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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보쿠아카] 부엉이의 달

별골짜기 2016. 8. 13. 19:54

보쿠아카

부엉이의 달

안봐도 상관없는 전편: http://byeoljari.tistory.com/39

연상수 동양풍AU

 

 

 

 

하여, 아카아시 가문이 시대를 잘못 만나 고꾸라졌던 것을 공이 이리 번듯하게 재건하시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합니까.”

대단하오. 공의 힘을 필요로 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더이다. 그 예로 폐하께서도 공을 늘 가까이 두며 정사를 돌보질 않으오. 공의 덕망을 칭송하는 목소리를 이 지척에 나가도 금방 주워 담을 수 있다는 걸 귀가 있는 이들이라면 전부 알고 있소.”

…….”

그런데 말입니다여즉 내자를 들이지 않는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는지.”

 

마주앉은 사내에게 술을 따라주던 손이 잠시 멈췄다. 쪼르르 소리가 나던 주전자 입구에서 가느다래진 줄기가 금방 끊겼지만 사내의 잔에 찬 술은 고작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늘상 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어 그 속내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꾸준히 가득 차오르던 것이 갑자기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는 점에서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사내가 애써 웃으며 말을 더했다.

 

물론 나라의 각종 정사를 돌보시느라 몸이 열개라도 부족하시겠지요. 공의 노고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비록 온갖 음해와 시기를 받기도 하시지만은그게 다 공이 너무도 뛰어나기 때문 아니오. 그들에겐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범재의 비애올시다.”

일단은 가만히 듣고 있으려 했습니다만.”

 

아카아시는 들고 있던 잔까지도 기어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마주앉은 사내가 흠칫하며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리둥절하면서도 의아한 얼굴이라 아카아시는 한숨과 함께 혀를 찼다. 저리도 아둔하니 아직도 지방 한직만을 전전하며 자신의 아들 뻘이나 되는 이에게 좀 도와주십사 돌려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백성들 사이에서 제 공덕이 칭송되고 있다 말씀하셨지요.”

아무렴요. 공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군요.”

 

아카아시가 여상하게 말했다. 그가 겸손을 떠는 것이라 판단한 사내는 그의 말을 더욱더 보태기 위해 열성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허용해주지 않겠다는 듯 서릿발 같은 찬 목소리가 그를 딱딱하게 얼려버렸다.

 

백성들이 입은 은혜는 제가 아닌 폐하께옵서 하사하신 은덕이고 백성들이 누리는 성대함은 폐하께옵서 만드신 태평이거늘 어찌 제 이름이 오르내린다 하십니까.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카아시는 단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은 그의 술잔을 힐끗 본 뒤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차디찬 시선과 마주한 그가 그제서야 아카아시의 생각을 헤아렸다. 마른 침을 삼키며 전전긍긍하는 속이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훤히 보이니 참으로 딱할 노릇이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여쭤보고 싶군요.”

…….”

만약 불순한 의도를 가진 무리가 폐하를 깎아내리기 위해 제 이름을 팔아 없는 덕도 만들어 세운 것이라면 제대로 뿌리까지 뽑아내야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역심을 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봅니다만.”

 

아카아시의 말에 사내는 입을 꾹 다물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빤히 보였다. 저렇게 뻔하고 말과 행동에서 감정이 내비치는 이는 감히 역모를 할 그릇이 되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상대로 증좌를 캐고 귀양을 보내거나 극형에 처하는 건 숨 쉬는 것만큼 쉬웠지만 지레 겁을 먹게 만드는 건 그것보다 더 쉬웠다. 사실 눈앞의 사내가 그렇게 배짱이 두둑한 것 같지도 않다. 역모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선두에 서서 모든 계획을 이끌어보았던 아카아시는 하나의 오차도 없이 그 가능성을 골라낼 자신이 있었다.

 

다름 아닌 그가 보쿠토를 황제로 만든 선봉에 섰으니까.

 

한 번 뒤집어진 황권이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보쿠토가 이루고 있는 황권은 굳건했지만 정통성에서는 장자에 비할 바가 없었다. 정통론을 내세우는 이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태자였던 이를 말끔하게 처리했지만 태자 아래와 보쿠토의 위로 수많은 황자들이 있었고 그 모든 황자들을 전부 처리하지는 못했다. 꺼진 불씨라도 다시 한 번 확인해 흙으로 덮어버리고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는 싹은 짓밟아 쇠로 그 위를 막아버리는 것이 바로 아카아시가 할 일이었다.

 

책잡힐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옳다. 전대 황제의 편에 완전히 서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황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능구렁이 같은 잔재들이 산재해 있었다. 백성들을 위한 이상적인 황제. 그가 만들어낸 황제. 그 존재만으로도 완전무결해야 하는 황제. 그리고감히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는 제자.

 

입술을 잠시 사려 문 그에게 뒤늦은 대답이 딸려왔다. 진땀을 흘리며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모습이었다.

 

저도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입니다만역심이라니 당치도 않으오. 누가 어떤 명목으로 그런 음험한 생각을 품겠소이까? 혹여 그런 징조가 보이면 곧바로 공에게 말씀드리겠소.”

