔을 부딪쳤다. 급할 거 없었다. 어차피 밤은 길었다.

 

 

 

 

남은 일주일 동안 카라스노의 훈련은 딱히 어긋난 부분이 없었다. 우카이 감독이 지난 10년을 허투루 보낸 게 아니었다. 나름대로 연구하고 체계를 잡아온 덕분인지 처음 히나타 시절 배구부를 맡기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훌륭하고 여러모로 보완된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히나타가 우카이와 함께 지도하면서도 감탄할 정도였다. 확실히 우카이 전 감독의 손자는 맞는지 히나타가 카라스노 3학년인 시절에는 자연스럽게 돌아온 강호라는 인식이 주변학교에 심어졌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언제까지 일요일에 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번주는 개인시간을 쓸 수 있었다. 히나타는 그 개인시간을 카게야마와 보내기로 미리 약속을 했었고. 히나타는 점심을 대충 챙겨먹은 뒤 집을 나와 느긋하게 체육관으로 향했다. 굳이 차를 타지 않아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 상관없었다. 터덜터덜 걷는 동안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했던 2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어디보자, 히나타는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체육관 앞을 살폈다. 카게야마를 찾기 위해서였다. 안 왔으면 근성이 없다고 좀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충격적이게도 이미 그가 체육관 계단 앞에 도착해있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가만히 있어도 느껴질 것 같아 히나타는 재빨리 뛰었다. 카게야마 앞에 멈춘 그가 물었다.

 

뭐야, 언제 도착했어?”

“10분 전쯤.”

지금이 2시 되기 10분 전인데?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어쩌다 보니까.”

 

카게야마는 조금 자신 없는 투로 말했지만 어쩐지 진 기분에 젖어 더 일찍 나오지 못한 스스로를 반성하고 있던 히나타는 눈치 채지 못했다.

 

으윽, 다음에는 꼭 내가 이기겠어!”

내가 질까보냐.”

그건 가봐야 아는 거지.”

 

힘 있게 말하는 히나타와 카게야마의 대화가 잠시 뚝 끊겼다. 익숙한 상황과 익숙한 대사들이 떠밀려왔기 때문이다.

 

[‘다음에는꼭 우리가 이길 거다!’

다음에도 질 생각 없어.’

그건 그때 돼봐야 아는 거지!’]

 

언제였더라2학년 인터하이 예선 때였던가? 결승에서 시라토리자와에게 지는 바람에 아깝게 전국행이 좌절됐었다. 11. 그게 22패가 될 때까지 반복된 패턴이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코트 위에 남는 건 나라고, 이번 전국행 티켓은 우리가 따낼 거라고 호기롭게 외치던 순간들은 생각해보면 딱 카게야마만을 상대로 한 의지였다. 재팬 우시와카나, 동갑내기 중 가장 빨리 에이스를 단 고시키나, 성깔이 장난 아닌 세터 시라부까지 아우르기보다는 카게야마에 한정된 오기.

나란히 배구 코트에 서자 그 기억은 더욱 강렬해졌다. 꺼지지 않고 미약하게 남아 있던 불씨가 당겨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되살아난 그때의 치기와 열정이 온몸으로 번졌다. 히나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고개를 돌려 카게야마를 돌아보자 그의 얼굴에도 약간의 홍조가 올라 있었다. 그는 카게야마가 자신과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일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질 생각은 없다, 마치 고등학교 때 네트를 사이에 두고 동등하게 마주섰던 그때처럼. ‘국가대표까지 지낸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닌 히나타 쇼요를 이기려 애쓰던카게야마 토비오가 보여 그는 씩 웃었다.

 

그럼 한 번 해볼까?”

좋아.”

 

카게야마가 공을 바닥에 퉁퉁 두드렸다. 두 사람의 눈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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