 

백성들이 황제와 그를 한데 묶어 칭찬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입에 발린 칭찬을 과도하게 부풀려 들이밀면 좋아할 거라는 착각을 해서 문제였지만. 그에 대해 조금만 더 신중하게 알아보았다면 그가 좋아할만한 말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 텐데 애석하게도 끝까지 사내는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예를 들어, 황제를 고깝게 여기는 불순한 무리 중 하나가 그랬다더라같은 종류의 말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지만 아카아시는 내려놓았던 주전자를 다시 들어올렸다. 주전자 입구가 사내의 잔에 다시 닿았다.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무리 아둔한 자라고 해도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이를 내칠 생각은 없었다. 당장은 쓸 자리가 없다고는 해도 언젠가 적재적소에 이용할 가치가 있는 자였다. 감정이 드러나는 한계가 있는 한 중요한 일에 써먹을 수는 없겠지만.

 

서론은 그만 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의미로 손짓하자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공이 내자를 들이시지 않는 이유 말입니다.”

 

아카아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잔을 힘주어 잡고 그와 잔을 부딪쳤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며 사내가 더욱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정사를 보느라 바빠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혹 다른 연유가 있으신 게 아니신지.”

정확히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속 편히 터놓으셔도 됩니다. 요새 남자와 남자 간에 애정을 나누는 것이 그리 흠 잡힐 일도 아니거니와

아닙니다.”

 

아카아시가 딱 잘라 말했다. 사내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그렇소? 그럼 내자를 들이지 않는 건

글쎄요해가 뜨고 짐을 그때그때 보지 못하다보니 제게는 시간이 다른 이들보다 더디게 느껴지나 봅니다.”

 

해가 뜨기 전에 등청해 해가 지면 퇴청하는 매일이 바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돌려말하는 아카아시의 말에 조금 시무룩해진 사내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말했다.

 

제 친척 딸아이 중에 어여쁘고 야무진 아이가 있습니다. 드물게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라 공에게 힘이 되어줄 거라 생각하오만.”

 

돌고 돌아 본론이자 결론이 튀어나왔다. 애초에 내자를 들일 생각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부터 예상하고 있던 말이었으므로 놀랍지는 않았다. 가진 돈이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재력가만 아니었어도 금방 내쫓아버리는 것을. 아카아시는 조금 웃었다. 사내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게 긍정적인 대답을 암시하는 웃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된 건 그 직후였다.

 

어제는 형부상서가 찾아와 제게 손녀를 주겠다고 하였고, 그제는 어사대부가 딸을 주겠다 하였고, 그 전날에는 태복시의 경이 찾아왔습니다. 오늘로 닷새연속 제 쉴 시간을 쪼개어 빈을 대접하고 있습니다만모두의 바람이 절실하고 간곡하여 제가 쉬이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음이지요.”

아카아시공.”

청을 들어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허나한 번 혼인을 한다 하여 그게 끝은 아닐 것입니다. 한 번 그 청을 수락하게 되면 다른 청들도 물리치기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

저는 좋은 남편감이 못 됩니다.”

 

완곡한 거절에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잔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기대를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닐 테지만 포기가 빨라 다행이었다. 아마 변변한 지위가 없어 기대감이 생각보다 낮았을 것이다. 그저께 찾아온 어사대부는 싫으면 싫다고 제대로 말하라며 역정을 냈었다. 그날 억지로 그를 달래며 술 상대를 하느라 다음날 업무에 차질이 빚어질 뻔한 일을 떠올리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몇날 며칠 술을 들이붓다 보니 다음날이 되어도 개운하지가 않아 앞으로는 무리해서라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로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소. 혹 마음이 바뀌면 언제라도

그러지요.”

 

순순히 물러날 때를 알고 가는 뒷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앞서 아둔한 면에 짜증이 치밀기도 했지만 마지막 모습이 마음에 들어 누그러진 얼굴로 아카아시는 그를 친히 배웅해주었다. 조그만 저택의 문이 닫히는 동시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술기운이 조금 올라 어지러웠다. 내일은 호부에서 올라온 안건을 제대로 확인해야 했고 이부의 상서와 긴밀한 대화를 하기도 해야 했고 무엇보다 황제를 직접 알현해야 했다.

 

아카아시 왜 이렇게 바빠?’

 

주안상을 들이라는 말이 습관처럼 입에 밴 보쿠토는 최근 들어 이른 퇴청이 잦아진 아카아시에게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몸 좀 생각하면서 쉬라며 술을 권할 때는 언제고 밤이 되면 적적하고 무료해 그의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막상 일찍 퇴청한다는데 막을 명분은 없고 일거리를 더 주자니 양심도 찔려 그를 볼 때마다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미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비식 불현듯 미소를 짓다가 혹시 누가 봤을 새라 표정을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몇몇의 식솔만을 남기고 모두가 잠에 든 깊은 밤이었지만, 아무도 보는 이가 없다고 해서 꺼내볼 수 없는 감정이었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고 아무도 봐서는 안 되는. 재상이 아닌 아카아시 케이지로서의 감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부를 수도 없으니 남아있어야 하는 건 오직 재상으로서 그가 모시는 황제를 향한 충심뿐이어야 하거늘.

 

그 충심을 충실히 따르자면 안주인을 들이는 문제가 급한 건 그가 아니라 황제인 보쿠토였다. 이런 사사로운 술잔을 기울이며 혼담을 제안 받고 그것을 거절할 시간에 내명부의 안주인이 될 이를 찾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지만, 아직 열여덟이니까, 아직 열아홉이니까, 이제야 곧 스물이니까, 어서 달을 맞이하라는 간언과는 달리 날로 쌓여가는 핑계는 그를 꾸준하게 괴롭혔다.

 

아까와는 다른 한숨이 비집고 새어나왔다. 원래대로라면 그 한숨마저 숨겨야 했겠지만 미약하게 도는 술기운의 핑계를 대본다.

 

 

 

 

 

재상, 안녕하시오?”

 

이른 아침 황제를 알현함과 동시에 정사를 논의하러 등청한 아카아시에게 저 멀찍이서 쿠로오가 반가운 체를 했다. 매일 지겹게 보는 얼굴이 뭐 그리 반갑다고 늘 싱글벙글 웃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늘 사람 좋게 웃는 얼굴 너머로 어느 누구보다 냉철한 면모가 숨어있다는 걸 제일 잘 아는 게 그였다. 하는 일 없이 늘 취해 있어 한량처럼만 보이던 그가 답답하게 굴러가는 세상을 한탄하며 홀로 술을 자작하던 아카아시 앞에 앉아 했던 말도 지금과 같았다.

 

아카아시, 안녕하신가?’

 

쿠로오가 그에게 건네는 인사는 늘 그때 그 순간의 느낌을 깨우치게 했다. 얼마나 썩어빠진 세상이었던가, 얼마나 암울하고 또 어두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기였던가, 얼마나 추레해 더는 기워볼 수도 없이 누더기가 된 시류였던가. 보쿠토가 황제가 되고 싶다 말한 이후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하고, 결국 그들이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쿠로오의 인사는 만족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고 해이해지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주문이었다.

 

그러는 중서령은 피곤해 보입니다만.”

요새 쪼들리면서 조사하는 게 있어서 잠을 못 자고 있네.”

 

아카아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말에 쿠로오가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오늘의 쿠로오는 역시 복장이 불량하다고 말하기도 뭐하고 단정하다고 보기에도 어려운 애매한 차림새였다.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 잘 가릴 수 있게 그냥 관모를 쓸 것이지 뭐 그리 답답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카아시의 눈이 자동으로 쿠로오의 머리로 향하자 그가 한 발짝 떨어지며 손으로 머리카락을 가렸다. 말 안 해도 알 것만 같은 눈빛을 받아 당연한 행동이었다.

 

평소라면 아무리 지겨워도 또 얘기하고 말하고 언급했겠지만 아쉽게도 차곡차곡 쌓여온 숙취에 덧붙여 귀찮은 이들을 연일 상대하느라 녹초가 된 정신은 그럴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보쿠토에게 얘기할 현안에 대한 생각들로도 머릿속이 포화상태였다. 금방이라도 아카아시의 말에 받아칠 준비를 하던 쿠로오는 생각 외로 잠잠한 그의 태도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뇨. 딱히.”

근데 왜 잔소리를 안 해?”

누가 들으면 맨날 잔소리만 하는 줄 알겠습니다.”

맞잖아? 복장 똑바로 하세요, 관모는 왜 안 쓰세요, 폐하께 언행이 그게 뭡니까

 

아카아시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그를 볼 때마다 한 마디씩은 꼭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쿠로오는 아카아시와 마찬가지로 재상이었고 고지식하게 구는 늙은 관료들에게 자유분방한 성정의 쿠로오는 늘 눈엣가시였다. 자꾸 공격할거리를 아예 만들지 않기 위해 미리 차단하려던 건데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카아시는 조금 반성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옷을 똑바로 여미지 않아 궁인들에게 망측스러운 모습을 보여도 아무 말 않고 관모를 쓰지 않아 머리가 보기 싫게 뻗쳐도 아무 말 않겠습니다.”

아카아시 그거 어쩐지 묘하게 나 욕하는 걸로 들리는데

 

아카아시는 대꾸 없이 효곡궁을 향해 저벅저벅 걸었다. 그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쿠로오가 그의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힐끗 보며 말했다.

 

진짜 무슨 일 있었어?”

아뇨. 딱히.”

요새 일찍 퇴청한다면서? 무슨 일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 최근 들어 보자는 사람이 많네요.”

네가 일일이 받아주는 성향이었던가?”

폐하께 도움이 될까 해서헌데 저도 후회중입니다.”

 

쿠로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카아시를 보았다.

 

무슨 도움?”

뭐가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그렇잖아. 내가 듣기로는 형부상서 어사대부 태복시 경 만났다던데. 그네들한테 얻을 게 뭐가 있어?”

폐하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저를 만나고자 한 자들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두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해?”

혹시 모르니 여지를 두는 게 낫겠죠.”

어떤 방법으로?”

 

아카아시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쿠로오가 그 대답을 대신 말했다.

 

딸을 주겠대? 아니면 손녀?”

 

부정하지는 않았다. 쿠로오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혼인해서 세력 끌어온다면 폐하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안 좋아할 게 뭐가 있습니까?”

스승이 팔려가는 것도 아니고.”

팔려간다니요. 표현이 뭐 그렇답니까.”

네가 좋아서 가는 거라면 인정.”

 

쿠로오의 말에 아카아시는 그를 흘낏 쳐다보았다. 알면서 저러는 건지 모르면서도 놀리는 건지. 만약 그가 혼인을 하게 된다 해도 마음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닐 거란 사실을 알면서. 어차피 아카아시도 제대로 현안을 처리하려면 그런 종류의 자리를 좀 줄이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쿠로오의 장단에 맞춰 한 생각에도 없던 말을 철회하려던 참이었다.

 

……아카아시 혼담 청탁 받고 다녀?”

 

그런데 순간 여기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려 아카아시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건 쿠로오도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커다래진 두 사람의 눈동자가 소리 나는 쪽을 향했다. 익숙해진 목소리를 지우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만드는 주인공인 보쿠토가 궁인들을 대동하고 이 멀리까지 나와 있었다.

 

아카아시와 쿠로오는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쿠로오의 다급한 손이 얼른 뒤집어쓴 관모를 삐뚜름하게 만들었다. 평소라면 그런 쿠로오의 모습을 비웃으며 역시 자유로워서 좋다고 한마디 던졌을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충격 받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은 그 얼굴을 직접적으로 보지 못해 알지 못했다. 늘 허리를 숙이고 있는 궁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홀로 미세하게 흔들리던 눈동자를 겨우 수습한 보쿠토가 아카아시에게 재차 물었다.

 

무슨 말이야? 내가 모르는 일이 있나?”

별 거 아닙니다.”

별 거 아닐 리가 없는데.”

여기까진 어인 일로 걸음하셨습니까.”

요새 하도 아카아시가 나와 상대를 해주지 않길래 마중이라도 나와서 얘기 좀 할까 싶었는데

 

보쿠토의 눈이 잠시 차갑게 식어 아카아시가 숙인 머리를 보았다.

 

나만 모르는 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폐하, 그건

다들 물러나.”

 

보쿠토가 손을 내저으며 궁인들에게 말했다. 몸을 깊이 수그리고 있던 그들이 움찔했다. 환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폐하라고 중얼거렸지만 보쿠토가 다시 말했다.

 

황명이다. 불복할 테냐.”

 

그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환관이 줄지어 늘어선 궁인들에게 눈짓했다. 그들 모두가 물러나 효곡궁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보쿠토와 아카아시와 쿠로오만이 남게 되었다. 아카아시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으며 쿠로오는 난감한 기색이었다. 피곤해 보이는 아카아시를 약 올리려 장난을 치던 게 보쿠토의 귀에 들어갈 줄은 몰랐다. 그렇잖아도 요 며칠 새 아카아시가 술상대를 안 해준다며 시무룩하던 게 이런 식으로 튈 줄이야.

 

쿠로오는 아카아시를 힐끔 보았다. 아카아시는 늘 같은 그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얼굴. 아카아시가 무슨 말을 어떻게 설명할지는 몰랐지만 왠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감이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보쿠토가 요즘 그를 들들 볶다 못해 태워버릴 것처럼 구는 그 귀찮은 일보다 어쩌면 더.

 

이제 말해봐. 요즘 일찍 퇴청하고 간 이유가, 혼담 건네는 사람들 만나려던 거야?”

일단은맞습니다.”

나 보고 말해.”

 

보쿠토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카아시는 고개를 들었다. 그를 보자마자 가슴이 익숙하게 울렁거렸다.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인 일로 그를 마주하는 건 언제나 어렵고 힘겨운 사투였다.

 

그리고 그게, 나 때문이고?”

 

하필 들어도 쓸데없는 부분을 들었다. 아카아시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가 평소와 같은 어조로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인데?”

 

아카아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지금 이 나라 관료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 있습니다. 폐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과 폐하를 정통성을 트집 잡는 이들로 말입니다. 저편에서 이편으로 넘어올 낌새를 보이는 건 나쁘지 않은 현상입니다. 그 빌미가 혼담이라면 적당히 맞춰주는 척 할 수 있는 거고요.”

그러다가 정말 부인이라도 들어앉힐 수 있는 거잖아.”

글쎄요. 제가 원할 때여서야 그렇게 되겠죠.”

 

아카아시는 누구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황제의 전폭적인 신임이라는 뒷배경도 있었지만 그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재상이라는 지위만으로도 대부분의 관료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러니 적당히 장단만 맞춰주다가 적당한 순간에 발을 빼버리는 게 가능한 것이다. 그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텐데도 보쿠토는 뭔가 마음에 차지 않는 눈치였다. 그를 위한 일이라고 표현한 것이 문제가 되었을까. 아카아시가 잠시간 눈을 내려 뜰 때 보쿠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초에 그네들을 왜 챙기는데? 있는 쪽이나 잘 챙기면 될 거 아냐.”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정통성은 이 나라에서 꽤 중요한 요소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국호까지 갈아엎자는 제안을 드렸던 겁니다만.”

 

쿠로오가 손을 들고 잠깐 끼어들었다. 보쿠토는 조금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 쿠로오는 그의 표정이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뜻에 가깝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의 뜻대로 조용히 입을 다문 쿠로오와 다시 생각에 빠진 듯 말을 잃은 보쿠토 사이에서, 아카아시는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제가 마음에 차는 이가 나타나야 혼인을 고려해볼 테니까요. 또 폐하께 여러모로 도움이 될 지도 따져봐야겠지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

마음에 차는 이가 나타나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그래그게 문제야.”

 

보쿠토가 가만히 중얼거리는 말을 아카아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쿠로오도 마찬가지라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애초에 보쿠토가 스승님을 그런 놈들에게 보낼 수는 없어!’라고 격분하는 걸 예상했지, 이렇게까지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던 터라 오히려 그쪽이 더 놀라운 점이었다. 쿠로오의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오늘 논의하기로 한 건 뒤로 미루지.”

?!”

 

보쿠토의 뜬금없는 말에 아카아시는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말려야 했지만 그의 단호한 표정을 보니 그럴 수 없어졌다. 정사를 돌보기 싫어 떼를 쓰는 얼굴이 아니라 정말 정당한 이유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아카아시는 저런 표정을 짓는 보쿠토를 알고 있었다. 어느 보름달 뜨던 날 밤, 홀로 정원을 산책하며 거닐던 그의 앞에 우뚝 서서, 진중한 얼굴로 황제가 되고 싶다 하던 모습과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황제가 되고 싶습니다.’

장난 아닙니다. 스승님이 쿠로오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다 알고 있어.’

스승님. 그러니까 날 황제로 만들어줘.’

 

이기적일 정도로 당돌한 청을 거절할 수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카아시는 한숨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쿠로오도 고개를 조아리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보쿠토의 황명이 있었다.

 

중서령, 그대는 남아.”

? , .”

 

쿠로오는 무슨 일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보쿠토가 어떤 일로 부르는 건지 대충 알고 있는 눈치였다. 반면 그에게 선택되지 못한 아카아시는 홀로 돌아서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 뭐가 문제인 걸까. 마음에 차는 이가 나타나면 한다는 말이 왜 폐하께 문제일까. 아무리 짚어보고 추측해보려 해도 보쿠토에 대해서는 늘 중심을 잃기 일쑤인 그에게는 너무 어렵고 벅찬 일이었다.

 

폐하 당신 말고는 평생 마음에 찰 이가 없을 거란 사실을 혹여 눈치라도 채신 겐가. 그게 불쾌하고 싫어 이러시는 겐가.

 

한없이 땅굴을 파고들려고 하는 생각을 가까스로 건져내며 그는 이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로는 몰라도 재상인 그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상념을 지우려 굳이 당장 할 필요 없는 일까지 죄다 떠맡아 처리한 아카아시는 해가 지고 더 한참이 있어서야 퇴청을 결심했다. 속 편히 가마를 타고 돌아갈 기분이 아니라 일꾼들을 물렸다. 관복을 입고 걷기에도 지나치게 시선이 쏠릴 것 같아 미리 가져다 놓은 평상복 하나를 골라 갈아입는 게 나았다. 오랜만에 직접 걸어서 돌아가는 동안 아카아시는 낮 동안 하지 못했던 수많은 생각을 했다. 쿠로오는 아침에 본 이후 보지 못해 보쿠토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모르고 보쿠토가 왜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늘 그의 마음을 털어놓을 구석이 없었지만 오늘은 유독 더했다.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궐과 그의 저택까지는 걸어서 넘어지면 코 앞 거리에 있었음에도 반시진이라도 걸릴 것처럼 느릿느릿 속도가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아카아시는 늦은 밤에도 번화한 거리를 헤쳐 나가며 그늘진 얼굴을 했다. 밤하늘에 낀 구름이 시커멓게 달을 가렸기에 상점가에서 나오는 불빛이 아니었다면 더욱 어두워졌을 얼굴이었다. 그가 익숙한 상점들을 지나쳐 구석진 골목에 접어들었을 즈음, 어둠속에서 불쑥 그를 잡아당기는 손이 있었다.

 

……!”

 

제 아무리 문관이라 할지라도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진 반년간의 전쟁통에서 직접 칼을 쥔 그다. 실력이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보쿠토와 쿠로오에게 짐이 될 정도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수많은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건 반응도, 대처도 빨랐기 때문이었다. 아카아시가 그의 팔을 붙잡은 손을 오히려 부여잡고 꺾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빠른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이 낯선 팔이 의해 감겨버리고 말았다.

 

가마도 안 타고 혼자 돌아다니다가 괴한이라도 만나면 어떡해?”

 

상대의 허리를 팔꿈치로 있는 힘껏 지르려던 아카아시는 귓가에 닿는 익숙한 목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정적이 그의 약점을 간파하고 흉내라도 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보쿠토의 목소리가 똑같았다. 당사자일 수도 있지만상식적으로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됐고. 하지만 목을 감았던 팔에 힘을 풀고 그의 몸을 돌려세우는 손과 얼굴에 그 생각을 수정했다.

 

, ……!”

 

아카아시가 경악과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칠 뻔하자 보쿠토는 재빨리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 나 들키면 곤란한 거 알잖아?” 분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아카아시는 늘 보고 싶은 얼굴이 너무나 친근한 모습으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했지만, 그 감정에 앞서 어이없는 얼굴로 보쿠토를 살폈다. 그는 사람들 몰래 나온 것처럼 아카아시와 비슷한 차림새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부잣집 철부지 도련님쯤으로 볼 정도로 편해 보이고 익숙해보였다. 2년 전만 해도 황자였지만 도련님에 가까웠으니 영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여긴 왜 나오신 겁니까? 호위는요, 궁인들은요?”

따로 볼 일이 있어서 나왔어.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는 일이라.”

아무도 모를 일이라는 게 무슨, 아니, 적어도 호위 한 명은 데리고 나오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금방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런데 왜 안 들어가십니까?”

아카아시가 보여서.”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쿵 떨어지다 못해 그 자리에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리던 마음이 죄악스러울 정도로 싫었다. 아카아시는 주먹을 한 번 세게 쥐어 정신을 차렸다.

 

볼일 보셨으면 돌아가셔야죠.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방금 보니까 내가 데려다줘야겠던데?”

 

아카아시는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지금 정치를 굉장히 잘 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보쿠토는 문()보다는 무()에 재능이 더 뛰어난 이였다. 전쟁에서도 그들이 적은 병력으로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건 보쿠토의 실력과 하늘이 내린 듯한 운 덕분이었다. 그런 그가 작정하고 끌어당기고 제압하는데 빠져나올 사람은 아마 없었다. 그의 말에 서린 대로 보쿠토가 보호를 받는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황제라는 자리는 더하고 싶다 하여도 더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덜하고 싶다 하여도 덜할 수 없는 자리라 제가 줄곧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어.”

 

보쿠토는 고리타분한 아카아시의 말을 질색하긴 했지만 꽤 기분이 좋아보였다. 아침에 봤던 딱딱하고 불만스러워 보였던 모습과는 달리 평소에 봐오던 모습이었다. 그게 다행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침에 한 행동은 대체 어떤 이유인지 알 길이 사라진 것 같아 막막해졌다. 스승과 제자였던 시절과 달리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 질문할 자격이 없었다.

 

알면 가시죠.”

원한다면.”

 

마치 아카아시가 그렇게 말하니 따라준다는 의미처럼 들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달이 뜨지는 않았지만 거리의 불빛이 밝아 궐로 돌아가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다만 아쉬운 건이곳으로 오는데 반시진은 걸린 것 같았던 길이 보쿠토와 함께 돌아가니 유독 짧은 것 같이 느껴져서였다.

 

스승님. 밤에 보는 거리는 반짝반짝하고 예쁜데 왜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거야?’

황자님은 너무 어려요.’

나도 예쁜 거 보고 싶은데에!’

반짝반짝하고 예쁜 건 대개 위험한 경우가 많지요.’

그게 무슨 말이야? 예쁜 게 좋은 거 아니야?’

외면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 내면을 보셔야지요. 겉이 아름답다고 하여 안이 아름다운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함께 나란히 밤거리를 걷다 보니 그 언젠가 있던 일이 떠올랐다. 보쿠토의 스승이 되어 그와 가까워지고 단순 이론적인 지식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데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 그의 말이 무조건 옳은 것으로 알고 명심하며 따르겠다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장난꾸러기의 순진한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랬던 어린 제자가 지금은 한 나라를 호령하는 황제가 되어 있으니 격세지감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정무를 보기 싫다 괴로워하는 모습은 공부를 지독히 싫어하던 모습과 여전히 닮아 있다는 사실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아카아시가 웃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보쿠토가 금방 고개를 돌려 아카아시를 보았다. 그는 뒤늦게 표정관리를 하며 헛기침을 했지만 그의 눈이 둥그렇게 떠지는 걸 보니 들킨 모양이었다.

 

뭐야, 아카아시 왜 웃어?”

아뇨. 안 웃었습니다.”

거짓말! 내가 다 봤어! 왜 웃었어!! 나 웃기게 걸었어??”

아뇨

 

아카아시는 하는 수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예전에 폐하와 있던 일이 떠올라서요.”

. 나 때문에 웃은 거야?”

 

보쿠토가 환하게 웃었다. 아까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카아시는 순순히 인정했다. 늦은 밤, 둘만 있는 거리, 편하게 차려입은 옷차림이 그를 조금 풀어지게 만들었다.

 

예전에 밤거리를 왜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냐고 물으셨죠.”

. 반짝반짝하고 예쁜 거에 쉽게 현혹되면 안 된다고 했지.”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게 사실은 기방이 대부분이라 못 나가게 했다는 것도 금방 알게 됐고.”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쿠토가 변방 황자에 불과했던 시절, 이 근방 거리는 대부분이 기방이었다. 나라가 위태롭고 암울한 와중에도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은 향락과 사치에만 빠져 어려운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다. 일부만이 누릴 수 있는 밤문화는 점점 거리 전체를 잠식해나갔고, 반짝반짝 예쁜 장신구로 치장을 한 여인들이 웃음을 팔았다. 보쿠토가 황제가 되어 가장 처음으로 한 일도, 조세를 제대로 납부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그 기방들을 이 근방에서 찾아볼 수 없게 만들어버린 일이었다.

 

사실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반짝거리고 예쁜 건 단지 외양에 불과한 경우가 아주 많다는 걸 폐하께서도 알고 계실 텐데요.”

글쎄

 

보쿠토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난 하나 알고 있는데.”

 

아카아시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뭡니까? 사치품은 아니길 빕니다.”

 

즉각적인 아카아시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보쿠토는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런 거 아냐. 사람이야.”

 

다만 아카아시는 그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사람이라니.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반짝거리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방금 그가 말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조금 충격적인 것은 논외로 치고, 아카아시의 머릿속을 수많은 생각들이 휩쓸었다. 그런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그가 알고 있는 여인들 중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훌륭하다는 평을 듣는 이가 있던가, 만약 그 여인이 마음이 든다고 하면 곧바로 내명부의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가, 폐하께옵선 대체 그 여인을 어디서 만난 것인가.

 

문득 아카아시는 아침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좋아진 보쿠토의 표정을 떠올렸다. 볼 일이 있었다며 굳이 궁인들을 물리치고 혼자 나온 것도. 아카아시는 올 것이 왔다는 마음과 함께 치솟으려는 서러움을 꾹꾹 눌러 삼켰다. 수많은 가정과 수많은 연습이 있었다. 정략적인 결혼을 하게 되는 경우 하나, 궁인 하나와 잠자리를 가지게 되는 경우 하나, 그리고 보쿠토가 마음에 들어 하는 이가 생겼을 경우 하나. 그 순간들을 대비해 마음을 단련시켰지만 가장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경우는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카아시를 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표현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잘된 일이기도 했다. 나라의 기틀을 더욱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보쿠토에게 하루바삐 후사가 필요했다. 정통성을 운운하며 모든 일에 반대부터 하고 나서는 이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는 나라의 중대한 경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카아시는 가시가 돋은 입안을 헤쳐 억지로 물었다.

 

누구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알면 어쩌게?”

자세히 알아보아야지요.”

?”

폐하의 달이 될 가치가 있는 이인지 확인 작업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어. 다들 인정할 걸?”

 

보쿠토가 다시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그렇게 좋은가. 아카아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허나, 만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보다 엄중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바로 내명부의 주인을 삼는 일……

아카아시를 아카아시 스스로가 조사할 순 없잖아?”

……?”

 

아카아시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늘 누구보다 한발 빠르게 굴러가던 머릿속이 한순간에 엉키고 꼬여 제대로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옛날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나한테는 아카아시가 세상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나고 예뻤는데. 아카아시는 내가 몇 안 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일 정도로 내면도 그런데. 어째서 외면 내면 둘 다 충족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

 

아카아시는 충격에 가까운 감정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칭찬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연히 옛날이야기가 나와 그간 생각해왔던 의문과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다소 낯간지럽게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장은 왜 이리도 의지를 배반하며 쿵쾅거리는 것인가.

 

있잖아, 아카아시. 아카아시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보쿠토가 던진 말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했는데 이어지는 말에 더더욱 상황을 알 수 없게 된 아카아시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는 걸 아카아시가 모를 리가 없어. 그러면 우리나라를 처음 세운 시조에서부터 내려오는 전설도 알겠지?”

 

아카아시는 종잡을 수 없는 대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충실히 그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어떤 부엉이가 있다고 했다. 어느 나라의 건국신화를 찾아봐도 그렇듯 허구와 과장이 다소 섞인 그들의 전설은 부엉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년에게 거대한 붉은 부엉이가 나타나 터를 정해주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전설은 아주 어린 아이들이 자라면서 귀에 닳도록 들어온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부엉이의 눈이라는 거 있잖아.”

 

붉은 부엉이는 청년에게 어떤 을 주고 세 번의 소원을 말할 기회를 주었다. 첫 번째 소원은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소원은 기근과 가뭄을 비롯한 자연재해를 피하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은 유일하게 개인적인 소원으로평생을 함께 할 배필을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청년에게 세상 전부를 안겨준 반짝반짝 빛나는 노란 돌은 마치 붉은 부엉이가 하고 있던 눈을 연상케 해 부엉이의 눈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얘기가 지금 왜 그의 입을 타고 이 시점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황가에만 내려오는 추가적인 이야기가 있어. 평범한 사람들은 잘 몰라. 워낙 오래되고 또 단절된 시기가 있어 거의 사장된 이야기니까.”

 

들어도 들어도 이해가 안 되는 경험은 낯설었다. 무엇보다 지금 보쿠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황족이 아닌 아카아시가 정말 모르는 이야기였다. 부엉이의 눈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더 있다고?

 

대대로 내려오는 황제에게는 첫 황제가 정한 의무가 있어. 두 가지 의무. 첫 번째는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들 것. 두 번째는 자연을 노하게 하지 않도록 제사와 기도에 힘쓸 것.”

 

붉은 부엉이가 청년에게 들어준 소원.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 수 있길. 자연재해를 피할 수 있길. 그럼 나머지 하나는. 무언가를 직감한 아카아시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만족한 황제에게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개인적인 소원 한 가지를 이룰 권리가 주어지지.”

그 무엇이라도?”

이유 없이, 근거 없이, 내가 원하는 딱 하나.”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런 게가능할 리가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들었어.”

그걸 들으셨다고 해도 단지 구전으로 전해진 이야기 아닙니까. 적절한 근거가 될 성문으로 된 문서가 있어야

 

아카아시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여긴 왜 나오신 겁니까? 호위는요, 궁인들은요?’

따로 볼 일이 있어서 나왔어.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는 일이라.’

 

설마. 설마……

 

맞아.”

 

보쿠토는 근래 들어 가장 기분 좋은 표정이 되어 말했다.

 

그동안 중서령아니 쿠로오 통해서 찾았어. 성문으로 된 문서가 분명히 있었거든. 전전대였나, 전전전대였나, 그때 황궁 서고에 불이 난 적 있는데 아마 그때 유출되었을 거야. 그걸 유출시킨 녀석이 꽁꽁 숨어버린 바람에 한참 고생했는데

 

보쿠토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한순간에 멍한 아카아시와 시선을 마주했다.

 

조금 무리해서 오늘 찾았어. 더는 느긋하게 준비할 수 없었거든.”

…….”

아카아시가 날 위해 오히려 날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다급해서 어쩔 줄 몰랐어.”

 

보쿠토가 한걸음 가까워졌다.

 

나는 그동안 꽤 많이 참았다고 생각해. 아카아시아니 스승님이니까 이 정도까지 참은 거야.”

…….”

이 문서를 손에 넣은 이상 지금부터 내가 뭘 좀 추진할 건데스승님한테 동의를 구하진 않을 생각이야. 스승님 마음에 내가 찰 때까지 기다리다가 다른 사람한테 뺏기긴 싫거든.”

,”

거절할 생각은 마. 아카아시가 분명히 그랬어. 외면 내면 모두 반짝이고 예쁜 건 극히 드물다고. 그런데 나는 찾았잖아. 바로 내 눈앞에 있잖아. 황제인 내가 그걸 가지지 못해서야 말이 안 되지.”

폐하.”

 

목소리 끝이 갈라져 나왔다. 아카아시가 전혀 상상해본 적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중간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며 생각을 해보아도 보쿠토의 말은 하나의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폐하가 나를 원한다.

 

그건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서는 결론이었다.

 

내가 왜 황제가 되려 했는데.”

…….”

내가 왜 국호를 바꾸지 않았는데.”

 

아카아시가 다른 이를 황제로 세우고 그를 위해 헌신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다.

불안한 정통성이라는 약점을 가지고도 결국은 황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모든 걸 걸어 아카아시를 가져야 했으니 그런 거다.

 

보쿠토는 손을 들어 아카아시의 볼을 매만졌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그 눈을 피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보쿠토가 이어야 할 후사, 다져야할 나라의 기틀, 빗발칠 상소들, 우르르 몰려와 설명을 요구할 늙은 고관들, 나라에 파다하게 퍼질 소문을 비롯한 수많은 걱정거리들이 산사태처럼 굴러 떨어져 그의 머릿속을 마구마구 두드렸다.

 

안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득은커녕 실밖에 없다. 제가 폐하를 어떻게 끌어올렸는데, 제가 폐하를 어떻게 지켰는데, 제가제가 어떻게. 아카아시는 밀려오는 암담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피하지 마. 황명이야.”

 

아카아시의 눈이 다시 뜨였다. 피하지는 못하였으나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보쿠토의 다른 쪽 손이 그를 제지해 무력해졌다. 그는 보쿠토에게 늘 약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안 된다. 아카아시가 그대로 보쿠토에게서 물러나려는 순간,

 

내가 스승님을 연모해.”

 

언젠가 꿈속에서, 환상속에서, 바람속에서 들은 적 있는 목소리가 똑같이 들려오는 순간, 아카아시의 마지막 저지선은 형체를 잃은 채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아카아시의 손은 속절없이 그를 안아오는 보쿠토의 등을 받아들였다. 재상도, 스승도 아닌 아카아시 케이지가 기어코 보쿠토의 앞에 자리하고 말았다.

 

어둠이 걷히고 온종일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그제야 스르르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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